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평화와 안보를 위한 기독교인의 발걸음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미국의 여성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의 책 ‘진정한 평화, 진정한 안보Real Peace, Real Security: The Challenges of Global Citizenship (Fortress Press, 2008)’는 평화에 관한 다양한 이론과 실천을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웰치는 특정 국가에 속한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계 시민인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종교적, 윤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제 사회가 인류에 대한 범죄를 막거나 벌할 수 있을까 (1)”라는 신학적, 윤리적 화두로, 이 작지만 힘있는 책의 서문을 연다. 쉬운 화두가 아니다. 특히 이 화두는 단순히 지적인 활동으로써의 평화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사색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 생각의 변화, 그리고 영성의 변화와 함께, 타성에 젖어 생각해 왔던 종교의 가르침과 하느님에 대한 생각까지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란, 넓게 보면 인간에 대한 폭력이고, 구체적으로 보면, 전쟁과 인종 학살, 집단적 성폭행이나 군위안부 같은 전쟁 범죄를 가르킨다. 구체적인 전쟁 범죄들은 인간의 폭력성이 환경에 따라 집단화, 광폭화되어 나타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집단적 폭력성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들 또한 해결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또한 아니다. 웰치는 이 제3의 길이, “우리 인간이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비심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공감력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란 사실을 묵상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2).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 잔인함의 DNA를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선과 악을 구별하거나,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충분히 선을 선택하고, 선을 만들어갈 능력이 있는 존재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약자와 타인에 대한 폭력과 잔인함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착각에서 시작된다. 제3의 길의 여정은, 아군을 절대선으로 포장하고, 적군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를 진리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구조적인 폭력과 인류에 대한 폭력적 범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100).


    웰치는 국제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세가지 노력을 소개한다: 평화 유지 (peacekeeping), 평화 만들기 (peacemaking), 평화 건설 (peacebuilding)이다 (8). 평화 유지는 인종청소나 대규모 전쟁에 국제 사회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인류에 대한 폭력 범죄를 막는 것이다. 평화만들기는 전쟁이나 분쟁에 개입된 두 국가나 집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평화조약이나 협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여기서 UN이나, 미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중재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평화건설은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진행중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사회구조, 즉 무력분쟁, 경제적 착취, 그리고 정치적 소외계층 등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을 담고 있다.


   평화유지, 평화 만들기, 평화 건설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주로 UN 평화 유지군이 개입하는 “평화 유지 (peacekeeping)”는 강대국의 이익이나, 분쟁 주변국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분쟁 초기 개입이 늦어져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 전쟁이나, 르완다 학살, 수단 다푸르의 인종청소, 시리아 전쟁은 모두 초기 개입이 늦어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특히 현대전은 내전이나 시민전이 아니라, 다국의 이익이 개입된 국제전임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일어 나고 있는 지역의 국가 자주성을 이유로, 국제사회는 초기 개입을 꺼린다.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을 위한 윤리적 가이드 라인은 R2P로 알려진 “Responsibility to Protect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무)”이다. 대량 학살이나, 대규모의 전쟁이 임박했을 때,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최소화하거나 막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지역의 정부가 개입을 반대하거나, 인종 청소나 대량 살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때, 국제 사회의 개입은 어렵다. 또한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은 서구 국가들의 신식민주의와 윤리적 우월감의 남용이란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더불어 기아와 인종차별, 종교적 박해, 성차별 등등 서서히 진행되는 학살적 폭력을 막는 국제 사회의 물리적 개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평화 유지는 분쟁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물리적 분쟁을 일시적으로 막아서 분쟁 당사자들이 대화하고, 장기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40).

  
   21세기에 들어 평화 만들기는 단순히 국가간의 평화 협정 뿐만 아니라, Track 2 Diplomacy (민간 외교)로 알려진, 다양한 시민, 종교 단체 간의 평화 운동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시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류는, 문화적 이해와 종교의 다양성에 관한 이해, 서로의 고통에 대한 진실성 있는 공감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평화 협정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각 국의 정부 지도자들이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한 민간 외교는 여러면에서 정치적 구속력을 갖기가 힘들다. 비근한 예로, 한-일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10억엔 배상은, 두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여 정치적 구속력을 갖게 된 비윤리적 행위이다. 한-일 민간 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이 그동안 원폭피해와 군위안부 문제 등을 포함하여,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묻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온 역사를 철저히 무시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한-일 협정이 의식있는 많은 시민 단체를 결속시켜, 반대 운동을 전개시키게 만든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민간 외교를 무시하고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평화 건설은 장기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평화실천 운동이다. 사회 불평등과 불만 등,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미리 알아채고, 해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비폭력적 방법으로 분쟁에 대항하는 사회적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목과 분열 관계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과 국제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변화 시키려는 제도적 장치와 실천이 요구되며, 과거의 실패를 분석하여 새로운 전략과 실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평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평화 운동을 시작하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공동체 형성이 크게 도움이 된다. 평화란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가 실현된 사회, 분쟁이 폭력이 아닌 대화와 비폭력으로 해결되는 사회를 의미하며, 그러한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평화 운동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실천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여러가지 사회/평화 운동들을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종교들이 축적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지혜, 인내와 함께 적극적으로 용감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 그리고 구조적 폭력과 전쟁에 고통받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덕목이 평화를 위한 제3의 길을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이 제3의 길은 또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의 (self-righteousness)”에서 해방되고, 적군이나 힘을 가진 억압자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회적 갈등과 반목, 국제 사회의 폭력 행위와 전쟁 등을 보며, 웰치의 책이 갖는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사드 (THAAD)배치에 비폭력적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성주 군민들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반대 운동 때에도,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 때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때에도, 세월호 진실 규명 운동 때에도 던졌던 질문이다. 우선 웰치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만을 놓고 보았을 때, 한국 정부와 미국의 결정은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 세계 평화에 위해를 가할 비윤리적인 결정이다. 왜냐하면 북한을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오만함,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과 사회 불만을 어설프게 숨김과 동시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세계 패권주의와 우월감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는 국제 사회에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 러시아의 불만을 고조시켜,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만들려는 세계 시민들의 노력을 억압하고 있다. 북한이 일으키는 공포감이 적극적인 비폭력 운동을 통해,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희망보다 더 큰 것일까? 더구나, 사드 배치를 통해 고통받을 사람들과 계속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세계 민중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려는 평화의 정치보다, 군사 무기를 통해 이루려는 평화가 더 값진 것일까?


    사드는 미국의 록히드 마틴 (Lockheed Martin)사가 개발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다. USA Today에 의하면 록히드 마틴은 2011년에만 약46.5 억 달러 어치의 무기를 전세계에 팔아치운,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고 있는 무기회사다.[각주:1] 모든 전쟁은 자본가들의 이익이 걸린 사업이다. 미국의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 (Smedley Butler)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미 1932년에 “전쟁은 사기다 (War Is a Racket)라는 책을 통해, 미국이 관여한 모든 전쟁이 소수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사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 사기는 소위 말하는 소수의 내부자들이 공모하고, 각본을 짜서,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상영하는 사기극이라, 외부자들은 그 전말을 알기가 힘들다. 사드는 누구를 위한 평화이며, 누구를 위한 안보일까? 기독교에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은, 소수의 내부자들이 주장하는 평화와 안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외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 운동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의에서 벗어나고, 사드 배치와 같은 결정을 한 정치 지도자들까지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듬으려는 노력까지도 포함한다. 웰치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평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으로써,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서울 시청 광장에서 만난 많은 일반 시민들과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 군민들은, 정부의 결정을 규탄하지만, 그 결정을 한 정치가들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치인들이나 경찰, 주요 언론사들은 이들 시민 운동가들을 ‘빨갱이들’, ‘전문 시위꾼들’, ‘북한 동조세력들’로 부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집시법 위반으로 벌금을 물리는 것을 본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광야에서 ‘회개하라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자기비판과 성찰을 하라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해도, 예수를 죽여도, 광야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지난 2000년 동안 끊어지지 않은 것이, 평화와 정의를 향한 기독교의 지혜이고, 힘이고, 열망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satoday.com/story/money/business/2013/03/10/10-companies-profiting-most-from-war/19709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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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가라![각주:1]

: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 소고(小考)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Intro: 메시아의 귀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안으로 귀환하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아적 대망은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위안이자 미래를 대망하는 종교적 비젼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녀)의 재림으로 인해 체제의 압제로부터 비롯되는 이 땅에서의 고통과 억울함, 분노와 절망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이것이 메시아주의를 바라보는 범박한 정의이자 주술이라고 한다면 불손한 발언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메시아주의의 현실은 배제와 차별, 적대와 응징의 매카니즘을 양산하면서 비극적 메시아 현상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역사가운데 전개되었던 메시아적인 열망과 환상은 그것 이외의 것들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낳았고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멀게는 중세 십자군 원정과 근세에 벌어졌던 서구 열강들의 제3세계 침탈 과정에서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테러와의 전쟁’까지, 시대와 이유를 떠나서 그 이면에는 서구열강의 음모를 메시아적 환상으로 등치시키고 그것들 이외의 것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매카니즘이 깔려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 안에 깃든 광신성을 감지했던 데리다는 ‘the meesianic without messianism’이라는 다소 과한 표현을 동원하면서 전통적 메시아주의를 향한 적대를 선언한 바 있다.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메시아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서구 메시아론의 지형에서 보면 그 위상이 꽤나 독특하다. 역사적 예수가 성취했던 유일회적 그리스도 사건을 예수라는 어느 한 슈퍼스타의 일인 무용담으로 가두지 않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한 민중(오클로스)까지를 포함한 사건으로 취급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화석화된 메시아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까지 민중의 함성과 저항을 통해 이어지는 살아있는 메시아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이유로 민중신학의 메시아론은 주체의 역동과 시대적 사명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진보기독교 진영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 몸담고 있었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당대를 해석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광풍이 몰아친 이후 주체의 죽음이 선언되고, 시대의 요구와 당대의 원칙이 대의와 명분에서 실리와 자본으로 바뀌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민중신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이론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자본의 무한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001년 9.11 테러를 통해서,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치면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노출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모순들, 즉 체제는 숨기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틈과 균열이 더 이상 은폐가 안 되고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움츠려 있었던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변혁에 대한 꿈을 다시한번 상상하게 하고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맑스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교 논쟁이 근래에 핫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빨갱이들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변혁을 위한 상상을 끌어오고 있는 셈인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논의 주제가 메시아라는 점이다. 왜, 무엇 때문에 다시 메시아는 소환되는가? 이 글은 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어떻게 신학적 상상력과 조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고(手鼓)이다.  


서로 다른 메시아: 유대교 메시아 Vs. 개신교 메시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유대교 메시아론과 개신교의 메시아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유대계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개신교의 메시아주의에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지만,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초월적 질서의 도래가 현실의 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대 메시아주의는 개신교 메시아 주의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개신교가 구원을 믿음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한다면,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유대 메시아론에서 메시아는 그(녀)의 도래를 염원하는 인간의 바람, 노력, 분투와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 자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유대교 사상가인 발터벤야민과 자크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의 조상, 발터 벤야민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서 말하는 강한 메시아가 아니라 약한 메시아를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기념비적 논문 <역사철학테제>에 등장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이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 끔하는 통로로 작용하지만 기존의 메시아론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 않다.


<역사철학테제>가 전하는 새로운 메시아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각주:2]고 말이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한다. 전통적 유대사상에서는 현실의 압제를 풀어줄 슈퍼스타의 등장을 대망해왔는데 그(녀)에 대한 기표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누구이고, 그는 언제 등장하며, 메시아가 등장한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동안 전개되어왔던 주된 메시아론의 토픽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의 핵심은 기존의 메시아론의 시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전통적인 메시아관과는 다르게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각주:3]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각주:4]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전통적인 변증법과 다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각주:5]이라 표현하였다.  

    어쩌면 메시아적 현실은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서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것 아닐까? 벤야민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런지?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조각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의 퍼즐로 이루어진 것이 메시아적 사건이다. 어느 천재적 화가의 단 한번의 붓질로 미래의 언젠가에 완성되는 그림이 메시아적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파편들이 모이고 자리를 잡고 쌓여서 희미했던 메시아적 힘은 마침내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벤야민의 메시아론에 깃들어 있는 함의다.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


    자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메시아를 둘러싼 문제의식으로부터 본인 사상의 후기를 대표하는 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6] 을 끌어온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론을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관부터가 종전 메시아론과 다르다. 데리다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적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질서와‘시간이 탈구될 것(time is out of the joint)’이라고 예언하였다.[각주:7] 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변증법적 시간관과 더 나아가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한 역사발전의 원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데리다가 취했기 때문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예: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예: 새하늘 새땅)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 속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낙관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시간은 탈구될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했던 것일까?  

    데리다가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시간이 탈구’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메시아주의로 대표되는 신학적 도그마와 교리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황홀경도 아니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고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이고,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교리와 도그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움을 겨냥한다. 전통적인 강한 메시아론이 기실 헤겔적인 변증법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데리다에게서 ‘메시아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는 진공의 상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변증법을 조롱하다 뒤돌아서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기표가 차연을 통해서 영원히 지연되는 의미의 껍데기만을 지속적으로 산출해내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메시아란 하나의 기표일뿐이고, 이 지점에서 일어난 ‘메시아적인 것’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꽉 찬 중심을 지향하는 강한 메시아주의(messianism)와는 다른 개념이다. 메시아주의(messianism)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가?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the messianic’을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보다 더 정치적 속셈이 있다. 텅 빈 기표로서 ‘메시아적인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스템속에서 틈과 균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고, 그 틈과 균열을 통해 도래하는 사건과 희망을 예감하고 전망하자는 취지다. 이 대목에서 ‘메시아적인 것’은 위험한 정치적, 윤리적 상상으로 전환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학, 혹은 윤리학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다. 특별히 차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광명한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은 드세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수평적 다양성이 혁명에 이르는 수직적 적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사이비 저항을 멈추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의 차연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차이 자체에는 방점이 없다. 차연은 엄격히 말해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은 불확정성, 비대칭성, 비등가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데리다는 후에 ‘차연’을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라는 용어로 정치-신학화 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그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속에서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유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일까?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이 견고한 텍스트에 차이를 발생시켜 균열을 내고, 주름을 만들고, 틈을 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메시아적인 것’ 안에 담긴 정치적 음모가 아닐까?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불순세력에 의한 공작이 이 사회속 어딘가에서 획책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안에 깃들어있는 정치적 음모이고 윤리적 강령이라 한다면?  

   그러므로,‘메시아적인 것’은 신에 대한 경외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고백과 성찰에서 기인한 말도 아니다. 오히려 신은 텅 빈 기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초월적 메시아가 스스로를 비워 이 땅으로 하강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신은 충만과 충족의 신이라기보다는 결핍과 잉여로서의 신이다. 텅 비어 있는 신 자체를 세계에 집어넣음으로써, 구멍 자체인 신을 기입함으로 세계는, 그리고 상징적 질서인 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이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이 노리는 계략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혁명은 다시 사유되고 시작된다.  


ⓒ 웹진 <제3시대>



  1. 본고는 에큐메니안에 기고한 기사 '메시아는 가라!'의 원고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87 [본문으로]
  2.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53. [본문으로]
  3. 벤야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Ibid., 254. [본문으로]
  4. “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Ibid., 261. [본문으로]
  5. Ibid., 261. [본문으로]
  6.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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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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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를 쓰는 수도사
    2016.08.24 20: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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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있고 재미있는 설명과 해석입니다. 발터 벤야빈과 자크 데리다의 차이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체제로서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신, 하나님은 진작부터 공기같은 존재로 여겨졌지요. 때문에 저는 메시아론을 검토함에 있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개신교의 차이라고만 규정하기에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런 차이는 구태여 구분하자면 묵시론과 종말론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뭐 어쨌거나 벤야민이나 데리다나 인격적인 또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메시아론에는 반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오늘날 금융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개신교와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이른바 메시아닉 유태인들 messianic jews 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적어도 미국에서 이를테면 성서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개신교와 공조해왔다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벤야민이나 데리다가 이런 현실을 직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메시아적 틈새가 과연 어떤 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이 특별하다고 보십니까? 님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의 메시아는 정치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집단적 기대치라고 말할 수 있고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은 도리어 정치적 개념을 탈각시킨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치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과 개인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예수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메시아는 현존하는 모든 인간의 질서 즉 지배를 추구하는 체제에 반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이 지구에 항존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그게 완성되는 시점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파국이지요. 그때까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인간의 행위도 계속되겠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복잡해지겠지요.

    메시아에 대한 전제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최종국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 전체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메시아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오는 그 나라는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이 틀린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이 틀린 것입니다.


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과학과 그 너머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베르그송의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의지』를 읽을 마음이 생겼다. 몇 년 전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으로 한글로 새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영어번역본인 Time and Free Will 에는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가 부제로 달렸다. 영어번역본은 베르그송이 한창 활동하고 있던 1910년에 나왔다. 원저는 1888년에 출판되었으니 상당히 빨리 번역된 셈이다. 윌리엄 제임스 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베르그송의 테제는 ‘의식의 흐름이 구체적인 경험이라면, 시간을 양화(量化)하는 당대의 철학은 그것을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없다면, 근대 과학에 구현된 연장(extension)의 방법으로 현상을 해명하는 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근대 과학은 상식과 동조하여 의식의 현상들을 마치 연장인 것처럼 다룬다. 시간은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작업은 다음 물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은 공간인가? 그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의식 현상들에 적합한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당대에 사상계에 나타난 가장 큰 충격의 하나는 『종의 기원』의 출간이었다. 더 광범한 맥락에서 본다면, 19세기 중반에 과학의 심대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근대 과학이 19세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는 화이트헤드 등의 통찰이 맞는다면,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이 헤게모니는 다방면에서 흔들렸다. 위기의 시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패러다임은 현저하게 교조적인 특성을 갖는다. 차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패러다임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심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단순히 과학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의 위기와 전체 사회의 위기는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동안 삶을 고정하던 상징 세계의 위기는 합리적인 해결을 향하지 않고서 파국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베르그송은 19세기 중반에 공부하면서 당시 주도적인 방법에 천착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H. 스펜서의 사유에서 당대의 주도적인 방법의 현신을 보았다. 이 방법은 보통 “실증주의”로 불린다. 실증주의는 근대과학의 독단적인 표현이다. 콩트와 스펜서의 실증주의와 페히너의 심리물리학과 경험론에 터하는 연상주의(associationism) 등은 가족유사성을 갖는다. 보통 소박한 경험론으로 한데 묶인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관심의 하나이다. 이미 칸트는 강력한 경험론의 비판을 제시한다. 많은 면에서 칸트는 이후 철학을 지배한다. 베르그송이 칸트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칸트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누구의 철학을 비판한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에 기대어, 누구의 사유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부차적이다. 경험과 현상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순수’ 경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방법과 이론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직관을 통한 순수 경험의 획득이 가능하다면, 이 경험은 현존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일종의 비판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포퍼 등의 진화론적인 인식론은 이 가능성에 정초된다. 그가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아무튼 경험이 이미 있다고 하자. 이 경험은 방법의 참과 거짓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경험의 풍부함이라는 착상을 생각해 보자. 풍부하다면, 어떤 방법이 이 풍부함을 제대로 포착하는가? 

    이 책에서 베르그송이 집중하는 것은 의식 현상들이다. 의식 현상들의 학은 가능한가? 베르그송은 프로이트와 같은 주제를 천착한다. 19세기에 정신 현상 내지는 감정들 등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이미 로크와 흄에 의하여 일종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라캉은 어떤 곳에서 근대 학의 승리는 측정(measure)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측정이라는 이상. 이 방법의 특징은 모든 주관성의 요소를 지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과학 이전에도 공간의 측정이 있었고 시간의 측정이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측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세기에 서학이 동양에 전래될 때 그 형이상학은 거부되곤 했지만 달력은 매우 진지하게 검토되고 수용되었다. 그런데 달력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의 측면이 아니라 공간으로 환원된 양화된 시간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잠시 소설을 언급한다. 물론 자기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이 반드시 반(反)-과학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이 기대면, 우리는 기술 자체가 갖는 한계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베르그송은 내적 통찰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심층을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내면성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내면성을 다른 사람과 교통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 내지는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용은 곧 내면 상태를 공간화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에 종사하는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가 문제된다.

   한국에서 스펙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끈다. 스펙이라는 단어는 원래 공산품의 특징을 기술하는 용어가 아닌가? 이 스펙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라는 시장에서 매력 있는 상품으로 사람이 전화되는 극단을 표현한다. 그 단어에 대해 구토를 느끼는 대신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인한다. 베르그송이 제시하는 사유를 통하여 이를 해석한다면, 사람으로-있음의 자본주의적인 양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양화의 도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사유를 예수의 언명과 관련하여 고찰할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물론 말씀이 환기되는 순간 베르그송은 말할 것이다. 말씀마저도 양화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말 또는 언어는 절대적인 지평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말없이 사는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말이야말로 사람으로-있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말은 이미 획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으로-있음에서 변모하는 것이라고. 베르그송이 책의 한 대목에서 소설을 다루면서 표현하는 난점들을 기억한다. 내적 상태를 양화하지 않고서 기술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시. 또는 그림과 음악.

   1888년에 베르그송은 이 책을 출판했다. 그는 1859년생이니 서른이 되던 때였다. 그의 나이에 견주면 나는 십 수 년을 더 살았다. 세상에 내어 놓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공인된’ 자리 하나 잡지 못한 채 늘 막연한 고민에 시달리는 처지이다. 나는 이 세계적인 철학자 앞에서 부끄럽다.

   그런데 문득 이 부끄러움은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참된 자기(self)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ego)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사람에게 있다면 그것은 양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사회적이고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ego)와 관련하여 사람은 비교된다. 비교된다는 말은 측정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일정한 키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키가 사람으로-있음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문득 키를 아주 세밀하게 측정할 것이다. 키에 따라서 차등하게 자원을 분배하는 세계를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분명 당혹스럽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의 한 사유의 입장에서 사람으로-있음의 값을 매기는 모든 일은 궁극에 있어서 키에 따라 사람을 일렬로 배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이것은 현실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람으로-있음은 그렇게 양화할 수 없는 차원을 갖는다. 양화할 수 없는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평등하다. 양화할 수 없는 것을 배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점에서 현대의 문제는 양화할 수 없는 것을 양화하는 매우 섬세한 방법을 개발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화할 수 없는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유는 매우 심대한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을 갖는다. 다시 나의 부끄러움으로 되돌아가면, 나의 자아 또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양화를 극복하고서 참 나(self)와 ‘더불어’ 자족하는 경지를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 경지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 자족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일은 다시 자기를 양화의 세계로 이끈다. 정말로 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머물면 무슨 유익이? 나는 그렇게 묻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양화하는 어떤 정신의 강고함을 느낀다.

   요컨대 베르그송의 자기는 지속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다. 그러면 지속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가능한가? 지속은 오직 부정적으로 포착되는 것이지 않을까? 정말로 긍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앞서 예술을 거론하였다. 과학은 양화의 기술로 남아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화합이라는 면이 거론될 수 있다. 과학이 문제되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독단 때문이다. 과학이 만능이라고 착각할 때, 베르그송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삶의 영역은 축소되고 왜곡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삶의 완전한 지속에 대한 헌신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다. 삶은 어떤 면에서도 불완전하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영역들을 완전히 한쪽으로 환원하지 않고서 어떤 중도를 발견하는 ‘지혜’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이 자기와 자아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첨언한다. 자기는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자아는 자기가 공간화 또는 양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양화된 것은 측정될 수 있으며, 이 영역이 심대하게 양화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대 사회는 자아의 양화를 매개로 한 착취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면 양화되고, 양화는 총체성(totality)을 지향한다. 만약 철학이 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학 내지 지식은 언제나 양화의 문제일 것이다. 더 섬세하고 말랑말랑한 양화가 있겠다. 그래서 학에 맞서는 것으로 비(非)-학이 있겠는데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문학과 예술은 사람으로-있음의 복잡한 지속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타락과 위축은 베르그송적인 시각에서 현대가 직면한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있어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중에 그가 기억에 관한 책을 쓴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현상이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현재의 순간을 산다고 하자. 그런데 비유한다면 사람은 한 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공간이랄 수 없지만, 공간의 비유를 빌 수밖에는 덩어리로 산다고 해야 할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주체성은 출생 이전에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또는 유전자의 형태로 주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많은 의문이 든다.

   나는 주체성이 출현한다고 보는 편이다. 주체성은 경험적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환경은 같을 수 없고, 유전자도 같을 수 없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삶은 출발한다. 유전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온갖 가능성들의 집합이고, 환경은 온갖 우연의 집합이다. 이 둘의 결합과 더불어 삶은 시작된다. 불현듯 시작된다. 우리는 말 이전에 정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할 방도가 없다. 동물에게 의식이 있는가 하는 점이 아직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듯이. 이것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소통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또한 오직 말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無)라는 말인가? 무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소통되기 위해서는 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아직 말이 없는 시절에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말의 너머에 존재하는 그 세계를 아이의 세계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 너머의 세계마저도 말이 있고나서야 존재하지 않을까?

   이 글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와서는 일기장에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은 것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그와의 만남은 나를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와의 만남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그 만남은 나라는 기존의 사람으로-있음에 오직 피상적인 흔적만 남길 것이다. 자유의 실현이 없는 반복과 리듬이 부각된다. 극도로 미세한 관찰에 의하면, 여기에도 변화와 창조가 있기는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만남은 과거-현재의 연속체와는 매우 다른 자기, 즉 사람으로-있음을 창조하거나 구성하기도 한다. 이런 자기창조의 가능성 때문에, 사람으로-있음의 해명은 과학 내지는 지식의 방법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내적인 의식 현상들을 양화하는 일은 사회생활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있음을 온전히 해명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과학의 너머를 지시한다. 너머에서. 물론 과학이 자신의 너머를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반드시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베르그송의 첫 저작에서 그가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과학에 맞서는 또는 나란히 존재하는 지속의 세계를 강조한다. 베르그송의 책을 읽고서 사람으로-있음, 너머와 자유, 창조에 대해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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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첫 번째[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웰빙-우파'


    이것은 한국사회의 웰빙-우파에 관한 이야기다. ‘웰빙-우파’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보수주의의 한 양상을 크로키(croquis)하게 스케치한 나의 용어다. 즉 그 사회적 현상을 빠르게 포착하여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강한 반공주의 성향과 성장지상주의가 결합된 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회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그러한 체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무너지고 사회는 다양한 실험 상황에 놓이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문화 영역에서의 창조적 도전들이 속출했다. 그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중상위계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웰빙’이다. 이것은 먹거리를 필두로 삶의 다층적인 영역에서 빠르게 확산된 문화적 고품격화(gentrification) 현상이다. 특히 중상위계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러한 고품격화를 나는 중상위계층적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of middle/upper class)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웰빙 현상은 1990년대 이후 격화된 ‘보수 대 진보’의 갈등과 엮이곤 하였다. 하여 웰빙 현상을 단순 양분하면 ‘웰빙-우파’와 ‘웰빙-좌파’ 현상으로 나뉜다. 그중 내가 주목하는 것은 웰빙-우파다.


대형교회와 보수주의


    미국적 개념인 ‘메가처치’(mega-church)는 단순히 양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교인의 숫자가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킨다. 최근에는 1만 명 이상의 교회들이 많아지면서 ‘기가처치’(giga-church)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한국에는 대략 880여개의 개신교 메가처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만으로 한국교회의 특징을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해서 ‘강남대형교회’와 ‘강북대형교회’, ‘중산층 대형교회’와 ‘혼합계층 대형교회’ 같은 공간적 범주로 대형교회를 나누거나,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 같은 시간적 범주로 분류하곤 했다.

    이러한 분류법은 모두 비슷한 현상을 다르게 포착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탄생은 두 범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1950년대 월남자교회인 영락교회를 필두로 해서 1990년 어간까지, 그러니까 한국 사회와 개신교가 공히 초고속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등장한 대형교회들(A)과, 1990년 어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한국 사회와 교회가 공히 저성장 혹은 역성장 상황에 있던 시기에 성장한 대형교회들(B)이 그것이다.

    (A)는 서울에서 훨씬 많았지만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적지 아니 등장했다. 이때 서울의 경우는 당연히 강북 지역에 몰려 있다. 당시까지 한강 이남이란 여의도와 영등포 지역에 불과했다. 그리고 교인들의 계층 분포도 시골에서 이주한 도시빈민들에서부터 도시중상위층까지 다양했다.

    (B)는 서울의 강남지역(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지역)과 강동지역, 그리고 분당에서 집중적으로 탄생한다. 이 지역들은 땅값이 빠른 속도로 상승한 곳이고 젊은 중상위계층이 집중적으로 이주한 곳이다. 물론 강북지역이나 일산, 산본, 부천 같은 다른 신도시들에도 대형교회들이 등장했지만, 그 숫자는 강남, 강동, 분당에 비해 매우 적었다.

    한편 대형교회들은, 범주를 어떻게 나누든,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이다. 그것은 한국개신교의 성장 과정에서 근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거의 모든 교회들의 신앙의 모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란 현실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보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현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대신 근본 원리에로 돌아가려는 신앙운동이다. 한데 한국개신교가 신봉했던 근본 원리란 미국개신교 근본주의의 가치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의 근본주의는 일종의 ‘친미적 식민주의’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반공국가 건설에 깊이 개입하면서 한국개신교에는 반공국가체제를 수호하는 보수주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 대형교회’, 웰빙-우파의 문화공간(champ, field)


    서울의 강남 지역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1970~80년대부터이고, 1990년대에 이르면 이 지역은 한국근대화를 상징하는 중심지역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2천 년대에 이르면 중심지역이 강동과 분당 지역으로 확장된다.

    1970~80년대에 강남으로 이주할 당시 나이가 10~20대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1990년대에는 30~40대가 되고 2010년대에는 50~60대가 된다. 그러니까 1990년대에 그들은 핵가족의 중심 역할을 하는 세대이자 직장에서 현장업무를 책임지는 이들로 부상하고, 201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층이 된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한국사회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1차 베이비붐 세대다. 바로 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강남의 중상위계층이, 앞에서 말한, 웰빙 현상의 주역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 시기, 즉 1990년 어간 이후에 강남, 강동, 분당 등에서 집중적으로 대두한 대형교회를 주목해보자. 이들 대형교회들이 강남지역에서 창립하거나 다른 데서 이곳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1970년대 말 이후다. 그러니까 2010년대가 되기까지 이 세대는 길게는 30~40년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여러 공식・비공식 행사들 속에서 서로 얽혀 왔다. 이른바 ‘신실한 신자’의 경우 최소한 주1회 이상의 만남을 몇십년 동안 나눈 이들이다. 그러니 이 지역의 대형교회들을 ‘그 대형교회’들이라고 한다면, ‘그 대형교회’들에서 신앙을 매개로 하는 삶의 스타일로서 웰빙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 대형교회’들의 웰빙신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웰빙’ 현상에는 웰빙-좌파도 있고 웰빙-우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대형교회’들에서 웰빙신앙은 어떤 이념 성향을 지닐까? 한국의 교회들의 신앙의 근간이 보수주의적이니 만큼 웰빙신앙도 우파적 성향을 지녔을 것이겠다.

    한데 웰빙적 삶의 양식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형성되는 현장을 ‘웰빙 문화공간’이라고 한다면, 대형교회만큼 자주, 그리고 장기간 지속적으로 웰빙적 일상이 교차하는 문화공간이 또 있을까.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웰빙적 문화공간은 다름 아닌 ‘그 대형교회’들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그 대형교회’들의 웰빙적 문화공간은 우파적이다. 이 연재는 바로 그것을 탐사할 것이다.


‘웰빙-우파’에서 ‘계몽적 보수주의’로


    지난 4.13 총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결과의 하나는 ‘중간범주의 등장’이다. 1990년대 이후 격화된 보수-진보의 갈등이 정치영역에서 양당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어왔는데 시민들의 투표는 그것에 저항했다. 양당 모두 심하게 교란되었고 특히 거대 여당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새누리당에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결과가, 그 왼편과 오른편 정치세력의 강화가 아닌, 중간범주의 뚜렷한 대두였다.

    중간범주가 정치세력으로 중요하게 부상한 첫 번째 사례는 아마도 2007년 대선 무렵이었다. 당시 보수 영역에는 ‘선진화’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고, 진보 영역에는 ‘문국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또 2012년에는 우파 영역에서 경제민주화 카드가 큰 힘을 펼쳤다. 하지만 이 시도들은 보수주의 정권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약진한 중간범주의 정치운동은, 보수-진보의 의제에 흡수되지 않는, 독자적 의제를 부각시켰다. 그것은 기성 정치세력의 부패를 꾸짖는 ‘도덕적 의제’다. 심지어 기성 정치세력이 보수-진보의 의제보다 중간범주적인 도덕 프레임에 흡수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중간범주적 차원의 ‘정치의 도덕화’를 일종의 ‘정치의 웰빙화’ 현상으로 해석한다. 즉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웰빙 현상이 문화적 생활양식(아비투스)으로 빠르게 정착해왔는데, 그것이 최근 뚜렷이 정치 영역에서도 안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웰빙이라는 문화적 양식은 다분히 ‘쿨’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는데 정치의 웰빙화는 ‘쿨’하기보다는 ‘계몽적’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적인 웰빙-우파’가 ‘정치적인 계몽적 보수주의’로 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13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은 약진했지만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당초에 다섯 석을 예상했고 선거 당일 출구조사발표에서도 두 석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약진했다고 함은, 이제까지 기독정당들이 얻었던 표보다는 좀더 많은 지지를 받았고, 또 다른 기독정당인 기독민주당이 얻은 표와 산술적으로 합산하면 비례대표 한 석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문제는 확장 가능성이 거의 안 보이는 ‘약진’이라는 데 있다. 왜냐면 기독자유당이 내걸은 아젠다가 가장 잘 먹힐 것으로 기대한 지역에서는 득표율이 매우 낮은 반면, 득표율이 높은 지역은 새누리당 이탈자 중 개신교 신자 일부가 이동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몇몇 대형교회들의 목사와 장로들이 기독자유당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이다. 특히 수도권의 유력한 교계 지도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교인들 대다수는 목사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지적이든 매우 높은 수준의 엘리트 교인들이 새누리당보다 훨씬 더 극우적인 기독자유당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들 중 다수는 극우적이라기보다는 중도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증오의 정치보다는 관용의 정치를 선호했고, ‘적’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이념 마케팅보다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실용적 마케팅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이 과거 2007년 대선 때엔 MB를 지지하는 바이블 벨트에 결속되었고, 2012년에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선거연합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선 그 대열에서 이탈했을 뿐 아니라 중간범주의 정치세력을 등장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대형교회적 웰빙보수주의 혹은 계몽적 보수주의는 중간범주의 정치를 어떻게 제도화하게 될까? 이 연재가 묻고자 하는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첫번째 글로, [주간경향]에는 <대형교회는 강력한 웰빙 문화공간이다>(1183호. 2016. 07. 05)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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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평 1 : 양육 너머의 문제들



신윤주*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병적 사랑과 새로운 삶을 위한 급진적 자기 포기로서 죽음 사이에 선명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한 알카에다 대원은 "부당한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너희가 삶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의 선언 앞에서 죽음충동과 정치적 전략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각주:1]

-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  


 

    지난 7월 26일, 프랑스 북부의 생테티엔 뒤 루브래 성당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가 자행되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인 두 청소년이 공모한 테러였다. 이들은 오전 미사를 집례중이던 자크 아멜(84) 신부의 목에 자상을 입혀 살해했고 세 명의 수녀와 한 노부부를 인질로 잡았다. 신고를 한 것은 잡혀있던 인질 중 탈출한 어느 수녀였다. 이후 두 청소년은 당국에 의해 사살되었다. 공모한 청소년 중 아델 케르미슈Adel Kermiche는 지난 2015년에 시리아에 있는 극단주의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시도하다가 구류되었다가 풀려나면서 보호관찰 하에 전자발찌를 하고 있었고, 반면 동부 프랑스 출신의 공범, 압델-말릭 쁘띠장Abdel-Malik Petitjean의 경우는 관련한 특이사항이 없다. IS의 대표적 선전 매체로 알려진 아마크 통신은 두 청소년이 IS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내용의 증거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NBC 뉴스는 이 사건이 IS에 의해 구체적으로 지시된 정황은 없다고 보도했다. 쁘띠장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IS에 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각주:2]

    그리고 약 17년 전인 1999년 4월 20일, 미국의 콜로라도 주의 한 도시인 리틀턴에서 일면 유사점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각주:3] 마찬가지로 두 명의 청소년이 공모한 이 사건은 이후 모방 범죄의 모델이 되어 더욱 문제가 되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격 사건이다. 콜럼바인 사건을 다소 상세하게 정리해놓은 위키피디아 페이지에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대량살상"[각주:4] 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계획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총기 외에도 폭탄으로 사용할 프로판 가스통, 아흡아홉 개의 폭발 장치, 자동차에 설치한 폭발물의 사용을 시도했으며, 결과적으로 총기를 사용하여 열두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를 사살했고 스무 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두 명의 사망자가 있다. 바로 이 사건의 두 공모자, 18세의 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17세의 딜런 클리볼드Dylan Klebold이다. 이들은 계획한 일을 마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해 2월,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는 콜럼바인 사건과 아들 딜런에 관하여 쓴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A Mother's Reckoning』(반비)라는 제목으로 지난 달에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각주:5] 출판사 서평에서 소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올해는 콜럼바인 사건이 일어난 해로부터 17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기간은 저자의 아들 딜런이 이 세상에 살았던 17년과 동수이기도 하다. 콜럼바인 이후 그날의 참혹한 비극을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고 믿었으나 결코 알 수 없었던 아들을 오롯이 헤아리기 위해 저자에게는 열일곱 해의 세월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세 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23)  


   우리는 아이들에게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 등을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자기 뇌의 건강을 잘 살피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기 뇌건강을 건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몰랐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후회는 딜런에게 그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442)


   위에 옮긴 첫 번째 인용문은 펴내는 글을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말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442쪽의 여정을 지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을 통해 해야만 했던 말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는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회한이 압축적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이 두 문단에는 어떤 '변화의 결과'와 '변화의 어려움'이 공존한다. 사건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딜런과 에릭의 가정을 의심했다. 딜런의 어머니인 저자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양육 방식을 의심하고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량살상을 계획한 이 청소년에 관한 책임을 단순히 특정 부모의 양육방식parenting에 돌리기에는 상당히 복잡 다단한 사회적 문제들이 한데 얽혀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학내 괴롭힘의 문제가 심각한 곳이었다. 약한 아이들은 운동부 학생들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육체적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스스로 도덕적 엘리트임을 내세운 복음주의 기독교 학생들은 일부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개종을 강요하곤 했다. 한 학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가 머리에 불을 붙이는 식으로 괴롭힘을 당해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복도에서 폭력적인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교사들은 못 본 척했다. 딜런의 경우에도 괴롭힘을 당했다는 정황들이 있는데 일례로 게이라는 조롱, 옷에 케첩을 뿌리는 일, 차를 찌그러트려 퓨즈박스를 망가트리는 일 등이었다.[각주:6]  


    학교 폭력 문제 외에도 총기류에 대한 노출의 문제가 콜럼바인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다양한 종류의 영상물과 비디오 게임을 통해 청소년들이 폭력적 장면과 자극에 노출되고 있는데,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만 13세 이상의 청소년들이 총기를 사용하는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는 경우가 30년 전에 비해 세 배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폭력적인 영상물에 대한 접근성이 바로 콜럼바인 사건과 같은 일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구매하는 비율 자체는 일본의 청소년 사이에서 더 높게 나타나지만 일본에서 대량살상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변인이 폭력에 대한 노출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량살상이 가능한 조건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내 학교에서 총기사사용건을 일으킨 학생들의 68퍼센트가 자신의 집이나 친척으로부터 총을 입수했다고 한다.[각주:7]  

    그러므로 콜럼바인 대량살상은 특정 지역사회 내에, 한 국가 안에, 현 시대의 문화 속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던 폭력성이 면밀히 상승효과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던 비극적 사건으로 조명해야 마땅하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역할은 수 클리볼드가 지적한 바,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속한 지역사회와 국가와 문화와 매체의 흐름에 주목하고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연대하고 노력함으로써 자녀들 개인으로서 가정 밖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정감 있게 실험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기 위하여 작은 참여와 실천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본문에서 치아 관리나 용돈 관리 등에 관한 것과 더불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사회적 연대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뇌의 건강"에 관한 관심이다. 저자는 아마도 딜런의 일차 양육자로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되었던 것인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던 수 클리볼드에게, 뇌과학은 그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길을 열어주었다. 수 클리볼드가 잃어버린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을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데 다른 어떤 조각보다 큰 역할을" 하는 어떤 하나의 조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뇌건강의 문제였다. 물론 뇌건강 문제가 "딜런이 한 행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폭력과 광기를 자동적으로 연결짓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도 않는다. 다만 정신질환과 폭력의 교집합이 발견되는 적은 비율, 4퍼센트의 경우에 딜런이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각주:8]

    특히 뇌건강 문제와 총기 난사 사건 사이에 접점이 있다. 1999년, 콜럼바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국토안전부 비밀경호국과 교육부가 '안전한 학교 계획'을 발표했다. 37건의 학교 총격 사건을 검토하여 재발을 막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범인들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 이력이 있으며 극도의 불안 혹은 좌절을 경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뇌건강 상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폭력을, 그리고 자살, 섭식장애, 약물·알코올 남용 등 십대들이 마주한 여러 위험을 예방하는 데 핵심이 될 수 있다. (250) 

   저자는 '정신질환', '정신건강'이라는 말 대신 '뇌질환', '뇌건강'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선호한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지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서 사회의 낙인을 벗겨내고", 그러면서도 폭력적 행동을 취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자살로 죽겠다는 욕망을 할만큼 심각한 우울에 빠진 바로 딜런과 같은 사람들을 포함한다. 신경과학자 제러미 리치먼 박사가 수 클리볼드의 접근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 '정신' 대신에 영상으로 보고 측정하고 수량화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는 '뇌'에 집중하여 이해의 범위를 "뇌건강과 뇌질환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9]

   그러나 정신역동의 개념과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을 연결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 뇌를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인 신경정신분석Neuropsychoanalysis이 있다. 일부에서는 신경정신분석을 1985년에 프로이트가 발표한 『과학적 심리학 초고』의 프로젝트를 잇고 완성하는 작업으로 본다. 정신현상과 뇌라는 두 차원을 잇는 매커니즘은 불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현상의 신경 상관물을 찾는 것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며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일단 한 번 가공된 이후에야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경계의 활성은 '언어'를 통해 가공되어 정신현상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동시에 언어로 가공되지 않은 채 아직 활성화 되지 않은 신경계가 간과될 수도 없다. 약물치료는 이렇듯 비활성화 상태인 신경계를 활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신경계의 활성 자체가 곧장 주체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신경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약물치료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가 증상개선을 위한 하나의 옵션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뇌과학의 발전과 그 결과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대상이 인간 주체인 이상 정신분석은 여전히 필요하다.[각주:10]

    향후 이어질 글에서는 수 클리볼드가 뇌과학을 통해 우울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소간 결을 달리하여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우울을 포착해보고, 이러한 우울이 테러리즘으로 이어지는 어떤 경우들에 관하여 논의를 좀더 이어갈 것이다. 도대체 어떤 모호성 혹은 복잡성 때문에 수 클리볼드를 만나거나 그의 글을 읽은 다수의 독자들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었을까?  


 한때 좋은 삶이라는 게 있었어. 좋은 아빠가 되어 주말엔 피크닉을 가고, 잠자리에서 이야기 책을 읽어주고, 그렇게 아들을 품위있고 충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 그게 미국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을 제대로 했지. 그러므로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 [각주:11]

-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 -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옮김 (생각의나무, 2007), 195쪽. [본문으로]
  2. http://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4168, http://www.nbcnews.com/storyline/isis-terror/france-church-attack-abdel-malik-petitjean-was-known-potential-radical-n618661 [본문으로]
  3.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 성당 테러의 케이스에 관한 조사는 좀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청소년 가해자 두 명이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둘 중 좀더 주도적인 한 명이 가학적 성향을 보이고 나머지 한 명은 쉽게 영향을 받는 성향인 듯하는 점을 통해 유사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다. 콜럼바인고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2001년에 학교 총격 사건의 청소년 가해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해자 중 25%가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두 아이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영향을 쉽게 받고 의존적 성향이 있고 우울에 시달린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forensis.org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인용한 것을 참조) [본문으로]
  4. https://en.m.wikipedia.org/wiki/Columbine_High_School_massacre [본문으로]
  5.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본문으로]
  6. 수 클리볼드, 위의 책, 302-307쪽. [본문으로]
  7. FULL INTERVIEW 20 20 Diane Sawyer Sue Klebold Mother of Columbine Shooter Dylan ABC 2/12/16 (https://m.youtube.com/watch?v=zHRcF-pFGYI&autoplay=1); 더불어 총기소유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통찰이 담긴 서보명 교수의 글의 일독을 권한다. (제3시대 웹진 87호, [비평의 눈: 미국의 묵시록 6] 총의 묵시록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m/post/647)) [본문으로]
  8.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49-250쪽. [본문으로]
  9. 수 클리볼드, 위의 책, 251쪽. [본문으로]
  10. 김규호, "뇌과학과 정신분석," 「FiLUM」 3(2015), 19-21쪽. [본문으로]
  11.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송정은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2), 595쪽. 2011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이 소설은 공교롭게도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사에서는, 모성 이야기와 심리 스릴러가 절묘하게 혼합된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설정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인용한 부분은 서간문으로 써진 이 소설의 화자인 에바(케빈의 어머니)가 수신자인 프랭클린(케빈에 의해 살해된 자신의 남편)을 향해 건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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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윤주
    2016.08.18 00: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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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입니다.ㅎㅎ 마지막 단락은 인용문과 인용문의 미주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편집 간사님께서 댓글을 확인하신다면 수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2016.08.18 00: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죄송합니다. 수정되었습니다. ^^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다섯. <고흐의 방에 아빠를 뉘였으면 좋겠다>




 김정원*


    아빠는 6인실을 선호했다. 싼 이유가 반이고, 사람들과 보다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음이 그 반이다. 말씀이라고는 없는 양반인데도, 북적거리는 그 곳을 좋아했다. 환자와 그 보호자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와 의사들은 물론 방문자들이 한꺼번에 몰리기라도 하면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폐쇄적인 울 아버지 성정에는 맞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의 몸에 주렁지게 달린 주사병과 소변줄 너머 시선을 둘 곳이 필요했기에, 그는 차라리 6인실에 있고자 했다.


    새로 들어 온 옆 침대의 아저씨는 서른 번째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라며 말을 건넨다. ‘신입’들은 다른 환자들에게 통성명, 아니 통병명(通病名)을 하기 마련이다. 아저씨의 ‘말 걸어옴’이 시작되자, 아빠는 내게 침대의 머리맡을 올려 달라한다. 그는 별 대꾸는 하지 않지만, 아저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이 침대 저 침대의 환자들의 ‘들음’이 시작되고, 각자의 ‘history’가 붙여지며 대화는 금새 익어간다. 누구는 간암, 누구는 위암, 누구는 임파선암…… 개중에는 병세가 완연한 사람도,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들어온 고등학생 남자아이는 너무도 말짱하여 침대를 팔짝팔짝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각자가 겪고 있는 ‘암 이야기’가 한창이지만, 그 남학생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 별 대답이 없다. 대신에 그 남학생의 유일한 보호자인 그의 누나가 대화에 낀다. 괴롭기도 지루하기도 한 보호자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병실에는 훈기가 돈다. 생경한 훈기가 아닐 수 없다. 이이도 저이도 겪고 있는, 말하자면 이 병실에 있는 모든 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암이라는 상황이 만들어 낸 훈기이다. 담아 온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화장실을 가주기도 한다. ‘오늘 내일’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훈기는 그야말로 아프도록 따뜻하다.


    그런데 이것도 낮의 풍경이다. 해 지고 달 뜨면, 낮 동안 숨어있던 죽음의 유령이 암 병동을 배회한다. 어떤 이는 진통제를 달라고 애원하고, 어떤 이는 몸부림하며 고통을 참아낸다. 그리고 어떤 이는 죽는다. 이 때, 환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죽음이 제발 ‘우리 방’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함께 말과 밥을 나누던 이의 죽음이 안타까운 탓도 있겠지만, 바로 앞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큰 이유이다. 죽음을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한 공포. 그렇게 그들은 매일 밤 죽음을 본다.


    그 밤에 죽게 된 환자의 보호자들은 작게 작게 운다. 이미 예상했던 죽음이라서가 아니라, 남은 다섯 명의 환자들과 그 병동에 뉘여 있는 다른 환자들을 위함이다. 오열을 하다가도, 터지는 울음을 이내 타이른다. 죽음의 직전에 살고 있는 다른 환자들을 위한 그네들의 ‘마음 씀’이다. 혹여 애통의 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 병동 전체를 죽음으로 흔들어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 씀’인 것이다. 그 방에 남겨진 환자들은 더는 그 밤을 그 곳에서 보내지 못한다. 바로 옆, 앞 침대에서 죽음이 시작되면, 나머지 환자의 보호자들은 환자를 뉘인 침대를 채로 끌고 방을 떠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오늘 본 죽음이 내일 이 침대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서로 나누지 않는다. 동틀 무렵 방으로 다시 모인 살아남은 환자들은 울지도 않고, 별 말을 나누지도 않고, 죽음이 비워 낸 그 침대에 더는 시선을 두지도 않은(못한) 채, 늦은 잠을 청한다.


    해가 뜨면, 새로운 환자가 그 침대에 짐을 푼다. 신입의 클리셰 같은 통병명이 또 지나가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이야기를 역시나 경청한다. 밥도 나누고 말도 나누지만, 누구도 어젯밤의 이야기를 털지 않는다. 누구도 어제 보았던 그 침대에서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다시 밤이 찾아 왔을 때, 내가 그리고 저이가 죽음에 덩핑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새로 온 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렇게 몇 날이 가고, 다시 밤이다. 팔짝팔짝하던 그 아이가 낮부터 심상치 않더니, 밤이 되자 앓아대기 시작했다. 죽음이 덮치기 바로 전, 보통의 환자들은 밤 사이 장을 다 비워낸다. 뼈만 남아 있는 그네들의 몸뚱이에서 그 많은 것들이 배설된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로 비워내는데, 그 밤에 그 아이가 꼭 그랬다. 그의 누나는 열 두 번도 넘게 기저귀를 가느라 혼이 나갔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찾아 오기까지 한 것을 보니 영 기운이 좋지 않다. 자정이 넘도록 비워내던 아이는 소리 소리를 지르며 누나와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한 두 시간이 흘렀나. 사경에 다다랐는지 아이는 입을 다물고 몸부림을 그쳤다. 이제 막 열 여덟이 된 그 아이는 그렇게 가버렸다. 그 날은 병동 환자들 모두가 들썩였고, 죽음에 냉정하던 의사들 마저도 입을 닫았다. 그 어느 밤보다 힘든 밤을 울 아빠도, 옆 자리 아저씨도 보내고 있었다. 


    암만 죽음이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라지만, 암 병동의 그것은 이처럼 지나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그 가능성을 드러낸다. 죽음이 ‘존재 상실’이라고 정의한 어느 철학자의 말이 살아오는 공간, 바로 암 환자들의 방이다. 그곳은 환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고통스러워 하는 보호자들의 방이기도 하다. 이제 더는 자신의 세계 안에 머무는 존재가 아닌, 즉 자신과 절대 관계할 수 없는 아내를, 아빠를, 동생을 예감하며(곧잘 그 예감을 회피하며) 머무는 보호자들의 방이다. 그런 의미로 암 병동은 “임박해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그 자체의 공간이 된다. 즉, 존재 상실을 기다리는 공간, 존재 완료를 인수하게 되는 공간, 인간 본연의 필연을 마주하는 공간으로서 절실하게, 아주 절실하게 존재한다.


    그 절실한 공간에서의 삼 개월, 울 아빠와 나는 섬처럼 남아있었다. 그는 ‘존재 완료’ 너머의 삶을 꿈꾸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암 병동의 여느 신자들처럼 일요일이면 침대에 누운 채로 예배를 보러 갔고, 양희은의 찬송가 테이프를 듣곤 하였다. 가끔은 자신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나보고 대신 먹고 오라 일렀고, 그 음식을 먹고 돌아오면 꼭 그 맛을 물어 보곤 했다. 맛이 좋아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말하면 반색하며 좋아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싶어 과장된 표현을 더러 하기도 했다. 복수가 가득 찬 배를 해가지고도, 의연하기도 초연하기도 한 그의 태도를 보며, 죽음의 완전한 존재론적 본질을 파악한 사람인가 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 곧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도 내 세계 속에서 그와 더는 관계 맺을 수 없는 ‘그 때’가 곧 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빠는 참 아빠 제 성정대로,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조용하게도 갔다. 다만 내가 그와 달랐다. 판옵티콘과도 같았던 그의 관심 아래 자랐던 스물 넷의 여자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을 순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그 사건을 막아내지도 못하면서 야윈 팔에 끝끝내 주사하고 피를 뽑아가던 의사들을 저주했다. 눈덩이처럼 늘어난 치료비를 지우는 병원에 분노했고, 복도에 쳐 앉아 고래고래 우는 날 곁눈질하는 간호사들을 쏘아 보았다. 많은 보호자들이 잦게 잦게 흐느끼던 모습들이 머리에 스쳤지만, 나는 그대로 큰소리로 울어댔다. 암만, 암만 이미 주어져 있는, 그래서 결국 필연적인 사건이라지만, 죽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지는 나의 몫이니, 나는 울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편히 눈을 감았다고 소곤대는 이들의 귀 속에 내 울음 소리가 박히길 바라며 울었고, 하늘나라로 갔을 것이니 편히 그를 보내주라 말하는 이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심정으로 울었다. 누구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 누구도 그의 죽음을 대신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며 종말과 인간의 전체성을 분석하는 이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 세계 – 안의 – 존재’로서 있지 않는 그.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팠다.


    몇 주가 흐른 뒤 삼십 차 항암치료를 받던 그 아저씨도 떠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팔짝팔짝하던 아이의 누나는 병원 빚을 갚기 위해 투잡을 뛴다 하고, 다른 병실로 옮겨 갔던 간암 아저씨는 더는 손 쓸 방도가 없다 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나 역시 학교로 돌아갔고, 매 주 설교를 했으며, 친구들과 웃으며 밥을 먹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어느새 열 해가 지났다. 십 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하고 좋았던 기억도 흐릿해지기 마련이건만, 암 병동에서의 삼 개월은 어제 본 듯 훤하다. 환자들의 신음 소리, 죽음의 낯빛, 의사들의 무성의함,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알알한 알코올 냄새까지 내 오감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인실 한 켠에 누워있던 아빠의 모습. 창가 옆의 침대, 그곳이 아빠의 ‘마지막 방’이었다.


    그 방에 종일을 붙어있던 아빠를 구원해내어 아름다운 남프랑스의 프로방스로 보내드릴 수만 있다면 참말로 좋겠다. 고흐도 반한 그곳에, 밤을 이기는 강렬한 햇빛이 있는 바로 거기에 아빠를 데리고 가, 고흐의 ‘처음 방’인 아를의 방에 뉘여 드렸으면 좋겠다. 고흐의 고백처럼 절대적 휴식이 있는 그곳에 말이다. 끝도 없이 고독했던 고흐 같은 이가 편히 쉴 수있었다면, 암 환자도 잠들 수 있는 곳이 분명할 테니.


    고흐는 동생에게 적었다.


    "문이 닫힌 이 방에서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가구를 그린 선이 완강한 것은 침해 받지 않는 절대적 휴식을 표현하기 위해서야."


    이제, 암 병동에 대한 기억의 재생을 그만 멈추고 기억의 공간을 고흐의 방으로 이전해 본다. 


    “나는 고흐의 방에 조심스레 울 아버지를 눕히고- 그가 잠들길 가만 기다렸다. 그가 새근새근 잠이 들자– 그가 깰 까 하여 까치발을 들고 문까지 걸어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는 방문 앞 복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제발 그에게 절대적 휴식이 깃들길 기도하며 기쁘게 밤을 기다렸다.”


    다시, 기쁘게 밤을 기다린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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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1. 솔직


    고딩 시절 내 지갑을 포함 한 학급 여러 명의 돈이 도난당했다. 굳은 표정의 담임 샘은 아이들 모두에게 눈감으라 한다. 그리고 돈을 훔쳐간 사람은 조용히 손들라 한다. 성과가 없자 모두를 책상위로 올라가게 한 다음 무릎 꿇고 눈감으라 한다. 그리고 훔쳐간 사람은 손들라 한다. 그래도 성과가 없자 솔직하게 손만 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한다. 역시 성과가 없자 우리는 매일 진짜 도둑 대신 책상위로 올라가 무릎 꿇고 솔직하지 못한 자들이 들어야 하는 훈계를 받아야 했다.  

얼마 전 힙합 경연 프로그램인 엠넷의 <쇼미더머니>에서 프로듀서들이 이미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참가 래퍼에게 왜 굳이 이 경연에 나오게 됐냐고 묻자 ‘돈 많이 벌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리곤 프로듀서들의 칭찬 같은 반응이 나온다. ‘솔직하네!’ 


2. 쇼미더머니


    ‘지 지 지 지’, ‘쏘리 쏘리 쏘리 쏘리’... 고장난 녹음기 같은 아이돌들의 후크송에 비해서 래퍼들의 가사는 사람 냄새가 난다. 써 준대로 만들어 준대로 입혀 준대로 시키는 대로 인형놀이 같은 아이돌 시스템과는 다른 조금은 이질적인 토템이 작용한다고 해야 할까. 래퍼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라임을 짜고 개성이 담긴 플로우를 담아낸다.  

    속사포 같은 랩 테크닉만이 중요 한 게 아니라 ‘자기 서사’라는 문학적인 콘텐츠도 중요 자본이 된다. 그리고 ‘욕’과 ‘디스’는 힙합 문화만의 특이 구성물이 된다. 

사실 이 자기서사, 욕과 디스는 힙합이 대기업 인기 TV 음악 채널을 타고 안방으로 전해질 때 사람들에게 생경하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특정 계층의 하위문화로 시작된 대중음악들이 그렇듯이 아프로-아메리칸의 실존적 상황을 담아내고 에너지를 분출하기에 그것들은 최적화된 표현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한국이라는 환경으로 옮겨 왔을 때 남의 옷을 걸친 듯 어색 하냐 아님 어색 하지 않냐 이다. 당연히 갱스터야만, 흑인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 백인 래퍼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 <8 mile>에서 주인공 버니래빗 역을 맡은 에미넴은 극 중 흑인 래퍼 파파독과 랩 배틀을 한다. 버니래빗이 펼친 선공에 관중들은 열광하고 파파독은 그만 기가 눌려서 랩 배틀을 포기하고 만다. 버니래빗이 한 디스 내용인 즉 파파독이 유명 사립학교에 다녔고 그의 부모님은 잉꼬부부라는 것, 그리고 버니래빗 자신은 트레일러에서 살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백인 쓰레기라는 거다. 흑인이 백인 같고 백인이 흑인 같은 상황이다. 이 영화 장면만 보더라도 힙합 씬에서 그들만의 합의되고 상징화된 토템이 백인 래퍼에게 진정성이라는 힘을 부여 한 게 확실하다. 

 그러나 쇼미더머니에서는 무엇이 디스이고 무엇이 힙합의 에토스인지 알 길이 없다. 느닷없는 자기서사에 맥락 없이 디스한다. 가장 손쉽게 끌어 쓰는 서사는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누리겠다거나 부모님 이야기로 공감을 유도하거나 래퍼로서의 고독감 정도이다. 디스 또한 디스를 위한 디스 일 뿐 상징화된 공연으로서의 수준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그냥 서로 얼굴 붉히는, 그저 프로그램 흥행을 위한 선정적인 밑밥이 되고 만다.  

그래서 힙합 음악이 추구하는 힙합성의 부재 그리고 힙합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징화 과정의 부재와 어색함을 메우려 손안대고 코 풀 수 있는 키워드로 내 놓은 것이 ‘솔직함’이란 암묵적 부유물이다. 

내 안에서 끓고 있는 욕구와 질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로 뭔가 용기 있고 자유를 향유하는 거라고, 그것이 힙합의 진정성인양 몰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솔직함은 진정성이 아니다. 그것은 손만 들면 도둑질을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던 고딩 시절 기억만큼이나 벌어진 상황과는 매치되지 않는다. 

 개인의 의미, 공통의 가치체계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전제 되어야 진정성이다. 말 그대로 솔직함 자체는 무색무취하다. 성찰이 따르지 않는 솔직함이 어떻게 진정성이 될 수 있으며 무슨 콘텐츠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솔직함 위에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막무가내 식 긍정, 혹은 타인에 대한 무시와 혐오가 담겨지면 영락없는 일베 식 폭력이 되는 거다. 쇼미더머니 출신 래퍼 블랙넛의 랩은 자신의 열등감의 도를 넘은 표현이 타인을 향한 흉기가 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고 까발려서 자유와 권력을 얻는 것? 개콘 식 유행어를 빌리자면 그건 순 ‘기분 탓’이다. 기분 상 자유롭고 기분 상 파워맨이 된다. 하지만 실상은 시스템의 노예일 뿐이다. 

    철학자 한병철에 의하면 ‘기분은 합리성을 대신하여 자유로운 주체성의 표현으로 환영 받는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주체성을 착취한다. 사물은 무한히 소비할 수 없지만 기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분 탓에 자유로워진 존재는 감성 경영의 지휘아래 놓여지는 감성 소비자가 될 뿐이다. ‘신자유적 심리정치는 이러한 반성 이전의 층위에서 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기분을 장악한다. 심리정치는 기분을 통해 인격 깊숙한 부분에 까지 개입한다.’ 

    자유로운 기분, 권력을 얻은 기분의 통로는 필연적으로 탈정치로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힙합이 갖는 이질적 반항성, 직접성과 즉흥성, 배틀과 디스라는 용광로급 에너지를 블링블링한 금도금 목걸이나 만들고 인신공격 정도의 찌질 험담으로 디스를 채우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철저하게 장내에서 치고받고 경쟁한다. 힙합문화의 특징인 크루 간의 음악적 조화를 지향하는 대신 실력이 떨어지는 래퍼, 실수를 연발하거나 멘탈이 약한 동료 래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 뜬금없는 사적 디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선택이라는 약육강식 포맷으로 래퍼들의 자존감을 소진 시킨다. 

    아마도 쇼미더머니는 힙합의 사회적 에너지를 탈진 시키려 고안된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철저하게 모래알 래퍼로 만들기 ... 

    하지만 어쨌거나 집단 왕자, 공주병 환자 같은 보이 그룹, 걸 그룹보단 래퍼들의 스웨그에 희망을 걸고 싶다. 부와 명예와 섹스를 숭배하는 랩이 넘쳐나도 흑인 게토에서 태어난 힙합이라는 질긴 모태성은 언제고 발현될 수 있으니까.  

    락이 저항성을, 포크가 민중성의 콘텐츠로 사람들 맘속에 각인 되어 있듯이 말이다.  

    Show me the swag! 


* 좌파 티를 입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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