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안다, 침묵 하나에-

                            주검 하나[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한백교회 전도사)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야」 53장 4~6절

 

1.

지난 16일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누구 하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한 지인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두고 “숨 쉬는 것조차도 죄스러운 나날”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충격과 분노, 안타까움 등이 뒤섞인 비통한 정서 속에 지금 대한민국은 깊이 가라앉아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슬퍼하고 더 분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누군가를 위로하려 하거나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한 말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기독교는 이 현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제 안에 치밀어 오르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습니다. 팽목항에서 바다를 향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며 간절하게 절하고 또 절하는 한 어머니를 TV 화면에서 보며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팠습니다. 대체 그 수많은 생명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인가요? 아이의 어머니는 왜 있지도 않은 죄과를 자신이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어야 했던 것일까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기독교는 이처럼 무고한 자들의 불의한 죽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언론과 여론은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추적하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로부터 시작해, 해경과 정부 관계자들, 선주 등이 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때의 물음은 원인제공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며, 동시에 죄과를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인은 ‘전문 시위꾼이 유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의 한 최고위원은 한술 더 떠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파가 정부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책임자’의 자리에 이처럼 자신들의 분노와 증오의 대상을 단세포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분노에 찬 ‘책임자 찾기’가 끝나고 책임자에게 처벌이 내려진다고 해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죽음이 정당한 죽음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안전을 지킬 법적 의무가 ‘누구’에게 있었는가 묻는 편협한 책임담론은 그 질문이 첨예해질수록 이 사건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때의 책임이란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한 돋보기이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런 책임담론을 넘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를 ‘책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2.

저는 항구에서 자신이 죄과를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는 한 어머니를 보며 오늘의 성서본문이 떠올랐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데,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는 4절은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어머니의 절규와 같은 감정적 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는 아이가 담임선생님의 깜짝 생일파티를 끝내고 자랑하기 위해 전화한 것에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핀잔하고 짧게 통화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3절 본문은 그 어머니의 후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두 이 사고에 매우 깊이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5절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인용한 본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위해 무고한 당신이 벌을 받았구나’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보통 기독교의 ‘대속’ 또는 ‘속죄’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대속 교리의 핵심입니다(롬5:8, 고전15:3, 살전5:10).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대속과 관련한 놀라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대속 교리와 관련해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알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에서 대속에 대한 서술의 강조점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다른 데에 있습니다. 원래 오늘의 본문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야기 단락(52:13~53:12)의 일부분입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이 이야기 단락의 전반부(52:13~15)에는 당신의 종이 앞으로 이룰 성공에 대한 하느님의 연설이 배치돼 있고, 그 뒤로 후속부에는 "그"의 고난을 목도하며 하느님의 연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서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표1>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52:12~53:12)의 화자-대상 구조

 

말하는 이

말해지는 이/대상 

 전반부(52:13~15)

하느님 

"그(주의 종)" 

 후속부(53:1~12)

 "우리"

 고난받는 종의 노래 전체

 이사야 예언자

 "그"에 대한 "우리"의 증언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이와 말해지는 대상의 관계를 보면, 전반부는 하느님이 말하는 이이고 하느님의 종인 "그"가 말해지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후속부에서는 주어가 "우리"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는 "우리", 말해지는 이는 "그"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후속부의 본문은 하느님의 연설, 즉 하느님의 진리 선포가 아니라, 무고한 "그"가 고난을 받는 현장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자 그가 우리 대신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대속의 강조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고난과 승리를 ‘예정’했다거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을 보며 고난을 피할 수 있었던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과 연민, 그리고 그것을 성찰하고 증언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대속은 내가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자 그리스도 ‘앞에’ 선 장소의 발견을 의미합니다.[각주:2]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업과 짬짜미나 짜는 관료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안전 따위는 상관없다는 선박회사, 열악한 노동환경을 핑계로 승무원들이 내팽개쳐버린 책임의식 등 일반 승객은 알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죽음의 카르텔을 형성해 필연적인 참사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죽음의 자리를 피할 수 있었을 뿐이며, 그들의 죽음이 언제든 나의 죽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5절) 그리고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거짓 명령에 학생들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7절)는 사실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배신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사야서의 "우리"와 같이 부조리한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의 자리가 됐을 수도 있는 고난의 자리에 무고한 그들이 있었고, 그들이 희생됐음을 깨닫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겹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나 대신 희생당한 사람이 바로 내 자녀라는 사실은 생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보며 내 자녀가 언제 죽임의 체제에서 나 대신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희생자의 부모와 같은 심리상태로 몰고 갑니다. 제가 이사야서에서 본 대속의 맥락은 이런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 앞에 있는 성서는 우리를 어떤 자리로 안내하고 있는 것일까요?

 

 3.

너는 안다, 말 하나에-
주검 하나                       
(파울 첼란의 시 <밤으로 삐죽거리는> 중)

나치의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두 줄로 서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불길한 느낌에 슬쩍 줄을 바꿔섭니다. 그리고 인원을 체크하던 나치 장교는 첼란이 옮겨간 줄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고 첼란이 서있던 줄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서 파울 첼란은 노무자 대열에 포함돼 살아남았고, 첼란 대신 줄을 옮긴 남자는 가스실로 가야 했습니다. 첼란의 시는 줄을 옮기라는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을 주검으로 뒤바꾸는 잔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는 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게 됩니다. 그는 자기대신 희생된 한 남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그 경험을 잊지 말라고 되뇌었고 그 기억을 나중에 시로 적었던 것일까요? 자신의 시를, 자신의 증언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잔인한 현실이 당신들의 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대라는 것을 경고하려 했던 것일까요? 어찌 됐든 그는 짧지만 심장을 찌르는 말을 통해 그가 목격하고 살아냈던 잔인한 과거를 현재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말은 죽임의 체제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자기 대신에 희생된 이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검이 된 남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한 생명을 그렇게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죽임의 체제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첼란의 증언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절규는 세월호 안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목소리와 처참한 심정, 그리고 공포를 대언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절규는 비통함에 매몰돼 있고, 그래서 갈라지고 떨리는, 질서가 없는 (말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그 소리
들이 우리의 실존의 민낯을 보게 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우울과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희생자들 앞에 선 우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삶의 비참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안전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고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생명을 빚졌습니다.[각주:3] 파울 첼란과 이사야서 속 "우리"의 증언은 이미 '과거'가 된 것을 현재화하는, 살아남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타인의 희생에 기대고 있다는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역사의 고통스러운 선물이 아닐까요.

이제 애도의 시간이 지나가면, 상대에게 의지해 자유를 얻고 있음을 보고 그것을 시인함으로써, 자신이 타인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부여받게 되는 증언의 책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생명을 빚진 자이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무고한 삶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 앞에 서있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압니다, 증언해야 할 자의 침묵은 또 다른 죽음을 묵인하게 될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증언의 책임을 말하기보다는 좀 더 슬퍼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4.4.27.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87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의 '대속' 개념이 '고통받는 이와의 동행'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베른트 야노프스키 지음/김충호 옮김, 『대속』(한국신학연구소, 2005)에서 얻었음을 밝힌다. 대속의 개념사 연구와 충실한 구약성서 본문분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번역이 새로 되기만 한다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이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본문으로]
  3. 물론 체제가 가하는 죽음의 위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할돼 있지 않다. 때문에 이 글에서 말하는 공감과 증언의 영성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논란이 됐던 정몽준 의원 아들의 트위터 발언을 떠올려보라. 그는 세월호 참사와는 무척 거리가 먼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이와 같은 이들은 이 글이 말하는 체제가 만드는 죽음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집단적 감성의 분할선을 추적해보면 우리 사회의 근본적 적대가 무엇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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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연구마당 탈향,동행(/,同行)”

2014년 상반기 강독모임 개강 안내

 


1. 취지:

 (1) 공부와 수행(영성훈련)을 함께 할 실질적인 에큐메니컬한 신뢰 서클 구성.

 (2) '하느님의 편들기'라는 공통적인 신학 주제와 각자의 관심사나 연구 과제를 함께 공부하는 모임.

 (3) 이를 위해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아카데미 프로그램인 ‘탈/향’과 신학공부모임 ‘동행’이 공동으로 ‘연구마당’을 열어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운영.


2. 진행:

 (1) 3월 13일(목)부터 격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약 20분간의 기도(켈틱 매일 기도서 또는 다양한 기도 방법 안내)를 드린 후, 발제 및 토론마당 진행.

 (2) 장소는 안병무홀 한백교회당(http://hanbaik.synology.me:8080/xe/hanbaikway)

  -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로 나오신 후, 신한은행과 우체국 사이 길로 50m 들어오셔서 왼편 건물 1층.

 (3) 3월 13일(목) 저녁 7시 첫 모임에서 오리엔테이션 및 브레인스토밍으로 세부 일정과 계획 확정.

 (4) 책임도우미: 

  - 유승태(한국기독교장로회 한백교회 전도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 민김종훈(자캐오, 대한성공회 사제, 길찾는교회 공동기획자)


3. 방식: (core 모임에서 최종 조정)

 (1) 1단계. 독서 토론 모임: 기초 체력 쌓기를 통해, 문제의식과 호흡 맞추기.

  - 입장이 분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연대기적 읽기’를 통해 기초 다지기.

 (2) 2단계. 문제의식과 맥락 만들기: 공시적인 연구를 위한 배경 공부하기.

  - 멤버 간 ‘신뢰서클’이 형성되면 ‘각자의 관심 분야와 연구하고픈 주제’를 공유.

  - 각자의 문제의식과 관심분야를 공시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배경에 관한 공부.

 (3) 3단계. 퀼트식 공부하기: 서로 돕기.

  - 공동의 자료 조사 및 각자의 관심과 연구 주제를 심화하기 위한 공동 연구 진행.


4. 모임 참여 자격: 작게, 의미 있게, 연결하며

 (1)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지향하는 사람.

 (2) 그러나 교회와 신학이 모든 것의 해답일 수도 그렇게 될 필요도 없다는데 동의하는 사람.

 (3) 교회와 신학이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자기 공부’가 선행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4) 그래서 ‘제대로 된 문제의식과 맥락 읽기’에 기반한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5) ‘~척’하기보다는 ‘경청을 위한 독서’와 ‘삶에 근거한 치열한 토론’을 통해 ‘진검 승부’ 공부를 하고픈 사람.

 (6) 그렇기에 더욱 교회와 신학이 잃어버린 이야기와 전통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는 사람.

 (7) 다양한 교회와 신학적 이야기와 전통을 통해 풍성한 하느님의 속삭임을 듣고픈 사람.


5. 책임도우미들이 제안하는 공부 범주와 함께 읽을 저서

 (1) 신학하기의 다양한 유형들: 우리 시대의 주목받는 신학자들의 대표적인 저서. 역사적 예수 연구, 민중 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퀴어 신학, 영성 신학(사회적 영성) 등, core 멤버들이 분야별로 함께 선정. 

  - 예) 매튜 폭스, N.T.라이트와 마커스 보그 비교 읽기, 케네스 리치, 윌터 윙크 3부작, 안병무, 그 외 토착화, 상황화 신학자들의 주요 저서 등.

 (2)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 그리스도교에 대한, 또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리스도교 해석을 내놓는 종교학자, 인문학자들의 저서. 

  - 예) 에리히 프롬의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등.

 (3)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적 주제들 다시 보기: 구원론, 성령론, 유일신론, 종말론 등,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뤄지는 주제 가운데 몇 가지를 선정하여, 그 주제에 관한 다양한 관점의 저서를 비교하여 읽고 나누기.

 (4) 신학현장의 (재)발견: 동시대의 다양한 '문제설정'들과 대화하기. 이 부분에서 다양한 사회학 이론/분석 서적이나 한국 현장에 대한 스케치를 할 수 있는 저서와 글들을 읽고 나누기. 

* 구체적인 책 목록과 공부 일정은 첫 모임 후 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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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은 광인[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 「마가복음」 5장 15절 中 

 

오늘의 본문(막5:1~20)은 ‘거라사 광인’ 일화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들에 소개된 예수의 이적기사 중 단일한 사건이 이 본문처럼 길게 서술된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서술 분량이 많다고 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설명이 충분히 돼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량이 많은 만큼 의문도 많아지고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 의문들 중에서 저는 성서기자가 15절에서 전하는 광인의 최종상태, 즉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집중해 오늘의 이야기를 펼쳐볼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일화를 군대 귀신이 들려 광인이 됐던 한 남성이 예수의 축귀를 통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됐다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에서 군대 귀신이 옮아 붙은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갈릴리 호수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과 관련된 설교들을 찾아보면, 주로 ‘끔찍한 상태에 있던 광인이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뀌었다’, ‘마을사람들은 돼지라는 재산을 잃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예수(영생)를 거절했다’, ‘거라사 광인인 단순히 정신병자가 아니라 귀신 들린 것이다. 악마는 실재한다’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일반적 이해방식들은,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광인의 변화, 즉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는” 광인의 상태(4절)에서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든” 상태(15절)로 변화한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으며, 때문에 이 일화가 우리 삶의 현장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석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 해석은 성서기자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이 일화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주제의식이라는 것은, 예수가 악마까지 다스리는 권능자라는 것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대립은 예수와 광인, 다음 단계에서는 예수와 마을사람들의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3~5절을 통해 예수와 광인의 대립 전에 광인과 마을사람들의 대립이 먼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서기자가 광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이 부분에서 마을사람들의 시점만을 대변하는 편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기자는 광인을 가리켜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휘어잡다는 표현에 대응하는 헬라어는 ‘다마조(δαμάζω)’인데 의미는 ‘통제하다, 길들이다’에 가깝습니다. 바꿔 말하면, 마을사람들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가축을 결박하듯이 그를 묶어두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광인’이나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호칭은 모두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이름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가 그 세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대상을 언어화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세계는 그를 광인이라 불렀고 그를 가축처럼 결박해 길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그를 부르는 이름 속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이미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일반적인 해석들에서도 이러한 평가절하는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부순 그의 행동은, 세계가 자신에게 행하는 길들이기 시도와 평가절하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물론 이때 저항이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대의를 따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저항자의 ‘자의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억측이기만 하지 않은 것은, 고대인들이 생각한 ‘귀신들린 사람’은 현대인들이라면 서로 다른 범주라고 생각할 것들을 모두 지칭하는 대상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아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정신병과 (그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의) 반사회적 행동을 구분하는 세밀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 범주 안에는 정신병 증상과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행동이 구분되지 않고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면, 거라사 광인은 단순히 귀신의 조종을 받는 ‘사탄의 인형’인 것이 아니라, 그를 휘어잡아 길들이고자 하는 주변 세계에 대항해 사투를 벌이며 탈주를 꿈꿨던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거라사 광인은 자신의 이상행동들, 세계화 불화하는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제 정신이 들었다”(15절)고 기술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갖는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일축해버립니다. 그저 이전의 행동은 미친 짓들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인을 바라보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들의 시각이지 광인 자신의 시각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서가 그를 묘사할 때 사용한 ‘편파적’ 언어 때문에 우리는 광인의 행동이나 말을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우선 대상화하고 표면적으로만 바라볼 위험이 큽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표현의 의미는 마을사람들이 시도했던 ‘길들이기’와 무엇이 다른지(혹은 같은지) 묻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인을 길들이려는 마을사람들의 태도나 그 태도에 동조하는 성서기자의 편파적 시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광인의 눈으로 본 세계는 어땠을지 묻는 것이 그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은 광인은 어떤 자기이해를 가지게 됐을지 물어야 성서가 말하는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의 ‘거라사의 광인’ 에피소드(5:1~20)와 루쉰의 「광인일기」라는 소설의 교차읽기를 통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중국의 작가 루쉰은 1918년 5월 「광인일기」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합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쓴 동명의 소설에서 제목,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 그리고 그 수기를 쓴 주인공이 ‘광인’이었다는 설정 등 여러 문학적 장치를 빌려온 루쉰은 이 소설을 통해 중국 신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뭔가 껄끄러운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일기장 표지에 ‘미친놈의 일기’라고 제목을 적는 사람을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내밀한 자기고백을 담는 기록형식인 일기 앞에 ‘광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설의 서장에서 광인일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서술자(광인의 중학교 시절 친구)는 “책명은 본인이 완쾌된 후에 붙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기를 쓴 사람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사람은 동일인물입니다. 그러나 일기를 쓴 것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것 사이에는 단순히 시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즉, 일기의 제목을 붙일 당시의 주인공이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광인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쾌된” 현재의 주인공은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수용해 과거의 자신을 바라봅니다.
때문에 광인일기라는 제목은 주인공이 주변 세계와의 갈등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 운명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연하면, 마을사람들과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중화 문명 속에서 4천년 이상 이어져온 야만(식인)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더 이상 주변 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근거로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식인풍습’을 혁파하려는 그의 목소리는 주변사람들에게는 광인의 헛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계를 뒤집어엎을 힘이 없던 주인공은 방에 감금당한 채 자신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신의 소신과 다짐대로 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순응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의 상태로 규정하고 관직 후보가 돼 마을을 떠났습니다. 주인공과 주변 세계의 갈등상황에서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주변 세계가 붙인 꼬리표인 광인이라는 호칭을 주인공이 스스로 수용한다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갈등에서 자아의 패배, 세계질서의 일방적 수용을 의미합니다. 또한 관직 후보가 됐다는 것은 자신이 식인의 체제라고 규정하던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완쾌됐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광인’에서 ‘식인’으로 바뀐 것을 뜻할 뿐입니다.
다시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오늘의 본문 역시 광인일기의 내용과 유사하게 읽힐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을 식인의 문명과 맞서 싸우는 계몽가로 생각할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피해망상증을 앓는 광인에 불과합니다. 거라사 광인도 (그것이 망상에 근거한 것일지언정) 자신을 “군대”라고 정의하는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군대란, ‘레기온(λεγιών)’ 즉 로마의 군단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6000명의 거대한 군단을 이끄는 장군으로 여기고 세상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을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지만, 광인은 (사실은 자해의 흔적이었지만)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 제정신이 든 광인을 묘사하기 위해 성서기자가 사용한 표현은 그가 “옷을 입었고 ... 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묘사들을 보면 그는 꼭 문명의 질서에 길들여진 것 같습니다. 마치 제정신이 된 모습은 세계와의 갈등이 없는 상태,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 통념에 투항한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거라사 광인 이야기는 ‘저항(주인공)-억압(세계)’의 서사가 ‘굴복(주인공)-훈육(세계)’의 서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체제에 먹혀버렸던 것처럼, 거라사의 광인도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는 예의를 갖춤으로써 스스로 그 사회에 길들여지고 평가절하 받는 길을 택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 읽기 방식은 성서 안에서 윤리적 정당화 방식, 본받을 대상, 동일시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대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서 어떤 윤리적 함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과연 윤리적 함의라는 것이 그 이야기 안에 있기는 한 것일까요? 저는 거라사 광인 이야기와 광인일기의 의미가 이야기 ‘내부’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미덕은 이야기 내부에 우리가 쉽게 ‘동일시’하고픈 주인공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반면교사’(윤리적 주인공의 뒤집힌 거울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서사는 등장인물 중 어느 한쪽에도 쉽사리 동조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앞에 놓인 두 이야기가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만드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윤리적 동일시의 대상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통념화된 윤리관의 정지, 이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던 윤리적 사고의 토대에 대해 회의를 갖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고, 그 계기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사고가 시작될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윤리적 성찰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쉬운 동일시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지 묻는 태도인 것은 아닐까, 묻게 됩니다. 옷을 입은 광인은 우리에게 자기와 쉽게 화해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렇게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윤리적 성찰의 지점 또는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3.11.10.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62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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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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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가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얼마 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나, 제목이 무척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제목의 의미를 풀이해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겠다. 이 질문을 살짝 바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던져보면 어떨까? 왜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가, 라고.

성폭력 혐의를 받고 삼일교회를 사직했던 전병욱 목사가 최근 홍대새교회를 개척했다. 사임한 지 17개월 만이다. 줄곧 목회만 해왔고 나름의 목회 ‘성공신화’를 갖고 있던 이였으니, 그가 목사로 교회에 복귀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전병욱 목사의 교회개척 소식이 아니라, 그 교회에 700여명의 신도가 모여들었으며, 새벽기도마다 200명가량의 청년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언론보도였다.

피해자들의 신빙성 있는 진술이 다수 공개됐고, 언론을 통해 사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난 상황에서 전병욱 목사를 여전히 추종하는 현상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진실하게 사죄한 적이 없는데도, 그가 번듯하게 목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전병욱 목사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목회자들의 부패・부도덕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다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적어도 더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목회자의 위험성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없지 않을 텐데도, 지탄을 받아 마땅한 많은 목회자들이 여전히 교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목회를 하고 있다. 부도덕한 목회자나 지도자가 자신의 신앙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자기 교회의 목회자, 자신이 속한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는 그런 사람일 리 없다고 믿거나, 너무 쉽게 그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 소식에 교계가 발칵 뒤집혀 있을 때,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종교 집단에서 벌어지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사례를 두 주 연속 보도했다. 한 여성은 미대를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까지 했던 엘리트인데도 ‘선녀님’의 비상식적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폭력을 감내하거나 폭력의 가해자가 됐다. 이 피해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지 않았다. 또한 강압적 상황에 놓여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종교 지도자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거역하기는커녕 그에게 한 올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 방송은 이러한 행동의 심리적 기반을 분석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실험의 모형이 된 것은 1963년 미국에서 스탠리 밀그램이라는 학자가 수행했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다. 밀그램은 실험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기억과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전문직 남녀 중 실험 참여자를 모집했다. 실험 참여자는 창문 너머에 있는 학습자(연기자)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전압을 올리며 전기충격을 가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참여자가 상당히 높은 전압에서야 충격을 가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예 최고 전압까지 올리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옆에 있는 과학자가 ‘치명적인 신경 손상은 없다, 실험을 계속하라’고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다. 권위자의 명령이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높은 전기충격을 가한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자들이 누르는 단추의 최고 전압은 450볼트였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전압이다. 실험이 끝나고 실험의 배경을 설명한 후 최고 전압의 단추를 누른 사람들에게 왜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사회복지사는 “이런 교육법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전기충격으로 학습능력이 향상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간호원은 “평소 의사에게 처방이 맞는지 세 번씩 물어보기 때문에(의사가 괜찮다고 하면 자신은 거스를 수 없으니까)”, 수질검사관은 “난 내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을 뿐(내게 책임은 없다)”이라고 답했다. 정리하면, 권위자의 명령이 자신의 윤리적 신념과 어긋나더라도 그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면해주는 나름의 설명체계를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는 ‘설명의 언어’가 권위자의 부당한 명령을 분석하고 고발하기보다는, 권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아를 타인과 자기 자신의 윤리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역할을 하기 쉬움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권위자의 존재감’이나 ‘죄책감을 덜어주는 설명체계’가 개인들이 비윤리적 결과를 초래하는 명령에 순응하게 만드는 강한 요인들이다. 그리고 이 두 요인의 부적절한 조합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 체제 차원의 ‘악’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당연시하는 ‘목회자의 권위’는 교회 밖에서는 ‘몰상식’인 것들이 교회 안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교인들이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회개’를 개인의 고백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신학은 어떠한 잘못도 하느님께 고하기만 하면 내가 피해를 준 타인과는 아무 관계없이 마술처럼 용서받게 된다고 믿게 만들고, 잘못된 교회 관행과 목회자의 부도덕함에 대해서도 눈감게 만들 수 있다. <밀양>에 나오는 살인범처럼, 전능한 하느님이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피해자(당사자)의 용서 없이도 자신은 죄 사함 받았다고 믿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보증해주는 교회의 ‘권위자’들이야말로 전병욱의 성폭력을 조장하고, 수많은 청년들이 그 사건에 대해 판단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든 원인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권위자의 존재감’이나 ‘죄책감을 덜어주는 설명체계’만으로는 전병욱 목사 추종 현상이나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 여러 사례들에서 발견되는 ‘신자들의 자발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지못해 이들 목회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고 열광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고 신뢰한다. 애초에 자신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면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죄책감을 경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들 신자들의 자발성 안에는 일반적 상식에 따른 윤리적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겠다. 이런 자발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병욱 목사를 추종하며 교회에 몰려가는 청년들,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 신자들은 밀그램의 실험에서처럼 도덕성이 의심받지 않는 강한 권위자를 갖고 있지는 않다. 밀그램의 실험 참가자들은 명령이 내려진 이후의 상황에서 윤리적 판단을 할 것인가(명령 거부), 아니면 윤리적 판단 자체를 중지할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면, ‘부도덕한 목회자 추종’의 경우는 명령을 내리는 자의 권위 자체가 심하게 손상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병욱 목사나 부도덕한 목회자에게는 그들이 상실한 도덕적 권위를 충분히 보충해주고도 남는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마 그들 목회자들 중에는 상대를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언변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조성 능력 등 소위 ‘카리스마’라고 불리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카리스마의 진정한 의미는 상대의 ‘설득됨’이 있을 때만 획득될 수 있다. 목회자들의 어떤 뛰어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동의하고 감동 받는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그 ‘무엇’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 목회자와 신자들이 어떻게 상호 결속을 이루고 ‘외부’의 윤리적 개입을 거부하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교회 안의 인간관계를 떠올려볼 수 있다. 한국의 특수한 인간관계 이해를 기반으로 한국적 심리치료 방법을 고민한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이 관계 형성의 목표로 ‘심정이 통하는 관계’를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때 심정이 통하는 관계란 자신과 상대가 정서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 됨’의 느낌을 갖는 관계를 말한다. 즉, 상대와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를 ‘진짜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우리’ 관계를 재확인한다. 사실, 이 주장은 그다지 복잡한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관계맺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진짜 관계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관계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이러한 관계맺기 방식은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촉매제로 작용해 매우 증폭된 형태로 나타난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힘든 고민이나 상처도 교회 안에서는 그 대화 상대를 찾기 쉽다. 그리고 서로 기도제목을 공유하는 문화나 많은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통성으로 자신의 상처를 울부짖으며 고백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은, 개인에게 심정을 토로할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익명의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과 심정을 공유하는 ‘우리’ 관계라는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우리’라는 신앙적 관계가 ‘우리’의 윤리적 우위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라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며, 이 관계에 위해를 줄 수 있는 목소리는 배제되기 쉽다. 그것이 아무리 옳은 소리여도 말이다. 때문에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우리를 공격하는 목소리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러한 관계가 낳는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 중의 하나는 ‘우리’의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 다양한 발언기회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누군가 다른 목소리를 낼 때 그가 더욱 힘내서 말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의 목소리만큼 명확하게 들릴 수 있도록 그에게 물리적・심리적・제도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 ‘우리’는 결국 그 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혐의가 삼일교회에서 처음 불거졌을 때도 당회가 택했던 솜방망이 처벌은 전병욱 목사의 권위는 보전해줬을지 몰라도 피해자였던 공동체 구성원들의 울부짖음은 평가절하한 것이며, 결국 이들을 교회 안에서 침묵하는 익명으로만 남게 만든 것이다. 이는 하나가 된다는(또는 교회를 지킨다는) 미명 하에 공동체 안에 있는 타자 자체를 소멸시키고, 그래서 결국 타자와의 거리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 전형적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목회자의 권위, ‘회개’라는 신앙 양식, 그리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문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버려야 할 것은 없다. 다만 이 세 가지가 불의한 방식으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의 불의한 결합이 결국 외부의 비판에 대해 귀를 열지 않는 폐쇄적 신앙을 만든 것이라는 혐의가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성서에서 보여준 한 사례야말로 다소 진부하지만 그래도 가장 근본적인 대안을 우리가 상상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하고 싶다.

갈라디아서 5:18에서 바울은 ‘육체의 기회로서의 자유’와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종이 됨’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진정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말하는 사랑은 막연히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전반부에서 나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한 교회의 위기 상황에 대해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전반부에는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초래된 분열과 위기에 대해 전하고 있다.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갈라디아 교회를 압도하고 있을 때, 이들이 맞았던 위기는 단순히 신앙논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질성의 회당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 유대적 정체성을 추종할 사회・경제적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밀어내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이 ‘사랑하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이들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밀려나더라도 갈라디아 교회 자체는 남겠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곧 갈라디아 신앙 공동체가 ‘육체의 기회’를 따르지 않는 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때 ‘서로’에는 유대 전통을 따를 수 없는 타자가 포함된다. 이로써 공동체 안의 각 주체는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주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 거리는 각자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리가 아니라 서로가 섬기는 관계로 묶여있음을 의미하는 거리가 된다.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는 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삭제하지 않고도 공존하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 이 글은 "왜 홍대새교회로 청년들이 몰리나?"라는 제목으로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글의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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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4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성서 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사도들의 거절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사도행전 6:1-7 中]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무리의 일곱 지도자가 사도들을 찾아왔습니다. 늦은 저녁 그들이 조용히 사도들의 숙소를 찾아온 것은 굳이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 듯합니다. 마침 사도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장(杖)을 맞고(5:40) 병상에 누워있던 터라 ‘문병’을 왔다고 둘러댈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찾아온 ‘진짜 이유’는 문병에 있지 않아 보입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겪었던 수모(6:1)에 대해 듣고 난 이후여서인지 이들 일곱 지도자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듯합니다. 일곱 지도자의 대표인 스데반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반응에 당황한 듯 보입니다. 일곱 지도자 중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돌아서서 고개를 젓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날, 사도들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서두에 인용한 말들을 합니다. 대체 그날 저녁 사도들의 숙소에서 일곱 지도자는 어떤 말을 들었던 것일까요?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위에 인용된 사도들의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이러한 상황 재구성과 질문 모두 저의 상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적 비약이 존재하는데 그 비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통적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이해대로라면, 일곱 ‘집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차별 받았고, 그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사람을 임명하는 것으로 신앙 공동체 내부의 갈등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석에서 세 가지 지점에 물음표를 붙이고 싶습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의 일곱 지도자가 (이전에는 없다가) 성서에 언급된 사건 이후에 선출된 것일까, 공동체 안의 갈등은 ‘분배 불평등’ 때문에 초래됐을까, 일곱 집사의 선출로 신앙 공동체는 다시 평화를 회복한 것일까?(평화를 회복했다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세 가지가 제가 갖는 의문들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 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그리고 이 ‘아니오’라는 답 때문에 앞서 인용한 2-4절을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행 6:1-7)은 보통 교회 안의 여러 직무 중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돼 왔습니다. 또는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헬라 이름을 가진 일곱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교회 안의 갈등을 해결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로나 집사라는 교회의 직분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4절은 교회 안의 갈등해결의 모범 사례, 직분 선출을 위한 기준 등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정한 해석의 틀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전체를 교회의 성립과 복음의 확장 과정으로 보려는 틀입니다. 예수 사후의 기독교사(史)는 제도화된 교회형태와 공교회(Catholicism)라는 목표를 향해 수렴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갈등은 결국 ‘교회’를 완성하기 위한 체계 내적인 분화와 적응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업무를 수행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이 일 때문에 사도들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돼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곱 장로 혹은 집사를 선출하는 것은 사도들의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그 일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분화와 적응 행동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차분하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이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차별의 주체는 누구였던 것일까요? 분명히 1절에서는 ‘문제 상황’이 ‘분배의 불평등’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사도들이 제시하는 2-4절의 ‘해결책’에는 왜 분배방식 개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문제 상황이 분배 때문이었다면 왜 선출된 일곱 집사의 자격조건은 하나같이 분배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뿐일까요? 또한 “제자들을 모두 불러”(2절) “여러분 가운데서”(3절) 일할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하고는 (모인 사람들 중에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이 함께 있었을 텐데) 뽑힌 사람은 왜 전부 헬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한 마디로, 문제 상황과 해결책의 연결이 매우 껄끄럽게 돼있는데 대체 이 문제와 해결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해결방식은 이 껄끄러움을 ‘없는 셈’ 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 해석학’을 가져다가 성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나아갈 바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론적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 다양한 ‘단계’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은 구체적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학은 성서를 통해 현대의 ‘삶의 지침’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해석학의 입장에서, 사도행전에서 언급되는 이상적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단계들은 현재의 상황과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한국교회 안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주로 교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출된 일곱 사람에 대한 묘사(3절,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를 근거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신앙양식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일꾼’은 이 일곱 집사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이 본문이 ‘사역의 우선순위’를 규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즉, 구제와 같은 봉사활동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이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섬기는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이 주장은 양날의 검과 같이 사용되는데,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의 역할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 장로들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기도와 말씀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규율하는 논리로 사용됩니다. 이 논리를 따라 기도와 말씀 섬김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선한 봉사활동이라 해도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서는 목회자 중심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스데반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쉽게 내파되고 맙니다. 위의 설명대로라면 스데반은 사도에 의해 임명된 집사 또는 장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신도지 목회자와 같은 ‘급’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기적을 행하였”으며(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논쟁의 적수가 그를 “당해날 수 없었다”(10절)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스데반을 사도와 동급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을 봉사 업무를 전담하는 평신도라고 규정할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그를 평신도로 본다면 평신도가 사도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을 근거가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오늘의 성서본문에 번역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공교회를 향해 가는 체계 내적 과정으로만 볼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의 흔적을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흔적을 ‘섬김(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ᾳ)’과 3절에 나오는 ‘이 일(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의 불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들의 ‘섬김’과 3절의 ‘이 일’이 일치될 수 없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동사형으로 쓰인 것을 포함해 오늘의 본문 안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사용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서를 놓고 볼 때, 1절에서는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 2절에서는 “음식을 베풀다(식탁에서 봉사하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씀을 섬기는 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때 단어의 기본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용법은 2절의 ‘식탁 섬김(봉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구호제도 전통과 기독교 신앙 전통 속에서 이 단어가 갖는 ‘섬김’의 의미가 확장돼 ‘구제활동’이나 (섬김을 본연의 임무로 하는) ‘사역’, ‘직무’의 의미로 쓰이게 된 듯합니다. 오늘의 본문 안에 있는 세 번역은 이 한 단어가 갖는 다양한 번역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역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번역, 개역개정과 같은 한글번역뿐만 아니라 NAS, NIV, RSV같은 영문번역들도 아래처럼 새번역 성서와 대동소이한 번역 방식을 보입니다.


1b

τδιακονίᾳ τκαθημεριν

2b

διακονεν τραπζαις

4

τδιακονίᾳ τολγου

새번역

날마다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다

말씀을 섬기는

공동번역

그날그날의 식량 배급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다

전도하는

개역개정

매일의 구제

접대를 일삼다

말씀 사역

NASB

the daily serving of food

to serve tables

the ministry of the word

NIV

the daily distribution of food

to wait on tables

RSV

the daily distribution

to serve tables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껄끄러운 궁금증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 본문에 나오는 문제 상황과 해결책이 잘 연결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이처럼 일관성 없게 번역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번역 때문에 구제 문제에서 시작해 뜬금없이 사도의 직무 문제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이 본문이 이해돼온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의 헬라어 ‘테스 크레이아스 타우테스(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는 4절의 “우리는 기도하는 과 말씀을 섬기는 에 헌신하겠습니다”와 대비시키기 위해 ‘이 일’로 번역됐으나, ‘크레이아스(χρείας)’의 원래 의미는 ‘요구’나 ‘필요’에 가깝습니다.[각주:1] 따라서 3절 후반부의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를 다시 번역하면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들었던 요구는 무엇이고, 왜 그 요구를 자신들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을 선출해 그들에게 맡기려 한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 안에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디아코니아’를 구호제도나 직무라고 보는 해석 전통을 따르지 않고 원래의 의미에 가깝게 통일해서 ‘섬김’으로 바꿔보면 아래와 같습니다.(밑줄 친 곳이 다시 번역한 부분입니다.)
1a.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1b.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1c. 왜냐하면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무시 받았기 때문이다.
2a.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2b.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식탁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
4.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습니다."
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2b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라는 표현입니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해 마치 두 일이 대비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다시 번역해보면 그것은 식탁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식탁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을 원래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2:42, 46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행전의 문맥 속에서 식탁 섬김과 말씀 섬김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질 때 공동체가 화합과 평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위의 해석을 보면 사도들은 말씀 섬김과 식탁 섬김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로부터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식탁 섬김에서 무시 받았고(1절),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에 대해 사도들에게 식탁 섬김에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3절), 사도들은 그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거절했습니다(2절). 그리고 식탁 섬김의 요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일곱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맡김으로써(3절) 자신들은 신앙적 소신을 지키며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4절). 그렇다면 이때 사도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의 충돌이 아니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의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소신에 위배된다는 점입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의 다른 본문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들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음식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데, 베드로가 보니 그것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먹을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세 번 거절합니다. 이 환상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예비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또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에는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나무란 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유대인적 정체적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게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 2:9) 중 한 사람인 게바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을 때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게바의 이 행위를 “위선”(13절)이라고 질타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 실천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에 대한 식탁 섬김을 유대인인 열두 사도가 거절한 것은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종교적 열심에서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보다 결코 뒤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주로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의 디아스포라(유대인 이산집단) 출신으로, 종교적 열심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가 예수 운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거나, 디아스포라에 소속돼 있을 때부터 이미 예수 운동을 접하고 매력을 느꼈던 이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헬라 말을 한다는 점 때문에 헬라문화에 우호적이며 따라서 성전제의와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의 준수에서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혼합주의적’ 경향을 보였을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헬라 문화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흡수, 타협, 전통 고수 등 다각적이었으며, 그 양상은 동방과 서방의 디아스포라가 각기 달랐습니다.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에 거주한 유대인들은 절대 다수가 유대적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도 더 성전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뛰어났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귀환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예수 운동에 소속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한 태도에서 유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팔레스틴 유대인들에게 ‘헬라인’이라는 호칭은 율법과 전통이 정한 신앙과 관습으로부터 이탈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방인’과 동의어였으며, 이는 곧 헬라인을 불경스런 자로 보는 경멸적 시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학자는 70년 이전까지 ‘헬라파 사람들’이란 표현은 ‘정통’을 자처한 바리새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다양한 사상과 관습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였다고도 말합니다.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이로부터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적어도 유대 중심적 가치관에서 배제된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점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1절에 등장하는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은 애초부터 동등한 주체로 성서에 소개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유대 사회의 주류집단과 하위 주체화된 집단이 예수 운동 공동체 안에 미묘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가정은 너무 순진한 시각일 것입니다. 설령 사도들이 식탁 섬김 참여 요청을 거절하기 전까지는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신앙 공동체 밖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존재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삶의 방식이 일종의 상식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 ‘위험한 상식’을 사도들이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동안 평화롭던 교회가 분배 문제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집사 선출로 타개하는 것으로 이해됐던 오늘의 본문은 새롭게 읽혀야 합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에서 일곱 지도자를 선출(혹은 이미 존재하던 지도자를 승인)하는 것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심지어 사도들마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위험한 상식이 신앙 공동체를 그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의 선출은 교회가 그 상식으로 인해 결국 분열돼나가는 상황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사도행전 주석서의 저자인 핸첸은 χρεία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궁핍, 필요”가 아니라 “직무, 일”을 의미했다고 주장했다. E. 핸첸 / 이선희·박경미 옮김, 『사도행전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404-405 참조. 그러나 그의 주장은 어떤 문헌 근거를 토대에 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의 글에는 참고문헌이 소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BDAG(바우어 헬라어 사전)의 ‘χρεία’ 항목을 보면 복음서와 다른 헬레니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필요’나 ‘요구’를 의미하는 용례를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 2:45, 4:35, 20:34, 28:10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명백히 ‘필요’나 ‘요구’와 관련 있다. 다만 BDAG에서는 행 6:3절의 경우 ‘필요한 해동(an activity that is needed)’의 용례로 보고 ‘직무, 의무, 봉사’를 뜻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때 ‘직무’는 제도화된 형태의 직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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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 위기의 지구화 시대 청소년이 사는 법

▷ 지은이 : 백소영ㆍ엄기호 외 지음
▷ 펴낸곳 : 도서출판 이파르
▷ 기   획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 한신대 평화와 공공성 센터
▷ 2011년 6월 30일 발행 | 값 12,000원 | 304쪽
▷ 분   류 : 사회>사회비평/비판>한국사회비판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지구화 시대 공공성의 위기와 청(소)년의 삶
지구화, 세계화의 폭력적인 확산으로 근대적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도처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공공성의 위기를 의미한다.
최근 공공성 논의가 부각되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지구화라는 길고 복잡한 터널에 진입하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의 공공성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지구화로 인한 공공성의 위기를 가장 격렬하게 몸으로 체현하는 연령적 계층인 청(소)년에 집중하는, 한국적 공공성의 인문학을 모색한다.     

잉여와 잉여짓, 청(소)년의 고통과 저항은?
지구화 시대 공공성의 위기로 청(소)년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미래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청(소)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자, 곧 잉여가 되고 있다. 또한 잉여로 전락하지 않은 청(소)년들도 그들의 많은 행동들이 잉여짓으로 분류되는 고강도 규율 아래 놓여 있다. 
자원화될 수 없는, 쓸데없는 짓으로 낙인찍힌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되는, 오직 스펙 쌓기 머신이 되어야 하는 청(소)년, 그들의 고통과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제1부는 이러한 청(소)년의 고통을 다룬다. 청(소)년의 자기 진술을 듣고, 그 배후를 추론하여, 지구화 시대의 공공성의 위기의 맥락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 이것이 제1부의 목적이다.
제2부와 3부는 청(소)년의 저항을 다룬다. 제2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저항은 잉여짓을 적극적으로 재전유하는 청(소)년의 창조적인 행위들에 관한 것이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재전유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체제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제2부는 그러한 탈주, 탈주체화의 기록들이다.
제3부는 그러한 저항을 제도화하는 시도들을 다룬다. 즉 재주체화의 기록들이다. 그 과정은 때로는 기성의 제도를 개혁하는 실천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성 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제3부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 저항의 양면을 점검해보는 글들을 모았다. 

기획 과정
이 책은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가 주최하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우리신학연구소가 주관하여 2010년 11월에 3회에 걸쳐 진행한 평화와공공성 콜로키움을 발전시켜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와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 기획주관을 맡아,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4편의 글을 수정 보완하고, 추가로 8편의 글을 청탁하였다.
백소영 외에, 인류학자 엄기호, 신학자 구미정, 문화기호학자 김수환 외 10명의 필자가 참여해 12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출간일에 맞추어 필진의 일부가 다시 모여 비공개 집담회를 열어 향후 작업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책의 외연. 공공성의 인문학이라는 기획에 대하여
공공성에 관한 논의가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 책의 기획진과 주관 단체인 두 연구소(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는 공공성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 책의 방향과 향후 공공성 담론의 방향에 대해 잠정적인 논점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적인 공공성의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존의 공공성 담론은 지구화 시대의 위기를 공공성의 위기의 관점에서 다룬다.
하지만 우리는 공공성의 위기라는 말은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임에 주목한다. 즉 공공성의 위기는 근대 민주주의의적 기획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위기에 빠뜨린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의 위기를 다루는 공공성의 인문학은 근대 민주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공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탈근대적인 인문학적 시도이다.
한편 공공성 담론은 국가와 종교, 국가와 시민사회 등과 같은 거시적 주제를 중심으로 공공성의 위기와 대안을 물었는데,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은 구체적인 위기의 현상 읽기에서부터 물음을 시작하고자 했다.
이 책이 청(소)년을 말하고, 그들로부터 잉여짓에 관해 청취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인류학적 연구나 문화연구 등에서 이미 시도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공공성에 관해 묻지 않았다. 반면 공공성 논의는 미시현장의 소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이 두 별개의 논의를 공공성의 인문학적 시각에서 연결시키고자 하였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은 중범위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한국 사회의 공공성의 위기를 살피는 작업은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이 한국의 지역학적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음을 뜻한다.  
한국적 공공성의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우리는 이 책에 한정하지 않고 더 발전시켜 다룰 예정이다. 곧 이 책은 그 첫 번째 모색이다.
향후 계획에 관해 이 책의 기획진은 생각을 다듬고 있는 중이다. 
 
저자 소개(가나다 순)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구미정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김강기명  연구집단 CAIROS 연구원
김수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
유승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
연규홍  한신대 교수.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 소장
이규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차 례

머리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제1부   고통

         잠재성을 잉여라 부르는 세상__백소영

         이것은 우리 잘못이 아냐!
                   ―세 청년의 이야기__엄기호


제2부   저항 하나
        제도에 흠집 내기 

         청(소)년의 패러디 문화, 잉여짓 또는 잠재적 혁명성?__백소영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
                  ―웰 컴 투 더 <이말년 월드>__김수환 

         학생들과 무슨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백에서 증언으로의 전환__엄기호 

         김예슬 선언에 나타난 엑소시즘
                   ―지구화 시대의 시장 귀신 내몰기__ 구미정  

         도시, 청(소)년, 그리고 정치의 한 방식
                   --홍대 앞 두리반과 청(소)년의 집합행동__김강기명

제3부  저항 둘
       제도를 창안하기 또는 포섭하기 

         촛불과 팬덤
                  --팬덤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팬덤화__이규원
        
         단기 선교와 자발적 섬김
                  --지구화 시대 개신교적 주체 형식__유승태
        
         카리스마 운동이 추구하는 신앙과 공공성
                  --지구화 시대 천주교적 주체 형식__경동현

         자기를 이야기하는 청(소)년, 세계와 적대하는 인간__정용택


맺음글   잉여의 시선으로 공공성의 인문학을 꿈꾸다__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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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차 월례포럼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하고 우리신학연구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한국사회 우파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포럼으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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