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김진호 vs 이재원, 바울을 둘러싼 썰전]




바울과 제국, 현대신학의 화두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리고 이재원(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 현, 한신대학교 초빙교수)



제 1주제_ 전사(前史)와 전향(轉向)


김진호_


    바울이 역사적으로 처음 포착된 시기는 서기 36년 직후로 보이고, 장소는 다마스쿠스다. 그 해는 예루살렘의 리버디논 회당(리베르티논 회당. 예루살렘에 거류하는 헬라계 이주자들의 회당)에서 스데반이 처형되는 등 일단의 헬라계 예수 추종자들이 심각한 탄압을 받고 흩어진 때다. 이들이 흩어져 이방지역에서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개시한 곳이 다마스쿠스와 안디옥인데, 나바태아국(Nabatea) 영토였던 다마스쿠스는 동방으로 향하는 선교의 거점이었다면, 로마의 영토였던 북시리아의 안디옥은 지중해로 이어지는 선교의 교두보였다. 

    바울은 그 무렵 다마스쿠스에서 반그리스도파 운동을 주도하다 그리스도파의 일원으로 전향하였다. 당시는 안티파스와 나바태아국의 아레타스 3세 간의 전쟁(34~36년)으로 나바태아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이때 바울이 다마스쿠스 성을 몰래 빠져나온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후 바울은 아마도 나바태아국 여기저기서 그리스도 선교활동을 폈던 듯한데, “14년”(〈갈라디아서〉 2,1)이라고 말한 그의 동방 선교 활동은 실패했고, 그 역사적 흔적도 사라졌다. 

    여기서 논점은 ‘전향’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회심’과 ‘개종’인데, 회심은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인생행로의 극적인 전환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간과하게 하고, 그의 선교활동의 방점이 개인적 차원의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개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새로운 종교를 창안했거나 이미 존재한 종교에 새로 가담한 것처럼 보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생애 내내 이스라엘 신앙 체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전향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향의 바뀜’이라는 의미와 사회적 운동의 뉘앙스를 갖는 이 표현은 바울이 가치관과 실천의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는 그가 적대하던 그리스도파 운동가로 전향하여 활동한다.


이재원_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영향을 받아왔던 한국의 제도권 신학과 교회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 이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활동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바울의 삶의 전환점을 ‘회심’이나 ‘개종’이라는 말로 지칭해왔다. 그리고 그 의미를 바울의 ‘내면성’ 또는 ‘내적 성찰’의 극적인 변화로 해석해왔고 동시에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전환했다는 소위 ‘개종’의 의미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전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신학적 영향 속에서 지탱되어 왔던 ‘회심’이나 ‘개종’의 개념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적, 신학적 전제들에 내재한 문제점들이 비판적으로 지적되었다. 우선, 바울당시 유대교와 분리된 소위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전 종교에서 새로운 종교로 옮겨간다는 의미에서 바울의 개종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전제이며 의미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사회적 공동체와 관련된) 바울의 삶과 실천의 지향점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전향’이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하는 김진호 목사의 주장은 나와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바울의 전향은 무엇을 뜻했는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관해 알려주는 대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파 집단에 대한 박해활동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1세기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던 (다마스쿠스를 포함하여) 유대인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현장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의 박해활동은 전통적 서구 해석이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바리사이파적인 철저한 율법주의나 유대주의라는 단순한 관념적 도식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지배질서를 교란하고 위협하고 저항하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진압하고 차단하기 위해 정치반란범에게 가해진 십자가형에 처형된 식민지 유대 땅의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운동이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로마제국 도시 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주변까지 전해졌고, 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운동이 도시 내의 비유대인 (여성과 노예들을 포함한) 민중들의 가슴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로마제국이 제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안전과 존속을 보장받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그러한 운동의 집단을 잠재적 혹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소수 종족적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과 불안한 정치적 위상이라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종의 자기검열의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기검열의 행위는 반드시 항시적이거나 일관된 태도였다기보다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모국의 (로마제국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도시 내에서 그들의 특정 지역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바울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바리사이파적인 종교적 실천이 반로마제국적 그리스도 운동을 배격하려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울타리 내에서 제국의 질서유지를 도와주는 실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실천의 전환, 곧 십자가에 처형당한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반로마제국적 실천의 지향점으로 삼게 된 것을 바울의 전향의 주된 의미라고 해석한다. 


제 2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상적 매트릭스-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김진호_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초기 선교의 실패 이후 그가 다시 등장한 것은 안디옥이었고, 이후 그의 활동은 지중해 지역에서 전개된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활동 이력은 바로 이 시기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지역의 대도시들에서 활동했고, 대개는 그 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서 활동했다. 당시 로마제국도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불렀고 오늘날의 거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유대주의와 사마리아주의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배후가 되는 역사는 거의 1천년에 달한다. 그러므로 수백 년에 걸친 이주의 역사를 지닌 지중해지역으로의 팔레스티나계 이민자들을 유대인으로 소급해서 명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류다. 

    바울 당대에 이들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하나의 잘 조직된 교리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들의 결속은 지중해 역사권의 형성 과정과 자치결사체로서의 콜레기아(collegia)의 형성 과정을 유념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간략히 말하면 기원전 4세기 이후 지중해가 하나의 역사권이 되면서 이 지역에는 광역 이주민들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이 특히 많은 도시들에서 이해집단으로서의 종족적 콜레기아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적 콜레기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을 결속하게 하는 교리적 통일성은 아직 구축되지 않았고, 무수한 종파들이 공존하였으며 때로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바울이 전향하기 전의 자신을 규정했던 바리사이파와 전향 이후 새롭게 그를 규정하는 그리스도파는 바로 이런, 범이스라엘 종교권 내의 소종파 운동들이었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바리사이운동은 강한 유대주의 성향의 종파였다. 공개적 공간구조를 띤 사마리아 성전이 야훼 앞에 모인 이들을 차별 없이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폐쇄적 구조를 지닌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가 시사하듯, 유대주의는 인종적, 성적 배타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리사이는 이러한 유대주의를 좀더 강도 높게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이재원_


   바울의 실천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현장을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는 역사적으로 분리된, 혹은 신학적으로 대립된 소위 이방인 그리스도교인(Gentile Christians) 혹은 이방인 교회(Gentile Churches)로 간주했던 바울 해석의 지배적인 틀은 최근의 바울연구가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운동에 가담하여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촌락에서 활동했던 바울의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현장은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들이었고, 여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비슷한 사회적, 정치적 처지에서 이들의 주변에서 살고 있었던 다른 종족 출신 이주민들 및 식민지하에서 자기정체성이 해체되었던 토착민중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전향 이후 십여 년 동안(〈갈라디아서〉에 언급된 1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 바울 자신은 직접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제국의 여러 도시와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피지배계층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다양한 현실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이다.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헬레니즘시대에는 특히 지중해 서쪽 지역에서는 주로 폴리튜마(politeuma)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다소 통합적인 자치체제를 갖추었는가 하면, 1세기 로마제국의 시대에는 주로 회당(synagogue)이라는 이름으로, 김진호 목사가 말하듯이 당시 로마사회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다양한 이해단체인 콜리기아(collegia) 등과 유사한 자치결사체(association)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회당 중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로마의 도시들에서 통일된, 혹은 통합적인 체계방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특정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한편으로는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통합적, 중심적 구조와는 지리적으로나 종교제의적으로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여러 종교적 제의적 실천과의 긴장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국인 팔레스티나의 유대 지배층을 비롯한 여러 집단들이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공조, 타협, 저항 등의 상이한 입장을 취했듯이,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에서도 그들의 지리적, 사회적 입지와 지역적인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태도도 다양하게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지배와 관련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본다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멀리는 팔레스티나에서의 예수운동과의 관계 속에서, 가깝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연대, 때로는 갈등과 긴장관계 속에서, 소아시아, 에게, 마케도니아 등 여러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사회의 구성요건의 충족(즉, 남자의 경우 할례행위) 없이 비유대인을 유대적 메시아 공동체 안에 받아들인 바울의 선교활동은 김진호 목사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의 배타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로마제국의 지구적 차원의 지배질서에 맞서는 예수운동의 지구적 공동체화(global localization)라고 나는 본다. 


제 3주제_ 전향 후 바울 활동의 사회적 매트릭스 - 로마제국


김진호_


    로마제국은 지중해 역사권을 제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제국이다. 물론 이 방대한 제국은 유럽 내륙으로 팽창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역사로 한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유럽 내륙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특징을 규정짓는 데 덜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에서, 지중해 제국이라고 가정해도 큰 무리가 없다. 

    나의 첫 번째 테제는 지중해 역사권의 모든 사회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여러 다른 주장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 테제는 이재원 교수와 논점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둘째 테제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사회들을 통치하였지만, ‘그 지배는 촘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통치가 관철되는 것은 주로 무력에 의한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 통합이나 사회적 통합은 거의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가령, 수많은 그리스도계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제숭배이데올로기는 결코 제국 전체를 통합하는 실효성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셋째 테제는 로마제국의 제1인자는 로마황제이지만,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는 것이다. 로마황제의 명령은 제국 구석구석에 효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지방의 갈등이 중앙의 갈등으로 점철되거나 중앙의 법정으로 소환될 경우에는 황제의 결정이 중요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황제의 명령은 지방에까지 닿지 못했다. 가령 많은 비판적 그리스도교 연구자들이 바울의 반로마 활동을 반황제운동으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로마체제를 황제체제로 오인한 결과다. 

    이상의 세 테제들에 기초해서 나는 바울의 로마체제에 대한 태도를 재해석한다. 바울의 반로마활동은 반황제론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사실 대개 바울의 활동은 로마황제를 염두에 두고 수행되지 못했다. 그는 황제를 알지도 못했고 알 만한 위치의 사람도 아니었다. 또 그의 선교지의 대중에게 황제가 어떤 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황제에 대한 입장이 시사된 문서는 〈로마서〉인데, 이것은 로마시에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갈등이 당시 황제인 네로의 정치와 뒤얽혀버린 상황에서 바울이 이 갈등에 끼어들려 한 문서이다. 


이재원_

    기원전 2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의 정치경제적 패권경쟁에서 서서히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던 로마는 마침내 기원전 63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게 되고, 뒤이은 악티움 내전(31 BCE)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명실공이 지중해 지역의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군사적 무력으로 평정된 세상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포하며, 로마의 승리와 평화는 로마의 신들이 로마에게 부여한 은혜(Benefaction)이자 이러한 은혜는 동시에 정복당한 속국들을 위한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선전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전쟁과 군사력에 기반을 둔 로마의 제국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하여 제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고 강화시켰다. 제국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무리에게는 가차 없이 십자가형을 가했는가 하면, 그 질서에 타협하고 순종하는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전(peace and security)이라는 기치 아래 때때로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라는 당근도 하사했다. 로마의 황제는 제국주의의 정점에서 위치하는 군사적 최고사령관이자 로마신들을 모시는 대제사장이고 로마의 정의와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이며, 최고의 가부장이자 로마제국의 최고의 후견인(patron)이고 두말할 여지없이 최고의 부자였다. 이는 단순히 로마황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속국의 지배권력과 도시의 귀족층 및 관리들로 이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수혜자(patron-client) 메커니즘의 연쇄망을 통해서 통합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러한 메커니즘은 하부구조인 사회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로마의 황제는 죽어서 혹은 살아서도 신적인 존재, 구원자로, 신의 아들로 승격되었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당시 통용되던 동전화폐(coins)나 도시의 광장에 세워진 황제의 상, 신전, 종교적 제의행위 등의 다양한 공적인 공간을 매개로 제국의 군중들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었고, 소위 황제제의(imperial cults)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하고자 하는 속국이나 도시의 엘리트층에 의해 행해진 자발적인 제국 친화적 제의행위였다. 

    최근의 이른바 제국비판적 바울연구에서 역설하듯이, 예수와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고전적인 로마역사가들이 로마의 황제 개개인의 치적에 관심했던 그런 의미에서 황제 중심 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요소를 총체적으로 관통하면서 극소수의 지배층과 대다수의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 철저한 정치적 지배와 배제, 그리고 이들 사이에 존재한 엄청난 경제적 양극화를 지탱하고 정당화시키는 포괄적인 지배와 착취와 배제체제로서의 로마제국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적 상황은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의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콘텍스트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김진호 목사가 말하는 ‘지배체제로서의 로마제국은 탈중심적 체제였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한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에서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성격을 보는 입장은 김진호 목사가 우려하듯 바울의 활동과 공동체운동을 단순히 ‘반황제운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제 4주제_ 바울의 의인론. 그 사회정치적 함의


김진호_


     바울은 지중해의 몇몇 대도시들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에서 적대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의인론을 제기했다. 곧 그의 의인론은 김창락의 가설처럼 논쟁의 이론적, 신학적 무기였다. 

     문제는 그 논쟁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해석하는 데 있다. 의인론이 지지하는 대상은 남자, ‘유대인’, 자유인에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 여자, 이방인, 노예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세기경 지중해권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무수한 타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유입은 크게 두 부류,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테오세비우스)과 개종자로 나뉜다. 전자가 후원자이거나 후견인들로,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의 신앙에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후자는 대체로 이스라엘계 이민자 공동체의 도움을 바라고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후자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포함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 이후 정복전쟁이 사라지자 주요공급원이 사라진 노예의 가격 상승 현상이 급격하게 나타났고, 이에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경제가 빠르게 붕괴하였다. 하여 노예노동에 기초했던 지주들이 노예를 방출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방출노예들이 살 길을 찾아 대도시로 유입해들어 왔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존의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고자 애를 썼고, 유력한 자치결사체(콜레기아)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에도 방출노예들의 유입이 적지 않았다. 

     대도시들에서는 방출노예들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하급노동시장이 교란된 데다, 불결하고 불경한 자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방출된 노예들에게는 더 불리한 생존여건이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계 공동체 내부인들은 저들 ‘더러운’ 개종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의 발언권이 빠르게 강화되었다. 

     한편 바울의 공동체 내에는 이들 방출노예들을 포함해서 하층민들과 여성들이 적지 않았고, 또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다. 바울은 이런 ‘권리 없는 자들’이 차별당하지 않는 평등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한데 순혈주의적이고 노예에 대해 적대적이며 강성 마초주의적 성향을 지닌 바리사이 운동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바울은 바리사이파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바울이 발명한 신학적 담론이 의인론이었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샌더스가 이야기했던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적 기조를 바울이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의인론을 통해 유대인, 남성, 자유인 중심의 이스라엘 신앙에 대항하여 여성, 노예,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옹호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러한 의인론은 그의 종말론적 비전과 결합되어 있다. 즉 그의 비전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의 평등주의를 주장한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평등사회를 향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4,21 이하의 종말론적 텍스트가 의인론에 관한 직전의 논지(바리사이파와의 논쟁에 한정된 논변)를 우주적 변혁의 사건으로 확장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그 담론의 장에 맞춘 언어로 의인론을 선택한 것처럼, 권리 없는 자들을 옹호하려는 그의 실천은 로마제국 내의 여러 담론의 장에 따른 언어를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구체적 언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이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기억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4,21 이하의 종말론적 언술은 그의 선교가 황제의 나라로서의 로마가 아닌, 차별과 배제의 체제를 총괄하는 포괄적인 중심인 로마체제의 종식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망하는 총괄적 언어다. 주지할 것은 이것은 로마체제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에게 전달하는 선전포고의 문구가 아니라, 바울의 대중인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권의 대중에게 제시한, 일종의 반제국적 선언문이라는 점이다. 1세기 중반 빌립보 시의 인구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전투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전투의 희생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 못지않은 혹독함이 뒤따랐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이 도시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절대1인이 되기 위한 정치적 격변이 세 번이나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층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고, 그들과 얽힌 서민들의 삶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이재원_

    김진호의 의인론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 내 ‘유대주의적 배타주의적 성향’을 띤 집단에 의해 배제되고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의인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바울과 율법/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수정한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서 보는 바울의 의인론 해석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른바 안디옥사건을 바울의 의인론이 전개된 일차적인 삶의 자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 관점은 바울의 의인론을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차별 없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논쟁무기로 보면서도, 동시에 바울의 공동체들 내부의 유대인과 이방인 관계에서 유대적 배타주의를 여전히 일반화시키는 해석으로 치우치고 있다. 다른 한편, 김진호 목사는 소위 그가 말하는 ‘유대주의적 율법론 작동의 메커니즘’의 현장을 로마제국의 도시들에 흩어져 있는 유대/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공동체의 상황과 관련시키면서, 의인론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바울의 비판의 중심에 ‘강성 순혈주의를 주장했던’ 바리사이파적인 배타적 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고 다소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김진호 목사가 〈갈라디아서〉 3,28의 세 가지 사회적 관계유형과 연결시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물론 동의한다. 그럼에도 내가 비판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김진호 목사가 가정하는 ‘유대주의자’와 그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는 배타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유대주의자’와 ‘배타주의’라는 개념들을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집단들에게 어떤 의미로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그 논거가 빈약하고 여전히 모호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의 바리사이파적 성향을 띤 유대주의자들이 디아스포라 회당내의 (‘더러운’) 개종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추측은 보다 명확한 개념적, 사회사적 분석이 요구된다. 

    나는 바울의 의인론이 넓은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3,28의 세례공식문에 선포된 계급적, 여성해방적, 종교문화적 평등지향적 가치의 실천에 접목된다고 본다. 그럼에도 디아스포라 회당과 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메시아로 선포하고 따르는 집단 내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방인과의 종교적 사회정치적 평등한 관계문제가 바울 의인론의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로마에 의해 정복당해 그 지배 하에서 그들의 주권을 박탈당한 나라들, 유대인/이스라엘인들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족적 민중들/이방인(nations)을 그리스도 공동체 안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바울의 메시지와 실천이 과연 유대주의적 배타주의(Jewish ethnocentrism), 달리 표현하면 유대교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겨냥한 것이냐, 아니면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주의의 당시 민중들을 향한 타자화를 겨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라고 본다. 


제 5주제_ 오늘 우리는 왜 바울을 이야기하는가


김진호_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바울을 주목한다. 오늘의 시대는 지구적 무기체계와 지구적 자본체계로 인해 무수한 난민과 유민들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세계의 고통의 질서를 재구축하고 있다. 이들 난민과 유민은 탈계급화된 존재들이고, 탈주체화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어 붕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런 체제의 질서를 구축하는 제국은 국가 중심적 질서가 지배하던 근대국민국가 시대에 비해 현저히 탈중심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곧 여러 모로 지금의 시대는 바울의 시대와 닮았다. 

     바울은 그런 시대에 배제된 자들, 권리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방식으로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과 실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바울은 로마제국이 붕괴될 것 같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를 넘어서고자 사력을 다하는 데 있어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같았다는 점이다. 메시아에 대한 그의 갈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시간을 예단할 수 없음에도 어느 순간 도래할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신앙양식이다. 하여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지배가 무제한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울의 신앙을 되새기고 재점검하는 것은 오늘을 견뎌내는 신앙적 내공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재원_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태동시킨 그 처음에 일어났던 예수운동과 바울운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변수가 아니라 핵심적인 상황이었다.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남미해방신학과 한국민중신학에서 다루기 시작했던 ‘제국(주의)’이라는 주제가 21세기 초부터 북미 성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신학영역의 지각변동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고도 구체적인 세계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바울과 (로마)제국이라는 문제는 한국의 교회 상황에는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문제인식에 도대체 다가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바울이 저항했던 제국적 지배와 불의와 차별은 우리의 교회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통적으로 해석된 바울의 의인론에 근거하여 더더욱 배타적인 신앙론과 구원론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오늘날 초국적 지구적 자본주의는 바울 당시의 로마제국주의에 맞먹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며 이에 종속된 국민/국가와 개인들을 총체적인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시장의 논리 하에 무자비하게 예속시키고 있다. 이 논리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개인, 국민/국가, 민중, 사회체제는 짓밟고 정복하고 제거해야 하는 ‘타자’(Others)로 규정되고 고통의 현실 가운데로 처절하게 버려지고 있다. 

    오늘날 지구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총체적 구조적 실체로서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세력이다. 바로 이러한 지배와 권력과 폭력에 대한 저항하여 보편적인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은 국가내의 대안적 운동과 실천을 바탕으로 한 지구적(세계적) 연대를 절박하게 요청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와 종말론적 저항의 희망에 근거한 바울(공동체들)의 신앙과 실천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지난 해 11월. 30일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컨벤션홀에서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한신대 신학대학원 주최로 열린 좌담회의 자료집을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 youtube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으로 좌담회 실황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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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수현
    2016.01.07 13: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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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좋은 계획이었고,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좀 질투도 납니다. 이정도의 깊이를 가진 학문적 결과물을 이토록 쉽게, 그리고 대조를 통해 명확하게 차이와 의미를 가르쳐 주는 토론은 제가 공부할 때도 만난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계획하신 분들과 참여하신 분들 그리고 올려주신 분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저는 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로 소박한, 무지한
신앙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세례교인이지만 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평소에 이렇게 입에 달고 다닙니다

난 탕자다. 난 집을 떠난 탕자다

정말이지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탕자가 가출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열배는 더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는 꽤 성공한 졸부 
부모처럼 굴고 있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지상에 마치 사소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이나 하려고 오신 듯합니다

요즘 교회는 남의 성생활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교회가 이권 나눠 먹기의 장소가 되고
중산층들만의 배타적인 지리멸렬한 사교 장소가 되는데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큰 건물 짓는데 혈안이 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을 은총으로 여깁니다

대형 교회들의 타락상은 환멸감을 안겨줍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은 이미 혜택 받은 자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받은 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기만적으로
남한테 진부한 훈계를 늘어놓는 것을 기꺼이 봐주시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그것 때문에 몹시 슬픕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들이
삶은 엉망진창으로 꾸려나가면서
구원과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데 저는 정말로 넌더리가 납니다

예수의 놀라운 약속
하층민들에게 주었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부유층들의 전유물들이 되어갔는지
저는
예수님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라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구하는데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자기를 찬양해 왔을 뿐이다.
고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교인들입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 절망감이 컸기 때문인지
저는 예수가 한 개인으로서 누구를 사랑했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적어도 그 성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적 사랑을 했으니 동성애는 괜찮은가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솔직히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란 제목을 봤을 때도
예수가 사랑한 인류 정도로 제목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란 단어에 대해 제가 처음 들은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책 108페이지에 보면 이러한 구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아가페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특정한 우정 또는 성애적 애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출할 것이다
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저입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은 동성애적 욕망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사랑이 보다 정신적인 형태로 승화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관계를 맺지 말아야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로 말해질수 있는 사람이 친밀한 의미에서
특정하게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이로 판명되는 것의 부적합함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책이 열두제자중 혹은 열두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를 사랑했느냐 추적하는 것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의 성생활에 밝히는 책도 아니고요.
저는 다른 것들을 기쁨속에서 봤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규칙들보다 인간적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126페이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27페이지

-노예적인 수용과 복종의 태도가 아니라
관습적인 도덕과 생활양식에 대한 훨씬 집요하고 끈질긴 전복이란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거룩한 사람 예언자 메시아에 관한
어떤 기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벤덤이 말했듯이
인간의 행복과 중요한 진실에 대한 존중
애 관한 글이라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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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영준
    2011.10.07 21:3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으로 감사한 글입니다.
    돌아봐야지요.
    반성해야지요.
    더 없이 더 없이 더 우리가 아닙을 고백해야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하는 즉시 바로 헛짓꺼리를 하닌까요.
    그저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


저는 성서신학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문서비평이나 양식비평적 차원에서의 공감이나 반문을 제기할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그러니까 주변자적 시선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한 한 지식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의 소박한 ‘독후감’을 나눌까 합니다.

1.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 즐기기, 예수 전승으로부터의 적극적 독해

예수는 게이였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도록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예수가 게이라 해도 그의 메시지 전반의 핵심 내용과 위배됨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가 게이인 것이 주변인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려는 그의 선교사역의 수행성으로 더욱 적합하며 그의 전반적인 메시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전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싸움에 나선 개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는 바닥에 깔린 몇 개의 부스러기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무시하고, 그 대신 신약성서 서사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에만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는(414) 제닝스 박사의 말처럼 말이죠.

흑인, 여성, 제3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전통적 성서해석에 이의를 제기해온 그 모든 해방신학적 전통과 맥을 같이 하며 제닝스 박사는 이 책의 시도가 “‘완전한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른 것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는 부분적인 해방은 예수 안에서 약속되고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지평 내에서 해방일 수 없”(19-20)으니까요.

때문에 “오늘날의 게이적 또는 퀴어적 감수성의 관점으로부터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전략”(22)을 택한 이 책은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23)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제안 받으며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얼른 떠올렸던 전제처럼, 제닝스 박사는 제일 먼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랑받는 자’에게 주목합니다. “예수의 무릎에 기대어 있고” “예수의 가슴에 등을 기댄 상태로 예수에게 말을 건네는”(49), 그리고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예수가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그를 가족으로 연결해준 ‘그 남자’ 말입니다. 불트만이 이 사랑받는 자에 대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 즉 후대의 추가로서 이방인 교회의 전형으로 풀이한 것에 반대(79)하며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지만,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즉 성애적 의미에서] 이 제자를 사랑했음”을 강조합니다(81). 물론 이 사랑은 예수 사역의 공적 지위에서는 그 어떤 특별함이나 우위를 가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제닝스 박사는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메시지가 강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애는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관습적 제도들이 가진 억압성에 반대했던 예수이고 보면 “결혼과 가족적 가치들에 의해 대표되는 관습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동성애적 관계의 암시가 하나의 적절한 수단”(139)일 수도 있겠지요.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예수와 그 제자의 관계가 성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는 가정에 기초할 때 가장 잘 이해”되며, 무엇보다 “텍스트 전체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합치한다.”(169-170)고 결론짓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를 모든 면에서 비관습적인 인물로 표상한다. 그의 비관습성 자체가 동시대인들의 신학적-사회적 가정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예수는 경건하고 인격적인 고결함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는 금식, 정결례, 성전 참배와 같은 경건함을 실천하는 예시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성서 해석에 대한 관습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죄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관습적인 방식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먹보에 술꾼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오로지 (사회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구성원들인 창녀나 (로마 제국의) 부역자들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의례적 정결함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문둥병자, 시체, 생리중인 여자를 거리낌 없이 만진다.(181)

요한복음의 예수가 “정의와 관용 그리고 기쁨이라는 가치들이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정립하기 위해 관습적인 사회생활의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181)“사회적, 생물학적, 경제적 필요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성애적 관계를, 그래서 이성애적 관계들 역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성애적 관계를 예기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닝스 박사의 주장은, 이성애자인 저에게 그 어떤 거부감도 없는,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2. 예수, ‘게이’이거나 ‘젠더제한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이어지는 II부에서 제닝스 박사는 1-2세기에 유통되었던 ‘비밀의 마가복음’에서 전해지는 ‘부유한 젊은 관원’ 전승과 정경 복음서에 남아있는 ‘백부장과 젊은 애인’ 에피소드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가지는 체제 전복적 메시지들, 주변화된 사람들이 주된 증거자요 체험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고려할 때 동성애자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전승은 충분히 가능한 서사라는 것이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257) ‘욕망’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책 『안티고네의 주장』이었습니다. 국가의 법에 의해 범법자로 낙인찍힌 오라비이기에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 역시 역모로 규정되던 상황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주검을 고이 묻어주고 싶은 그 욕망에 충실했기에 범법자가 되었던 안티고네 말입니다. 예수 전승에서 백부장은 제도와 규칙의 위반자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믿음의 범례로서 예수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는 법보다 욕망의 지지자이기 때문이겠죠?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담고 있는 ‘젠더해방적인’ 담화들, 즉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환관들과 1세기 젠더적 역할 기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하며 예수를 따른 여제자들의 이야기, 예수 선교사역의 클라이맥스에 주요한 역할자로 등장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 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게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제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은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302)는 제닝스 박사의 결론입니다.

3.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III부는 복음서들에 나타난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가르침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예수의 (확대가족)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자매들의 연합과 연대 말입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340) 사두개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350)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350)이었다는 겁니다.

결혼은 예수 전승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행동양식)를 구현하는 자유롭게 선택된 충실성을 나타내는 것”(365)이나 “두 사람이 욕망과 환희 내에서 연합하는 것”(370)으로서는 옹호되지만, “분리와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가치들의 기초적인 생산 단위 내에 인간들을 얽어매는”(371) 제도로서는 거부되고 폐기됩니다. 때문에 이런 서사 속에서 “제도화되지 않은 성애에 대한 긍정”은 “동성애와 동성적 관계”라는 주제와 연관될 수 있다고, 제닝스 박사는 말합니다, 예수와 그가 사랑했던 남자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라는 젠더적 특성보다는 ‘종속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적 사랑’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채 읽혀져야 하니까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제닝스 박사의 독해,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375)는 그의 읽기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홍수 때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는 방식과 비교하며,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낸 예수의 에피소드를 해석하는 방식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실현된 새로운 약속은 새로운 민족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내에서 완성에 이르게 될 새로운 운동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열두 명의 아들이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에 이어 땅 위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381)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연합시키는 욕망이 “자손에 대한 약속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382)이라면, 그 ‘연합에 동성애적 성애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제닝스 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전통적으로 바울에게 저작이 돌려지는 일부 서신들에서 여성억압적이고 반동성애적 언급들이 나오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후기바울적인, 그리고 종종 반바울적인 텍스트임을 밝히고 있는 마당입니다. 복음서와 동시대적으로 편집되었을 이 서신들은 기독교 초기 전통 안에서 예수 전승에 반하는 뚜렷한 한 흐름, 즉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그 구조를 신성화하려는 ‘제국적’ 의도를 보여줍니다. 제국은 ‘동질화’와 ‘보수화’를 그 핵심가치로 하는 시스템이니까요. 결론으로 가면서 저자가 분명히 하듯이 문제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를 긍정하는 독해는 성서상의 모든 구절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지 않음”(415)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 특정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두려움’ 말입니다. 그들은 근대・자본주의・가부장적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이성애적 결혼과 가족제도의 ‘신성화’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 전통의 시각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년’으로 읽히고 거부되듯이,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교회의 알레르기 반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제국의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변인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또한 그 여정이 점차로 예루살렘을 향해 갔던 것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 그 모든 차이들의 위계화와 분리가 해체된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이 책의 주장과 이 책이 선택한 읽기방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녀)가 제국의 옹호자, 예수의 반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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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축사

동성애자들과 민중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멀리 미국 쉬카고에서 방한하신 쉬카고 신학대학원의 제닝스 교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방한을 계기로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출판사 동연이 공동으로 하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제닝스 교수님의 역작인 2003년도 판, [The Man Jesus Loved]를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참 좋은 일 하셨다고 치하하고 싶습니다.

저는 1950년, 61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만난, 미국 해군 친구의 도움으로 1956년 미국 서부에 있는 작은 기독교 인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공부를 시작해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공부를 뉴욕에 있는 유니언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목사 아들로 성장하면서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교육 받은 사람으로, 유니언에서 180도 다른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 개론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창조설화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성서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 억압과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에 회의와 함께 분노를 느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튼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의 신학적 꿈을 키웠습니다. 저의 목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만주에 망명한 항일 목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분자로 낙인 찍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이념적 탄압,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독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은 미국 흑인들의 꿈 만이 아니라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독재 정권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 민중이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 된 나라를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우리 신학의 선배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과 후배인 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위해서 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민중 연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신학화한 것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민주화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민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민중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의 친구이며, 동시에 민중입니다.

"민중"이 누구냐? "민중"을 정의하라는 학문적인 압력을 안과 밖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민중"을 관념적인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삶을 보고, 연대함으로써 알게 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구지 서술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릴 만 한 사람들은, 게급과 계층,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람들,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윤곽 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가난하고 병든자들, 여자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오클로스, 구약성서의 하피루라고 했습니다.

저희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정치적으로 억압 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의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의 연대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닝스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또다른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방한하셔서 바로 이자리에서 강연하신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읽게 되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민중 중의 민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사회에 발 붙일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극한상항에 처해 있어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타자 (Others)"거나, 싸구려 관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민중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시대의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분명한 구절들을 읽지 못했을까? 어려서 부터 수십번 읽은 성경, 신학교에서 시험까지 보고 합격한 성경말씀들, 대학에서 교회에서 수십번 설교하면서도-- 눈 먼 사람처럼, 예수 역시 성적 주변인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발견한 정치적, 문화적 반항아 이상의 혁명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관용과 기쁨을 설파한 선지자라는 것을, 이책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받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를 유교 문화와 접목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엄하고 강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도덕군자 연하는 유교적 아버지로 알고, 교회의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모시라고 강요하고 절대 복종을 명령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며 재국주의적인 선교사의 기독교와 유교가 힘을 합친 종교권력은 어느 나라 기독교 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인간 해방의 복음을 우리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로 왜곡해 왔습니다.

"예수는 게이였는가?" 이 질문 만이 아니라, 차마 질문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철통 같은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지진의 굉음이 들리는 책입니다. 제닝스 교수님의 신학, 성서 읽기는 신학적 상상력을 넘어서, 신학적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 용기는 이단의 눈으로, 종교적 순교자, 지적 순교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는, "queer" 즉 이상한 사람, 색 다른 사람, 괴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읽은 그대로 말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제닝스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난생 처음으로 번역하시노라고 수고하신 박성훈 선생님에게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혁명적이며 체제 해체적인 무서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연구소 김진호 실장님과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사장님의 신학적 상상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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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인사말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의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날을 바라며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1.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해석학적 색안경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깨우쳐줄 책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것을 다 함께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자축하고 서로 격려하는 의미로 큰 박수를 칩시다.

2.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계 각 곳에서 갖 가지 해방운동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갖 가지 급진적 신학사상들이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당하는 격심한 경제적 불의로부터 해방하려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에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black theology(흑인신학)가 탄생했습니다. 1960년에서 70년대에 한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 정책으로 희생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쟁취 투쟁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 소외당한 민중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젔습니다. 이 맥락에서 민중신학이 탄생했습니다. 민중신학은 현재의 체제 아래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같은 궤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흑인의 해방, 민중의 해방보다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1970년대에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난 여성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여성신학(femnist theology)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신학들은 주장하기를 설령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의 해방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여성의 해방은 자동적으로 이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성은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들 가운데서도 차별적으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인간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성해방이야말로 참된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또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성소수자 권리 운동입니다.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권리옹호라 불리는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 양쪽으로부터 다 배제당하는 특별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queer theology가 등장했습니다. 이 신학은 성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에도 이른바 정상적인 남성/여성과 꼭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그들의 성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10월에 동성애 조항이 삭제된 채 국회에 제출되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일부 대형교회와 기독교인 네티즌들의 극렬한 반대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회가 약자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가장 배타적이며 보수적 성향의 단체임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교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하느냐의 가부를 놓고서는 교회가 분열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지경입니다. queer 신학은 교회가 성 문제와 관련된 현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의 처지를 단지 예외적 사항으로 보고 시혜적 차원에서 용인해 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증은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성서본문들의 세밀한 해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4.

독일에는 2년에 한 번씩 Kirchentag이라고 하는 신도대회가 열립니다. 이것은 교회 당국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주관으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주요 당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2년마다 약 일주일 간 전국 곳곳으로부터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입니다. 1974년은 제가 독일에 간 후에 처음으로  Kirchentag이 열리는 해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대회에서 호모섹스의 문제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공론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섹스 집단도 이 대회에 참가 단체로 초청을 받았으며 그들에게도 자기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장(場)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집단이 발표하려는 연제는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3,000여명을 수용하는 대형 강당이 특별히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청중이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도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동성애자의 연제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니까 그가 동성애자로서 그의 상대역 되는 한 남자와 어떻게 동성애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이야기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귀을 귀울였는데 그는 한 남자, 즉 예수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기대와 전혀 달랐지마는 그 동성애자도 예수를 사랑한다면 똑 같은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와 그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Kirchentag 이후에 신학교 게시판에는 동성애자 파트너를 구한하다는 광고가 공공연히 나붙게 되었으며 교회의 목사가 동성애자임을 표명하더라도 해임당하지 않고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가 사랑한 남자>입니다. 예수와 한 여자,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에로틱한 로맨스 사건이 일어났다는 가상적 풍설에도 우리는 충격을 받을 터인데 예수와 한 남자 사이에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몰라도 육체적 친밀함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더욱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5.

성서는 억압, 차별, 착취, 탐욕, 교만과 같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불의를 가장 큰 죄악으로 규탄했는데 이와 달리 교회는 인간의 성본능을 가장 가장 큰 죄악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강자들, 즉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죄악을 눈감아 줌으로써 그들과 한 편이 되어 특권을 누리는 길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 교회는 성에 대한 죄의식을 극대화하여 그것으로 모든 인간을 꼼짝없이 옭아매고 죄사함이라는 필요불가결한 미끼를 사용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섹슈앨리티(성애, sexuality)를 죄 중의 죄로 내세우는 난공불락의 신화를 일찍부터 쉽게 구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교회는 동성애를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규탄하는 그 한 가지 일로써 교회가 이 사회에서 최선의 윤리를 수호하는 고귀한 투쟁의 최선봉에 서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이성애적 교인들로 하여금 동성애와 무관하고 이성애적 성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성과 관련된 현재의 어떠한 제도와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6.

이성애를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교인들은 혼인과 가족 제도, 자녀 출산과 같은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완전무결한 절대적 가치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이 개인에게 안정을 부여하고 자녀 생산이 사회를 존속하게 해 주는 순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 조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 제도는 분리, 사유재산, 지배로 특징지워집니다. 교회가 이 제도를 현재 있는 그대로 영속 불변적인 것으로 보는 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가정의 폭력에 내동이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시집하고 장가가는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빛에서 혼인과 가족이라는 현재의 제도를 비판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7.

저자는 작년 이맘 때 이 자리서 “교회와 동성애”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밝혔습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는 성소수자에 속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또는 죽음으로 휘몰아갔다고 고발하면서 교회는 이들에게 끼친 피해와 하나님의 말씀에 끼친 피해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회가 가진 자들만의 잔치마당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 날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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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읽으며 떠올려본 몇 가지 기억들
 
 
유경종
(본 연구소 회원)

* 장면 1. 1985년 겨울
교회 청년 중에 대학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누나가 한 분 있었다. 교육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던 경기도 변두리 교회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패기있고 세련된 대학생의 기풍을 보여주며 동생들의 동경을 받던 선배였는데, 그 누님께서 어느날인가 방학을 맞아 심심해하는 내 또래의 중등부 친구들을 모으더니 연극을 한 편 만들자고 꼬드기는게 아닌가. 당시만 해도 교회를 들락거리며 뭔가를 꾸미는 일이 제일 재밌었던 시절인지라 우리들은 두 말 없이 누나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누나가 들고 온 작품은 <욥>이었다. 제목은 심플했지만 내용은 심각해서 욥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진지하게 그려낸 연극이었다. 누나가 대체 무슨 의도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인생의 쓴 맛 단 맛 다 본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작품을 들이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이해가 안가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내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한달여동안 꽤나 열심히 매달렸다. 하지만 곧 문제가 터졌다. 교회 어르신 몇 분이 우연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매우 언짢아 하셨고, 공연 자체를 막지는 않으셨지만 교회로부터 아무런 관심이나 협조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공연일이 되었지만 객석은 텅 비어있었다. 뭔가 막연히 폼나는 성취감을 꿈꿨던 우리들의 기대는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연기인생의 데뷔 무대를(^^*) 언더그라운드로 시작하게 된 나는 그 일을 통해 어렴풋한 교훈 한 자락을 얻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교회라는 동네에서 탈 없이 지내려면 욥이라는 양반이랑은 웬만하면 친하지 말아야겠구나, 라는 다짐 말이다.

* 장면 2. 몇 해 전 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다짐의 흔적은 무뎌지고, 몇 년 전 또다시 나는 욥 아저씨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두 번째 상처를 자초하고 만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선교회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세상과 교회의 돌아가는 꼴에 지긋지긋한 염증을 앓던 나는 뜬금없이 욥기를 다뤄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 즈음 나는 정병선 목사님이 쓰신 욥기 묵상집 <신앙의 마스터클래스>(대장간)를 꼼꼼히 읽으며 욥이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의 신앙에 새롭게 눈 떠 가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하필 욥?’ 이라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지만 맘에 안 들면 댁이 리더를 하시던지, 하는 심뽀로 무작정 밀어붙였다. 결과는 뻔했다. 구성원들의 열화와 같은 외면 속에 욥기 공부는 몇 주 만에 흐지부지 중단되었고 나는 교회 내에서 그나마도 근근하던 공신력에 적잖은 데미지를 보태야 했다. 역시나, 어릴 적 깨달은 교훈을 망각하는 인간 치고 잘 되는 인간 없다더니... 물론, 스터디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성급히 구성원들을 계도하고자 했던 나의 어쭙잖은 조급함에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하여튼 욥 이 분은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 교회의 주류 정서에서 여전히 왕따 신세를 못 면하는구나 생각하니 적잖이 씁쓸했다. 차라리 경륜있는 엘리바스나 근엄한 빌닷이나 열정적인 소발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적절히 발췌해서 신앙 강화 교재를 만든다면 한국 교회 성도들의 입맛에 딱 맞는 프로그램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소위 잘 나가는 목사님들께서 성서속의 별별 요상한 인간상을 그럴듯한 학습 모델로 잘도 포장해내면서 이건 왜 안하는지 모를 일이다.

* 장면 3. 몇 해 전 가을.
송 권사님은 우리 교회의 할머니 권사님들 중에서도 가장 몸집이 작은 분이다. 그 작은 몸으로 한평생을 종종종, 교회와 집과 일터를 오가며 살아오신 분. 몸집만큼이나 성품도 온화하여 기도도 조용조용, 봉사도 사근사근, 한번도 누구랑 말싸움이라도 댓거리를 하는 걸 보질 못했다.
어느 저녁, 차량 운행을 하는데 마침 차에 타신 권사님들의 화제가 하나님에게 복받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다들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주신 복을 카운트하고들 계신데, 아무 말씀 없이 듣기만 하시던 송권사님이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내뱉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정말 하나님이 나에겐 뭔 복을 주셨는지 모르겠어... 정말 나에게도 뭘 주시긴 주셨나...?"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어느 분이 아따, 송권사는 무슨 말을 그리 복없이 한댜? 라고 눙을 치자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뭐, 하며 허허 웃으셨다.
그저 흘러가듯이 하신 말씀이지만 그 고백이 내 마음에 한참동안이나 무겁게 남았다. 아마도 그건 권사님께서 평생을 두고 곱씹어 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전처의 자식이 있는 집에 시집을 와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시며, 그나마 바깥양반을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시며, 혼자 몸으로 남겨진 삼남매를 키워내시며, 진득이 집에 붙어있지도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도는 막내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시며, 얼마 전에야 병석의 시어머니 수발을 놓으시며, 고단에 겨워 눈거풀이 무겁고 마음이 시려 무릎이 꺾일 때마다 아마도 권사님은 같은 물음을 묻고 또 묻지나 않았을까.
하나님이 나에겐 뭔 복을 주셨을까나...? 교회서는 늘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배웠는데, 그럼 내 평생의 믿음은 대체 뭘까...? 

* 다시 욥을 읽으며...
작년 말부터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는 터라 짬짬이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 주어졌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주로 슬렁슬렁 읽히는 잡지며 소설류를 읽곤 하는데, 요즘에는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챙겨 최형묵 목사님께서 쓰신 <반전의 희망, 욥>을 하루에 몇 페이지씩 천천히 알뜰하게 읽고 있다. 고즈넉한 새벽녘에 최 목사님의 웅숭깊은 글을 읽는 맛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랴. 
어릴적 선배 누나를 통해, 몇 년전 정병선 목사님의 책을 통해, 그리고 또 다시 최형묵 목사님의 목소리를 빌어 욥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논쟁할 때 알아봤지만 참 끈질긴 양반이다. 이쯤되면 나도 욥이 걸어오는 말에 진지하게 대답을 준비할 때가 된 듯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대답을 나는 송권사님 같은 분과 나누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랜 고민을 거쳐 건져 올린 대답이 송권사님 같은 분과 소통할 수 있을만큼 낮아진 목소리였으면 좋겠다는 바램 때문이다.
누군가는 역사의 격랑을 끌어안고, 어떤 이는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다. 각자의 십자가를 감내하며 나가는 이들에게 욥은 역설적 희망의 지표가 되어준다. 그런가하면 송권사님처럼 그저 소박하게 가족과, 이웃과,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를 섬기는 일을 자신의 십자가려니 여기고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그게 그 분들이 알고 있는, 또한 살아낼 수 있는 신앙적 삶의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방식이었기 때문일게다. 욥이 던져주는 반전의 희망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장삼이사의 필부들에게도, 심지어는 나처럼 한 인생 대충 방기하며 살아가는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에게도 평등하게 유효하리라. 대체 어떤 언어로 그 희망을 함께 나눌지는, 책을 마저 읽고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 웹진 <제3시대>




연구소가 기획하고 도서출판 동연이 펴내는 <성서_현대를 읽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성서와 더불어서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살피고, 오늘의 인간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이 시리즈는 욥기를 새롭게 읽는 첫 번째 책에 이어 앞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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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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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0 23: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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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유경종님. 다비아 인문학적 성서읽기모임에서 뵈었었는데 이렇게 글로도 뵙는군요. 좋은 글을 제 블로그에 발췌하겠습니다. 물론 코멘트도 달아서요.

우리 시대에서 욥은 누구인가?
 - 최형묵 목사의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을 보고 

정혁현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라 하면 대개 잠언과 전도서 또는 시편을 떠올린다. 물론 『욥기』도 지혜문학에 포함되지만 대중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전도서나 잠언은 솔로몬, 즉 성서의 인물 중 가장 지혜로울 뿐 아니라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인물이 쓴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도서의 저자, 즉 ‘전도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도서와 잠언은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인생관과 처세술이다. 적어도 솔로몬의 영화를 욕망하는 성공시대의 독자들은 이 지혜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그러므로 지혜서들은 요즘 서점에 가면 소위 ‘실용서’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대개 성공에 따른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실패자들에게 너그럽게 충고 한 마디 하는 책들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공’이라고 알려진 삶을 간절히 욕망하는 독자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며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고 다시금 성공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성공한 자가 자신의 삶을 성공 이후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아보며 정당화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과거의 선택은 대부분 성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현존하는 질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조건이었을 뿐 결코 변화시켜야 할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요즈음의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현상을 보면 씁쓸하다. 성공의 문은 좁아지며 남루한 삶은 늘어만 가는 현실에서 이런 실용서들이 실패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패한 이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성공한 소수의 영광을 더욱 더 빛내는 주제넘은 봉사활동만 하고 마는 격이 되는 것이다.

파이를 나눌 생각을 하지 말고 키울 생각을 하라는 신자유주의의 지혜는 가진 자, 성공한 사람에게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의 몫까지 몰아주라는 말에 다름 아님이 밝혀졌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위기는 커진 것처럼 보이던 파이가 실상은 불면 꺼지는 투기 거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허황된 성공신화에서 깨어나 비록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맡은 바 직무를 기쁘고 성실하게 수행하며 소박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대다수 찌질이들의 삶을 재평가하고, 이들의 생활을 지속가능하며 발전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공신화가 정치권력까지 틀어쥐고 양극화를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굿판으로 난리법석이다. 성공한 자, 가진 자들이야 이런 현실이 그 자체로 잔치 마당일 터이지만, 대체 실패한 이들은 왜 남의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인가? 문제는 맘몬에 현혹된 정신이다.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참 지혜의 모범을 『욥기』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욥기』는 결코 쉽게 읽히는 문서가 아니다. 『욥기』는 구약성서 지혜전승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혜전승 중의 다른 문서들, 예를 들어 전도서나 잠언 등은 딱히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읽어보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대 『욥기』는 그렇지가 않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은 대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뿐이다. 더욱이 친구들이 욥의 회개를 촉구하며 던진 이런 발언들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어리석다”(42:8)는 핀잔을 듣는다. 반면 주인공 욥의 발언들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불경스러운 경우가 많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6:4)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7:16) 심지어 하느님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10:3) 도저히 의로운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다. 사정이 이러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욥기』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내 혼란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대체 『욥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 최형묵 목사에게 『욥기』는 성공한 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실패한 자들의 지혜이다. 욥이야말로 한 순간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척되었으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자신의 육체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하는 찌질이 중에서도 상 찌질이로 전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대 저자에게 욥은 성공한 사람들을 선망하면서, 그들의 충고에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욥의 정체는 “도발과 항변”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과 항변이야 말로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면,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언어”이다.  

『욥기』는 지혜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구약신학은 물론이요, 신학 전반을 넘어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와 해석이 축적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모든 자료들의 성격을 함부로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욥기』에 대한 관심은 대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집중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왜 이 세계에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신정론의 질문은 자비로운 하느님의 통치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궁지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악과 불의가 현존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욥기』에 관한 신학적 연구는 대개 이러한 궁지를 돌파하여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신 개념을 수호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논리를 돌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신도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도의 추상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형묵 목사의 책 역시 신정론의 문제의식 안에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욥기』가 지혜문학 중에서도 독특한 문서인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처하게 된 상황, 즉 의로운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삶의 상황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것임에 착안한다. 그 이유는 신정론이 제기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최형묵 목사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에 애써 눈감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하고 항변하는 욥 같은 인물에게서 기독교 신앙인의 한 모범을 본다. 따라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느님 개념을 수호하는 일에 조금도 애쓰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욥기』 안에서도 이러한 신학적 개념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모두 욥을 비난하는 그의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욥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핀잔을 듣는다.

반면 저자의 관심은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로 꽉 막힌 현실에서도 결코 저항과 항변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태도가 어떻게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내는가에 집중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 욥의 신앙은 주어진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음을 통탄하고 이를 저항과 항변을 통해서 구현하고자하는 불굴의 정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창조세계의 청지기 정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신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그 연구 대상인 『욥기』와 동일한 관심사와 방법을 가진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함부로 『욥기』를 요약 정리하여 그 핵심을 추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욥기』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이 구약성서의 독특한 지혜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 시대의 상황이라는 증폭기를 통해 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욥기』를 우리 시대라는 맥락에서 다시 쓴 2009년 판 『욥기』, 혹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의 『욥기』라 할 수 있다. 연구가 연구 대상과 동일한 시야를 확보했기 때문에 분출되는 생산성은 다양하지만, 이 책의 경우 두드러지는 것은 여느 『욥기』 연구서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대적 울림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반전의 희망”은 결코 주어진 현실에서 찌질이가 결국 ‘운 좋게’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성공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전은 욥의 저항과 항변이 초래한 현실 그 자체의 뒤집힘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회개’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회개는 단순히 신앙인이 주어진 현실 내부에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뒤집히는 사건, 지혜로운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높고 거룩했던 것들이 천하고 하찮아 보이는 세계 그 자체의 뒤집힘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는 대체로 자기 확신의 재확인에 그치는 수가 많다. 이 때 성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거울처럼 사용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며 이를 하나님으로 착각한다. 이를 나르시스의 성서읽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우리의 “아멘”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이런 성서 읽기는 폭 넓은 성서이해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 듣기 좋은 말씀만 반복적으로 읽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 신앙인들에게 『욥기』는 불편한 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식당개업식 문구가 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욥기』 안에서 결국 하나님의 핀잔을 듣는 발언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웃지 못 할 오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침묵시키고 나의 욕망이 원하는 발언을 하나님에게서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조심하려 하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성서 읽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신앙인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최형묵 목사의 책은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현직 목회자로 천안살림교회를 담임하는 저자가 교인들과 함께 『욥기』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보적인 신앙인의 수준에서 『욥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욥기』를 통해 신앙인이 들어야 할 말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의 탄탄한 민중신학적 입장과 목회적 경험을 버무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도 명확하게 표현해내는 깔끔한 문체 덕분일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질서를 거슬러 맘몬의 질서를 강요하는 배반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창조질서는 인내의 임계점에 서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위기를 깊이 자각하는 신앙인들조차 어디에서부터 출구를 찾아야하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절망의 장벽 앞에 선 인간이 세계와 함께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 최형묵 목사는 『욥기』를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신실한 신앙인의 씨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적인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 <기독교사상> 2009년 12월호 서평
자료 출처
 : 천안살림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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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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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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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초대석] '반전의 희망, 욥' 최형묵
"성경 속 욥은 순종의 인물이 아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항변의 상징"

유상호기자 shy@hk.co.kr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성경 '욥기' 8:7)

고린도전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말씀만큼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긍정적 메시지로 널리 쓰이는 이 말이, 본래는 "독선적 교리에 뿌리를 내린 언어폭력이었다"고 최형묵(48·사진) 천안살림교회 목사는 말했다. 그가 낸 <반전의 희망, 욥>(동연 발행)은 인내와 순종의 인물로 인식되던 욥을 도발과 항변의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세상의 부조리한 본질을 묻는 책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절규해도 세상은 굴러갑니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문제가 우리 시대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욥기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간의 오랜 물음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욥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부조리를 덮으려는 사람들에게, 그 논리와 상반되는 현실을 들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성서 해석에 따르면, 욥은 고난을 묵묵히 참고 견뎌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한 인물이다. 그러나 최 목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공평함을 말할 수 있는 현실은 부조리하며, 그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주장은 불온하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후략)

기사 출처 : 한국일보 홈페이지
전문 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9/h200909050351438421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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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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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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