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2] 창조과학/과 동성애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최근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가 청문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결국 사퇴한 한 교수가 이른바 ‘창조과학’을 신봉한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었다. 물론 ‘사퇴’까지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른바 ‘뉴라이트’ 경향의 역사관에 따른 활동들이 노출되면서였지만, 그러한 부정적 요인들이 드러나도록 촉진하는 분위기가 처음 조성되는 데에 ‘창조과학’의 역할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듯 하다.

   창조과학이 한 공직 후보자의 평가에 이렇게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담론들이 그만큼 비상식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그러한 비상식적인 점들은 이미 해당 인사가 공직 후보자에 오르기 전에 아예 걸러지거나 혹은 시정을 약속받아야 할 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처 없이 버젓이 등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오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장관이 되기야 했지만 다른 부처의 장관 후보자도 이른바 ‘유사역사학’ 문제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었고 말이다. 

  이렇듯 문제시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비상식적인 속성은 역시 창조과학이 사실상 “성서에는 생명이 (진화가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그것이 맞다/맞아야 한다”는 전제를 미리 가지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명’을 위해서 과학적인 것인양 보이는 담론들을 만들어 내고 그 담론들에 과학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해 달라고 우기는(그래서 역설적으로 ‘과학’의 권위를 더더욱 보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대중들의 일각에 퍼져 있는 편견(그래서 유달리 많이 들먹이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생명이 진화되었다면 ‘최초의 생명’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러니 진화론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이기도 하다)을 끌어와,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보충하려 드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모든 모습은 결국, “성서가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했으므로 진화가 아니라 창조가 맞다/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으므로 가능한 것일 터이다.


2. 


  그런데 이렇게 창조과학을 곱씹어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성서가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했으므로 창조가 맞다고 우기는 것과, 성서가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했으므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다른 것이 무엇일까.

  일단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성서가 그렇게 말했다니까”이다. 물론 성서에 등장하는 소위 ‘동성애’가 오늘날 정설로 정립된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가 아니라는 것은 그들에게 상관없다. 오히려 성서에 그런 동성애가 안 나오므로 동성애는 성적 지향이 아니라 성적 일탈이 될 뿐이라고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성서가 그렇게 말했다니까”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 특히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는 이야기들을 끌어 대고, 거기에 대중들의 편견까지 동원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다를 바 없다. 벌써 논파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오는’ “동성애=AIDS” 담론이나 전환치료 담론, 도덕적 타락으로 매도하기 등의 담론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나 더 보탠다면, 동성애를 이렇게까지 매도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라고 여기는 흔한 생각이 결국 저러한 매도의 연료가 된다는 것은 굳이 두 번 말할 이유는 없을 듯 하다.


3. 


  그런데, 이렇게 창조과학이나 반동성애담론이라 그 형성 원인과 작동 방식이 별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한 가지 질문이 머릿 속에 생긴다. 별 다를 바 없는 두 개의 담론 중, ‘창조과학’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는 ‘흠결’이 되는데, 어째서 ‘반동성애담론’은 거꾸로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낙마시키고 대법원장 후보를 낙마시킬 뻔한 ‘동력’이 되는 것인가.

  그만큼 반동성애담론을 밀어붙이는 극우적 개신교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극우적 개신교의 집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창조과학도 집착 대상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저러한 차이의 이유를 ‘극우적 개신교’에서만 찾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을까. 아니, ‘극우적 개신교’의 입장에서도, 적어도 동성애 이슈에 대해서는 상대편에 ‘틈’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이미 동성애를 강하게 매도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라고 여기는 흔한 생각을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생각이 명백한 하나의 ‘틈’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얹어 본다면, 동성애 이슈에 대해 인권보호라는 당연한 차원의 입장 표명을 못 하는 이유를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라고 후보 시절에 변명하고 아예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대선토론 때 이야기하기도 했던 현직 대통령과, 그 변명에 자신들 나름대로의 변명을 지지자들이 양산하는 모습에서도 그러한 ‘틈’이 보인다고 할 것이다.

  특히 후자의 모습을 곱씹어 보면, 그 지지자들이 대선토론 때의 후보의 문제발언에 대해 LGBT 운동가들이 항의 퍼포먼스를 한 것을 두고 “만만하니까 그런 항의를 하는 거냐”라고 거품을 물었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이 때, 전자가 전형적인 ‘권력자’들의 행태(그럼에도 여전히 ‘노무현’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행태도 보이지만 말이다)라는 것도 짚어 둘 만할 것이다. 물론 이 때의 ‘권력’은 흔히 생각하는 ‘소수에 독점된 권력’이 아니라 ‘다수’로서 행사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든지 ‘소수’에 대한 배제로 돌변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쯤 오게 되면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던, ‘강하게 매도하진 않아도 좀 이상한 건 맞지 않나’와도 통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배제. 그리고 그런 배제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라는 것이야말로 성서의 핵심 메시지 중의 하나라는 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러니, “성서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니까 동성애를 죄라고 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게 ‘성서적’ 신앙이라는 말 이상의 코미디가 어디 있겠나. 오히려 성서 모독으로 짤없는 지옥행을 예약한 언행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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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HRA
    2017.10.09 18: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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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는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에 법 질서를 깨고 무너트리는 죄다...
    당신 자녀가 동성애자라면 그렇게 소수의 인권이라 이야기할수 있는가...
    먹으면 정녕 죽는다...하신 선악과와 같이
    하나님이 죄라 하셨고 죽이라 명 하셨으니
    분명 죄고 하지 말아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2. jmh
    2017.10.11 14: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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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끼가 어찌 찍는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사야 10:15,16

    우리가 어떤 위치인가요? 도끼이고 막대기이며 몽둥이이지요..누구의 손에 붙들여있는지 안다면 경홀히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도 하지 않는 동성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지 맙시다.!


생명의 기원과 하나님의 행위 (Divine Action):


엠페도클레스와 고대 원자론자들의 급진적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


정대경

(GTU Ph.D Candidate)


 



   현대 우주론이 밝혀주듯이 우리 우주는 특이점의 폭발, 곧 빅뱅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4차원의 시공간이다. 약 137억년 간의 팽창 역사 가운데서 무수한 별들이 생성 되고 소멸 되기를 반복 하였다. 그 역사 안에서 약 45억년전쯤 우리가 사는 행성 지구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생명체들이 생겨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했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계가 형성되었다.  

   생명이 출현했던 환경적 배경에 관해서는 의견들이 아직도 분분하지만 아마도 위의 그림이 부여주는 용광로와도 같았을지 모른다. 행성 자체가 생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 내부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지진과 화산 활동들로부터 용암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며, 동시에 태양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던 미행성체 디스크 파편 물질들이 지구 원시 대기를 뚫고 무수한 폭격을 가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우주 안에는 전방위적으로 무질서를 창출해내는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인 엔트로피 증가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혹은 열역학 제2법칙)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 지구에서 발생한 생명의 출현과 진화는 마치 이러한 경향성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원시 지구 환경에서, 그것도 모자라 전 우주적인 무질서로의 경향성 아래에서 어떻게 생명이 출현했을 수 있을까?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 것일까? 아니면 용광로와도 같은 원시 지구 환경과 열역학2법칙 자체에 생명을 출현시킬만한 무슨 특별함이 있는 것일까? 

   혹시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원시 생명체를 이 지구에 생겨나게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위배하고 행위하시는 분인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또 생명체를 생겨나게 하셨던 것일까? 

    필자는 몇 회에 걸쳐서 위의 질문들과 유사한 고민들을 가지고 씨름 했던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다루어 보면서, 현대 과학이 밝혀주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 (e.g. 화학적 진화)과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인 창조 교리 사이의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으로 본 글은 현대 환원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출발점인 고대 원자론과 그 지지자들이 생명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생명체 화석은 약 34억년 전의 것이다. 다소 논쟁의 여지는 아직 남아 있지만 일각에서는 그린랜드에서 발견된 퇴적층이 약 38억년전 존재했던 생명체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학자들은 작년인 2015년 생명의 기원이 약 41억년 전쯤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최초의 생명체가 지구의 형성 직후 운석과 혜성들로 인한 대폭발기를 지나자마자, 혹은 그 기간 내에 대폭발의 충격이 다소 완화 되었던 장소에서 (e.g. 해저 열수공) 이른 시기에 생겨 났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고대인들 또한 위와 같은 질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듯 하다. 그 당시에는 급진적 자연발생설 (Spontaneous Generation Theory)이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주된 이론이었던 듯 보인다. 급진적 자연발생이라는 것은 생명체들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기본 물질들과 그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자연스레 출현했다는 이론이다. 언뜻보면 당연한 듯한 소리이지만, 그 당시 고대인들은 이러한 급진적 자연발생이 단순히 생명체들의 머나먼 기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생명체들의 출현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개구리와 같은 몇몇 종들은 교배나 교미가 아닌 세상의 기본 물질들로부터 ‘곧바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는데, 이 맥락에서 고대 철학자들과 일군의 신학자들은 성적인 결합과 더불어 급진적 자연발생을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Empedocles, ca. 495-435 BCE)는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세계와 그 안의 존재들은 모두 네가지의 기본 물질들 (불, 공기, 물, 흙)과 그것들을 상호연관 시키는 두 가지의 기본 물리력 (사랑과 증오)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사랑은 기본 물질들을 연합하게 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증오는 그 물질들을 흩어버리는 파괴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는데, 그 두 가지 기본 물리력들 사이의 조화로 인해 보통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생명체들이 생겨나지만, 그 둘 사이의 균형이 깨져 파괴의 물리력인 증오가 지배적인 때에는 미노타우로스와 유사한 “소의 머리를 한 인간의 자손 (ox-headed offspring of man)”과 같은 기이한 생명체들이 출현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레우키포스 (Leucippus, ca. 5th century BCE),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 ca. 460-380 BCE), 에피쿠로스 (Epicurus, ca. 341-270 BCE)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엠페도클레스의 두 가지 기본 물리력을 배제하고 자연현상을 기술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비가시적인 원자들 (invisible atoms)”을 근본 물질과 힘으로 이해했다. 원자들은 그 자체로 모든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뻗어 나가려는 운동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운동 때문에 원자들 상호 간의 충돌과 연합이 가능했으며, 원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명체들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레우키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극히 작은 크기 때문에 비가시적이며 그것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있는 것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질이다. 원자들은 심연 (the void), 비존재적 공간 안을 끊임 없이 돌아다니다가 상호 간에 충돌과 연합을 거쳐 모든 물질들을 생겨나게 하였다. 그 원자들이 흩어지고 해체되는 순간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이미 엠페도클레스에게도 전제되어 있었지만 고대 원자론자들은 생명체들의 기원과 형성이 비생명체들의 기원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은 바 생명체와 비생명체 사이에는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도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원자론자들에게는 모든 개별자들은 그것의 크기와 형태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차이도 없고, 그러한 맥락에서 생명체들은 비생명체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복잡한 존재자들일 뿐이었다. 원자론자들은 생명의 출현과 관련하여 모든 종류의 목적론이나 신적인 개입들을 거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은 순전히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지적하였다.

   에피쿠로스주의자이자 로마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 (T. Lucretius, ca. ??-50 BCE)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인격적 신이나 신적 존재의 목적과 섭리 등을 거부하고, 원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 곧 생명의 기원이 일어나는 근본 장 (field)을 “the Mother-Earth”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비록 그의 단어 선택이 범신론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적어도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것, 곧 모든 것들의 기원이 벌어지는 장으로 인식했을 뿐, 어떠한 종교적 혹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함의를 드러낼 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원자론자들과 같이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생명의 기원은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또 다른 종류의 원자들 간의 조합물이었다.  

   엠페도클레스, 루크레티우스와 더불어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다소 우리의 직관, 곧 ‘생명현상은 비생명현상과 어떠한 이유로든 구별된다,’ 과는 반대되는듯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일부는 앞서 밝힌 바 있는 환원론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입장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에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원자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현상은 비생명현상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것 이었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원에는 초월적인 존재와 힘이 작용 하였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다음 글에서는 고대 원자론자들과 급진적 자연발생설을 공유 하기는 했지만 그들과는 사뭇 다른 생명 현상과 기원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살펴 볼 것이다.


참고문헌 


  Alexander I. Oparin. Origin of Life. Translated by Sergius Margulis.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65. 


  Elizabeth A. Bell, Patrick Boehnke, T. Mark Harrison, and Wendy L. Mao. “Potentially Biogenic Carbon Preserved in a 4.1 Billion-Year-Old Zirc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12, no. 47 (2015): 14518-14521 


  Ernst Mayr. The Growth of Biological Thought: Diversity, Evolution, and Inheritanc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Ernest L. Abel. Ancient Views on the Origins of Life. Cranbury: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1973. 


  Iris Fry. Emergence of Life on Earth: A Historical and Scientific Overview. New Jersey: Rutgers University Press, 2000. 


  J. William Schopf. “Fossil Evidence of Archaean Life.”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iological Science 361 (2006): 869-885. 


  Jonathan Barnes.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2nd ed. Boston: Routledge & Kegan Paul, 1982. Malcolm Schofield. “The Presocratic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Greek and Roman Philosophy, ed. David Sedle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Stephen Toulmin and June Goodfield. The Architecture of Matter. New York: Hutchinson & CO, 1966. 


  Yoko Ohtomo, Takeshi Kakegawa, Akizumi Ishida, Toshiro Nagase and Minik T. Rosing. “Evidence for Biogenic Graphite in Early Archaean Isua Metasedimentary Rocks.” Nature Geoscience 7 (2014):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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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의 '창조론'에는 없는 여성과 성 소수자들의 권리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창조과학 세미나] 강의가 한국의 한 명문 사립대학교에서 2015년 2학기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창조과학회 (이하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담당교수는 수업 계획서에서 “기독교인 과학자로서 성경의 내용 중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보는 수업을 할 것”이고, “종의 기원, 노아의 홍수, 창조와 진화, 성경과 과학, 우주의 창조 및 진화론 등을 주제로 강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이 나간 직후 여러 가지 이유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 명문대에서 ‘창조과학 세미나’ 개설을 둘러싼 소란은 미국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나에게 흥미로운 뉴스로 다가왔다. “내가 만약 창조와 관련된 주제들을 가지고 강의를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수업의 목적, 그리고 이 주제들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나는 [창조과학 세미나] 와는 다른 동기와 방법을 가지고 그 강의를 바라볼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의 주제들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의 과학적 증거들을 드러내는 것을 추구해 온 창조과학회에서 말하는 ‘창조’는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이다 (참고로 창세기에는 두가지 창조설화가 있다). 창조과학회는 몇 명의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1980년 서울에서 열린 “80 전세계 복음화 십자군” 대회에서 주최한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1981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그 세미나는 현대 창조과학의 아버지로 알려졌고 창조연구기관(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공동 설립자인 헨리 모리스와 그의 동역자들이 진행했다. 창조과학회의 비젼과 선교는 성서무오설을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입장을 반영한다. 창조과학회는 열방의 구원, 창조신앙의 회복, 교육개혁과 창조과학관 정립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무엇보다 진화론을 과학적 허구성을 지닌 복음전파의 커다란 장애물로 여기는 반면에, 성서무오설, 즉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를 바탕으로 창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장 과학적인 이론이라 주장한다.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이 교육현장에서 논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가 말과 시조새의 진화 과정이 상상의 산물이라며 정부에 낸 교과서 내용 삭제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이를 2012년 6월 12일에 과학전문학술지 '네이처(Nature)'가 기사로 내보냈다. 기술강국, 인터넷 대국인 한국에서 벌어진 ‘믿거나 말거나’ 한 일이라며 자기네들끼리 뒤에서 키득거렸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창조과학회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알려졌고, ‘반진화론’ 학술 단체로 스스로 규정을 내리는 교진추의 궁극적 목표는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고 진화론의 부정적인 영향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창조과학회가 한국 사회에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 우려되지만, 사실 나는 창조론이 ‘진짜’ 과학에 의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반론되어 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의과정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설화’를 과학의 언어로 얘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창조설화’ (creation narrative) 를 포함해서 스무가지가 넘는 다양한 ‘창조설화'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왔고, 어떻게 번식을 하고, 하늘과, 땅과, 동식물 및 자연의 현상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각각의 설화들이 생겨난 지역에서 쓰였던 다양한 표기형식과 언어를 통해서 설명하고 표현해 낸 상징적인 이야기들이다.  

    각자가 지닌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설화’는 진실된 이야기이다. ‘진실되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과학실험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길을 제시해 주는 ‘살아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내용을 진리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 내용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사하여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삶에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즉, 검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백과 실천을 통해서 진리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창조론과 관련해서 진화론이 더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데도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포함한 모든 과학 이론들이 지속적인 검증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고, 소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알려진 이론들 또한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할 때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이 어떻게 당대의 ‘객관적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과 조응하는지에 대해 주목해야한다. 19세기 말의 다윈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회적 다윈주의가 어떻게 인종주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했는지는 그저 하나의 간접적인 예일 것이다. 

    ‘창조과학’의 문제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과 그 해석에 근거한 신학에서 보여지는 집요한 반지성주의와 여성차별 및 성소수자 차별의 요소들이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초석인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둔 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각주:1]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서의 무오를 믿는 일반적인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신학은 19세기 중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각주:2] 그런 신학은 19세기 성서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 중에 만들어 졌고, 천년왕국설 운동과 함께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토대가 되는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고, 그런 해석은 일관성 없이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져 왔다. 이런 성서무오설은 19세기 말부터 미국의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들에 의해 문자주의적 해석만이 성서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이라는 통념이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성서무오설은 19세기 중.후반 미국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서적 입장과 관련해서 일어난 광범위하고 심각한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주:3]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도 가정과 사회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여기서 질서는 다름 아닌 창조질서를 말하는 것이고,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은 창조 질서 안에 내재된 것으로 믿었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성서적 진리로 받아들였고, 이브의 종속은 물론 더 나아가 여성들의 ‘다른’ (사실은 불평등한) 지위가 하느님의 원래 창조질서안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주의 기독교는 그저 추상적인 무질서나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젠더 (성)와 관련한 “무질서 또는 혼란의 가능성”[각주:4] 에 대해 염려를 한 것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가정 예찬/숭배’ (the Cult of Domesticity)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곳은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사적인 공간이다’– 에 근거한 젠더화된 신학을 미국의 기독교 우파가 이어 받게 된다.[각주:5] 근본주의 기독교의 맥을 잇는 미국의 기독교 우파가 받아들인 젠더화된 신학 체계에서 여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의 가정과 하느님의 관계를 책임져야 하는 반면, 남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역사적으로 남성이었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각주:6] 다시말해서, 젠더화된 신학은 위계질서적인 젠더체계와 이성애 가정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젠더 (남성과 아버지로) 에 관한 태도 역시 미리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각주:7] 

    이렇듯,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과 그것에 근거한 신학이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에게 해로운 것임은 자명하다. 그것이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여성은 가정의 우두머리 –아버지든 남편이든– 에게 속하고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종속은 창조질서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하느님이 창조한 첫번째 인간이고, 여자는 남자로 부터, 남자를 위한 조력자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과학을 따르거나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정말 한 명의 여자가 감히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은 뒤 모든 인간 후손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하느님이 만든 ‘보기 좋은’ 세상을 ‘죄가 가득한’ 세상으로 완전히 뒤집어 엎어 놓을 만큼 ‘강했다’라고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들에게 문자주의적 해석은 딱 두가지 선택을 주고 있다 – 죄인으로서 영원한 정죄를 받던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젠더이원론과 이성애규범주의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주의해석을 통해서 설명되는 창조질서에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든 창조과학을 믿고 가르친다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혈액형’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려는 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역할은 (남성)배우자를 돕는 것이고, 성은 출산과 관련해서만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립적이고, 남성과 동등하게 취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성을 다향한 형태로 표현하거나 관계를 맺는 것은 모두 창조질서에 반하는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 된다. 아무리 ‘과학적’인 것으로 잘 포장된다고 하더라도 창조과학은 창조질서로 여겨지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구조와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다. 교육에 있어서 비판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창조과학이 ‘과학적 검증’의 한 방식으로 교육 제도속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것과,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권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만약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한 학기를 진행한다면, 한국 명문대에 개설된 [창조과학 세미나]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 나는 우선 여러종류의 ‘창조설화’들을 비교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난 인간관계, 젠더형성과정, 삶과 질병과 죽음의 이해, 사회의 금기사항들,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이 각각의 종교와 문화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의미를 달리하는지를 밝힐 것이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최근 관심을 많이 받는 ‘종교와 과학’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해도 대학교 1학년생들에게 필요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엇을 왜, 어떤 교육철학과 목적으로,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는냐 일 것이다.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은유 가득한 시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듯이, 다양한 창조설화들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창조설화를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통해 해석해 내고 설화의 의미들이 사람들의 삶에 미쳐온 영향 (긍정적, 부정적인 것 모두 포함해서)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현재의 내 삶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서 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이라면 해 볼 만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업의 목적이 한 종교의 한가지 교리만을 ‘진리’로 가르치려는 ‘교화’ (indoctrination) 또는 ‘주입’이라면 교육의 장에 들어설 수 없고 그래서도 않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은 ‘교화 공장’ (indoctrination mill)이 아니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근본” (fundamentals) 이란 단어는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된 The Fundamentals 의 제 일권에 처음 표기 됬고, “근보주의자들”이라는 용어는 커티스 리 러즈 (Curtis Lee Laws)가 1920년에 처음으로 썼다. See Ernest R.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 (Chicago,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본문으로]
  2. Ibid., 106. [본문으로]
  3. Margaret Lamberts Bendroth, Fundamentalism and Gender: 1875 to the Present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34. [본문으로]
  4. Ibid., 113. [본문으로]
  5. Kathy Rudy, Sex and the Church: Gender, Homosexuality, and the Transformation of Christian Ethics (Boston, Mass: Beacon Press, 1997), 26. [본문으로]
  6. Ibid., 39. [본문으로]
  7. Ibid., 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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