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항제철을 부인할 수 있을까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단상



황용연

(본 연구소 객원연구원, GTU Interdisciplinary Studies 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박사후보생)


 

1. 

   지난 해 말 한국-일본 외교장관 간에는 이른바 ’12.28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얼마 전 그 합의에 따른 재단이 출범했고, 조만간 그 합의에 따른 10억엔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 합의에 대한 서경식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 사이의 지상논쟁이 지난 3월에 한겨레신문을 무대로 벌어졌다. ’12.28 합의’에 대한 서경식의 부정적 입장과 와다 하루키의 긍정 후 개선의 입장이 시종일관 엇갈리는 이 논쟁에서 특히 필자의 주의를 끌었던 엇갈림의 지점은 이 곳이었다.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은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성공했다고 와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피해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이름을 밝히고 나서서, 끊임없이 일본 국가가 저지른 일을 비판한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은 기금 쪽에 신청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성공’을 자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일본 국가가 가장 진지하게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고, 그녀가 용서를 해야만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서경식) 

   “네덜란드에선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비판해온 얀 루프 오헤른이 기금을 거절했다.”고 한 서씨는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헨슨을 언급하며 “철두철미하게 일본국가에 유린됐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속죄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헨슨은 기금을 받을 때 “지금까지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습니다.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와다 하루키)  


   아시아 여성기금이 ‘반관반민의 모금 형식을 취한 위로금/사죄금’ 지급을 통해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배상을 대체하려는 시도였음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기금에 대해 ‘얀 루프 오헤른’을 예로 들어 비판하는 서경식에게 와다 하루키는 ‘마리아 헨슨’ 같은 경우도 있는데 ‘얀 루프 오헤른’만 부각시키는 것은 부당한 비판이라고 대답하는 셈이다. 확실히 ‘마리아 헨슨’ 같은 케이스는 한국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긴 하고, 와다 하루키의 글에서는 이런 케이스가 적어도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적지 않았다는 뉘앙스도 받을 수 있다(사실은 한국에서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이미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얀 루프 오헤른에게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여성기금이 그것을 수용한 피해자들에게 ‘불가능한 꿈의 실현’일 수 있었음을 인정하더라도, 수용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적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아무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지점에서, “적어도 일부의 피해자들에게는 정의의 실현이 되었으니 그만큼은 성공하고 진전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이 때 ‘성공’과 ‘진전’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일까.


2. 

   와다 하루키의 입장에서 보면, 서경식이 아예 ‘반동의 물결’에 몸을 담갔다고까지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느낄 만도 할 것이다. 한일협정 때문에 법적 배상의 길이 막혀서라고 하든, 현재의 일본국이 전전의 일본 제국과 연속성을 갖는 국가이고, 과거 전쟁 범죄를 자기 손으로 심판해 본 적이 없는 국가라, 지금 와서 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는 실제로 여성기금 출범 당시,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찬성 측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왔던 이야기다)이라고 하든, ‘국가의 법적 책임’이라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어렵다면 다른 해결책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란 생각과 행동을 했을 테니. 그리고 앞에서 보듯이 그 여성기금을 ‘해결’로 받아들인 당사자들도 상당수 있으니, 그 당사자들의 선택을 “법적 배상을 피하려는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났다”고 폄하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부분, 위안부 당사자들이 바라는 정의를 실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역시 ‘얀 루프 오헤른’ 앞에서는, 그리고 그녀와 같은 거부의 입장인 한국의 피해자들 앞에서는, 와다 하루키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여성기금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일 수 있다고 한다면, 혹시 그 해결은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서경식의 표현을 약간 수정해서 빌리면 “일본인 자신들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가.”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일본국과 일본 제국의 연속성에 관해서 간단히 짚어보자. 잘 알려졌듯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는 미국이 일본을 태평양 지역의 하위파트너로 활용하는 동맹 체제 위에서 가능했고, 그 동맹체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처 중 하나가 일본 제국의 핵심구조인 ‘천황제’를 ‘상징’으로서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동맹체제의 핵심요소인 군사력을 ‘오키나와’에 집중시켜 본토는 ‘평화헌법에 기반한 군사력 청정지대’로 유지하고, 사회적으로는 ‘재일조선인’과 같은 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등장함으로써, 이 문제가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토대 중 하나인 ‘제국의 핵심구조를 비무장이라는 조건으로 존속시키는 대신 전쟁 책임을 면제한다’는 점에 대한 직접적인 폭로가 됨을 의식하고, 전후 책임 문제를 통해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는 지식인 그룹이 생겨났다.

   최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큰 논쟁을 촉발한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이 상황을 탈냉전 이후 할 이야기가 궁색해진 일본의 좌파가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이야기거리를 찾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 전체의 개혁과 연관시키기보다 ‘그 문제 자체에 집중했더라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제국의 위안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앞에서 와다 하루키에게 던진, 거부하는 당사자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여기서도 유효하게 될 것이다.



3.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과거사 청산’ 작업이 꾸준히 이어질 당시, 그 작업에 대한 이런 비평이 나온 적이 있다. “도대체 역사나 과거라는 것은 ‘청산’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마치 결산서를 작성하여 집행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런 것인가?”(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중에서)

   이미 벌어진 일을, 있었던 피해를, 되돌릴 수 없으니, 역사나 과거라는 것이 ‘청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 바로 그 가해자에게 계속 항의하고 있으니, 그 항의가 이어지는 한은 당연히 청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설령 그 항의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라도 이 피해의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결산’해 버린다고, 그런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자기 마음대로의 결산’이 벌어지는 경우, 대체로 그 밑에는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국가간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문제가 되는 ‘12.28 합의’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예 대놓고,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면서 ‘결산’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짚어 본다면, 이 문제를 ‘한일화해’로 풀길 바라는 의견들도, 이미 ‘한일’이라는 ‘국가간’의 구도를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국의 위안부]처럼 ‘한국과 일본’이라고 하든, 와다 하루키처럼 ‘조선 민중과 일본 민중’이라고 하든.

   그런데, 사실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문제’로 보는 것은 위안부 당사자들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위안부 당사자들을 “민족이 당한 피해”로 인식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 방식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최근 위안부 피해 관련 운동의 상징이 된 ‘소녀상’도, 대다수 피해자들이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고, 식민지 조선에서 어린 여성들을 동원하는 것이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관련 전략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이미지를 집약한 측면이 강함을 부정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말은, 위안부 당사자들이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그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 해방 후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학자에게, 그 문제제기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꽤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말이 그 ‘민족’ 내부에서 똑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도 된다. 상황이 이렇다면, ‘민족이 당한 피해’라는 패러다임이, 위안부 당사자들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어떤 긍정적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렇다면 ‘국가간’ 문제라는 시각 말고, 위안부 당사자들과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 사이의 관계라는 식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피해자들을 굳이 ‘한국인’으로 제한할 필요도 없이,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이 져야 할 책임을 요구하는 주체들로서의 위안부 당사자들이라는 시각으로 말이다. 물론 이렇게 볼 때, 당사자들 각각이 일본국의 책임 완수를 어느 선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얀 루프 오헤른’과 ‘마리아 헨슨’이 갈라졌고, 한국에서도 여성기금 거부자들과 수령자들이 갈라졌듯이 말이다), 위안부 관련 운동의 입장에서라면, ‘수용’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그것대로 존중하되, ‘거부’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끝까지 그 거부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게끔 도우는 것이 운동의 본질이지 않을까.


4. 

   위안부 당사자들과 제국의 후신으로서의 일본국 간의 관계라는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 그 일본국의 전후 책임 문제와 깊이 관련된 미일동맹구조에 현재의 한국도 발 담그고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한국의 ‘현재까지의 번영’에 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도 외면할 수가 없게 된다. 국가간 법적 문제는 다 끝났다는 법적 핑계나, 미일동맹구조를 깨는 건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핑계 양쪽으로 활용이 될 만한 ‘한일협정’으로 받은 ‘독립축하금’이, 다름아닌 포항제철의 건설 기반 자금이 되었다는 것은 미일동맹구조와 현재의 한국 간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장 아메리는 이런 몽상을 했다고 한다. 독일인 스스로가 나서서, “굴욕의 날들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심지어 동시대의 소산인 아우토반마저도 예외 없이, 가능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집단”이 되는 몽상이다. 이 몽상이 실현된다면, “피해자의 원한이 주관적으로는 풀릴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장 아메리의 몽상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모든 것을 부인한다면, 한국인은 어떠할까. 방금 이야기한 대로 한일협정의 산물이 포항제철이라면, 한국인은 포항제철을 부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애당초 시작점인 장 아메리부터가 ‘몽상’이었고, 결국 그 몽상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하지만 여기서 나는, 체 게바라가 말했다는 그 유명한 문구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리얼리스트도 될 수 없다.” 

   역사와 과거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포항제철을 부인할 수 있다는, 포항제철을 가능하게 했던 미일한 동맹체제를 부인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 그 역사와 과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일 수 있단 말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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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공개토론을 기대하며



 

백승덕*


 

          지난 9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400명 가까운 지식인들의 명의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를 기소한 것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공개토론을 통해 풀자고 제안했다. ‘학문의 자유’의 상징이 돼버린 이 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학계의 자율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고민들이 모여 만들어낸 자리였다. 국가권력이 법이라는 앙상한 잣대를 들고 학계에 개입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들의 공개토론 제안은 학계가 법정을 대신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충분히 대변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어쩌면 학계가 이 사태와 관련하여 내놓을 수 있을 가장 적절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위안부’ 생존자 유희남씨는 그러한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그의 질문은 ‘위안부’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학자란 무엇이며, 대체 무엇이기에 그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여태껏 이어졌던 질문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세웠다. 즉, 지금까지 학자들이 ‘위안부’가 무엇인지 물어왔다면, 유희남씨는 ‘위안부’ 생존자로서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 학계가 무엇인지 되물은 것이다.  


학문의 경계


         학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사건들은 비단 <제국의 위안부> 사태뿐만 아니라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2015년 한 해 동안 역사학계에는 전문성에 대한 공격이 집중됐다. 그간은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첨예하게 벌어져도 ‘역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라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라는 초대형 스캔들이 터진 뒤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검인정 체제 대신 국정화하겠다고 결정했는데, 학계는 이 사태에서 애초부터 전문성을 부정당했다. 정부와 여당에서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는 색깔론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국사학자들이 교과서 시장에서 밥그릇을 지키려고 한다는 공격도 더해졌다. 색깔론에 밥그릇론까지, 국가가 나서서 학자들을 좌파·이익집단으로 몰아세웠으니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어려워졌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학계 전체가 국가에 찍혀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게 된 사태까지 치닫게 됐다.

         역사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역사의 다양성’을 내세워 맞섰다. 국정교과서가 역사를 획일화하여 죽인 역사만을 가르치는 독재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가가 역사해석에 개입한다면 역사가 획일화되어 학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실제로 자국의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국가는 북한, 몽골, 스리랑카 같은 극소수 독재국가 밖에 없다는 사실도 학계의 비판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역사학계가 ‘역사의 다양성’을 한없이 세게 이야기하기는 곤란했다. 역사는 정말 다양한가? 학계는 앞서 검인정 체제에서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교과서에 대한 인정을 반대했던 적이 있다. 이 교과서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연도표기를 잘못하는 등 수준미달의 모습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학계가 교학사교과서에 반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 교과서가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 독재 미화’라는 비판에 부딪히며 전국 2천300여개 고등학교 중 3개 학교에서만 채택되고 말았다. 보수 정권이 집권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음에도 사실상 채택율이 0%를 기록했으니 참패였다. 이처럼 학계 역시 ‘역사의 다양성’을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다양성의 기준이다. 어디까지를 학문의 자유로 인정할 것이며, 누가 역사와 역사 아닌 것의 범위를 판단할 것인가? 역사는 다양한 것이므로 공공연히 친일을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도 얼마든 가능한 것일까? 반대로, 북한 정권이 발행한 교과서를 다양성을 내세워 남한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친일이나 북한 정권을 무작정 찬양하는 교과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배나 남북대치가 지금도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과서를 인정하면 학계의 객관성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뤘다고 어떤 이야기든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박사논문 한편을 쓰기 위해 한 청춘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어렵게 훈련 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계에서 위서(僞書) 취급을 받는 『환단고기』 식의 역사관을 교과서에 싣는 일도 문제 삼을 방법이 사라진다.

          그러니 학계는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애쓴다. 문제는 학계가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을 때에만 이러한 구분 역시 실질적인 효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학계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면 어떤 주장이든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그만큼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권위가 더더욱 약해지기 때문에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소수자들의 역사처럼 그간 억눌렸던 기억들이 새로 조명을 받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반동이 힘을 받을 위험도 크다. 한국의 넷우익들 역시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광주항쟁이 북한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며 ‘팩트’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의 세기가 저물고 있다


         그런데 조금 넓게 보면 학계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생산/인정해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역사학이 전문 분과로 등장했으니 이제 200년 정도 지속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우에 따라 조선 후기의 실학사서까지 소급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청구학회(1930년), 진단학회(1934년) 등이 결성되고서야 비로소 학회 중심의 학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근대 역사학계는 자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생산해내는 방식을 모방하여 학회를 중심으로 태동했다. 16~17세기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동료들을 초대하여 실험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공증 받았다. 진실은 과학자 사회의 인정으로만 효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학회(society)는 진실을 공증하는 공신력 있는 과학자 사회로서 자리매김했다. 19세기에 들어 역사학계 또한 자연과학의 체계를 뒤따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공증하기 시작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체계를 통해 생산되었다. 이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단독으로 역사적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역사적 사실은 오직 동료 역사학자들의 공증을 통해서만 학문적 진실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학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계가 그러한 공증을 담당했다. 학회지에 논문이 투고되면 보통 2~3인 정도의 심사자들이 이를 검토하여 통과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보편화된 절차다.

         근대에 들어 역사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한국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다른 지역의 역사와 구분하여 ‘국사(國史)’라고 부르며 특별히 다뤄왔다. 국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한국사는 더 이상 세계사의 하위 범주가 아니었다. 세계사는 다만 한국사가 다루지 않는 여분의 세계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워 국사교육을 강화했다. 중등교육에서 국사교과가 독립되고, 모든 대학에서 국사가 필수교양이 됐다. 국가권력과 학계가 국사를 매개로 밀월관계를 맺었던 시기가 반세기 조금 못 미치게 이어졌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새에 사정이 바뀌었다. 국가가 역사학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던 시대가 급격히 저문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자 어느 보수적인 지식인의 선언처럼 역사가 끝난 듯이 보였다.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영원히 머물 것만 같이 보였다. 역사가 끝났으니 역사학에 지원을 해야 할 이유도 급격히 줄었다. 북한이 세계의 섬처럼 고립된 상황이라 한국 정부가 이전처럼 국사에 지원할 필요도 사라졌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소수의 학자들만 있으면 충분할 뿐이다. 국가의 취향만 변한 것이 아니다. 역사학을 포함해서 대학 인문학 역시 소수 엘리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학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 정도만 읽을 정도로 끼리끼리만 돌려보고 말 뿐이다 보니 국가지원이 없다면 연구를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국가의 입맛에 맞춰 연구계획을 짜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에 대한 의존도도 너무 높아졌다. 자립도가 상당히 취약해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가 학계를 공공연히 ‘왕따’시키겠다고 나선 이상 국가재정에 기대던 학계의 기존 습속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렵다.

          학계가 직면한 위기는 돈 문제만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학계가 자기점검을 해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계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려면 독립적인 재정도 확보해야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역사학의 인식론이나 방법론과 같은 ‘게임의 룰’을 공유하고 있어야 학계라는 공론장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양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학술 업적 기준을 채우기 위해 논문을 생산해온 학자들에겐 학계를 돌아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역사는 학계에 맡기자’라고 주장하기도 참 머쓱해졌다. 학자 개개인이 개인사업자처럼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첨예한 역사 관련 논란들을 깊이 있게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에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해방직후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학계에 대한 지원은 늘 부족했고, 그 뒤엔 오랜 군사독재 치하에 놓였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학문의 자유는 항상 위험에 노출됐다. 학자들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공안 당국에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을 연구해도 사회주의 계열을 ‘잘못’ 다루면 공안사범이 될 판이었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이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 잠시 숨통이 트인다 했더니 곧이어 잔인한 생존경쟁이 학계를 위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교수든 학생이든 누구나 1인 기업처럼 자기 스스로를 경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학계가 언제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법하다.


'학문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호장치


         그러나 역사학계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보다 근본적이다. 학계가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를 의심받으며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학계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같은 갈등을 다룰만한 사회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학계가 이러한 논란을 다룰 수 있을 건강한 공론장인가? 회의적이다. 앞서 말했듯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들 정도나 읽고, 대중서는 논란이 되면 산발적으로 발표회를 열고 마는 현실이다. 익명의 심사자들은 심사평으로 “역겹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발표회에서는 나이 어린 학자의 비판을 “예의가 없다”고 정리해버리기 일쑤다. 이처럼 학문의 공론장이란 게 과연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남씨의 질문은 뼈아프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은 아마도 ‘그러한 자유는 없다’가 될 것이다. 기존 학계에 머물면서 학계 바깥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자 내세우는 ‘학문의 자유’는 환영에 불과하다. 가뜩이나 학문의 공론장이란 것의 실체도 의심스러운데, 단순히 교수가 낸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자유’는 학자라는 신분에 따라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새로운 공론장을 함께 열어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장비에 불과하다.

         그간 법정과 학계라는 이분법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정작 학문적 공론장은 썩은 도끼자루가 돼버렸다. 이러한 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게 공감한다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박유하 교수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공개토론을 제안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대학 안팎에 걸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열어갈 공론장은 기존 학계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일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공론장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그러한 존엄성을 위협했던 권력과 폭력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을 말들이 조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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