기억의 실종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 총회에 선포하시고,
이 말씀에 조금도 보탬이 없이,
그대로 두 돌판에 새겨서 나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5,22

 

2007년 저 소란스럽던 ‘어게인 1907’의 슬로건은 그 해가 지난 뒤 슬쩍 기억에서조차 사라졌습니다. 물론 이 소란은 꽤 큰 성과를 올렸지요. 그 해 대선에서 기독교도들이 MB에게 몰표를 주었고 ‘장로대통령’을 당선시켰지요. 하여 대형교회가 주도한 보수대연합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습니다. 권력과 자원의 점유를 둘러싼 정치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 보수세력에게는 ‘성공’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교회에겐 결코 성공일 수 없었습니다.

감소 추세인 교세는 반전되지 않았고, 교회 양극화는 훨씬 더 심화되었으며, 시민사회의 혐오 현상은 단순한 반대에서 체계적인 반대로 비약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충성심 이완 현상은 더욱 현저해 대안적 신앙을 찾는 추세가 두드러졌지요. 하여 ‘어게인 1907’은 단적으로 말해 교회에겐 실패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감리교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1903년 원산 대부흥’의 기억하기 현상이 ‘1907년 기억의 소환 작업’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철저하고 냉정한 반성 없이 새로운 계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산 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2007년의 ‘어게인 1907’의 실패한 기억에 대한 점검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우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原記憶)에 관해 살펴봅시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전쟁터였고 군대 진군로가 되었던 평안도의 1907년의 평양은 ‘전후(戰後)’라는 파행적 체험이 응축된 시공간입니다. 전쟁을 겪은 뒤, 그 미친 불꽃을 방사시켰던 폭력성이 일상화되고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진 몸과 정신의 분열적 갈등이 고조된 시공간이고, 그것이 원인불명의 파괴적 징후로 신체 외부로 돌출하여 발현되는 파생적 폭력의 시공간입니다.

이때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공간이던 교회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의 피폐함을 온몸으로 겪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 간의 갈등과 분열,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요.

교회 지도자들은 골방에 들어가 원산에서처럼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기도회는 곧 신비 체험에 휩싸입니다. 기도회 참석자들 다수가 자신들이 겪고 있던 혼돈과 무력함을 단박에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종교적 엑스타시 상태에 진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열광주의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 전염됩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런 종교적 엑스타시 체험에 몰입하게 되어, 이들은 모두 신비를 공유한 체험공동체로 결속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신비체험은 전후의 정체 모를 퇴행적인 파괴성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입니다.

이제 기억하기의 두 번째 차원, 곧 기억의 제도화 과정을 보겠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비 체험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여 이 사건은 성령사건이 됩니다. 사건의 해석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데 해석은 늘 여러 해석들과의 경합 과정을 통해 수행됩니다.

가령 예수가 악령을 추방한 사건을 바리사이는 악령이 벌인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예수는 악령이 악령을 추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사건임을 강변하였지요. 여러 다른 해석들이 경합을 하는 가운데, 한 해석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지배적 기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한데 주목할 것은,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에서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미국계 선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한 한국인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영의 체험은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종교적 전복의 코드가 되곤 합니다. 해서 학식 있는 자나 제의를 독점한 자들보다, 그런 일상의 체계를 기도회를 시작했으니, 기도회의 효과를 선점하고 통제권을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해석하는 언어를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더 자주 영의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은 그들이 비록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기성의 지도자들 못지않은 담론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의 평양의 교회에선 학식과 제의권을 전유한 이들이 영의 체험도 전유했지요.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견제받지 않는 압도적인 신앙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데 그들은 당대 미국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하여 이들이 전권을 휘두른 사건의 해석은 종교적 문화적 배타성과 성공주의가 결합된 방식으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는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 이 두 가지 기억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원기억’은 신비 체험 현상이며, 그 속에는 ‘전후’라는 파행적 기억이, 그 발작을 일으키는 정체 모르는 미친 상흔들(trauma)이 신비 체험에 의해 압도되어 해소되고 극복되는 ‘해방의 체험’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그들은 이웃을 적으로 환치시켜 그들에게 쏟아 부었던 폭력성을 속죄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적 체험’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원기억이 제도화되는 과정, 곧 다른 해석들을 압도하고 하나의 해석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일종의 헤게모니화 과정과 결과가 바로 ‘제도화된 기억’입니다. 한데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제도화된 기억은 부모의 전통과 단절하고 이웃을 적대시하는 배타주의적인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습니다. 또한 그 배타성의 근거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적인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지요.

그러므로 나는 2007년의 ‘어게인 1907’의 기억하기의 실패가 저 1907년의 제도화된 기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그 신앙의 배타성과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대신, 교회의 권력 지향적 패권주의를 위해 신앙적 재활의 열정을 쏟아 붓게 했던 것이지요. 그해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는 한인교회가 세워졌거나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곳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치루는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종교의례 중에 가장 위험스런 것은 이른바 ‘성시화’ 의례입니다. 왜냐면 그것을 주도한 이들이 그 도시의 시장, 고위관료, 기업인 같은 그 지역에서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는 권력엘리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장 적나라하게 편 이가 바로 이명박씨입니다. 그의 인사와 정책의 종교 편향성은 너무나 노골적이었지요.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치에 관여했던 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더욱 비소통적이고 부패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여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선교사들의 해석 대신에 1907년의 원기억에서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해체, 처벌하지 않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1997년 이후 한국은 모두가 서로 경쟁자가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승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선사되고 패자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이 부과되었습니다. 그 무렵 사회를 풍미했던 ‘부자되기 열풍’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의 미덕에 탐닉했고 그것을 위해 몸을 불사르도록 책동시켰습니다.

한데 그런 서바이벌 게임의 판타지가 무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병철 씨가 피로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몸을 불사르며 열정을 다해 달리던 사람들 누구도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피로증후군 같은 신체와 정신의 질병이었습니다. 게다가 한병철 씨가 생각 못했던 현상도 일어났습니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퇴출되어 자신을 불태울 노동의 현장 자체가 없는 이들이 피로증후군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증상을 더욱 더욱 심각하게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스트레스 증후군은 분노를 일상화한다. 이 분노는, 마치 1907년의 ‘전후(戰後)’처럼, 이유도 근거도 없이 타자를 향해 퍼부어집니다. 일상의 폭력과 테러가 횡횡하는 사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폭력과 테러를 가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처들이 넘쳐나고 분노와 증오가 남발되며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세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데 오늘 우리의 교회는 동성애 혐오주의자로서 혹은 마초적 과잉남성주의자로서 혹은 극단의 반공주의자로서 분노와 공격성의 화신이 되고 있습니다. 한데 여기에는 1907년의 원기억이 ‘실종’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전후의 상처들이 해소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사건, 그리하여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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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2]

새관점주의의 시작

유대교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기독교인으로서 한번쯤은 받게 되는 질문 또는 고민해보는 것이 제사에 관한 일이다. 기독교도로서 제사를 허용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우상숭배로 보고 금해야 할 것인가? 한국에 (그 당시에는 조선) 18세기말 들어온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이미 사망한 부모나 조부모들을 신처럼 받드는 행위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마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을 것이고, 자녀된 자들로서 마땅한 도리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받게 된다든가 하는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물음을 교황청에 올리게 되었고, 교황은 제사행위가 우상숭배라는 결정을 내려준다.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한 여성은 자신의 아들에게 제사상을 차리지 말로 자신을 신주로 모시지 말라는 유언을 하고 사망하고 아들 윤지충은 그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다. 당시 양반이었던 윤지충의 행동을 패륜으로 여겨 참수해 버리는 일이 벌어졌으니 이 사건이 1971년의 신유박해였다. 결국 1936년 교황 비오 11세가 제사를 하나의 문화로 봄으로서 교황의 결정이 번복되었고 제사를 드리냐 마느냐의 목숨을 건 종교적 결단을 해야했던 위기 상황은 교황의 말 한마디에 신앙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화적 행위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장례와 제사로 연결되는 의식은 유교적인 의미를 가진 행사일뿐 아니라 샤머니즘적 의미도 담겨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복잡한 여러 의식은 유교적 우주론과 가치가 한국에 토착화 되어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역사를 가진 하나의 의식을 단순히 이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가끔 한국신학에 관심이 있는 미국인들에게 ‘한’ 또는 ‘정’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곤한다. 그때마다 주저리 주저리 여러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몇마디로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 문화권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언어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몇가지 문장으로 정의를 내려달라는 요구는 책의 한 챕터를 몇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독일 기독교백과사전에는 조상숭배가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고 한다. “조상숭배는 죽은 조상들의 진노를 막고 축복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후손들이 죽은 조상들을 위한 제의식을 잘 수행할 때, 조상들은 그들을 잘 보호해주며, 반면에 후손들이 제의식을 소홀히 할 때는 화를 가져다준다.” 한국의 문화에 대해 과문한 필자이나 조상에 대해 존경과 죽은 자에 대한 관심이 이렇듯 미개한 종교적 행위로 짧게 정의되는 것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나의 우주론을 행성했고,  그 안에 정치와 인간의 종합적인 삶을 담았던 철학적 체계가 하나의 우상숭배로 전략해 버린 것이다. 한 서구인의 또는 서구적 체계에 물든 세련된 한국인의 눈에서 말이다. 20세기 인문학의 화두였던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담론을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타인의 문화에 대한 폭력적이기까지 한 편견의 문제는 상아탑내에서도 존재해왔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C.E. (공통시대) 1세기의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의 문제만큼 명확한 예를 보여주는 것도 드물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른바 바울의 새관점주의 연구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던  E. P. Sanders 의 연구를 그의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샌더스에 대해서는 두 번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인데, 이번 웹진에서는 샌더스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그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과 타나임 문헌, 사해문서와 위경과 외경에서 본 유대주의와 바울과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것이다.

 

    샌더스는 누구인가?

    1962년 남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샌더스는 그 후 2년 동안 괴팅헨과 옥스퍼드 대학,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루 다닌후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의 데이비스 (W. D. Davies) 밑에서 박사논문을 1966년에 마치게 된다. 샌더스의 독일,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행과 데이비스와의 만남은 그 후로 그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샌더스의 스승인 데이비스는 영국 신약신학의 거장인 다드 (C. H. Dodd)와 라비닉 문서들와 신약성서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던 유대인 법학자인 다우베 (David Daube)와 캠브리지에서 함께 연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듀크를 거쳐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후, 한 길건너에 위치하고 있는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의 탈무드 학자인 핑컬슈타인 (Luise Finkelstein), 랍비인 길먼 (Neil Gillman), 그 유명한 유대교 신학자 랍비 헤셜 (Abraham Joshua Heschel)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유대교와 신약성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 샌더스가 유니온에서 공부할 당시, 데이비스 ‘바울과 라비닉 유대주의’ (Paul and Rabbinic Judaism)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이 샌더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드로 부터 시작된 공관복음과 바울서신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당시에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독일의 신약성서신학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어 받은 데이비스는 여러 유대교 학자들의 연구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예수 시대의 유대주의의 심도깊은 연구가 신약성서신학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를 것을 예감하였다. 데이비스는 그의 첫 저서인 ‘바울과 라비닉 유대주의’에서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바울과 헬레니즘과의 연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오히려 바울의 여러 사상이 당시의 유대주의와 필접한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신약성서신학에서 데이비스의 연구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당시에 거대한 트랜드를 형성했던 바울과 1세기 헬레니즘의 관계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였다. 바울이 당시의 헬레니즘과 연관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의 신약성서 신학의 분위기는 바울 기독교의 원천을 헬레니즘에서 보는 연구가 활발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이야말로 1세기 유대주의의 율법주의 또는 유대주의 기독교에 반대하여 나타난 운동이었고 자연스럽게 헬레니즘의 여러 사상들을 흡수하면서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스는 바울서신과 복음서, 그리고 유대주의의 율법이해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바울의 서신이 오히려 여러면에서 유대주의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스의 연구의 두번째 의미는 헬레니즘에 중심한 바울의 연구를 넘어서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문헌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 연구는 길고도 힘든 여정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1세기의 유대주의가 어떤 것이었냐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당시의 거의 대부분의 자료들을 연구하여 선정하고 읽고 해석함을 거듭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적어도 당시에 기독교 신학역사 안에는 그러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니온에서 샌더스가 학위를 마치고 십여년이 지난 1977년 캐나다의 맥매스터 (McMaster University)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를 세상에 내어놓게 된다. (원래는 1975년에 완성하였으나 2년 동안의 노력 끝에 겨우 출판하였다.) 

    샌더스는 그의 연구 대상을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Palestinian Judaism)으로 한정하고 이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한다. 첫번째는 라비닉 유대주의이고, 두번째는 사해사본에서 나타나는 유대주의이고, 세번째는 외경과 위경에 나타난 유대주의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에 대해서 익숙한 독자가 많을 것이나 라비닉 유대주의에 대해서는 필자조차도 풍문으로만 아는 수준인바, 라비닉 유대주의에 대한 간략하게 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타나임 시대 –라비닉 유대주의의 시대-

    그 명확한 시작은 알려져있지 않으나, 제 2성전기의 유대사회에는 예루살렘에는 대 산헤드린 (Great Sanhedrin), 그리고 다른 유대공동체가 존재했던 도시들에는 소 산헤드린 (Less Sanhedrin)이 조직되었고 그 우두머리를 나지(Nazi)라 불렀다. 산헤드린은 유대사회의 최고위 결정기관이었는데, 대법원과 같은 역할과 각종 정치적 문제들이 논의되고 의결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는 대제사장이었으나 BCE (공통시대이전, 주전) 1세기 후반부부터 특출한 두명의 율법학자들과 그 제자들이 서서히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샴마이 학파와 힐렐학파로 알고 있는 이들은 샴마이 하 자켄 (Shammai ha-Zaken, 50 BCE – 30 CE 30)과 그를 따르는 자들인 샴마이의 집 (Beit Shammai- Academy of Shammai)과 힐렐 (Hillel the elder, 110 BCE – 10 CE)과 힐렐의 집 (Beit Hillel – Academy of Hillel)이 그들이었는데, 샴마이와 힐렐은 당시에 내려오던 오경과 구전전승의 법률적인 해석에 독보적인 스승들었다. 유대전승을 따르면 샴마이는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 반면 힐렐은 율법에 대한 유연한 해석을 중시함으로써 서로 대립하였고 결국 예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힐렐이 대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샴마이와 힐렐로 대표되던 랍비전통은 힐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연표를 보편 공통시대 10-220년대(주후 10-220년과 같음)를 탄나임 (Tannaim)이라고 불렀는데 이시대에 라비닉 유대주의가 그 기틀을 형성하게 된다. 탄나 (Tanna)는 선생이라는 뜻인데, 랍비 선생을 뜻하며 이의 복수인 탄나임 (Tannaim)은 이 시대에 구전으로 전승되던 율법과 그 뜻을 가르치고 이를 문서로 기록했던 대표적인 랍비들을 뜻한다. 이때 당시에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구전 율법들이 200년경에 문서로 기록되었는데 미쉬나 (Mishnah)라 불렀다. 그래서 탄나임시대는 미쉬나시대라고도 불리며 대략 120명의 탄나임들이 알려져 있다. 한편 미쉬나외에 탄나임들은 문서로 남아있던 모세오경 (토라, Torah 또는 Tanak)에 대한 해석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 기록들을 미드라쉬(Midrash)라고 한다. 미드라쉬는 크게 율법에 대한 해석인 할라카 (Midrash halakha)와 그 이외의 내러티브등에 대한 주석인 미드라쉬 학가다 미드라쉬 ( Midrash Aggadic) 로 나누어지며, 출애굽에 대한 미드라쉬(주석)는 ‘메킬타’ (Mekhilta)라 하며, 레위기는 ‘시프라’ (Sifra), 민수기와 신명기는 ‘시프레’ (Sifre)라 한다. 결국, 1세기의 율법연구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율법학자인 힐렐로 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이 탄나임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의 광범위한 유대주의의 역사의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라비닉 유대주의 (Rabbinic Judaism)이라 하는 것이다. 

    라비닉 유대주의가 유대역사의 한 축으로 떠오리게 된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공통시대 70년경 오랜동안의 저항끝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자 중요 율법학자둥 하나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 (Johanan ben Zakai)는 예루살렘에서 좀 떨어져 있었던 도시인 유대인들의 많이 거주했던 야브네 (Yavne)를 새로운 유대교의 중심지로 세우고 랍비들이 중심이된 유대사회의 재건을 이루고자 하였다. 예루살렘의 몰락은 당시의 유대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성전, 제사중심의 유대교에서 율법중심의 유대교로의 전환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성전의 시대 이전에 유대사회에 주어졌던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했는데, 예를 들면 속죄의 효력을 가졌던 제사가 대신 과연 무엇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등을 해결해야 했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과 라비닉 유대주의

    라비닉 유대주의의 등장은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자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유대독립전쟁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한다. 성서학자들은 야브네에서 있었던 얌니아 회의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유대주의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저주하고 배척했으며 그 후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데이비스나 샌더스의 연구이전의 성서학계가 가지고 있는 당시 유대교에 대한 시각은 이러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대립을 기반을 하고 있다. 게다가 초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공동체는 주류 유대사회에서 약자였을 것이므로 갑인 유대교로 인해 힘겹게 공동체를 지탱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유대 정치 분파들(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대립은 이러한 생각의 증거가 되었고, 예수는 당시의 성전중심의 또는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로 그려졌다. 유대교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공동체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은 요한복음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것은 유대인들로 그려지고 있다. 이 갈등적 관계는 바울 서신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그러났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보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을때 (행 9:1-19), 이 기록이 바울이 기록한 것이 아닌 사도행전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은 한번도 자신의 드라마틱한 회심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많은 설교자들만이 아니라 성서학자들도 이를 유대교와의 결별을 고하는 사건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유대교 또는 1세기의 유대주의(Judaism)는 기독교의 복음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현재 신약성서라고 부르는 경전에 그려진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유대교를 재구성해내기 시작했다. 결국 유대교는 20세기 성서학안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기독교의 반명제로써 자리잡게 된 것이다.

 

    샌더스의 도전

    샌더스는 기독교의 반명제로서의 유대교의 모습은 몇몇 학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신약성서학계의 공통적인 관점이라고 말한다. 곳곳에서 어느정도 균형된 생각을 보여주는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각주:1] 불트만이나 여러 학자들은 바울의 신학의 기본 구조가 유대교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정확하게 유대교와 반대지점에 있다고 생각했다.[각주:2] 샌더스 자신도 바울과 당시 유대교간의 율법에 대한 의견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샌더스의 불만은 신약성서학자들이 바울의 논쟁적인 어투에서 나오는 유대교에 대한 설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유대교에 대한 연구의 목적을 그 받아들인 관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에 있었다. 바울이 생각한 유대교와 당시의 유대교간에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환상이 신약성서학이라는 학문안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각주:3]

    당시의 유대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성서학자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세기의 유대교의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하면 저울을 들고 있는 하나님과 같다. 한쪽에는 율법을 통한 선행이 담기고 다른쪽에는 죄의 양이 담긴다. 그래서 죄의 양이 무거운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이고 선행의 양쪽으로 저울이 기운 사람들에게는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를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주의적인 바래새인들의 모습과 바울의 논쟁적인 어투를 바탕으로 당시 유대주의의 위의 언급했던 여러 문헌들에서 이를 지지하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낸 모습이 바로 철저한 율법의 행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이 바로 유대교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현대의 기독교인들조차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유대교에 대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렇듯 경도된 율법주의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누구이던가? 이스라엘이라면, 자신의 백성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분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에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스바냐 3:17) 그런 하나님이 아니던가? 히브리 백성을 너무 사랑하셔서 가나안 민족들을 멸절하시고, 이집트의 군대를 산채로 수장시키신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그런 하나님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릴때부터 외우고 마음에 새기는 민족들이 자신의 죄의 양이 선행의 양보다 조금더 가벼운지 무거운지 계산기를 두들기는 심판자로 하나님을 생각했을까? C. G. 몽테피오레 (Claude G. Montefiore)는 20세기 초에 신약성서에 대한 책을 쓴 유대교 신학자였는데 유대인인 그가 본 바울이 생각한 유대교는 당시의 라비닉 유대주의와는 명확하게 달랐다고 말한다. 라비닉 유대주의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율법과 회계를 통하여 인간이 쉽고 효과적으로 하나님과 만날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죄의 문제 때문에 천지가 뒤집어지는 우주적인 사건, 즉 화육 (Incarnation)과 십자가와 같은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각주:4] 이와 비슷한 논지로 샌더스의 선생이었던 데이비스는 바울은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믿은 랍비와 다름 없었다는 생각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샌더스의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의 유대교는 어떤 종교였었는가?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라비닉 유대주의, 사해문서에 나타난 유대공동체, 그리고 외경과 위경의 기록들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먼저 보통의 유대교에 대한 생각이 과연 옳은지 문서들을 읽음으로 알아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바울과 가지는 차이점이 있다면 분명이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샌더스의 생각이었다. 각설하면 유대교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풀고, 바울과 당시의 유대교가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밝히자는 것이 샌더스의 입장이었다. 다음 웹진에서는 본격적으로 샌더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자.

(원래 샌더스에 대한 글을 한편으로 끝내는 것이 필자의 목적이었으나 새관점주의의 연구를 이해함에 있어서 배경이 되는 것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웹진을 맺으려 합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 웹진 <제3시대>

 

  1.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3. [본문으로]
  2. “바울과 유대교사이의 차이는 그의 현실적 실재로서의 의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좀 더 확실한 주제에 있는데, 하나님의 무죄함에 대한 결정에 관한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킴, 즉 율법에 나와있는 행위들을 완수하는 것이 무죄함을 얻는 조건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바울의 관점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Waco, Tex.: Baylor University Press, 2007), 273.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바울이 생각하는 유대교라는 것마저도 어거스틴이나 루터가 생각했던 유대교라는 것은 스탠달의 글에서 설명했었다. 바울이 과연 유대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여러 학자들의 논쟁속에 있다. [본문으로]
  4.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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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I)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2)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이어도 사나~~

우리집은 내가 열 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도에서 서울 한복판 종로3가로 이사 왔다. (그 문화적 충격이란… 그에 대한 사연은 다음 기회에 또 나누기로 하고) 당시 제주에는 19세기에 출생한 팔십이 넘은 나의 증조 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줄곧 제주에서 사셨고, 제주에서 한일합방과 일제시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박정희까지 모두 감내했던 분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4.3까지…

할머니는 해녀였다. 지금은 제주해녀가 많이 줄었다지만, 할머니가 젊었을 때 만 해도 그냥 일상적으로 동네 아낙들이 바다로 들어가 물질(제주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가 전복, 해삼, 낙지 같은 것을 포획하는 활동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을 하였다고 한다. 해녀가 무슨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말이다. 옛날 지리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섬 현무암 지대로 물이 흘러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해안가에서 쏟아 오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민가들이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였다. 그냥 마을 길 따라 걷다보면 바다가 나온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당시 제주 바다는 제주 인민들에게 중요한 삶의 자원이었고, 그 몫은 당연히 생활력 강한 여인들의 차지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빈번히 물질에 참여하셨다고 당시를 회고하셨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랑 같이 있다 보면 당시 물질할 때 불렀다는 노동요들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알 수 없는 곡조에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읊조리던 할머니에게 “그게 무슨 노래야?” 라고 버릇없이 묻던 증손자를 할머니는 마냥 귀엽다 쓰다듬으며, 그냥 옛날에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불렀던 노래라고만 답하셨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이어도 사나’이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는 전설 속 섬 파랑도(‘이어도’의 정확한 명칭)를 찾기 위해 벌이는 수색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어도는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고, 수색종결을 선언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색작업 취재차 승선했던 제주출신 천남석 기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천남석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육지에서의 시간보다 바다위에서 생활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는 이어도를 찾아 떠나야겠다며 수평선을 넘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어도를 목놓아 노래하다 밭이랑 사이에서 죽는다.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 이청준, ‘이어도’ 中

‘이어도’는 제주 뱃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피안의 섬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나의 증조할머니가 불렀던 구전가요 ‘이이도 사나’는 이어도 관련 가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이어도 가니?’ ‘이어도에 사느냐?’라는 뜻이 가사에 내포되어 있다. 천남석은 섬사람들의 이 지긋지긋한 이어도를 향한 집단무의식, 당신의 아비와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어도’로 인한 정신의 가위눌림, 그리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어도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이어도 탐사작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승선하였던 것이다.
 
전설 속 섬이었던 이어도의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제주 남쪽 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된 이후이다. 영국해군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1910년 수심 5m 아래 암초를 측량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이어도’는 국제적으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 불린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1984년 제주대 탐사팀이 마라도 서남쪽 149Km 떨어진 곳에서 정상부가 해수면 5m 아래에 있는 4개의 봉우리로 구성된 거대한 수중암초를 확인하였다.

수심 5m아래 거대한 지대가 있다 함은 조금 높은 파도가 일면 그 형체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소설속 천남석의 아버지가 “파도로 정신을 잃어 의식이 혼미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이어도를 보고 살아 돌아왔다고…그 이어도를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탐사결과를 놓고 볼 때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어도는 존재하는가?

 

<검은 집>에 들어가기까지

지젝은 본인의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의 예제풀이 성격의 책인 <Looking Awa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1991)를 <The Sublime Object…>가 세상에 나온 2년 뒤에 출판하였다. <Looking Away…>를 연습용이라고 한 이유는 대중문화, 소설, 오페라, 히치콕 등을 끌고 들어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언급한 이론적 내용들을 보다 알기 쉽게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젝은 이 책에서 미국 작가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 <검은 집>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실재에 대하여,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텅 빈 실재를 메우는 환상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그의 앞으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옛날 필자가 어렸을 때 검정 뿔테 안경쓰고 영화 해설을 하던 정영일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그 분은 지금처럼 인터넷도 발달되지 않았고 씨네 21도 없었던 그 시절에 TV ‘주말의 명화’ 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아저씨였는데, 소년 상철이 보기에 정말 멋지고 근사하고 똑똑했었다. 그 아저씨 영화해설에 빠져 영화를 보겠다고 기다리다(보통 밤 10시 10분에 주말의 명화는 시작됨)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잠들었던 기억이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위선, 탐욕… 뭐 그런 것들을 다룬 영화였던 것 같은데, 보고 나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영화였다.

영화 <태앙은 가득히>의 원작 소설작가가 바로 <검은 집>을 쓴 하이스미스이다. 지젝의 <Looking Away…>에서 언급한 소설 <검은 집>을 필자는 3년 전 한국 방문 했을 때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이 오버랩 되었다. 왜지?

 

언덕 위 그 집에는 마돈나가 있다/없다

<검은 집>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원작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 나름대로각색을 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무대는 미국 시골 어느 선술집, 날이 저물면 마을에 사는 남자인간들이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 들어 언덕 위 ‘검은 집’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추억을 안주 삼아 시간가는 줄 몰라 한다. 응삼이는 검은 집에 홀로 사는 마돈나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한 후, 테라스에 포개어 앉아 함께 바라보았던 저녁노을을 이야기하고, 갑돌이는 마돈나와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갑자가 비가 쏟아져 몸을 급하게 숨긴 처마밑에서 우발적으로 감행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하고, 술에 취한 병태는 동공이 풀린 채 마돈나와 나누었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맞닥뜨리는 탁 트인 서재 건너편 첫 번째 방 하얀 커튼이 드리우져 있었던 침실에서의 정사를 고해성사 하듯 읊조린다. 

그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마을로 새로 이사온 한 젊은 엔지니어가 “내가 그 집에 가서 마돈나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여러분, 그 집과 마돈나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함께 갈 사람 없습니까?” 그 젊은 엔지니어의 제안에 아무도 마을의 남자들은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 청년 혼자 언덕 위 검은 집으로 올라가는데…
여기까지의 플롯은 카프카의 <성城>을 연상시킨다. 마을 사람의 경외의 대상인 성을 측량하러 온 젊은 측량 기사 K, 그러나, 소설 ‘성’에 등장하는 K는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하이스미스는 젊은 엔지니어를 언덕 위 검은 집으로 과감히 올려보낸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측량기사, 엔지니어는 근대성, 과학, 합리성, 이성…뭐 그런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성’과 ‘검은 집’은 신화, 전설, 전통, 무의식…뭐 그런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물론, 지젝은 이런 얕은 수에 관심하지 않는다. 좀 더 소설을 따라가보자.

언덕 위 검은 집에 도달한 젊은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응삼이가 마돈나와 함께 저녁노을을 보았다던 테라스는 축대가 무너져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갑돌이가 새벽산책길 마돈나와의 경이적인 첫 키스의 사연이 묻어있던 처마 밑은 누군가가 쳐놓은 녹슨 철조망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2층 탁 트인 서재를 지나면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병태와 마돈나의 하룻밤이 새겨져 있다던 그 방엔 천장에는 거미줄이 난무했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으며 하얀 커튼은 갈기갈기 찢겨져 깨진 창문 틈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언덕 위 검은 집은 폐가였던 것이다. 그럼 마돈나는 어디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마돈나의 자취는 그 집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을 나오려는 찰나에 1층 화장실 깨진 거울 틈새에 꽂혀 있는 사진 하나가 그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흑백사진이었고, 사진 밑에 적혀있는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사진 속 주인공은 백발마녀 같은 허리가 약간 꾸부정한 노파였고, 그의 왼손에 보드카 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Lovely Madonna! 라는 문구가 사진 밑을 장식하고 있었다. 설마 이 노파가 마돈나?  청년은 그 사진을 들고 마을로 내려갔고, 술 집에 모여있는 그 남자인간들에게 언덕 위 폐가를 돌아본 소감을 전달한 후에, 사진을 식탁 위로 던지며 “이 노파가 당신들이 말하는 마돈나인가?”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순간, 떠들썩했던 그 술집엔 찬물을 끼어 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은 짦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청년 뒤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응삼이가 서 있었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오늘은 살인죄로 징역을 살던 응삼이가 석방되는 날이다. 병태, 갑돌이를 비롯한 동네 몇몇 남자인간들이 감옥 앞에서 두부를 들고 응삼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새롭게 장소를 옮겨 단장한 Bar에서 축하주를 마시면서 그 동안 못다한 밀린 이야기를 하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응삼이가 갑자기 불쑥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난 그럴 수 밖에 없었어…어떻게 그 놈이 그것을 건드릴 수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구!” 응삼이의 최후 변론을 듣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를 하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 응삼이 네가 안 그랬어도 우리 중 누군가 아마 그렇게 했을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걸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잔에 술을 채우고 브라보를 외쳤다.[각주:1]

 

에필로그: 남겨진 질문들

앞서 살펴보았던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 등장하는 천남석에게 있어 ‘이어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검은 집>에 등장하는 응삼이에 있어 검은 집과 마돈나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 그리고, 지젝은 무엇을 이들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 다음 웹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검은 집]에 대한 에필로그: 10년 넘게 페미니스트 아내와 사는 까닭에 나는 [검은 집]을 읽으며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작품이 남자인간들의 관음증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에 기반하지 않나?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검은 집’을 향해 환상을 투사하는 존재는 오로지 남자인간들뿐이고, 여자는 남자 인간이 꿈꾸는 환상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에어리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환상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미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존재하며,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남자들의 환상공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우리 남자들에게 있어 환상이란 잉여쾌락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을 사내들에게 검은 집과 마돈나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흘러 넘치는 공간이고, 그 잉여의 꿈과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영화관이 밝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영화의 해상도가 낮아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이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아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영화관 안은 어두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상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서는 말이다. [검은 집]이라는 책 제목 안에 이미 이렇듯 음습한 남자들의 환상 메커니즘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인간의 환상작동방식은? 남자인간들과 다르지 않을까? 그럼, 책 제목은 [하얀 집]이 되어야 하나? (이 우매한 남자인간의 질문에 대한 여성 필자의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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