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안병무선생 18주기 추모기념행사


심원 안병무 선생 18주기를 기리는 토크 한마당에 선생님을 모십니다 


하늘도 땅도 공이다
 
공적인 것의 소멸, 그 시대적 추세에 반(反)하다


최근 우리사회는 강력한 민영화의 태풍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철도, 의료, 교육, 전기 등등, 이제까지 공공재였거나 공공재적 성격이 강했던 많은 것들이 그 공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사적인 이윤창출의 도구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그러한 추세의 주범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추세에 순응적인 정부는 공적인 것의 사유화를 극적으로 악화시키는 주역입니다. 바로 오늘의 한국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최근 가장 빠르게 사회적 양극화와 격차화가 진행되는 사회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려스러운 현실에 직면해서 우리는 지난 1986년 안병무 선생의 글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를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공적인 것은 끝끝내 공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창조 원리를 훼손하고, 그것을 사유화하려 했던 것에서 인간의 원초적 죄성을 해석했던 글입니다. 

이것은 선생이 이 글을 발표한 당대보다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신학적 문제제기로 다가옵니다. 해서 본 기념사업회는 추모 18주기를 맞아 ‘하늘도 땅도 공이다’라는 주제로 토크 한마당을 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 심지어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적인 것의 소멸 현상을 짚어보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 문제제기와 대안을 이야기하는 토크 한마당을 열고자 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기조발제

최형묵(한국민중신학회 총무. 민중신학자)

패      널

김기석(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시인)
김응교(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전 HK연구교수. 여성신학자)

진    행

김진호(심원안병무선생 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 민중신학자)


일    시_ 2014년 10월 19일(일요일) 오후 3:00~5:00
장    소_ 향린교회 본당(3층)
문    의_ 김진호(010-3078-8208)


※ 토크 한마당 이후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    최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조헌정(향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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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보다 우려되는 그들의 “도덕과 상식”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극우단체들의 오프라인 활동이 갈수록 가관이다. 지난 달부터 시작된 일간베스트회원들의 폭식투쟁에 이어, 9월 28일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을 표방한 20여명이 서울광장에 나타나 노란 리본을 훼손하려다 경찰에 저지당했다.

조국 교수는 29일 자신의 SNS를 통해, “다른 극우단체와 달리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결성은 형법 제114조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 4조 ‘범죄단체조직죄’에 해당한다”며 검경의 수사를 촉구했다. 서북청년단이 어떤 조직인가. 대구 노동자 파업, 보도연맹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 4.3항쟁에 개입하여 20~40만명의 양민을 학살한 극우 민병대다. 특히 4.3발발 전후 이들이 제주 민중들에게 가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의 잔혹성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다(김관후,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프레시안> 9월 29일). 테러조직의 재건을 지켜보면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운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범죄에 가담하는 행위이다. 수사를 진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베, 엄마부대, 서북청년단재건위원회와 같은 극우 전위부대가 저지르고 있는 엽기, 아니 광기에 가까운 행각들을 단지 수사와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파급력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토록 후안무치의 행동을 일삼고 있는데도 이들의 활동이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고 있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히기 꺼려하는 익명의 대중들에게 무언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신호다. 누구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 이면,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념에는 대중의 공감대를 건드리는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패륜적 “광기”와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이념”은 따로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9월 29일자 <시사IN>에서 천관율 기자는 일베연구자 김학준씨와 함께 쓴 기사를 통해 일베 사고체계의 핵심적 키워드를 “무임승차 혐오” 코드로 지목했다. 일베를 비롯한 극우 보수자들이 주요 타켓으로 설정하고 있는,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무임승차”를 시도하고 있는 집단들은 여성, 진보, 호남이며, 최근에는 세월호 가족까지 포함되었다. 일베의 사고체계에서 이들은 “하는 일은 없으면서 떼를 써서 과도한 보상과 특혜를 받으려 하는 암적 존재”이다. 즉,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성실하게 국가의 요구를 수행하는 “애국 시민” 들과는 달리, 이들 소수자들은 자신의 의무는 방기한 채 특혜만을 주장한다. 따라서 일베가 말하는 “정의 구현”은 “소수자가 국가로부터 받는 보호”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이들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애국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되 찾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천관율,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2014년 9월 29일 <시사 IN>”).  적어도 본인들은, 이러한 “상식”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구국의 희생을 감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에게 그냥 좀 “살살해”라고 말하고 싶을 뿐, 굳이 말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일베의 이 “무임승차” 코드는 기사에서 지적한대로 그들의 엽기행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기여한 만큼, 투자한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윤리의 잣대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임승차”는 “인간 본연의 도덕 감정과 정의감에 기반한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 잣대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일베의 행각 자체는 비상식적일지 모르지만 일베의 이념은 지극히 “상식적”이고,나름 “정의”롭고, “공평”하다.
 
광기와 “상식”은 사실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반면교사라고, 남의 나라 역사를 통해 이 불안한 만남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살펴보자. 지금까지도 가끔씩 되살아나는 미국의 악몽, 쿠 클럭스 클랜(The Ku Klux Klan), 그중에서도 연방법에 의해 몰락한 후 사그러 들었다가 20세기 초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미국 전역에 걸쳐 400만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렸던 제2기 KKK단이다. 제2기 KKK단은 1915년, 의사이자 목사였던 윌리엄 J. 시몬스(William J. Simmons)에 의해 조지아 주 애틀란타 근교에서 조직되었다. 제2기 KKK단이 정서적 공감대를 얻게된 배경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침범해 오는 이방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증가된 이민인구는 1924년 악명높은 반이민법을 통해 제한되기 직전 그 절정에 이른다. 대규모로 유입되어 오는 외국인들에 의해 미국사회의 인종적 성격이 바뀔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미국의 주류, 백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이 목숨걸고 수호해야 할 미국의 가치, 즉 “헌법, 성서, 인종분리”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집단들에게 린치를 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흑인을 비롯, 가톨릭신자들, 유태인들, 아시아인들, 독립적인 여성, 동성애자, 조합을 결성하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포함된다.

제2기 KKK단의 활동과 번성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세가지 있다. 첫째, 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던 이민자들과 소수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삶의 환경이 나아지지 않는 까닭을 이민자들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러기에 KKK 단이 자신들을 억울함을 대변하는 희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째, 회원 중 목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물론이며, 이들의 폭력과 테러를 모른척 하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 의사를 표하는 정치인들과 유력인사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정치인들은 KKK의 모토를 자신의 정책에 반영하고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어 의회를 장악했다. 1924년 반이민법이 통과된 배경에는 이들이 있다. 셋째, 이들을 묶어 낸 것은 강력한 형제애였다. 극심한 가치관 혼란 속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행동할 때 얻어지는 자긍심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에 “애국심”이라는 미국사회 불가침의 정서와 옛 남부에 대한 낭만적 향수가 보태져 “멋”과 “스타일”을 만들었다. 

굳이 병렬하여 비교하지 않더라도 KKK단과 일베를 위시로 한 극우보수집단들의 공통점은 가늠하기 쉽다. KKK단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극우집단 또한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라 늘어나는 타자들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비로소 시작 된 가치관의 다양화가 싫고 불편하다. 근면하고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버지 시대의 신화가 그립다. 비슷한 것은 정서 뿐이 아니다. KKK단과 종교인들의 야합은 극우집단과 보수 종교인들의 어딘가 모르게 닮은 행각을 줄창 보아온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KKK단을 등에 업고 출세한 정치인들 처럼, 공식, 비공식적으로 극우보수집단을 지지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늘어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옛것에 묻혀 살고 싶어하는 취향까지 닮았으니, 유신시대와 심지어 서북청년단까지 불러 들이고 싶은 망령된 생각이 외롭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유사성 중심에 도저하게 흐르는 것, 이 두 집단이 갖는 가장 유사한 점이며 동시에 이들의 출현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부분은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도덕성”과 “상식”이다. 즉, 내가 기여한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하며, 그것이 가장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이념이다.

미국 사회에서 KKK단은 이제 그 흔적이 미미하지만 이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이 이념은 면면히 살아남아 미국 정치의 강력한 축을 이루고 있다, 사회복지 정책을 감소하고, 탈규제, 민영화, 감세 정책을 통한 민간기업 경제력 회복 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모토에는 어김없이 이 “도덕과 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일베를 위시로한 극우집단들의 행동은 비판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무임승차혐오코드”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그들이 지향하고 지지하는 가치와 정책이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는 맥락을 본다면 우리사회에도 이 가치관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구조적 억압 따위는 소설에 불과하다. 소수자들과 약자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노력을 안하기 때문이다. 복지와 특혜가 오히려 그들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있다. 억울하면 군대에 가면 될 것이고, 안되면 더 노력하면 될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강해지면 누구나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사회는 지극히 “평등하다.”

KKK단과 일베,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도덕, 상식”과 이들의 광기어린 “패륜” 사이의 간격은 사실 그다지 넓지 않다. 힘에 대한 욕망과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 약자에 대한 공포와 멸시, 성공하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소속감과 친밀감에 대한 강한 갈구가 덧붙여 진다면 이들의 “도덕과 상식”은 언제든 광기로 돌변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전체주의의 광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중의 정서를 기반으로 발생했고 성장했다.  이들이 단지 폭력의 파편에 머물지 않고 전체주의라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중의 열망을 잘 이해하고 조직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극우집단들의 확산과 오프라인 활동을 보며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광기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도덕과 상식”이 확산되고, “무임승차혐오코드”가 먹혀들고 있는 광기의 저변이다. 그 저변이 단단하게 구축된다면, 설사 일베와 엄마부대와 서북청년단이 처벌을 받고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사회 소수자와 타자들을 폭력적으로 응징할 집단들이 다른 얼굴과 이름을 갖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KKK의 활동이 시시해진 미국사회에 네오나치, 반이슬람조직, 반동성애조직, 또 각종 종교집단의 형태를 띠고 극우 보수 집단의 출몰이 끊이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광기는 돌출되니 찾아내기 쉽다. 그러나 그 저변은 수사와 처벌로 찾아낼 수 없다. 면밀한 관찰과 일상에서의 인내심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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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키기 위한 반전 운동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전쟁이 살아 남은 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일상 생활의 파괴’일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낮 동안 일을 하고, 저녁에 휴식을 취하는 일상.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는 일상은 소소하고, 때론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란 결국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란 것을 고백하곤 합니다.
         지난 2011년 미국의 PBS (Public Broadcasting System) 방송국에서는 ‘여성, 전쟁, 그리고 평화 (Women, War and Peace)’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라이베리아, 콜럼비아 등지에서 전쟁을 경험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전쟁으로 인해 깨어진 일상이 가져다 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때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고, 마을의 대소사를 나누던 주민들은 보스니아 내전으로 적군과 아군, 강간 군인들과 피해자들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한 번 나누어진 마을 주민들은 전쟁 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무력 항쟁을 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들이 극히 제한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집 안팎에서 끊임 없이 감시를 받고, 길거리에서 매를 맞고 폭력에 노출됩니다. 한 마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합니다.
          일상의 파괴가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담론은 인간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자체를 쉽게 무시합니다. 전쟁 담론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는 국제 관계, 핵무기 사용, 군축 협상, 테러 조직 파괴, 국제 협약 등등, 소위 말하는 거대 담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 담론들이 활발히 토론되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여성이나 일반인들은 소외되어 왔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정치담론을 지배해 온 “정치적 사실주의 (political realism)”는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 문제에 집중하면서, 은연 중에 군사적 힘이나 전쟁, 핵폭격 등의 ‘힘든 (?)’ 결정을 하기엔 감정적이라 여겨지는 여성들을 배재해 왔습니다.
           20세기 후반들어 국제 관계를 다루는 여성학자들은 ‘정치적 사실주의’가 경제, 종교, 이민, 환경 문제 등을 동반하는 복잡다단한 국제 사회 관계를 다루기엔 역부족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실주의는 주권 국가를 국제 관계의 기본 단위로 보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에 들어 많은 여성학자들과 국제 NGO 관계자들은 평화와 안보의 주체를 국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하며,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평화와 안보의 핵심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사회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평화와 안보 정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 안보 (human security)’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안보를 위해서는 일상 생활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안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과 영양가 있는 음식, 양질의 교육, 마을 공동체, 종교의 자유, 의미있는 인간 관계, 정의로운 경제 구조 등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마련해야 합니다.
            인간 안보가 추구하는 사회 경제 구조는 다양한 기독교 해방신학이 추구해 온 ‘하느님의 나라’와 비슷합니다. 미국의 남미 여성 신학자 아다 마리아 이사시 디아즈(Ada Maria Isasi-Diaz)는 남미 여성 해방 신학의 핵심은 소소한 일상생활 자체가 폭력의 구조에 저항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군사주의가 인간과 자연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관계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닌 원자화(atomization)된 존재로 살도록 강요하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얻은 생존의 경험은 공동체를 살리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생존의 경험 속에서 얻어진 지혜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하느님의 가족 (la familia de Dios) 구성원이며, 이 가족 공동체는 가장 약한 구성원을 위해 폭력의 구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도로테 죌레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은 일상에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신비함을 경험하는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은 인간 공동체와 자연 공동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일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의 고통을 돌아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입니다. 결국 폭력에서 자유로운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살아있는 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전쟁과 폭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가 인간 안보에 우선한다는 생각. 군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강한 군사력만이 안보와 평화를 가져온다는 생각. 군대를 가야 남자가 된다는 생각. 살인, 테러, 방화, 폭격이 실제 상황처럼 펼쳐지는 영화와 컴퓨터 게임. 군대에서 강조하는 전우애와 국가에 대한 충성, 위계 질서가 중요한 사회 가치가 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반전운동, 평화운동은 일상을 지키기 위한 운동입니다. 나의 일상이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 시키는 문화에 젖어들지 않도록 하는 삶, 타인을 소외시키는 일상이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교통하는 삶, 그리고 인간 안보를 위한 사회 정의 실현에 참여하는 삶 말입니다. 반전 운동은 일상에서 시작해서 결국 그 일상을 지키는 운동으로 귀결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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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Before The Sewol[각주:1]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Intro: 제작의도 & 당부의 말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100일 가까이 보내고 있다. 갓난 아기가 태어나 100일을 넘기면 100일 잔치를 열어 이 아기가 100일까지 살았고,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도 이 거친 세상을 능히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 축복하는 세레모니를 가지는데,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100일 가까이 지나고 있는 나는 갈수록 이 사회가 묘연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에 치여 있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다. 도대체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일까? 그 시간들을, 그 세월 속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 시카고에서 하나하나 음미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내게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본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글에서 2014년 오늘의 한국 사회를 말하기보다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이방인의 관점에서 유학을 떠나기 10년 전 대한민국과, 10년이 지난 지금 고국으로 돌아와 100일 동안 살면서 느꼈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후기를 쓰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며 독자들도 당신들의 지난 10년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난 10년이 어떠했는지? 괴롭겠지만 잠시 회고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S# 1. 정권교체

우선,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가장 달라진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정권이 바뀐 것이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한국의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십 년 동안 이 나라는 정권이 두 번 바뀌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그리고, 내가 미국에 있는 십 년 동안 두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했고, 얼마 후에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울부짖던 김대중 대통령도 그의 명을 다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시카고에서 인터넷을 통해 접하면서 나는, 내부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국 현대사가 이렇게 저무는구나!’ 라는 씁쓸하고 애통한 마음에 한동안 빠졌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다 살아있는데,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사라진 것이, 내가 그 두 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이 무너졌구나!”라는 생각을 직감적으로 들게 만들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어떤 이는 '87년도 체제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기간을 이데올로기(시대)의 종말이라 부르고 싶다.


S# 2.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

2.1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지금은 슈퍼스타가 된 지젝의 영미권 진출작이 바로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이다. 그 후로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많은 단행본을 출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지닌 의미와 함량만큼의 그것을 담고 있는 책은 몇 권 되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The Sublime Object는 번역하면 숭고한 대상이다. 그럼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2002년 ‘인간사랑’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역자: 이수련)의 제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었고, 2013년 ‘새물결’에서 나온 개정판(역자:이수련) 제목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었다. 이렇듯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중간에 있는 전치사 ‘of’ 때문이다. 영어사전에서 of 용법을 찾아보면 수 십가지 용례가 나오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격의 of’와 ‘소유의 of’, 그리고 ‘주격관계의 of’이다.
첫 번째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이데올로기와 ‘숭고한 대상’을 동격으로 처리한 경우다. 그렇게 되면, 이데올로기 자체가 숭고한 대상이 된다. 개정판 번역본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이 경우 ‘of’를 ‘소유의 of’로 해석을 할지, 아니면 ‘주격관계 of’로 해석할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소유의 of’로 해석하면,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숭고한 대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주격관계 of’로 해석하는 것이 지젝이 의도하는 이데올로기에 적합하다.
‘주격관계 of’의 쓰임새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the works of 은희경’이라고 할 때, 은희경이 쓴 작품들을 뜻한다. 은희경의 작품들, 예를 들면, <새의 선물>, <타인에게 말걸기>, <비밀과 거짓말> 같은 소설들 말이다. 그렇다면 ‘주격관계 of’를 갖고,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될까? 이데올로기가 숭고한 대상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은희경이 그녀의 작품들을 생산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전포인트가 있다.

2.2 이데올로기 작동방식

이데올로기는 절대 자기 스스로가 숭고하지도, 그렇다고 이데올로기 안에 숭고한 측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데올로기 하면, 어떤 장엄하고 숭고하고 거시적이고 무엇인가 유의미한 것이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주는 환상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가 작동을 해서 별볼일 없었던 그 무엇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바라보게 되면, ‘숭고한 대상’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숭고한 대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온갖 정치적 선전들이 그 숭고한 대상들 아니었던가!  4대강, 뉴타운, 부국강병, 정의사회구현, 경제강국, 보통사람들의 시대…등등 얼마나 많은 ‘숭고한 대상’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졌던가!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허위의식, 즉 환상과 착각과 오해를 계속 만들어내는 주문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명품백을 사면 내가 명품인간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자본주의 상품 이데올로기의 특징인 것처럼, 내가(혹은 우리가) 그렇게 지금 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80년대 운동의 1차적 목적은 체제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거짓과 기만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명석한 현실분석과 각종 날카로운 이론을 근거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 시대는 90년 동구권의 몰락, 97년 IMF체제,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의 상실과 2007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라는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그 무렵 한국사회는 ‘냉소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S# 3. ‘냉소의 시대’가 오는도다!

3.1 Welcome to 냉소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무엇을 몰라서 문제가 발생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운동은 체제가 억압하고 강요하고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밝히고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신자유주의 시대는 운동의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시대가 뭘 몰라서 문제가 생기는 시대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이 냉소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다 알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안다’ 라는 뜻이 무슨 뜻일까?
냉소주의(Cynicism)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수면으로 올라온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질적인 차이, 즉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꿔 버린 시스템이다.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서사의 구조들이 있는가?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신앙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고, 전통과 개성일 수도 있는데, 그런 서사의 구조들을 비웃으며, 이제 현대인은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런 것들 얼마면 돼?” 이렇게 말해버리는 것이 자본이 지닌 냉소의 법칙이다. 예전의 사람들은 당신들의 속마음을, 그 진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는 서슴없이 그 속내들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3.2  냉소의 토착화

현재의 냉소주의가 시작된 것은 90년 사회주의 붕괴부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 냉소주의가 한국 땅에 고착화된 것은 IMF이후다. 공교롭게도 한국사회에서 냉소주의 전개되던 시기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던 민주정부 10년과 겹친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현 집권세력이다.
한국 현대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일종의 원죄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인권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분단의 문제, 정의의 문제 등등. 이러한 부채감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원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자본의 원칙에 충실하게 된다.
옛날에는 사회적으로 “돈, 돈, 돈” 그러는 사람을 천박하게 바라봤다. 설사, 마음속으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을 향한 우리의 탐욕을 거리낌없이,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우리사회는 꿈, 이상, 이념, 종교, 대학의 가치, 인간에 대한 예의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다 안다. 그런 것들이 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오직 시장의 논리만이 유일한 삶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다 알아버렸다. 이것이 저 냉소의 요체다.

3.3 이명박은 나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돈, 돈, 돈’만 외치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건이었고, 우리의 뻔뻔함과 우리의 파렴치함을 집단적으로 공유케 하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대통령이 되려면 어느 정도 자기희생이 있어야 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해,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선거 때마다 부산으로 달려갔고 예상대로 멋지게 낙선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 마저 박정희때 군부독재에 맞서 야당 총재시절 목숨을 걸고 단식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우리 국민들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일정부분의 자기 희생과 확고한 자기 철학을 대통령의 자질로 요구했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달랐다. 대선직전 BBK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유권자들의 표심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 민주, 통일, 정의, 인권, 자유…그런 이야기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과거 역사에 대한 살풀이를 했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탐욕과 욕망을 실현시켜 줄 정권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명박 이후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테네시 윌리암스가 말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공동으로 탑승했었다. 술에 취한 기관사가 운전하는 열차를 타고 고속주행을 하다 탈선한 형국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로 놀라워 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죄의식도 이제는 별로 느끼지 않는다. 이런 복원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니, 이런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에피소드: 세월(sewol)호에 갇힌 대한민국을 위한 레퀴엠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랑 가끔 소식을 전하거나 전화할 기회가 있다. 지금은 덜하지만 CNN에서도 한동안 세월호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친구들이 세월호를 발음할 때 ‘쎄울’로 발음을 할 때가 있다. 서울과 발음이 비슷하게 들린다. 미국 친구들의 어눌한 세월호 발음이 공교롭게도 서울로 들리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상징적 의미로 다가왔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서울의 침몰을 의미하고, 서울은 침몰은 결국 대한민국의 침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침몰이 이루어졌던 시기가 고난주간이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부활을 2014년 부활절에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 또한,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을 향한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詩가 사라졌다고 했는데, 포스트 세월호 이후 우리는 무엇을 잃어야 할까? 우리는 삶과 인간을, 세상을, 그리고 신을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시대는 아마도 오랫동안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사는 수 밖에.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도구이고 애도의 방식이다.

 

ⓒ 웹진 <제3시대>

 

 

  1. 굳이 번역하자면 “세월호 전에 우리는…”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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