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7]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I

- 바울과 제국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왜 주류신학에서 탈식민주의를 말하지 않는가?
    
    이전의 웹진의 글에서 원래는 식민주의 시대 이후의 정치적 텍스트 읽기의 한 방법인 탈식민주의가 어떻게 성서 해석의 장으로 들어왔고, 성서가 쓰여졌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가를 논했다. 더 나아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발달로 인해 영미의 인문학과 신학이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인정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번 웹진은 그러한 탈식민주의적 성서읽기가 어떻게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짧게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먼저 그 전에 이른바 진보적 성서읽기가 왜 신학교의 상아탑이나 학문적 차원에서만, 그것도 소수의 학자들에게서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식민주의만 논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탈근대의 시대에 태동되었던 성서해석의 흐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근대와 탈근대의 장구한 성서해석의 흐름을 짧게 요약하는 것이기에 많은 한계가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대 성서해석학의 위치를 조감해볼 기회는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근대의 시대가 계몽주의와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에 현실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카톨릭으로부터 개신교회가 독립하기도 하였지만 성서학에서 가장 큰 변화는 성서 이해에 대해 로마의 기독교화 이후부터 있었던 해석의 기준인 교황권이 약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즉, 무엇인가 새로운 해석의 방법이나 관점을 발견하더라도 근대 이전에는 교황권의 인정을 받아야만 유통될 수 있는 담론이 바로 성서에 대한 해석이었다. 한마디로 신학과 성서학은 카톨릭의 권위 아래에서 검열되었고 유통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개혁을 꿈꾸며 혁명적 신학을 개진했던 인물들이 있었지만(둔스 스코투스 또는 보나벤투라 등) 거시적 지평에서는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교황권에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 권위가 일거에 사라졌다.[각주:1] 게다가 이미 ‘이성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세계를 덮고 있었다.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서 라틴어로만 번역되어 존재하던 성서가 여러 언어들로(특히 독일어와 영어) 출판되고, 이성을 기반으로한 과학적 사고가 전통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부수고 나오게 되자, 시대는 전통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뒤덮혔고 이제 학문은 전통을 인정하되 과학적 사고로 전통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쉽게 바꿔 말하면, 근대 이전의 시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농작물을 키우는 일에 대해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농업에 대한 지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바로 전통이 그의 직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시대가 되면서 자연과학이 최고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자, 제일 먼저 농부가 해야 할 일은 (그가 성공하고 싶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발달된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야흐로 몇백년, 아니 몇천년동안 내려오던 전통적 방법에 물음표가 붙으면서 과학적, 이성적 방식을 받아들여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농업을 예로 들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가장 민감했던 것이 바로 예술과 인문학이었을 것이다. 신적 권위를 드러내고 그 권위를 이해하는 것에 바쁘던 학문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괄호를 치고 이성에 빗대어 질문을 던지면서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더할 것은 더하면서 좀 더 새롭고 이성적인 담론을 산출하기에 온 정력을 쏟게 되었다. 신학과 성서학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계몽주의적 성서학의 태동이 신화의 시대에 갇혀있던 인간을 계몽시키고 역사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질문없이 권위에 복종하며 참복음의 묵상에는 어쩌면 게을렀던, 그래서 너무도 쉽게 정치와 권위의 신하이기를 자처했던 성서학이 그 틀을 깨고 나와서 여러 다양한 비평의 시대를 연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성서학의 태동을 뒤집어서 보면,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성서의 생존을 위해서, 성서가 미신과 신화로 뒤범벅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성의 시대에 성서를 구원해 낼 것이냐를 고민했던 결과가 바로 근대성서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 근대 성서학의 빛과 그림자가 있다. 신학교 신학생 시절 선배들과의 대화 속에서 중고등학교때까지 충실하게 믿었던 성서의 여러 기적이야기들이 한낱 신화적인 그리고 문학적인 문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임을 들었을 때 물론 성서를 새롭게 보는 지평 또한 열렸겠지만 이전의 신앙적 양태를 폄하하는 교만의 시각도 함께 열렸다고 한다면 심한 억측일까? 새로움을 추구하는 근대적 학문은 중세의 그늘을 여는 눈부신 햇살이 되어 잠들어 있는 인간됨이라는 아름다움을 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오로지 진보와 새로움의 추구는 자칫 잘못하면 다양성에 대한 지적유희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한 예로 근대의 성서학은 일세를 풍미했던 불트만이나 케제만과 같은 독일 성서학 시대와 사회학적 해석과 간문화적 연구를 필두로한 미국의 진보성서학의 시대를 넘게 되면, 구조주의적 비평과 신비평, 그리고 문학비평 등의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하나의 텍스트에 하나의 의미란 없으며 텍스트는 오로지 열린 것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의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추구가 현실의 콘텍스트를 잃어버리고 학문의 상아탑 안에 갇히게 되면 성서는 믿음의 텍스트로서의 힘을 잃어버리고 학자들의 지적유희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이는 현대 대학의 인문학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특히나 성서학과 교회의 괴리, 성서학과 현시대 상황과의 괴리는 참으로 진보성서학에게는 아픈 부분이다. 교회는 보수화되었기에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들 하였다. 축자영감이나 주장하는 보수적 교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서학이, 바로 이스라엘의 해방, 예수 운동, 그리고 바울의 혁명적 교회론을 읽는 성서학이 현실에 귀기울이지 않고, 헬라어의 단어 하나, 몇개의 구절이 예수의 역사적 서술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골로새서가 바울의 저작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수백 편의 논문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탈식민주의란 것은 이러한 서구의 엘리트주의나 지적유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전 웹진에서도 설명했듯이 탈식민주의의 중요한 이론가들의 기반이 된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맑스주의, 라깡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푸코의 담론이론 등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인문학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나 몇몇의 전문가 집단을 제외하고 쉽게 이해되기 힘든 담론들이며 성서학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루어지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론의 역사와 달리 탈식민주의는 서구의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전세계적 저항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민중들의 담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넓고도 복잡한 탈식민주의적 이론과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성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오늘 웹진에서는 성서의 가장 문제적인 주제인 ‘제국’을 가지고 탈식민주의가 어떻게 상아탑에 갇힌 성서를 탈경계화하고 성서해석의 역사만이 아니라 성서텍스트 자체에 대한 반성을 생산할 수 있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탈식민주의의 두 갈림길 – 제국과 성서, 그리고 탈식민주의 관점으로 본 제국

    제국(Empire) 과 제국주의(Imperialism)만큼 본 웹진에서 자주 언급된 주제도 드물 것이다. 이 주제는 이 웹진만이 아니라 전체 인문학과 성서학에 흔히 다뤄지는 주제인데, 때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의 다른 말들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만큼 제국이라는 말이 현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국주의는 하나의 통치이념이다. 여기에서 Imperialism은 Imperator(임페라토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 독재관(또는 황제)이라는 로마의 직책에서 유래한다.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로마는 전쟁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타개해 나갈 방법으로 독재관이라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전까지의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지휘관의 개념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군사적 전권을 가지는 계급으로 로마가 황제정으로 가는 시발점이 된 직책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시이저를 들 수 있는데, 당시의 로마의 군인들은 원로원이나 로마의 공적 기관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휘관으로부터 봉급을 받았으므로 독재관이라는 것은 명실공히 금권과 군사력을 동시에 가지는 독재가 가능한 직책이었다. 이후 이른바 종신독재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지면서 황제정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황제정과 식민정책을 기본정책으로 삼는 것이 로마의 제국주의였고 이를 계승하려 한 것이 근대국가 이전의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들이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팽창을 위해 끊임없이 식민지를 만들고 타국을 침략하여 군사인 힘과 경제적인 힘으로 정복하면서 다른 제국들과 경쟁하는 시대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후, 네그리는 그의 저서 ‘제국’에서 전지구적인 하나의 제국을 상정한다. 국가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자본과 그들을 움직이는 힘들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자본의 힘으로 세계를 관리 감독하는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제국의 기본적인 체계가 바로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던 시대에 신약성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국가경영에 대한 정치이념에는 몇가지가 있을까? 깊게 생각해 보더라도 시민의 참여를 통해 국가의 경영을 결정하는 민주정치이념과 소수의 엘리트집단이나 개인에 의한 일당독재나 일인독재, 또는 황제정치(제국정치)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듯하다.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정치는 근대 이전에는 불가능했었는데, 민주정치에 대해 무지했다기보다는 이를 가능하게 할 인프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2013년의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를 예로 들더라도 초고속 인터넷과 엄청난 정보고속도로가 있음에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인력과 자금이 들어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개표에 대한 의문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물며 근대 이전에서 모든 국민들의 생각을 모은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민주정치를 꽃피운 (비록 소수 남성 자유시민들의 정치였지만) 아테네 또한 조그만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어느 정도 크기 이상으로 팽창하게 되면 일인독재체제가 가장 효과적인 통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제국주의가 기본 통치이념이 된 이후에 그리스 헬라 철학은 개인의 윤리와 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에피큐로스, 스토아학파) 정치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은 그 종언을 고하게 된다.
    헬레니즘과는 다른 지역에서 발달하여, 헬레니즘의 거대한 물결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헤브라이즘이라 후대에 불리우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성막중심 공동체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 왕에 이르러 성전 중심의 종교국가로 발전한다. 그러나 성막공동체가 야웨 하나님과 억눌린 자의 해방을 통한 정의의 공동체를 목표로 했음에 반하여 성전중심의 국가가 된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시대를 정점으로 남과 북왕국으로의 분열과 성전종교의 타락 등으로 쇠락의 시대를 걷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식민통치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민통치 시대에서 공동시대 70년쯤에 예루살렘성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남유다 멸망후 약 600년간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저항의 시대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에 그들의 중심이 된 사상이 바로 유대주의(Judaism)이다. 정치적 독립이 요원한 상태에서는 종교적인 담론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고, 로마의 감독을 받는 이집트와 시리아 제국이 잠깐 한눈을 팔기만 하면 정치적 독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 바로 유대의 역사였다.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생각도 생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한 예로 쿰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결국 제국과 성서에 대한 질문은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쓰여진 성서가 인간의 공동체와 국가를 경영하는 최종 모델인 제국이라는 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라는 것으로 모아지게 된다.
    성서가 인간의 제국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로 예수를 성전중심의 브로커 체제(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적 역할로서의 종교)를 혁파하는 종교혁명가로 소개하였을 때, 닐 엘리엇이 ‘Liberating Paul’에서 바울을 로마 황제 숭배에 반해 그리스도를 주(Lord, kupios)로 고백함에 대한 정치성을 말할때, 당시의 학자들의 마음속에는 제국의 패도정치에 반하는 사랑과 정의의 화신으로써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복음서의 예수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주의를 해체시키고 아래로부터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후 전미성서학회(SB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에 ‘예수와 제국’(Jesus and Empire)라는 분과가 따로 생겨날 정도로 신약성서의 배경을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보고, 성서를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식민공간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담론들을 좀 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잠시 눈길을 돌려 한국의 식민의 역사를 살펴보자. 대한 제국이 당시 일본제국과 한일합방의 치욕을 겪고 난 이후, 당시의 지식인들로부터 이후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물결이 해방을 얻기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조선시대 이후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적 변화의 일환이었으나 본격적인 근대화에 첫 발을 딛기도 전에 식민의 시대의 질고를 지게 되었다. 일본제국의 식민하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 바로 첫째는 민족주의이고 다음은 맑스주의 또는 사회주의였다. 평등과 자유를 기본으로 하였던 맑스주의는 불평등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한 식민통치에 저항담론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단어는 저항의 구심점으로 조선민중들이 하나의 가치로 모여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민족’이라는 단어는 위정자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아직도 필자는 아침마다 왼 가슴에다 손을 얹고 외우곤 했던 문장들이 기억난다. “난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모든 국민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해야 할 민족이란 무엇일까? 바로 국민들이 아닌가? 자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을까? 오히려 충성을 요구하는 어떤 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인 것 아닐까?
    다시 신약성서로 눈을 돌려보면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또한 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물론 근대 민족국가에서의 민족과 유대주의로 대변되는 유대민족주의는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에는 유대주의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가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의식은 제국의 지배와 함께 생성되어온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의 민족주의 또한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애매함과 폐쇄성 때문에 여러 새로운 민족에 대한 해석을 낳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로마인들은 제국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혜택을 얻을 수 없는가? 이미 요나서에서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하나님께 참회하는 꿈같은 장면이 그려지고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에 건설된 회당이 이방인들에게 이미 개방되어 있었다. 예수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그것은 예수라는 인물을 따르는 자들로 인해 시작되었고 성전멸망 이후에 유대교 회당에서 배태된 집단이었고, 예수라는 인물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였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저항담론을 만들었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파괴력과 넓이를 보여주었고, 이방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의 제국(바실레이아)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또한 여타의 제국이 가지고 있는 빛과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예수와 제국, 그리고 바울

    기독교제국(Christendom)을 비판할 때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확정하면서 주변에 머물렀던 기독교가 제국의 힘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위정자의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기독교 타락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학과 교리는 기득권층의 이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변하여 제국의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그들의 우월성을 대변하고 식민치하의 민중들을 유혹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이러한 기독교의 과거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과연 기독교 제국의 타락과 악행이 기독교제국의 위정자들에게서 나온 독극물이고 원래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와는 다른 순전한 사랑의 공동체였을까? 또는 신약성서는 그러한 권위주의와 기독교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종래의 리처드 호슬리나 존 도미닉 크로산 등의 예수와 제국간의 갈등과 저항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복음서의 공동체가 예수를 당시의 황제의 명칭이었던 주님(Kupios, the Lord)로 부른다거나 황제의 방문을 나타내는 용어인 파루시아가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예수의 공동체는 제국에 대한 저항 공동체임을 천명하였다. 로마제국이 황제종교의 성격을 오리엔트 지방에서 강화하면서 예수를 부활한 메시아로 받아들이던 공동체는 극렬히 저항했을 것이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은 정치적 저항으로 읽혔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예수가 복음서를 통해서 말했던, 바울을 통해서 알려졌던 세상의 평화가 아닌 평화의 의미는 바로 제국의 선전물에서 흔히들 나오던 평화의 메세지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향한 염원이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바울의 서신들 또한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를 예수를 믿는 공동체로 바꾸어버린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바울이야말로 제국에 대한 저항과 대안으로 예수를 붙잡은 사람이었는가?
    예수와 제국을 말하는 일군의 학자들과는 달리 탈식민주의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면서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호미 바바의 미미크리(mimicry)이론에 착안하여 식민지하의 상황에서 식민인들은 제국의 담론을 증오하면서도 제국의 코드들을 창조적으로 전유한다. 로마황제의 제국 대신에 예수의 제국(바실레이아, basileia)를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로마의 제국 이후에 도래할 예수의 제국을 말함으로 로마제국의 지배구조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정신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계급으로 올라섰을 때 그러한 제국의 담론은 기독교 제국이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혁명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성서학자들은 성서 내의 제국의 담론에 의문을 제시한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표현이 예수를 따르는 삶의 필요성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를 중심으로한 제국의 재편을 말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군림하는 하나의 진리가 되어버리면 그안에는 어떤 삶의 가치보다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는 차이만 존재하고 그 차이는 계급의 차이 또는 우열의 차이가 되어버린다. 특히나 기독교 중심의 세계에서는.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검을 든 이슬람 제국의 그림처럼(물론 이러한 담론은 후대의 기독교 역사가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이다.) 기독교 제국의 그림은 한손에는 성서,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자본주의라는 떡을 들고 타인종이나 타종교, 타국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전투적 선교주의가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이 이미 성서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탈식민주의 학자들의 논거라 하겠다. 제국에 대한 압제속의 저항의 몸짓이었던 성서가 지배계급의 도구가 되고만 가슴 아픈 현실을 비로서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교황권의 몰락은 단순히 인류의 정신사적 지평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지형과 경제적 변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되겠으나 여기에서는 단순화시켜 학문의 변화라는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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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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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

 

주님이 명령을 내립니다. 천사장이 그 명을 받들어 소리를 내지릅니다. 그러자 좌우의 나팔수들이 거대한 나팔을 힘껏 불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순식간에 세상을 가득 메웁니다. 그러자 죽은 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도 하늘로 이끌려 올라갑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좌우로 길을 만듭니다. 주님이 그리로 오신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는 마지막 때의 부활이 이렇게 청각적이기도 하고 시각적이기도 한, 한 편의 판타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바울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바울스럽지 않은 바울의 묘사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시청각적 부활 판타지 속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의 제2의 도시가 된 데살로니가는 본래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 세계의 대제국이 된 마케도니아의 무수한 폴리스들 간의 국제교역으로 이 도시는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합니다. 해서 이 도시에는 여러 인종이 만나고 다양한 물품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다양성의 도시가 됩니다. 다인종이 드나드는 도시에는 으레 그들의 신전들이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또 그이들의 종교적 결사체들도 세워졌지요. 그중에는 이스라엘인들의 회당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당들 가운데 어떤 곳은 더 유대적이었고 다른 어떤 곳은 더 사마리아적이었지요.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에는 로마에 병합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지정합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이 지역 대도시들 가운데 로마에 가장 충성스런 도시였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9절에 따르면 유대적 성향이 더 강했던 한 회당에서 바울이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바울은 시당국에 고소당하게 됩니다. 회당 당국은 시당국과 로마제국에 충성스러웠으며, 시당국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을 할 것으로 보이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기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 바울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지만, 바울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 텍스트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동족에게서 고통을 받았다’는 표현(2,14)을 보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도 이스라엘인임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집단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한데 ‘유대인들’은 그런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바울집단을 괴롭히고 당국에 고소한 이유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측근들은 발 빠르게 그 도시를 빠져나와 남쪽의 오래된 도시 아테네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동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모진 당하였고 일부는 죽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런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해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바울의 측근인 디모데가 그 도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협박과 회유에 고통당하고 있던 예수파 공동체가 전향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디모데로부터 들은 정보는 공동체는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마도 디모데로부터 공동체의 동요에 관해 전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죽은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산자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하여 그이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기도합니다. ‘도대체 다시 오신다던 주님은 언제 오시나요!’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알 수 없다고.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되뇔 바로 그때라고 말입니다.

이런 답변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묘사는, 앞서 보았듯이,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청각적인 판타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묘사는 하나의 패러디라는 점입니다.

과거 기원전 2세기 중반, 카이사르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데살로니가를 이 지역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곳은 이 지방에서 가장 열렬히 로마를 지지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여 로마 황제가 다시 돌아올 때를 열망하면서 판타지처럼 묘사된 대중설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주’(퀴리오스)가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황제의 등극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이가 도시로 되돌아오는 것을 ‘파루시아’라고 불렀지요.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황제를 마중 나가 그이를 ‘영접’(아판테시스)합니다. 그때 나팔이 울려 퍼지고, 영접하는 도시 주민들은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황제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런 패러디를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이야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도시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가도에 길을 따라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황제에 의해, 황제의 이름으로 죽임당한 이들의 시신들도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패러디는 하나의 음울한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황제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이 황제를 영접한다는...

한데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묘사합니다. 음울함은 다시 축제장면으로 역전됩니다.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에 황제로 인해 죽임당한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신체훼손형벌로 처형된 이들의 몸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몸의 부활의 상상은 바로 이런 갈가리 찢긴 육체가 깨끗하게 회복된다는 바람과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더 주지할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 재림의 때를 바울은 사람들이 ‘평안! 안전!’(에이레네 카이 아스팔레이아)이라고 되뇔 바로 그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선전 구호였습니다. 이 말이 도시 곳곳을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평화를 선사하는 이, 안전을 주는 이로 갈망하게 됩니다. 이 구호와 함께 사람들은 제국의 질서 속에 확고히 포섭되게 되는 것입니다. 한데 바로 그런 ‘평안, 안전’의 구호가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순간, 주의 재림이 있습니다. 그때는 황제로 인해 처철하게 난도질당한 이들의 육체가 되살아나고, 그로 인해 갖은 핍박을 받고 있는 이들이 하늘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바로 이 날을 이렇게 강변합니다. 그날, 황제에게 회유당하지 않고 견디는 이에게는 황제가 주는 안전, 평안과는 다른 안전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로마제국이 아닌 지구화된 자본의 제국이 세계의 평안과 안전을 준다는 메아리가 널리 울려 퍼지는 대도시 서울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습니다. 서울은 지구적 자본의 한 복판인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주변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 대도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지구적 제국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자본의 질서에 거스르는 이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의 추방령에 내몰려 스스로를 살해한 이, 몸이 불이 되어 잿더미가 된 이, 공장의 혹독한 질서 속에서 살해당한 이 등등. 그런 주검들이 도시 가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그 죽음을 기리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이들이 혹독한 자본의 질서 속에서 겨우겨우 숨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지구적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아니 그 신적 존재를 영접하기 위해 사람들의 안전과 평안을 희생시키며 제도를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에는 평안과 안전이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지구제국의 핵심 도시들보다도 더 열렬히 그 지본의 신봉자가 되고 그것을 신격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 끝이 어디에 있나요?,라고.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로 이런 우리에게 견딤의 지혜를 일깨워줍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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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5(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본문: 마가복음 11:1~11


혁명에서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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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청
(신약학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마가복음 11장 1~11절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종려주일, 즉 사순절의 여섯째 주일이자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본문으로 채택하는 본문이다. 한 마디로 교회는 예수가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시점을 종려주일의 시작으로 잡은 셈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마가복음11장 1~11절의 각본과 유사한 일련의 일들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에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친다. 이 사람들의 환호는 금방 무엇인가 일어날만한 사건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복음서, 예를 들면 마태와 누가에는 예수가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 성전을 뒤엎는다. 하지만 마가복음에는 때가 이미 저물어 성전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마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나리오, 즉 종려주일 날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의 판을 뒤엎는 일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예수가 예루살렘에 너무 늦게 도착해 아무 일도 벌일 수 없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전한다.

왜 마가는 종려주일 날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이러한 식으로 설정했을까?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은 이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느 날이건 상관없이 성전에 들어가 판을 뒤엎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마가에 따르면 성전체제와의 충돌이 교회가 설정한 종려주일 바로 그 날에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가 중요하다. 확실히 마가에 따르면 그 날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 이것은 나의 판단에 따르면 마가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마태나 누가에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마가는 자신의 다른 본문에서 예수와 다윗을 엮으려는 시도들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종려주일 이후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마가를 처음으로 읽는 독자는 이러한 비판을 알지 못한다. 마가복음 12장 35~37절은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예수는 다윗과 자신을 엮으려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마가의 이야기를 처음 읽는 독자라도 종려주일 이전에 일어난 베드로의 고백에서 이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흔쾌히 받아들이지만 수난을 당한다는 자신의 고백에 대한 베드로의 꾸짖음에 대해서는 불편해 한다. 이러한 비판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사람들의 환호에 대해 마가가 일종의 불편함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는 그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팁은 마가가 유대전쟁 이후에 자신의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가는 자신의 글을 씀에 있어 로마라는 제국의 눈을 의식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전쟁 이후 바리새인들은 로마와 적극적인 화친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랍비 유대교를 건설했고 이전의 젤롯당 운동들과의 관계도 거리를 두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유대회당에서 쫓겨날 운명에 처해 있었고 동시에 로마에 대한 반란죄로 죽은 예언자를 믿는 공동체로 바리새인들에 의해 로마에 고발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마가공동체도 랍비 유대교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전의 전투적인 메시야적 전통들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 점을 마가복음 13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장에서 마가는 적그리스도들이 끊임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는 본문을 제시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앞서 말한 베드로의 고백과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때에 사람들의 환호 그리고 그리스도와 다윗의 논쟁에 관한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확실히 앞서 보았듯이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처럼 종려주일에 예수가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 성전을 뒤엎는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종려주일 그 날 성전에 바로 들어가 성전을 뒤엎는 것은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유대전쟁 이전에 예루살렘 군중들이 가졌던 혁명적 메시야에 관한 꿈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계속 지적했듯이 유대전쟁을 확실히 제압한 로마로 인해 마가는 랍비 유대교처럼 혁명적 메시야 상을 추종하는 자들과 거리를 두어야 했고 그래야만 그의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잠시 마가의 이러한 전략 때문에 종려주일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종려주일 날 그 날에 예수가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 성전을 뒤엎었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기 때문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해 이 입성이 마가의 말처럼 딱 한번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와 다른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이외에도 당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시나리오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빌려온 모티프이지 실제로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입성했는지에 관해 우리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몇몇 학자들은 당나귀를 준비해두었으니 그것을 가져오라는 예수의 말은 기적과 예언에 속한 서술이지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마가복음 1장 1~4절에 제시된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예수가 사원에 입성한다는 신학적 모티프와 관계된 것이지 역사적 사실과 관계된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다시 말해, 유대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후 성전과 관련해 자신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새로 설정해야 하는 마가에 의해 설정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마가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는 사원의 주인은 다윗이 건설한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유전적 성격을 나타내는 성전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과 관련된 주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가의 예수는 종려주일 날 이후에 성전에 들어가 뒤엎는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일이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마가가 말한 대로 예수가 이방인의 뜰에서 이러한 성전정화 작업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는다.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문제와 달리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종려주일과 함께 시작되는 마가의 이야기는 대체로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닌 마가의 신학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가의 이야기에 예수는 유대 문화에 동화된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 입성한 젤롯당과는 다른 입성, 즉 유대교의 정결법과 관련한 최후의 전투를 벌인 입성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쨌든 마가가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를 설정했던 이유는 다수의 학자들이 말하듯 마가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어가는 랍비 유대교와 투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전쟁 이후 마가의 이러한 복잡한 상황은 마가로 하여금 로마나 랍비 유대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로 하여금 중심부에 속한 인물들이 아닌 주변부에 속한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실제로 그가 설정한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사회의 문화적 지위에 기대에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꾸려나갈 수 있는 중심부적 인물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마가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공동체는 플라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적 인물이 공화국을 통치해야 한다는 명제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가가 그리는 공동체의 성격은 플라톤과는 다른 차원, 즉 한 사회의 주된 문화적 권력을 향유하는 계층에서 벗어난 인물들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분명 마가의 이야기는 유대전쟁 때 나타난 젤롯당의 뜨거운 혁명에 관한 이야기도 또한 이 전쟁에 살아남은 랍비 유대교에 속하는 중심부 인물들에 관한 것도 마지막으로 이 전쟁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전쟁 이후 일상에서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주변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마가의 이야기는 유대 전쟁 이후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정결법으로 사람들을 묶어 갔던 랍비 유대교와 제국의 힘을 과시해 자신의 세계를 건설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와는 다른 방식, 즉 정결법에서 제외되었거나 제국의 조세를 떠안고 하층민으로 멸시받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재건을 논했던 이야기로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종려주일 첫 날에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군중의 환호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린 마가의 이야기는 전쟁 이후 국가라는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건한 중심부 인물들에 관한 영웅적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이후 국가를 구성하는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점을 지녔다는 이유로 밀려났던 주변부 인물들 혹은 일상을 견디며 살아냈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분명 이 인물들은 국가체제의 전복이나 혁명을 논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의 이해의 틀에 따르면 이들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었지만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혁명적 힘을 소유한 노동계급이 아니라 노동에서 밀려난 인간들 그래서 혁명을 제기하기는커녕 노동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랑자로 지탄을 받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마가가 표현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는 혁명적 전사가 아니라 부랑자들과 함께 하고 부랑자들을 비판하는 세상의 권좌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거라는 묵시적 사상을 충실히 따른 인내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떠돌이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 믿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마가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인간군상은 뜨거운 혁명을 논했던 전쟁이었지만 패배한 로마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것도 랍비 유대교에 속한 중심부 인물들이 아닌 주변부 인물들이 펼치는 일종의 비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본 것처럼 랍비 유대교와 로마 제국사이에서 살아야 했던 마가의 생존의 신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문화적 부랑자들에 대한 혹은 노동하지 못하는 부랑자들에 대한 관점의 이동으로 인해 마가는 뜨거운 혁명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즉 생활권력 혹은 규격화 권력의 문제를 논한다. 그의 이야기는 국가라는 거대담론이 펼치는 정치권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 정치권력이 하부적인 차원에서 펼치는 생활권력 혹은 국가 내부의 하위문화들을 국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배적인 문화의 틀에 따라 일일이 감시하고 획일화시키고자 하는 규격화 권력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마가의 이야기에는 감시병처럼 끊임없이 엿보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들, 즉 바리새인, 율법학자, 그리고 헤롯당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마치 파놉티콘처럼 예수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파고들어와 일일이 감시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의 감시로 인해 마침내 예수가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마가복음 2장~3장 초반부에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하나의 원인은 정결법을 중심으로 욱죄어 오는 생활권력 혹은 규격화 권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마가의 설정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해하는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마가가 생활권력 혹은 규격화 권력에 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 자신의 공동체가 무엇을 의제로 놓아야 할지를 분명히 밝혀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종려주일 첫 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가 겪게 되는 고난과 투쟁은 정치권력이 아닌 생활권력 혹은 규격화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수의 수난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마가는 로마에 반기를 든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잔혹한 인물이었던 빌라도를 아주 온화하게 그리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설명한 반면에 예루살렘의 고위층 지도자들은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예수를 처형한 장본인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마가복음 14장 이후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예수를 죽이라고 말했던 예루살렘의 지도층 인사들은 마가복음 2장과 3장 초반부에 나타난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헤롯당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항상 마가에 따른 예수의 고난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명심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예수가 유대교의 정결법을 어긴 인물이자 성전파괴를 예언한 인물로 고발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결코 로마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차원이나 대의와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차원에서 삶을 파고드는 권력에 관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분명 마가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는 랍비 유대교의 삶의 규율화 혹은 규격화에 대해 저항을 벌인 인물이지 로마와의 투쟁이라는 거대 담론의 차원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와 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학자들이 복음서에서 반유대주의적 시선을 잡아내는 것도 예수에 대한 마가의 이러한 서술 때문이다. 확실히 마가는 이방인을 포함한 어떤 의제 설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예수를 철저하게 랍비 유대교의 삶의 권력의 문제에 대해 도전한 인물로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반유대주의적 시선을 강화시켜주는 길을 터주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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