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4)
: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주체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현대 철학계의 흐름속에서 주체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스펙트럼상에 존재한다. 주체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디세이처럼 험한 여정을 마감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그래서 자아의 존재를 기어코 발견하고야 마는 가열찬 의지를 지닌 반성적인 주체이고, 또한 주체는 하이데거적인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주체, 그리하여 현실을 완전히 독점하는 주체이며, 이는 또한 세계사를 신의 자기 인식, 자기 생성으로 파악한 헤겔류의 역사철학에 등장하는 무한 진보 신화에 빠져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위에서 거론된 주체는 하나의 개별적 주체가 아니라, 근대성 혹은 근대적 프로그램에 의해 조성되고, 근대(성) 일반이라는 담론의 틀 안에서 주조된 주체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후기 구조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근대적 프로젝트 일반에 대한 폐기를 선언하면서, 인간의 계몽, 근대적 인식론, 근대적 주체론 등 이른바 근대성의 신화에 입각한 주체에 대한 무효와 해체를 주장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주체의 존재를 절대화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주체의 죽음’을 운운하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과도 선을 긋는다.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무리들 역시, 그보다 앞섰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성과 타자성,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각주:1]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죽음이 알 수 없는 실재, 즉 삶의 타자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2] 죽음은 빛의 영역(인식, 경험, 지식) 밖에서 일어나는 경험,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관계로부터 도래하는 사건이다: “주체는 이제까지 능동적이었다. 나는 ‘수동성의 경험’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경험은 항상 이미 인식, 빛, 주도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비로서의 죽음은 그렇게 이해된 경험과는 구별된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파악되고, 간단히 말해서 나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런 사건을 알려준다.”[각주:3]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내가 주인이 되는, 내가 주도권을 갖고 끝까지 밀어 부치는 그것이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해 빛의 명증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두움이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사로잡는 그 무엇(타자)이다. 그 상황은 <시간과 타자>를 비롯한 그의 저서들에서 ‘얼굴/미래/여성성/타인과의 만남’등 레비나스 특유의 레토릭으로 전개된다. 특별히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소위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하면서, 타자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각주:4] 
얼굴은 레비나스에게 있어 현시가 아니다. 얼굴은 물리적 시.공간에 위치를 점하는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굴은 우리에게 깊이와 근거를 알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우리를 향해 침투하고 관여한다.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아우성대며 우리의 응답을 촉구한다. 레비나스가 윤리학을 ‘제 1 철학’[각주:5]으로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를 전통적인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응답의 차원, 책임의 차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레비나스가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도 유용하다. 인간의 주체성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발성이다. 주체란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인간의 자발성의 영역이 아닐까?’라는 물음도 가능하다. 실제로 현대 철학자들 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최후의 순간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인간의 주체성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있지 않다.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주체이다. 죽음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책무를 다 했을 때 맞이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책임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희망’이라 말한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이다”. 계속하여 레비나스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며 “나는 숨쉰다, 나는 희망한다”라고 선포하는데,[각주:6] 이러한 고백은 전적으로 레비나스의 나치 치하 포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기인한다.[각주:7] 

Episode: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온 희망의 근거

필자가 현재 재학중인 시카고 신학교에 올해 나이로 96세인 노학자가 있다. 시카고에 있는 대표적인 진보적 색채의 신학교라 할 수 있는 시카고 신학교와 Northwestern대학 안에 있는 Garrett 신학교에서 유대교를 가르치고 있는 Rabbi Schaalmann 교수이다. 마틴 부버의 제자이고 레비나스와도 교류를 가졌던 분으로 현재 유대교 학자중에는 최고 원로급이며, 그 자체가 교과서인 신화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text 없이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이 질문하면 교수님이 대답하는 형식인데, 모든 질문과 어떠한 상상도 허락되는 시간이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가끔씩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주신다;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 친구들, 가스실, 삶을 차단해 버린 높은 담장과 철조망, 얼굴에 핏기가 없으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어 끌려가 죽는다. 얼굴에 생기가 있게 비치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어 얼굴에 바르는 사람들…
나치는 응징과 공포의 차원에서 몇몇 마음에 안 드는 유대인들을 골라 시범케이스로 교수대 위에 목을 메달아 공개적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나머지 유대인들은 고개를 들고 그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하면서 교수대 밑을 빙빙 돌아야 한다. 이렇듯 죽음이 선포되고, 집행되고, 확인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을,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피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다고 Schaalmann 교수는 회고한다.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신을 용서할 차례다. 이제 우리의 신을 놓아주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계속 의미를 묻고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 Rabbi Schaalmann은 고백한다. 신을 용서하고, 신을 놓아버리니까 (사실, 그 의미가 정확히 뭔지는 필자는 잘 모르겠다. 96살이 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런지?), 그 전에는 몰랐던 수용소 하늘 만큼의 자유가, 그리고 희망이 여전히 내게 있다는 것이 전해져 왔고, 죽음의 가스실 담벼락을 비집고 난 풀 한 포기 혹은 감방 창살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아래로 파랗게 낀 이끼들을 보며 여전한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집착을 느꼈다고 그는 증언한다. 그 힘이 우리를 끝까지 살아남게 했다고 말이다.

레비나스의 책을 읽다 보면 죽음과 자살, 그리고 희망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급격한 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레비나스를 읽는 독자들에게 난제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이는 다분히 아우슈비츠에 대한 전이해 부족과 유대 신비주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Schaalmann교수는 지적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 경험은 그것을 경험한 대부분의 유대 사상가들에게 그렇듯이, 레비나스에게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가 구사하는 문장 곳곳에 숨어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레비나스는 이런 이유로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고 말한 후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각주:8]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자신의 초기 저작인 Writing and Differ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안에 있는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에서 레비나스를 신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레비나스의 타자인식에 대해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1995년 레비나스가 죽은 후에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회상하며 ’아듀! 레비나스’라는 유명한 추모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Adieu to Emmanuel Levians(Stand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란 제목으로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다. 그 대목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적 타자 발상을 상당부분 수용한다.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를 둘러싼 논쟁은 타자 담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타자를 둘러싼 논쟁사: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중심으로(가칭)’라는 주제로 차후에 제3시대 웹진을 통해 발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 시간과 타자, 77쪽. [본문으로]
  3. Ibid., 77 쪽 [본문으로]
  4.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10;University Press, 1969;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후반부 전체를 ‘얼굴의 현상학’을 테마로 하여 그의 타자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5.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 Balckwell, 1989. p.75. [본문으로]
  6.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7.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본문으로]
  8.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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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3)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요약, 그리고 방향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기인한 죽음에 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이 쓰여지고 있던 기간에도 우리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 구약학자 김찬국 교수의 죽음, 그리고 영화배우 장진영의 죽음을 경험했다. 처음에 글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톱스타 최진실의 자살, 좀 오래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을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재벌, 스타, 심지어 대통령까지 자살에 대한 압제와 억압에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챤으로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글을 시작한다고 밝힌바 있다.
필자는 자살에 대한 논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자살 역시 인간이 맞는 죽음의 방식(형태)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두 차례의 (웹진 9호, 11호) 글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세계관과 근대철학, 현대 실존주의 철학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간략하게 진술하였고, 오늘 하이데거와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에 이르렀다.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자살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데 그 부분과 자살이 만연하는 한국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부분은 다음달 마지막 주제를 위해 남겨둔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I: 하이데거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실존주의적 인간유형은 하이데거에 와서 그 절정을 맞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 그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향한 일방적 포획으로서의 서구 근대철학은 고전시대(그리스시대)가 지녔던 존재체험을 상실했다고 비판한 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근원적 존재체험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 신이 이렇게 현전함 그 자체가 곧 그 구역을 하나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의 확장이자 경계지움이다.”[각주:1]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신전과 신상, 그리고 신화는 그들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들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신화는 그들에게 있어 기억의 반복이자 현실의 원칙이었다. ‘신전을 세웠다’함은 근대적 의미로 궁극적 대상을 향한 인식론적 분투라 표현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인들에게 있어서는 근대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태초에 신이 먼저 있었고, 그 신이 임재하는 신전을 세움으로 대상과 의식의 합일을 도모했던 근대적 인식론이 아니라,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비로소 신이 존재하게 되었고 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신전을 통해 신이 그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구절의 의미이다.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의 세계가 열린 것(개시 開示)이다. 고대 헬라스인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을 그 안에 안치시켰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의 세계, 하이데거적 의미로 ‘생활세계’를 건설하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생활세계는 실천적 해석을 전제로 하였고, 하이데거는 특별히 사물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실존적 주체를 ‘현존재 Dasein’라 불렀다. 


Episode:  개시開示 의 기억, 87년 6월

진리가 실존적 삶의 현장에서 개시되었던 사건은 역사상 무수히 많다. 문제는 그 이름없는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신이 신전 안에 현전한다’는 의미는 기독교식으로 ‘말씀이 육화되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의 현전을 봐버린 개시의 사건 말이다.
87년 6월이 그러했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신촌에 있었는데, 학교와 집을 오갈 때 맡았던 매캐한 췌루탄 가스와 버스 밖 풍경들, 예들 들어 푸른 옷의 전경들, 닭장차, 괴물 같았던 페퍼포그가 질서 있게 혹은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현재의 전황에 내기를 걸곤 했었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이었는데 그날 나는 학교에 안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신촌 일대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날 임시로 하루 가정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학교를 땡땡이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고3은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다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이한열 장례식에 있었다.
장례식 도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등장하셨다. 아버지의 대학시절 스승이셨다는데, 아버지는 문목사님이 엄격하고 학문에 열중하셨던 구약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하신다. 유년시절 수유리 고모네 집에 놀러갈때마다  아버지는 고모네 옆의 옆집이었던 문목사님 댁에 먼저 들르셨다. 그 집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나도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는데, 문목사님은 집에 계시던 때보다는 안 계셨을때가 훨씬 더 많았다. 아버지께 ‘목사님 어디 가셨어?’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감옥에 갔어’라고 말해주었다. 바로 그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하자 마자 이한열 장례식 연사로 나오신 것이다.
단상에 오르시더니 문목사님은 사자후를 토하시며 “장준하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독재정권하에서 죽어간 20여명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면서 그 넋을 하나씩 불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렸을때 보았던 만화영화중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폴이 4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때 화면 전체가 빙글빙글 돌면서 폴이 무슨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상한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데 마치 그와 같았다. 문목사님이 죽어간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폴처럼 새로운 세계로 빙글 빙글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모였던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로 엮어지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에네르기가 그곳을 휩쓸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열하고, 가슴을 치고,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내가 무엇을 알았을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 인지에 대한 이데아가 선재하고 있다가 우연히 87년 6월의 역사적 상황이 그것과 맞아떨어져 내가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와 정의와 자유라는 의미가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가 87년 6월에 불현듯 솟아올라 왔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87년 6월 한복판에 내가 우연치 않게 그곳에 서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 그 외침과 울음과 노래를 듣고 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확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니 현전이니 개시니 하는 암호와 같은 말들을 만날 때 마다 87년 6월의 사건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반추한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

궁극적 진리의 현전에 참여하는 주체, 즉 실존론적인 주체개념 하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현실적삶이라는 것 안으로 끌어들여(선취하여)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시간의 궤적을 따라 산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세계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고 나름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 지평을 갖는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 벌어진 사건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을 삶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던져진 세상과 맞짱 뜨는 적극적인 측면과 자신이 던져진 세상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어져가는 수동적인 측면을 모두 갖는다. 이런 점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자기 실존의 본질로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하고 깨어있는 본래적인 인간(존재)가 된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봄으로써 개시된 근원적 진리를 확인한 현존재가 비로소 전체로서의 진리(인간존재)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해의 근본조건이다. 
종합하면,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 속에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開示’를 제시함으로써 대상과 사유의 일치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성립하는 파생적 진리와는 다른 진리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그의 이해에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현존재속에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능한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V: 임마누엘 레비나스, 하이데거를 넘어서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주체가 주체로서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e>과 <시간과 타자 Time and Other>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른 죽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하이데거의 죽음은 마치 빛의 인식구조 안에 놓여있는 무엇이다: “죽음으로 향한 존재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에 있어서 최고의 밝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남성다운 힘이다.”[각주:2]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양태를 설명하며 ‘최고의 밝음’, 즉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을 의미)이라 표현을 썼다고 지적한 후, 하이데거 역시 서구 형이상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빛의 현상학’안에 있음을 꼬집는다. 
태양(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는 변방과 주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고 빛의 영향력을 점점 상실한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복과 타도와 착취와 왜곡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여성/이교도/흑인/유대인/장애자/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등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당대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왔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리이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 스펠링이Enlightenment인데, 가운데에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gh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히는 의미에서의 ‘빛’이다. 이렇듯 서구 형이상학 곳곳에는 빛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짙게 베어있다. 하이데거가 서구형이상학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를 하지만, 레비나스가 볼 때는 하이데거 역시 서구의 인식론적 방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빛의 폭력’의 수혜자(or 피해자)인 셈이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폰 헤르만,「예술작품의 근원」,『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기상 옮김,(서울:문예출판사,1997), 583쪽.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문예출판사,1996), 77-7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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