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라!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욕망으로의 초대


   근대 주체철학의 신화가 완성되던 무렵 근대성 일반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 천재들이 19세기에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맑스(Karl Marx, 1818~1883)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그들은 각기 서양 주류철학이 걸어왔던 관념과 의식과 이성 중심주의에 맞서, 물질과 무의식과 반이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욕망담론은 무의식과 반이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던 그때로부터 1세기가 흐른 현 21세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욕망에 대한 사유는 전통 사상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깡, 그리고 근래 지젝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 내지 윤리화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욕망인가. 이 대목에서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금부터 논의하게 될 욕망담론은 자본의 무한질주에 따른 소비에 대한 욕구와 충동을 격려하고 뒷받침하는 이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21세기 현실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언명법은 자본이다. 거대하고 막강한 자본이 선사하는 강제로 인해 지구촌 인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지만, 지옥과도 같은 자본의 압제를 벗어날 전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에 욕망이론이 현실 저편을 지향하면서 현실을 넘어가는 에너르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혹시 자본의 막강한 벽에 균열을 가하거나, 그 벽을 타고 넘을 힘을 제공하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사람들은 욕망이론을 펼쳐든다. 그럼 지금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탑승하기로 하겠다.


욕망이 출몰하기까지


   정신분석학의 기본명제는‘모든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는 것이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욕망은 억압의 산물이고 귀환을 일으키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욕망이 담론사에서 정식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이라는 걸출한 정신분석가로 부터가 아닐까 싶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어났던 예수운동이 바울을 통해 세계화되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했듯이, 이념으로서의 맑시즘을 실천철학화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견인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학의 발전과정에서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계도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라면, 라깡의 경우는‘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와 규범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남근(pennies)은 라깡의 남근(phallus, 팔루스)과 다르다. 전자가 단순한 생물학적 성기라면, 후자는 상징계(the Symbol), 즉 사회적 인정과 권위를 나타내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는 생물학적 성기에 대한 제거의 공포라기보다는, 자기의 사회적 자리와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박탈되는 것에 대한 공포이고, 이것이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남겨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적 해석의 틀로 확장시킬수 있었던 원인은 그의 언어관에 있었다.

    1953년 라깡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외치면서 본인 이론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라깡은 본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언어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특별히 그는 유아가 말을 배우는 시기인 6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울단계(mirror stage)’라 불렀다.

    라깡이 ‘거울단계’를 끌고 오는 이유는 분명하다.‘상상계(the imaginary)’를 언급하기 위함이다.‘거울단계’의 아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고, 정신적, 육체적 발달이 안 된 불안한 상태이지만,‘거울단계’아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낙관적이고 낙천적이다. 양육자(예: 엄마)와의 관계에서 100%의 쾌락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는 자신과 양육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이처럼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때리고도 자기가 맞은 것으로 오인하고,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울기까지 한다. 라깡은 이 시기를‘거울단계’라 부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유아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거울과 나를 분리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세상의 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유아와 양육자사이 형성되었던 2항 관계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깨지고 만다. 아이는 엄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하고 내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거대한 타자의 등장으로 폭로되고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때 아이는 자기의 성기가 색정의 원인이므로 아버지가 자신의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는‘거세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체념 속에서 근친 상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자신을 현실원리에 적용시키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 시기가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시기와 겹친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면서 타자를 만나고, 내안으로 침입하는 타자의 개입을 참아내면서 아이는 자라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배우고, 단어를 익히고,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시스템속으로, 즉 기호의 세계, 상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언어의 습득은 아이로 하여금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이전단계(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100% 쾌락이 붕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이때‘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이다. 이것은 사회를 작동케 하는 원칙들, 예를 들어, 도덕, 관습, 법, 관례, 예전, 이념 같은 것들이다.


욕망의 심층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심층으로 내려가보자. 라깡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설명하기 위해 ‘the ideal ego(이상적 자아)’와 ‘the ego-ideal(자아이상)’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각각은 상상적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동일시와 쌍을 이루는 말이다. 지젝은 상상적 동일시를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표상하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 당하는 장소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소를 동일시 함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고 좋아할 만하게 보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엄마의 젖가슴 만으로도 충분히 엄마와 합일이 가능했던 아이에게, 어느 날 엄마가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만 나와 합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고 치자.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젖가슴을 만지는 나로 만족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성화다. ‘너는 교수다!’ ‘너는 의사다!’ ‘너는 박사다!’ 이렇듯 엄마는 자신의 젖가슴만을 탐닉하면서 상상계속에만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닌, 교수, 의사, 박사, 판검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표화 된 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제시하는 이름표(기표)를 따는,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라깡은 desire와 jouissance를 구분한다. Desire은 상징계속 주체가 갖는 욕망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다.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되고 CEO되는 것과 같이 어떤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다. 남이 좋아라 하는 시선을 내가 따라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상징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볼까?’ 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고, 신부의 집안 배경은? 혼수도 얼마나 했는지? 예식장은 어디? 신혼여행은? 이 모든 사항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정되고 꾸며진다.

   반면, jouissance는 상상계에 남겨진, 혹은 상징계로 진입할 때 제거당한 내 마음 속 잔여를 향한 욕망이다. 어쩌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통과의례를 경험한 주체는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 깊숙히 간직한 주체다. 왜냐하면, 상징계속 주체(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원래 아기(상상계속 주체)가 지녔던 것 중 일부가 상징계속 주체안으로 편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시카고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한백교회 담임목사이고, 한신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상철이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말로 나를 다 표현할 수 있나? 뭔가 헛헛하고 아쉽고 섭섭하고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상징계속 이상철, 현실 속 이상철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상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즉 잔여다.

    이런 이유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상상계속 자아의 일부를 상징계로 진입하는 도중에 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spaltung(파열)이라 말한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자궁을 뚫고 나올 때, 엄마의 배가 찢어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낯선 타자와 직면하는 고통을 견뎌야 아기가 살 듯, 상징계의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상상계라는 제2의 자궁을 뚫고 나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은 드디어 인간(人間)이 된다.


슬라모예 지젝 曰 : "하지만, 이건 아니올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계속 나의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속 타자들의 욕망이다. 이를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결부시키면 이렇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역사를 회고해보라.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와 열사가 등장하여 조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가.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위해, 수출강국을 위해,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 진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가. 진보진영에도 강력한 대타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보수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기표를 흠모하면서 행위했다. 대타자의 음성은, 그것이 보수의 목소리든 진보의 목소리든 간에, 현실의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를 뒤에서 조정하던 실세였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현재화할 때 사용되는 해석의 준거였고, 우리의 미래까지를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묵시였다. 욕망이란 대타자의 목소리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동되는 주술이라 보면 맞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대타자가 지니고 있다는 권위와 숭고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한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 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 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타자가 실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를 몇 해 전 개봉했던 영화‘국제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국기 하강식을 하던 시절, 전 국민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부동자세로 태극기를 바라보던 장면이 영화에서 연출되었다. 그 영화 개봉 이후 누군가에 의해 국기하강식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다소 소란스러웠다.

    웬 국기하강식?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종북 좌파 빨갱이로 몰린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비록‘반공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비어있는 텅 빈 기표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세계인 대한민국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형태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근본주의는, 대타자를 향한 확고한 집단적 도착적 믿음위에서 탄생하였고, 그 믿음을 먹으면서 성장하고 나서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대상을 향해서는 광기를 표출하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중간정리) 쉽게 이해하는 욕망論: “라면 먹고 갈래요?” 


    앞서 우리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본능에서 초자아로, 자연에서 문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제도로의 이행을 뜻한다고 배웠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상상계에서 가졌던 양육자와의 완벽했던 양자합의 관계가 깨어지는 상실과 아픔을 경험한다. 누가 그랬던가 아픔만큼 성숙해진다고.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성숙이란 요구와 욕구사이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슬픔과 상실을 견디는 법이겠지만, 그 작업은 언제나 실패하여 욕망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욕망은 요구와 욕구사이의 함수관계에서 결정된다. 욕구는 보통 생리적 욕구다. 배고프면 먹고, 배설하고 싶으면 싸는 그런 욕구 말이다. 요구는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고시원에 혼자 사는 비정규직 열정 페이 청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배가 고파서 (텅 빈)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진다. 엄마가 차려준 집 밥도 생각나고, 하루 종일 일하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오는 자신의 처지도 처량하다. 라면을 두 개나 먹어 배가 불러 욕구가 해결되었는데 뭐가 문제지? 아마도 그(녀)가 원했던 것은 라면이나 밥이 아닐런지 모른다. 그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닐까.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안에 담긴 사랑 이라든지,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먹던 저녁상가에서 벌어졌던 수다와 웃음이라든지...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구의 영역이다.

    라면을 이용한 욕망계산법의 유명한 예화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 등장한다. 연상녀 이영애는 늦은 밤 문밖에 서있는 연하남 유지태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제안을 한다. 연하남 유지태는 정말 라면만 먹고 그 집에서 가만히 무사히(?) 있다 나온다. 정말 착한 교회오빠 스타일이다. 두 남녀가 이해한 "라면"은 서로 다른 의미였다. 연하남 유지태는 라면을 배가 고플 때 먹는 육체적 욕구의 대상으로 해석을 한 것이고, 연상녀 이영애에게 있어 라면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심리적 요구였다. 나의 허기진 마음을,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나의 이 쓸쓸함을 알아주고 만져주라는 싸인이 라면인데, 아직 세상을 몰랐던 유지태는 이영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나중에 둘은 헤어지고 마는데... 잘 헤어졌다!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따져 묻지만, 순수가 얼마나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지, 사랑이 때로는 얼마나 저열하고 구질구질하고 남루한 현상인지를 어린 유지태는 몰랐다. 그런 유지태가 여인 이영애에게는 버거웠던 것이고. 그 영화를 보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영애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도 속물이, 아니 성인(成人) 되어가나 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생리적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헛헛한 무엇이 항상 나의 무의식을 맴돈다. 그것은 욕구와 요구사이의 차이 혹은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상상계에서 누렸던 요구의 100% 충족이 상징계속 대타자의 개입으로 깨어짐을 전제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욕망이 출현하는 진앙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이해를 갖고 빨강구두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으로 넘어가보자. 거기에는 또 다른 욕망의 세계가 펼쳐진다.


빨강구두와 죽음충동


   Google에서 ‘Red Shoe’를 쳤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고급에로영화의 대명사인격인 잘만 킹 감독의 시리즈 포스터들이다. 한국에서 방송되는 <사랑과 전쟁>의 미국판 19금 버전이랄까. <사랑과 전쟁>은 이혼직전 남녀가 변호사에게 찾아와 당신들의 입장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는 한 남자의 우편함으로 배달된 여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들이 겪었던‘사랑과 전쟁’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과 배신, 잘못된 만남, 어긋난 사랑, 뒤늦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성적 환타지를 아주 농익은 영상으로 수놓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빨간 구두’란 그야말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고 조절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미끄러져 가는 욕망의 기표다.

잘만 킹 감독의 <Red Shoe Diaries> 포스터


    안데르센 동화 <빨강구두>에 등장하는 소녀가 신은 구두가 그렇다. 마치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동하는 근육인 불수의근(involuntary muscle)과 같다. 심장에 있는 근육, 소화기관이나 생식기관에 있는 근육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을 뛰게 하고 소화의 촉진을 도우며, 성기를 빳빳하게하는 자동인형 같은 근육이다. 동화에서 소녀는 춤을 추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녀가 추는 춤이 아니다. 빨강구두가 추는 춤이다. 그녀의 춤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구두가 끼워져 있는 발을 잘라내는 것이다. 결국, 빨강구두는 나와는 상관없이 보이나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고,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로 하여금 끝없이 춤을 추게 하여 발을 잘라내야 한다는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 충동’과 상관한다.

    ‘죽음 충동’이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오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겠다. 삶에 대한 충동인‘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생명을 끊으려고 삶의 에네르기와 단절하려는‘죽음 충동’은 그 제목부터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심지어는 엽기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죽음충동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의 전기사상이「꿈의 해석」(1889)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그의 후기 사상은「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와「자아와 이드」(1923)에서 언급하는 이드(Id)-에고(ego)-초자아(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에 관심한다. 특별히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욕망을 두 차원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에로스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와 반대적인 에네르기라 할 수 있는 죽음충동(타나토스)이다. 에로스가 삶에 대한 충동이라면, 죽음충동은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에 반하는 에네르기인 셈이다.

   ‘죽음 충동’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와 실재(the Real)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란 상징적인 세상 밖에 있는 초월적 실재(absolute being)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다르다. 내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그 무엇, 상징시스템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전제하고 이미 상징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상징시스템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빨강구두가 그런 것 아닌가. 내안에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나와 붙어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실재이고 그것이 빨강구두인 셈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이성을 바탕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역사의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주체는 어쩌면 근대성이 부여한 환상일런지 모른다. 우리를 완성된 주체로 만드는 요인은 빨강구두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우리조차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영역 때문 아닐까. 그 이질적인 것들이 출몰할 때 주체는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것 아닐는지.


파국의 욕망, 혹은 욕망의 파국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징계 속 주체는 결핍과 결여의 존재다. 상상계에서 누렸던 100% 쾌락을 거세당한 채 사회화과정을 밟으며 성장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은 드러나지 않지만, 인생의 고비고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멀스멀 올라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욕망은 어쩌면 그 결여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인간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욕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대타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망은 모른다. 돈을 많이 벌어도, 박사학위를 받아도 멋진 신랑 신부와 결혼을 해도, 성형수술을 해도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알고 싶어서‘케 보이(Che Vuoi)?’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죽음충동은 이 순간에 발동한다. 온갖 내공을 다 부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삶의 에네르기는 방향을 틀어 묻는다.‘죽어버릴까. 내가 죽어버리면 대타자는 만족하지 않을까. 죽으면 이 쓸쓸함과 공허와 이별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지친다. 죽자, 죽어버리자’어쩌면 우리의 근원적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의 진정한 의도는, 마치 수학(數學) 극한(Limit)에서 0을 향해 무한히 수렴(收斂)해 가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무한질주 아닐까. 그렇다면 욕망과 존재의 근원인 제로(Zero),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구원으로 이르는 계단 아닐까. 그 비상구는 에로스로 차고 넘치는 욕망의 거리에 있지 않고, 타나토스가 똬리를 틀고 앉은 욕망의 이면 어느 텅 빈 구멍 속 아닐까.

   정신분석학에서는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지젝은 라깡이 죽음충동을 성령으로 이해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근거로 성령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우리가 성령 안에 우리의 위치를 정하면 우리의 존재는 성스럽게 변하고 생물학적 삶 너머에 이는 또 다른 삶으로 진입한다.” 성령을 죽음충동과 연관시킨 대목은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성령임재 사건들이 갖는 특징을 언급하라면, 한마디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상징계 속 기표와 욕망과 기억과 경력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기득권을 어찌 다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로 인해 역사의 물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무너질 것 같이 않았던 전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완고했던 시스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성령을 체험했던 모세에 의해 파라오는 무너졌고, 성령을 체험한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면서 제국의 기독교화는 시작되었다. 성령을 체험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과 흑인간의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넘었고, 성령을 체험한 문익환 목사는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성령, 즉 죽음충동이 임하자 자아는 사라지고 텅 빈 충만이 자리했고, 그 힘으로 그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욕망의 전복성


   요약하면, 욕망은 삶에 대한 욕동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한 욕동인‘타나토스’로 구분될 수 있겠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빨강구두’는 삶에 대한 애착과 환희를 향한 욕망인‘에로스’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발을 잘라내어야만‘빨강구두’가 추는 춤이 중단되어 원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죽음 충동’을 닮았다.‘빨강 구두’로부터 시작된‘죽음 충동’은 현실 속 그 무엇도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의 욕망은 현실 저편의(혹은 아래의) 무엇을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불신과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해왔던 완벽한 대타자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보편성의 중핵이 텅 비어있다는 욕망이론의 발언은 통쾌하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완고한 신자유주의의 보편성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놓고 골몰하던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의 제안은 현실의 원칙에 집착하는 욕망이 아닌, 상징계 너머에 존재하는, 아니 상징계의 텅 빈 중핵을 겨냥하는 욕망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상이 21세기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자본에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틈을 통해 진입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노래하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이 제안하는 욕망은 전복적이고 급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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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서평 1 : 양육 너머의 문제들



신윤주*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병적 사랑과 새로운 삶을 위한 급진적 자기 포기로서 죽음 사이에 선명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한 알카에다 대원은 "부당한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너희가 삶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의 선언 앞에서 죽음충동과 정치적 전략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각주:1]

-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  


 

    지난 7월 26일, 프랑스 북부의 생테티엔 뒤 루브래 성당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가 자행되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인 두 청소년이 공모한 테러였다. 이들은 오전 미사를 집례중이던 자크 아멜(84) 신부의 목에 자상을 입혀 살해했고 세 명의 수녀와 한 노부부를 인질로 잡았다. 신고를 한 것은 잡혀있던 인질 중 탈출한 어느 수녀였다. 이후 두 청소년은 당국에 의해 사살되었다. 공모한 청소년 중 아델 케르미슈Adel Kermiche는 지난 2015년에 시리아에 있는 극단주의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시도하다가 구류되었다가 풀려나면서 보호관찰 하에 전자발찌를 하고 있었고, 반면 동부 프랑스 출신의 공범, 압델-말릭 쁘띠장Abdel-Malik Petitjean의 경우는 관련한 특이사항이 없다. IS의 대표적 선전 매체로 알려진 아마크 통신은 두 청소년이 IS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내용의 증거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NBC 뉴스는 이 사건이 IS에 의해 구체적으로 지시된 정황은 없다고 보도했다. 쁘띠장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IS에 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각주:2]

    그리고 약 17년 전인 1999년 4월 20일, 미국의 콜로라도 주의 한 도시인 리틀턴에서 일면 유사점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각주:3] 마찬가지로 두 명의 청소년이 공모한 이 사건은 이후 모방 범죄의 모델이 되어 더욱 문제가 되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격 사건이다. 콜럼바인 사건을 다소 상세하게 정리해놓은 위키피디아 페이지에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대량살상"[각주:4] 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계획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총기 외에도 폭탄으로 사용할 프로판 가스통, 아흡아홉 개의 폭발 장치, 자동차에 설치한 폭발물의 사용을 시도했으며, 결과적으로 총기를 사용하여 열두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를 사살했고 스무 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두 명의 사망자가 있다. 바로 이 사건의 두 공모자, 18세의 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17세의 딜런 클리볼드Dylan Klebold이다. 이들은 계획한 일을 마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해 2월,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는 콜럼바인 사건과 아들 딜런에 관하여 쓴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A Mother's Reckoning』(반비)라는 제목으로 지난 달에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각주:5] 출판사 서평에서 소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올해는 콜럼바인 사건이 일어난 해로부터 17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기간은 저자의 아들 딜런이 이 세상에 살았던 17년과 동수이기도 하다. 콜럼바인 이후 그날의 참혹한 비극을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고 믿었으나 결코 알 수 없었던 아들을 오롯이 헤아리기 위해 저자에게는 열일곱 해의 세월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세 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23)  


   우리는 아이들에게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 등을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자기 뇌의 건강을 잘 살피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기 뇌건강을 건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몰랐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후회는 딜런에게 그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442)


   위에 옮긴 첫 번째 인용문은 펴내는 글을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말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442쪽의 여정을 지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을 통해 해야만 했던 말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는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회한이 압축적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이 두 문단에는 어떤 '변화의 결과'와 '변화의 어려움'이 공존한다. 사건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딜런과 에릭의 가정을 의심했다. 딜런의 어머니인 저자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양육 방식을 의심하고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량살상을 계획한 이 청소년에 관한 책임을 단순히 특정 부모의 양육방식parenting에 돌리기에는 상당히 복잡 다단한 사회적 문제들이 한데 얽혀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콜럼바인 고등학교는 학내 괴롭힘의 문제가 심각한 곳이었다. 약한 아이들은 운동부 학생들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고 육체적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스스로 도덕적 엘리트임을 내세운 복음주의 기독교 학생들은 일부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개종을 강요하곤 했다. 한 학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가 머리에 불을 붙이는 식으로 괴롭힘을 당해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복도에서 폭력적인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교사들은 못 본 척했다. 딜런의 경우에도 괴롭힘을 당했다는 정황들이 있는데 일례로 게이라는 조롱, 옷에 케첩을 뿌리는 일, 차를 찌그러트려 퓨즈박스를 망가트리는 일 등이었다.[각주:6]  


    학교 폭력 문제 외에도 총기류에 대한 노출의 문제가 콜럼바인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다양한 종류의 영상물과 비디오 게임을 통해 청소년들이 폭력적 장면과 자극에 노출되고 있는데,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만 13세 이상의 청소년들이 총기를 사용하는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는 경우가 30년 전에 비해 세 배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폭력적인 영상물에 대한 접근성이 바로 콜럼바인 사건과 같은 일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구매하는 비율 자체는 일본의 청소년 사이에서 더 높게 나타나지만 일본에서 대량살상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변인이 폭력에 대한 노출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량살상이 가능한 조건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내 학교에서 총기사사용건을 일으킨 학생들의 68퍼센트가 자신의 집이나 친척으로부터 총을 입수했다고 한다.[각주:7]  

    그러므로 콜럼바인 대량살상은 특정 지역사회 내에, 한 국가 안에, 현 시대의 문화 속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던 폭력성이 면밀히 상승효과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던 비극적 사건으로 조명해야 마땅하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역할은 수 클리볼드가 지적한 바,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속한 지역사회와 국가와 문화와 매체의 흐름에 주목하고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연대하고 노력함으로써 자녀들 개인으로서 가정 밖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정감 있게 실험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기 위하여 작은 참여와 실천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본문에서 치아 관리나 용돈 관리 등에 관한 것과 더불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사회적 연대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뇌의 건강"에 관한 관심이다. 저자는 아마도 딜런의 일차 양육자로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되었던 것인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던 수 클리볼드에게, 뇌과학은 그의 질문에 가장 적절한 길을 열어주었다. 수 클리볼드가 잃어버린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을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데 다른 어떤 조각보다 큰 역할을" 하는 어떤 하나의 조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뇌건강의 문제였다. 물론 뇌건강 문제가 "딜런이 한 행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폭력과 광기를 자동적으로 연결짓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도 않는다. 다만 정신질환과 폭력의 교집합이 발견되는 적은 비율, 4퍼센트의 경우에 딜런이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각주:8]

    특히 뇌건강 문제와 총기 난사 사건 사이에 접점이 있다. 1999년, 콜럼바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국토안전부 비밀경호국과 교육부가 '안전한 학교 계획'을 발표했다. 37건의 학교 총격 사건을 검토하여 재발을 막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범인들 대부분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 이력이 있으며 극도의 불안 혹은 좌절을 경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뇌건강 상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폭력을, 그리고 자살, 섭식장애, 약물·알코올 남용 등 십대들이 마주한 여러 위험을 예방하는 데 핵심이 될 수 있다. (250) 

   저자는 '정신질환', '정신건강'이라는 말 대신 '뇌질환', '뇌건강'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선호한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지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서 사회의 낙인을 벗겨내고", 그러면서도 폭력적 행동을 취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가정하고 있는 것은 자살로 죽겠다는 욕망을 할만큼 심각한 우울에 빠진 바로 딜런과 같은 사람들을 포함한다. 신경과학자 제러미 리치먼 박사가 수 클리볼드의 접근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 '정신' 대신에 영상으로 보고 측정하고 수량화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는 '뇌'에 집중하여 이해의 범위를 "뇌건강과 뇌질환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9]

   그러나 정신역동의 개념과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을 연결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 뇌를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인 신경정신분석Neuropsychoanalysis이 있다. 일부에서는 신경정신분석을 1985년에 프로이트가 발표한 『과학적 심리학 초고』의 프로젝트를 잇고 완성하는 작업으로 본다. 정신현상과 뇌라는 두 차원을 잇는 매커니즘은 불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현상의 신경 상관물을 찾는 것은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며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일단 한 번 가공된 이후에야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경계의 활성은 '언어'를 통해 가공되어 정신현상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동시에 언어로 가공되지 않은 채 아직 활성화 되지 않은 신경계가 간과될 수도 없다. 약물치료는 이렇듯 비활성화 상태인 신경계를 활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신경계의 활성 자체가 곧장 주체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신경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약물치료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가 증상개선을 위한 하나의 옵션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뇌과학의 발전과 그 결과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대상이 인간 주체인 이상 정신분석은 여전히 필요하다.[각주:10]

    향후 이어질 글에서는 수 클리볼드가 뇌과학을 통해 우울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소간 결을 달리하여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우울을 포착해보고, 이러한 우울이 테러리즘으로 이어지는 어떤 경우들에 관하여 논의를 좀더 이어갈 것이다. 도대체 어떤 모호성 혹은 복잡성 때문에 수 클리볼드를 만나거나 그의 글을 읽은 다수의 독자들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었을까?  


 한때 좋은 삶이라는 게 있었어. 좋은 아빠가 되어 주말엔 피크닉을 가고, 잠자리에서 이야기 책을 읽어주고, 그렇게 아들을 품위있고 충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 그게 미국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것을 제대로 했지. 그러므로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 [각주:11]

-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 -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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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옮김 (생각의나무, 2007), 195쪽. [본문으로]
  2. http://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4168, http://www.nbcnews.com/storyline/isis-terror/france-church-attack-abdel-malik-petitjean-was-known-potential-radical-n618661 [본문으로]
  3.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 성당 테러의 케이스에 관한 조사는 좀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청소년 가해자 두 명이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둘 중 좀더 주도적인 한 명이 가학적 성향을 보이고 나머지 한 명은 쉽게 영향을 받는 성향인 듯하는 점을 통해 유사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다. 콜럼바인고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2001년에 학교 총격 사건의 청소년 가해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해자 중 25%가 짝을 이루어 움직였다는 점, 그리고 두 아이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영향을 쉽게 받고 의존적 성향이 있고 우울에 시달린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forensis.org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인용한 것을 참조) [본문으로]
  4. https://en.m.wikipedia.org/wiki/Columbine_High_School_massacre [본문으로]
  5.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본문으로]
  6. 수 클리볼드, 위의 책, 302-307쪽. [본문으로]
  7. FULL INTERVIEW 20 20 Diane Sawyer Sue Klebold Mother of Columbine Shooter Dylan ABC 2/12/16 (https://m.youtube.com/watch?v=zHRcF-pFGYI&autoplay=1); 더불어 총기소유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통찰이 담긴 서보명 교수의 글의 일독을 권한다. (제3시대 웹진 87호, [비평의 눈: 미국의 묵시록 6] 총의 묵시록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m/post/647)) [본문으로]
  8.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49-250쪽. [본문으로]
  9. 수 클리볼드, 위의 책, 251쪽. [본문으로]
  10. 김규호, "뇌과학과 정신분석," 「FiLUM」 3(2015), 19-21쪽. [본문으로]
  11. 라이오넬 슈라이버,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송정은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2), 595쪽. 2011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이 소설은 공교롭게도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사에서는, 모성 이야기와 심리 스릴러가 절묘하게 혼합된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설정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인용한 부분은 서간문으로 써진 이 소설의 화자인 에바(케빈의 어머니)가 수신자인 프랭클린(케빈에 의해 살해된 자신의 남편)을 향해 건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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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윤주
    2016.08.18 00: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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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입니다.ㅎㅎ 마지막 단락은 인용문과 인용문의 미주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편집 간사님께서 댓글을 확인하신다면 수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2016.08.18 00: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죄송합니다. 수정되었습니다. ^^

[바울신학가이드16]



지젝과 바울(I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도착에 빠진 세계와 기독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는 되도록이면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더 느끼려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하였다.[각주:1] 여기에서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이란 보통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쉽게 설명하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면 인간은 흥분상태가 된다. 이것이 고통의 상태, 또는 불쾌한 상태이다. 그런 증감된 흥분을 낮추어 주는 것이 바로 쾌락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쾌락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각주:2] 이렇게 보면 쾌락-불쾌는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경제학적 관계에 있다. 불쾌함의 강도, 즉 흥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락의 폭도 증가한다. 즉, 불쾌함을 열심히 저축하면 더 많은 쾌락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어린이는 즉각적인 해소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 어린이가 커서 현실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불쾌를 참아내면서 자신에게 허용된 쾌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허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법 (Moral Law)이다. 만약에 인간이 그 허용치를 넘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 한다면 더 이상 쾌락원칙이 통하지 않게 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라깡은 그 이후 부터의 어떤 상태를 쾌락이란 말과 구분되기 위해 향유(Jouissance)라는 말로 표현된다.[각주:4] 이제 쾌락을 넘어선 향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각주:5] 그래서 향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되는데, 하나는 어떤 중요한 법에 대한 위반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고통과 죄책감을 뜻한다.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고통에 따라오는 즐거움. 아마 이것이 향유에 대한 간단한 정의가 될 것이다. 바로 쾌락과 불쾌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 속에서 쾌락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불쾌를 넘어서는 고통인간은 바로 이런 향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했다.[각주:6] 아담 커스코는 다음의 예를 통해 지젝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도덕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려는 한 구도자를 상상해 보자. 일체의 욕망과 욕구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타자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으로 그 삶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욕구와 성적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속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육체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삶도 아니고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의 행위가 필요하다. 즉, 어느 정도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지젝은 ‘inherent transgression’ (내장된 위반)이라 하였다. 예를 들면 규정속도 시속 1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에서 5킬로 정도는 더 과속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듯이, 철저한 법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에는 이미 약간의 위반을 전제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바로 초자아적 목소리 (법을 지켜라!)에는 “향유를 즐겨라!”라는 목소리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 (Obscene superego supplement)라 하였다.[각주:7] 기억해 두자. 이러한 향유와 초자아, 달리 말하면 ‘big Other’ (대타자)의 관계가 더 과도해지는 것을 지젝은 ‘도착’ (Perversion)이라 부른다.  

   자, 이제 지젝과 기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Perversion (도착)이라는 개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원래 프로이드는 이성애에서 정상적인 성행위를 벗어나는 것을 도착이라 불렀으나 라깡은 이후 프로이드가 내린 정의를 변형시켜 성적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임상적 구조로 정의하였고, 자연적인 기준으로 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각주:8] 이 단어가 지젝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향유(jouissance)와 대타자(the big other)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중 하나를 ‘도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가 있는데, Psychosis, perversion, and the two forms of neurosis: obession and hysteria가 그것이다.)[각주:9]


   이러한 향유의 차원은 상징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상징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 (The big other)안에서 결여를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면서’ 향유적 존재인 인간을 여전히 이데올로기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도착’이란 증세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며 히스테리, hysteria에 대해서 지젝은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담 커스코는 도착이라는 개념에 지젝이 점점 집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유명한 말인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the perverse core or Christianity)으로부터 지젝과 기독교의 다리놓기를 시도한다고 말한다.[각주:10] 커스코는 여기서 지젝에게 도착이라는 것은 완전한 윤리적 실패 (the ultimate ethical failure)란 것을 강조한다.[각주:11] 지젝에 따르면 도착이란 스스로를 타자의(the Other’s) 향유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외설적 초자아의 보완재’로 직접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경계들 사이를 읽고 도덕적 법이 실제적으로 위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즉, “도착은 바로 ‘내재된 위반’인 것이다.”[각주:12]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는 공식적 도덕법을 지탱하고 도착은 법을 강화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며 도착적 쾌락은 바로 그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착은 전복이 될 수 없다.”[각주:13]

    지젝은 가장 도착적인 예로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를 든다. 도착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안내로써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편으로는 수긍할만한 공개적인 얼굴 (예수는 사랑을 가르친 ‘좋은 사람’)을 놓고 그 밑에는 외설적인 향유 (바로 복수하는 하나님)를 놓아두는 것이다.[각주:14] 동성애자들을 죄인으로 혐오하고 심판을 외치는 사랑 많은 목사님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 (증오와 사랑)은 드러난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상식적인 도덕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다종교사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종교에 대해 비방과 증오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겉보기에도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타종교의 성지에서 땅밝기를 한다거나)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이나 도덕에 비추어 보았을때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강력한 필요성 (하나님 나라를 위한)에 의해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확히 그 겉 사랑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착적 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각주:15] 결국 위반을 통한 고통을 포함한 쾌락 (향유)에 의해 기독교 근본주의는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 앞장에서 논했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로서 기독교를 기억해보자. 신앙인이 교회에 들어가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면 그들은 하나님, 또는 교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보기에, 또는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길은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결국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비록 계속 교회의 이데올로기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것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neurosis)적 증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책임을 본인에게 지울수는 없기 때문이다.[각주:16] 그러나 도착적인 상황은 다르다. 바로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착적 상황이 편만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대사회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의 향유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라는 지젝의 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각주:17] 

    바로 이 지점이, 나의 판단에는, 지젝의 담론으로 윤리와 신학이 파고 들어오는 곳이다.


지젝의 바울, 도착적 기독교의 해결책



    지젝과 신학의 관계가 밀접하다 못해 지젝이 신학을 이용하여 그의 철학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을 쓴 아담 커스코이다. 커스코는 지젝이 자신의 체계와 진리담론의 한 예로써 바울을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바디우는 다음편에서 논할 예정이다.) 지젝은 신학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각주:18] 지젝의 책, [The Puppet and The Dwarf] (한국어책 제목: 죽은 신을 위하여),의 서론은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역사철학의 첫번째 테제로 시작한다.[각주:19]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다. 그리고 이 인형은 절대 인간과의 장기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다. 알파고를 상상해도 된다. 그 테이블 안을 들여다 보면 한 난장이가 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 벤야민은 이 인형이 역사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이고 그 안의 난장이는 바로 신학 (theology)라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 유비는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젝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이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상징계의 산물로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이해해보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역사 서술은 벤야민의 지적처럼 ‘승자의 기록’이다. 여기서 승자의 기록은, 바로 살아남은, 또는 상징계 안에 알맞게 포섭되어 기억된 자들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젝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징계는 결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그 핵심은 텅비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적은 방식과는 반대의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잊혀진, 사라진 역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지젝이 보기에 아마도 현실의 상징계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판타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말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유일한 한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라는 것이다.[각주:20] 앞으로 발터 벤야민은 조르지오 아감벤을 다룰때 더욱 심도 깊게 이야기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신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던 원시공산사회로 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져 결국에는 공산사회가 된다는 필연적인 역사유물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론을 지젝은 ‘억압된 것의 귀환’ (return of the repressed)을 응용하여 과거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들과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들의 귀환이 바로 실재적인 혁명의 상황의 가능성이고 바로 그러한 잊혀진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이 구원받는 것이 혁명의 상황이라 말하였다.[각주:21]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역사유물론이 퇴조되고 있는 현시대에서 벤야민의 난장이 유비를 거꾸로 볼 것을 주장한다. 곧 신학이 장기 인형이고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벤야민의 시대에는 역사적 유물론을 통해 신학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잊혀진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시대에는 신학으로 부터 역사적 유물론을 재발견하는 것이 혁명적 사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사고로 인해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에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난장이를 붙잡음으로 혁명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지젝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유물론자이고 어쩌고 저쩌고해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kernel) 이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제는 더 강력한 것이다. 바로 이 핵심은 오로지 하나의 유물론적 접근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유물론적 접근은 기독교적 핵심으로서만 접근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각주:22]


    다시 ‘도착’이란 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지젝이 말하는 ‘도착’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첫번째는 왜 지금 기독교인가? 두번째는 왜 바울인가? 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지젝이 보기에 기독교는 매우 도착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이고 현대는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사회 전체에 편만한 상황이다. 즉,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착’인데 기독교에 이미 그러한 ‘도착’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착’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존재이다. 두번째의 답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 내재해 있는 ‘도착’에 대해 이미 알아차리고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고로 바울이 ‘도착’을 해결한 방법이 현재에도 가능하다면 바울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된다는 것이다. 차근 차근 따져보자. 

    커스코는 현대 사회에 대한 지젝의 진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사회는 곧 대타자 ‘Big Other’가 죽은 사회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라진 사회이다. 원래 대타자의 역할은 주체가 상징계에 잘 안착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내려진 법 (신의 법)을 어기는 향유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각주:23]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교회에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교회를 통해 공급 받으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쾌락을 누리며 (예배를 빠진다거나, 이웃을 미워한다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타자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신의 법도 이를 어기며 얻는 쾌락도 존재하지 없다. 갑자기 자신이 믿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을 상상해 보자. 단순히 ‘신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와 부모의 지갑에서 몇만원을 훔치던 스릴과 회개의 기쁨이 없는 무료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대타자의 죽음을 해결해 보려했는데 이것이 정확히 지젝이 지적하는 ‘도착’적 행위이다.[각주:24]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보수적인 교회들에서 동성애를 비판할때 이를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으로 연결하여 폄하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도착’적인 행위로 보는데, 여러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에는 무감각하면서 동성애를 이러한 수간과 같은 매우 원초적인 금지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반응한다. 곧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법을 세워두고 그것을 완전히 위배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보면 그들이 대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대신에 스스로의 향유(쥬이상스)를 위해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행위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기독교 번영주의도 ‘도착’적 행위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쩌면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이라 여겨지는 것 자체가 ‘도착’적 사고가 편만한 것을 의미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도착’적 현상이야말로 기독교가 생존해온 방법이라고 밀어붙인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이야말로 도착적이라고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의 방법은 좋은 것을 위해서 언제나 악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구원이란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 유다에게 스승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하지 않았던가? [죽은 신의 위하여]의 부제가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인데 지젝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야말로 ‘뭔가 악한 일을 하고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것 이라고 말한다. [각주:25]그리고 지젝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울이 찾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의 관점과 그 처방을 살펴보자.[각주:26]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유대교의 특이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라 욥이다. 모세나 다윗과는 달리 욥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은 공동체와 국가를 신의 법과 법칙 위에 세운 인물들이지만 욥은 정면으로 신의 법에 대해 질문하고 의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모든 종교나 국가는 어떠한 법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법은 언제나 신의 명령을 통한 금지를 바탕으로 세워지는데 그 저변에는 어떠한 폭력적 살해의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각주:27] 그렇다면 신의 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욥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시험하는 신의 존재는 프로이드의 초자아와 같은 외설적인 존재이다.[각주:28] 예를 들면, 욥기의 신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인간을 득의의 웃음으로 바라보는 신이다. 욥기의 마지막 40-42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지젝이 말하는 욥기의 해석은 성서학에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욥이 신의 존재와 전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신 스스로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욥 42:7,8)라는 말로 욥의 불평과 신에 대한 질문이 옳았음을 말했기 때문에, 지젝은 욥이야말로 신의 전능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고발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욥이 아니라 야웨였던 것이다.[각주:29]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에 두가지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법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생존을 추구하는 ‘도착’적 핵심(Perverse Core)과 그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외설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신의 전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복’적 핵심(Subversive kernel)이 그것이다. 지젝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욥이 고개를 숙이고 신의 법에 수긍하면서 유대교의 전복적 핵심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욥은 비밀을 알았지만 사회의 보전과 공동체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황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알면서도 수긍해 주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후에 용기있게 신의 죽음을 말한 자가 유대교에 나타났으니, 그는 예수와 그의 뒤를 이은 바울이었다.[각주:3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로 대표되는 로마서 7장은 보통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토로하면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로마서 7장의 해석은 바울이 스스로의 유대인됨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본문을 율법폐기론적 (율법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율법의 장단점 정도로 해석한다. 지젝은 로마서 7장이 정확하게 바울이 발견했고, 이미 욥이 발견한 율법과 야웨신에 존재하는 ‘도착’성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내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7장 18~23)


    욥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불능(Impotence)을 발견했던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어길수 밖에 없는 법칙이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즉,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비밀한 입장을 소개했던 것이다.[각주:31] 정리하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비밀은 바로 전복적 핵심 (kernel)이며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 7장 25절)이라고 말할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통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 27장 46절) 신의 불능성이 드러났고 바야흐로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바야흐로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으로서만 기독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그 비전을 지젝은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보는 듯하다. 이는 다음 웹진에서 논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Dylan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150. [본문으로]
  2.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And Other Writings (PENGUIN CLASSICS, 2007), 66–67. [본문으로]
  3. 김상환,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102. [본문으로]
  4. 이현우는 그런의미에서 향유라는 번역보다 ‘향락’이라는 번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하는데 원래 Jouissance라는 단어가 성적쾌락에 대한 의미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옳다고 본다. 그러나 향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므로 여기서는 향유라고 쓰겠다. https://blog.aladin.co.kr/mramor/category/1216428?CommunityType=MyPaper&page=161&cnt=801 [본문으로]
  5.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93. [본문으로]
  6. Ibid., 102. [본문으로]
  7. 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57–58. [본문으로]
  8.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41. [본문으로]
  9. Kotsko, Zizek and Theology, 61. [본문으로]
  10. Ibid., 6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63.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61. [본문으로]
  18. Ibid., 74. [본문으로]
  19.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ss.: MIT Press, 2003), 3. [본문으로]
  20.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151. [본문으로]
  21. Ibid., 158. [본문으로]
  22.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6. [본문으로]
  23.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85. [본문으로]
  24.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53. [본문으로]
  25. Kotsko, Zizek and Theology, 88. [본문으로]
  26. 필자는 많은 부분 아담 코스트코의 ‘지젝과 신학’ [Zizek and Theology]의 3장 ‘The Christian experience’부분을 참고했다. 아담 코스트코는 이 장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이전의 지젝이 평가하는 유대교에 대해 서술한다. 원래 프로이드의 저서 [Moses and Monotheism]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평가하였으나, 그 이후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는 프로이드를 참고하면서 율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Ibid., 88–90. [본문으로]
  27.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3.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26–127. [본문으로]
  30. Kotsko, Zizek and Theology, 95. [본문으로]
  31. Ibid., 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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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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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ecceitas
    2016.06.10 11: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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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Adam Kotsko는 코스트코/카스코 중 하나로 택일하거나 아니면 코츠커 정도로 음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2. 한수현
    2016.06.12 11:3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네. 알겠습니다. 원고를 몇번에 나누어 쓰다보니 미쳐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구 한.일전의 정신분석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나의 축구 사랑

독자들도 잘 알겠지만 예전에 '여자들이 지루해하는 이야기 세가지?'라는 유머가 있었다. 하나는 남자들이 하는 군대이야기, 두 번째가 남자들이 하는 축구 이야기, 세 번째가 남자들이 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도 대한민국에 산재한 조기축구회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어 볼을 차는 백성들이 세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선수들도 아닌 평범한 민간인들이 말이다. 오로지 축구사랑 때문에! FIFA를 감동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우스갯 소리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함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농담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축구에 관한 한 매니아 수준이다(물론, 진짜 축구매니아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초등학교 때 처음 봤던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때부터 2010년 사십이 넘어 본 남아공 월드컵까지 우승국, 득점왕, 이슈가 되었던 게임, 대회 때 마다 새롭게 등장한 축구 전술,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등을 필자는 줄줄이 꿰고 있다. 이론만 강한 것이 아니다. 축구를 직접 하는 것도 즐겼다. 한창 전성기(?) 때는 빠른 발을 바탕으로 내가 속했던 (학교, 교회, 동네, 군대) 축구팀의 붙박이 라이트 윙을 담당했었다. 바람의 아들 카니자(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변병주(80년대 말 90년대 초 한국대표팀 라이트 윙) 등을 축구할 때 나의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동료들에게 강요(애원)했었다. 물론 지금은 축구장에서 30분 뛰면 삼 일을 앓아 눕는 신세가 되었지만….유학을 온 이후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시들해지고, 이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축구선수들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축구에 대한 나의 사랑만큼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왜, 우리는 축구에 열광하는가?

FIFA(세계축구연맹)에 가입되어있는 가맹국수(208개국)가 UN(197개국)이나 IOC(202개국)보다 많다는 사실은 세계인들이 갖고 있는 축구에 대한 단순하지만 정확한 애정의 척도라 볼 수 있다. 왜, 유독 축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갑자기 머리를 스치면서 든 생각이다. 야구도 있고, 농구도 있고, 배구도 있는데…왜 나는, 아니 세계인들은 축구에 열광하는가?

많은 근거들을 끌어올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사람들이 축구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무척이나 단순하고 원초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룰과 작전도 단순하고, 경기장도 단순하고, 등장인물들도 단순하다. 우선, 룰이 단순하다. 축구처럼 단순하고 쉬운 경기규칙도 없다. 업사이드만 알면 된다. 물론, 그 업사이드가 보는 사람의 시점과 관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가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그 역시 축구의 일부분이다.

축구는 특별한 장비도 필요없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각주:1] 특정한 장비를 필요로 하고, 일정량의 훈련과 교정을 통해 폼과 자세를 익힌 후 실전에 투입되는 종목들에 비해, 축구는 현장에 투입되는데 소요되는 절차와 과정이 상대적으로 간소하다.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접근성면에서 무척 용이한 스포츠다.

축구는 또한 다른 종목에 비해 신체적.계급적 조건에 제한을 덜 받는다. 축구장안에는 160cm대의 선수도 있고 2m 가까운 선수도 있다. 170대의 남미 선수들이 190대의 유럽선수들과 맞짱떠서 당당히 승리하는 종목이 축구다. 계급적으로도 그렇다. 변방에 있는 소년들에게 그나마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인생 역전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스포츠를 꼽으라면 당연 축구가 1순위다. 유럽 빅리그 유소년 축구팀에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 훈련을 받고 축구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남미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공 하나 가지고 놀았던 아이들이나 아프리카 사막에서 공을 차던 소년들 중 세계 축구계의 별이 된 케이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축구는, 수시로 교체를 할 수 있어서 선수들이 들락날락거리는 다른 구기종목들에 비해, 처음 등장했던 인물들이 비교적 수미일관하게 끝까지 간다. 교체멤버가 세 명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특별히 외부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패가 별로 없다는 말이고, 꼼수 사용에 제한이 있다는 말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축구가 지닌 이러한 고지식함이 자칫 축구를 지루하게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축구가 지닌 이러한 단백함이 오히려 축구를 보는 사람이나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그라운드로 녹아 들게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이처럼 축구가 지닌 단순함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평등성, 그에 임하는 심기의 정직함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본인들의 잃어버린 본능과 야성과 지각을 되살리게끔 하는 아드레날린 같은 역할을 한다. 축구를 보면서(혹은 하면서)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은 우리의 심장을 강하고 빠르게 뛰게하여 혈관을 수축시키고 동공을 확대시킨다. 점입가경으로 우리는 올림픽에서 축구 동메달을 놓고 외나무 다리에서 일본과 만났다.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반일감정은 축구를 하는 선수들이나 축구를 보는 우리들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더욱 촉진시킬것이다. 이 보다 더 극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드디어 축구 한.일전을 관람할 시간이다.

 

한.일전의 정신분석학

올림픽 축구 한.일전이 열리기 전날, 필자는 한 달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시카고 돌아왔다. 8월 9일(목) 밤 10시(시카고 타임)에 나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고, 그 다음 날(8월 9일, 금 오후 1시 30분) 시차적응이 안되어 비몽사몽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무슨 예식을 치르듯 인터넷을 뒤져 SBS 차범근이 해설하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전 한국과 일본의 축구경기 앞에 앉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성스러운 예배에 참여하는 심정과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병역특례, 박주영 파동, 독도문제, 며칠 남지 않은 광복절, 그리고 일본! 너무나 완벽한 예배 순서였고, 그 예배가 끝난 다음에 벌어질 감격과 은혜를 기대하며 나는 TV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근래 방영되었던 드라마 중 최고의 흥행작이라 평가받는 현빈과 하지원 주연의 '시크릿 가든'의 최고 시청률이 30% 내외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벌였던 축구 한일전은 새벽 3시였음에도 불구하고 33%라는 국민 드라마 급의 경의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시청이 용이한 시간대였으면 최소한 60% 이상의 최고 시청률도 나왔을 것이라고 방송관계자들은 예측한다.

축구 한일전의 영향력은 비단 방송 시청율뿐 아니다. 한일전 패배는 곧바로 감독들의 퇴출로 연결된다. 비근한 실례로 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인 최강희 감독 전에 한국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조광래 감독은 작년 한일전 3:0패배 후에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다. 한일전 골 세레머니 혹은 승리 후 세레머니는, 이번 올림픽 대표팀 박종우의 독도세레머니가 대표적 케이스가 되겠지만, 정치적 액션으로 비화되기도 하여 양국의 국민감정에 영향을 끼쳐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사고가 아닌, 뭔가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경우에 어긋나고 상식을 뛰어넘는 과한 잉여가 축구 한.일전 후에 흘러 넘친다는 말이다. 이처럼 정상적인 비평의 도그마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한.일전 축구의 틈새와 잉여에 대한 설명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축구 한.일전에 대한 정신분석학이 작동된다.

 

'Id-Ego-Superego' in 축구장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었다.[각주:2] <꿈의 해석>(1899)을 통해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 밝힌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1923)에서 인성Personality을 욕망의 차원인 Id와 현실적 차원인 ego, 그리고 도덕적 차원인 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로 설명하였다. 자, 그럼 프로이트가 밝힌 인성의 역학관계를 축구장으로 옮겨보겠다.

 

  • 초자아 Superego

우선, 초자아인 superego는 주심과 부심이 될 것이다. 이들은 승부를 향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라운드 속에서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야만속에서 문명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축구장내 유일한 존엄자들이다. FIFA는 심판들에게 선수보호와 재미있는(골이 많이 나는) 축구경기를 위해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선수보호를 위한 백태클 금지, 허리우드 액션 금지, 골키퍼의 시간 끌기에 대한 경고, 업사이드에 대한 완화 등... 하지만, 이 모든 판결은 절대적으로 심판들의 촉에 의지한다. 내버려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온갖 Id에 대한 방어책이자 공격책으로 축구는 심판들에게 다른 종목 심판들에 비해 비교적 넓은 영역에서 광범위한 판단의 결정권을 강하게 부여하였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해 때로는 심판의 판정이 다분히 주관적 일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번 내려진 결정은 절대 번복이 안 된다. 숱한 오심과 석연치 않은 판정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그것조차 축구경기의 일부로 흡수하여 초자아를 보호한다. .

  • 자아 Id

광기에 찬 관중들은 Id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Id는 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원리인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지배를 받는다.[각주:3] 유럽축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훌리건들, 한국의 붉은악마가 대표적이다. 축구장내 관중 난동과 패싸움은 추락한 이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이 오히려 축구를 보는 재미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면 문제는 심각해 진다. 실제로 1969년 월드컵 중남미예선전 이후 온드라스와 엘살바도르가 일주일동안 축구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이번 올림픽 3-4위전이 끝난 후 발생한 박종우의 독도세레머니 후폭풍도 비슷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이드가 초자아의 통제와 감시를 뚫고 올라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자아가 퇴각한 이후 분출되지 못했던 이드가 축구장 안팎에서 만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오직 우리팀의 승리만을 염원하는 관중들의 집단적 에너지는 한.일 전이 벌어졌던 축구장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브라운관을 통해, 인터넷과 SNS를 통해 확대되고 증폭된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사태는 이미 축구가 아니다. 오직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박종우의 독도 세레머니는 애국의 차원으로 번져나갔고, 메달박탈과 병역특혜제외에 대한 논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축구와 애국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합리적 설명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는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어있다. What?

  • 자아 Ego

그라운드의 선수들은 Ego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뚜렷한 이드의 특성과 덜 성숙한 초자아 면모를 모두 지닌 존재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선수들은 초자아가 제시 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화려한 개인기와 톱니바퀴 같은 팀웍으로 이드의 괘락원칙을 양(+)으로 충족시키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아의 감시를 피해 능란한 솜씨로 반칙을 범하여 이드를 음(-)으로 자극하는, 마치 마징가 Z에 나오는 아수라백작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특별히 한-일전에 임하는 한국 축구선수들의 ego는 무척이나 복잡하다. 예전에 일본과 경기 전 한 선수가 인터뷰하면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렇듯 민족감정, 특별히 반일감정은 축구장내에서 이드를 작동케 하는 커다란 원천이자, 에고의 정신을 강하게 무장시키는 동기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일 전 때는 초자아의 힘이 이드와 이드에 의해 영향받는 Ego를 완벽하게 압도하지 못한다. 이번 런던올림픽 3-4위 일본전에서 경고누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칙을 해대는 한국선수들을 보라!

우리가 구자철에게 반했던 이유는 본인이 행한 플레이가 반칙으로 지적당하자 초자아인 심판에게 달려가 "Why? Why?"를 외치며 격하게 저항해서였고, 일본선수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적대의 시선과 그에 걸맞는 호전적인 액션을 취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자철은 축구를 잘하는 선수이지만, 구자철이 일본을 상대로 보였던 파이팅으로 구자철은 단순히 축구를 잘하는 선수를 넘어섰다. 구자철은 들끓는 이드의 욕구를, 아니 그들의 환상을 정확히 알고 충족시킬 줄 알았던 선수였던 것이다.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렇다면, 그 환상이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Che Vuoi? (케 보이?);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깡과 지젝이 출몰하는 지점이다.[각주:4]

 

에필로그

애초에 별 생각 없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성의 역학관계와 축구장내에 존재하는 인물들간의 역학관계를 엮으면 재미있는 글이 나올 것 같아 글을 시작했는데, 결국 라깡과 지젝으로 까지 글이 번져나갈 태세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이번 웹진 글을 마무리 한다. 한 달간 숨을 고르면서 겹겹이 쌓여 있는, 라깡과 지젝이 이룩한 사유의 거적을 천천히 들춰내야 할텐데……솔직히 그것이 좀 거시기하다. 언제면 그들을 나의 언어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언제면 그들이 내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되고, 언제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들을 가뿐하게 넘어 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사자가 되고 바람이 되고 나면 나는 기쁠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뭐지? 소원을 말해 봐~~ 소녀시대가 설마 케보이를?

(다음 글은 소녀시대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위험한 발언이다. 자칫, 평등을 내포하는 말로 해석이 되어 높은 양반들의 심기를 건드려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21세기를 다스리는 세력은 역대 지배계층이 지녔던 히스테리적인 요소들마저 자본의 흐름안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신출귀몰한 능력을 지녔기에 저 정도의 구호쯤에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 글을 쓰면서 생겼다. 실례로, 몇 해전 필자는 방학을 맞아 한국 방문 중에 하루 짬을 내어 인사동을 돌아다녔었다. 어느 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민중예술 회고전’이었다. 70-80년대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시절, 당대의 아픔과 모순을 파헤쳤던 예술들을 전시한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에는 그 작품들을 이렇게 불렀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국민일반의 정서에 반하는 풍기문란,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물 등.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 당시 지배계층에게 히스테리적인 요소였던 그 작품들은 쇼윈도에 전시되어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서 온 부자집 사모님들에 의해 15만원에, 30만원에, 50만원에 팔려나간다. 21세기 한국의 지배계급은 전 시대 자신들의 적대와 히스테리마저 순화시켜 회고할 줄 아는 넉넉함과 관조와 아량을 지닌 존재들이다. 위대한 자본의 승리랄까. 이런 자들이 ‘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라는 소박한 말에 무슨 자극을 받겠는가? 내가 또 오바했다. [본문으로]
  2. 프로이트 이후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과 인성의 역학관계에 초점을 맞춰 실제 정신치료에 프로이트를 적용하였다. 하지만, 라깡은 정신치료만을 목적으로 실천지향적으로만 치닫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철학적. 사변적 영역으로 전환시켰다. 라깡의 새로운 정신분석이론은 후에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현재 인문학 전분야에서 걸쳐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본문으로]
  3. 대부분의 프로이디안들은 프로이트 후기를 대표하는 <쾌락윈칙을 넘어서>(1920)에 대해 언급을 회피해왔다. 프로이트의 대부분의 책들이 구체적 사례에 바탕한 실천적 측면을 다루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사변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라깡은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충동’이 내포하는 철학적. 문명사적 의미에 주목한다. 이것은 후에 쥬이상스를 설명하는데 다시 이용되고, 궁극적으로, 라깡과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the Real(실재)’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단초가 된다. [본문으로]
  4. ‘케보이(Che Vuoi)’는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대타자를 향한 질문이다. 지젝은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3장에서 라깡의 ‘케보이’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케 보이’에 대한, 라깡을 경유한 지젝의 논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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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2.09.06 20: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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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4개가 모두 빠져 있네요. 원래 보낸 원고와 대조해서 정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윤리학 박사가 아니고, 박사과정 (나부랭이)입니다. 제 신분을 돌려주세요. 지금보니 사진의 제 얼굴이 부담스럽게 크네요. 지난 웹진부터 사진이 확대되더니, 이번 웹진 사진은 거의 영정사진 수준입니다. 6월 웹진 이전 사진 크기가 개인적으로 좋은데...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 얼굴이 날로 확대되는 건가요? 아니면 기술적인 이유라도...사진 크기 좀 줄여주시기를.
  2. 2012.09.07 09: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MS word에서 원격 발행하는 걸 테스트하다 문제가 생겼네요. ㅠㅠ
    사진은.. 워낙 멋지셔서 크게.. ;;
    사진, 각주 수정했습니다.
    글자체도 전과 다르게 나오게 됐는데,
    이미 올라간 글을 수정하려면
    (기본 제공되는 웹폰트가 아닌지라) 수정작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글자체는
    그냥 둡니다.
    사실 그동안 폰트나 줄간격 등은 매번 공들여 HTML 태그를 하나하나 수정해왔답니다. ^^;
    아무튼 원격 발행은 원래 텍스트대로 잘 안나오므로 이전 방식대로 올려야겠습니다.
  3. 이상철
    2012.09.07 09: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쁜데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4. 유승태
    2012.09.11 22: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닙니다. 늘 좋은 글 보내주시는데 실수 투성이로 블로그에 올리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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