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굿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의인이 망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 「이사야서」 57,1

 

제국의 경제가, 그 시스템이 온 이스라엘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황제가 재가한 국제적 거상(巨商)들이 이 지역에도 들어왔고, 대지주들은 그와 거래하기 위해 생산물의 가격 낮추기 경쟁에 매진했습니다. 일단 그와 거래관계가 트이게 되면 국제무역의 지역 독점권을 얻게 되었지요. 또한 세금대납업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그러다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지주들이 몰락하는 경우도 빈번했고, 무엇보다도 소농들의 몰락이 속출했습니다. 몰락한 소농들은 대지주의 소작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생존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하급노동자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 일부는, 그 땅에서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기에, 막막한 심정으로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여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에서 말입니다.

한편 이 시기, 국제경제의 활성화로 인한 다른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래장부, 거래계약서, 물품관리장부 등, 기록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상거래가 활발해지는 만큼 분쟁도 많아져 소송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것 역시 기록의 중요성을 강화시키는 이유가 되었지요. 이에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대량 수입되어, 기록을 위한 비용은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또 당국은 세수(稅收)가 늘면서, 통치를 위한 기록의 필요도 높아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국이 주도하는 종교의문서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른바 ‘성서’ 문서들이 편찬되거나 저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작된 성서 문서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성서본문이 포함된 한 문서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제3이사야서’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파트(56~66장)에 수록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시기의 문서 작업이 전례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제3이사야서’라는 저자미상의 이 문서는 하층민의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인데다, 그 기조 또한 민중적이기에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이 포함된 텍스트인 57장 1~13절은 당시의 민중 현실과 저항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합니다.

‘의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그 죽음을 사람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1절). 도대체 ‘의인들’이란 누구일까요? 또 왜 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5~9절에서 우리는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피우는 자이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입니다. 여기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인신제사를 말합니다. 원래 아하스 왕이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침공하여 국가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 아들을 야훼께 바치는 제사를 말하는데(「열왕기하」 16,3. 기원전 734~732년), 한 세기 쯤 후인 요시아 왕이 개혁 드라이브를 본격화하던 때(기원전 622년경)에 이 인신제사는 요단강 건너 지역 암몬족의 신인 몰렉에 대한 제사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스로 표상되는 불의한 통치자가 바로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자로 지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기원전 3세기, 제3이사야서의 시기에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 시절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토비야 집안입니다. 한데 이 사람은 암몬족 토호였고, 제국 왕제로부터 이 지역의 총독으로 위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경 토비야 집안이 죽음의 방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죽어가는 의인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9~12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정보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방조자들은 “섬길 신들을 찾아 먼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9절)고 합니다. 아하스 왕은 르신-베가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아시리아 황제에게 원병을 요청했었지요. 한데 이 애기를 전하고 있는 제3이사야서의 시대에 아시리아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시기에 아시리아 황제에 대응하는 이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황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아시라아 황제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황제의 대리인, 곧 황제가 재가한 거상의 거대한 행렬과 비견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거상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대지주들의 후견인, 곧 그들의 구원자입니다. 한데 바로 이런 네트워크가 대변하는 제국의 경제 시스템은 소농의 몰락을 초래했고, 소작농의 심화된 혹독한 노동 현상을 야기했습니다. 요컨대 제국의 거상이 대변하는 질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했지만, 민중에게는 고통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1절의 본문을 주목해 봅시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민중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들이 죽는 것은 도리어 재앙 피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요컨대 이 텍스트에는 제국의 경제 질서가 민중의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예언자의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한데 그 제국적 체제를 불러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토비아 가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입니다. 그들이 제국의 경제 질서를 불러들임으로써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쌓아가고 있을 때 민중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선 정국이 이제 막바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맘 땐 네거티브 전략이 불꽃을 일으킵니다. 그러는 중에 박근혜 씨가 연루된 스캔들이 여러 개 폭로되었는데, ‘억대 굿판’ 스캔들도 그 하나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1월 14일, 사단법인 박정희 생가보존회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서 탄신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행사에는 경북도지사, 구미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주요 인사들이 한마디씩 소원과 축하의 발언을 했습니다. 굿판이니 그 말들 속에 박정희 신격화 발언이 포함되었음은 충분히 예측할 만 합니다. 또 대선이 임박했으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는 말이 들어있으리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요. 물론 모두 의전용 발언입니다.

한데 굿을 했다느니 신격화 발언이 있었다느니 하는 건, 근본주의 성향의 유통성 없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민감한 사안일 것입니다. 해서 새누리당은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최초 유포자를 고발하고, 네거티브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박근혜의 표정이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그이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

이 스캔들을 둘러싼 공방이야 두 정당과 열혈 지지자들이 할 일일 테고, 나는 이에 대해 좀 다른 점에서 유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나의 관심은 이 굿에 참여한 대중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박정희를 기리면서 제단 앞에 세워진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빕니다. 그들은 필경 세상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얼굴에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만한 역량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해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서도 그들의 상처는 좀처럼 보듬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종교들이 지배층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들은 굿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상하로 권력이 나뉜 사회의 아랫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일반적인 상처이겠지요. 특히 한국 근대의 폭력성이 주된 원인이 된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혹독한 현실이 가장 깊은 상처의 흔적을 새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굿판을 찾아왔습니다. 한데 그 굿에서 신격화된 이의 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국제조약인 한․미 FTA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굿은 자신들에게는 구원을 선사하는 굿일 테지만, 민중에게는 죽음의 굿, 그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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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 없는 바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으니, 죽은 그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망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14절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이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사회를 엮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폴리스’였습니다. 이 고대 제국 시대의 폴리스들은 대체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왕성한 국제교역을 매개로 서로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배는 육로를 통한 운송보다 수십 배나의 운임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또 비교적 안전하며 또한 대량수송을 가능하게 했지요. 하지만 그만큼 배를 소유하고 운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해서 지중해를 오가는 국제무역의 시대는 부자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활짝 연 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였고,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이는 성공을 얻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자였으며, 바다는 온갖 생기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그 시대의 세계화는 ‘바다화’였고, 그것은 도시들의 폴리스화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 바로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더불어.
 
제국 내의 여러 식민국가들도 이런 바다화, 폴리스화의 대열에 앞 다투어 나서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유대의 경우, 내륙 한 가운데 있고 고지대에 입지한 도시 예루살렘까지도 폴리스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폴리스화란 폴리스간 국제무역을 위해 사회적 제도들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입니다. 폴리스간의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정향된 각종 교육, 스포츠, 패션 등이 활성화되며, 국제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어법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그리스풍의 외래어들이 범람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의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일부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배층들은 이런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알 수 없는 사고로 침몰한 천안함 병사들 46인의 장례식이 지난 4월 29일에 치러졌습니다. 전국에 분향소가 39개나 설치되었고, 군부대 내에도 220개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날은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되었으며, 전국 관공서에는 조기가 계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1분간 사이렌 소리에 맞춰 추모묵념시간이 있었고, 공중파 방송은 장례식을 생중계했으며, 공영방송은 추모모금방송을 편성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인 불명의 사고로 죽은 군인들에게, 그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단한 국가적 애도가 시행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사망한 병사들은 ‘전사자’가 되었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북한은 사실상 무력도발의 가해자로 규정된 것입니다. 하여 통일부장관은 타국외교관에게 대북관계를 재고하라는 내정간섭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당분간 대북 지원 및 교류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되었고, 응징의 방법을 둘러싼 논의가 공론의 장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외국 언론들은 한국만의 이 뜬금없는 신냉전주의적 행보에 의아해 합니다.

그 수몰된 병사들이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군이 공식으로 발표하고 대통령은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실상 정부는 구조에 그다지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죽음으로 방치되었는데, 죽음이 확인된 이후 느닷없이 ‘열렬한 기억’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그네들의 생명을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열렬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국가는 살해 방조자였지만, 그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전 국민의 가슴 속에 부활하게 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민이자 군인인 이들의 생명은 국가가 지켜야 할 공적인 생명이 아니었는데, 그 죽음은 ‘공적인 죽음’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이상한 결정의 주역인 청와대 지하벙커 모임은 부랴부랴 안보관련 위기관리센터로 급조되었습니다. 이는 지난 정권 때 존속했던 기관을 폐쇄했다가 다시 재건한 셈이지요. 하지만 이 급조된 기관이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의 국가화’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부가 진정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북정책이라기보다는 경제관련 위기관리 정책에 있었습니다. 큰 틀에서 얘기하면 이 정부가 치중한 것은 세계화 경제정책이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구체적인 전략은 ‘전 국토에 대한 토건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북문제는 이러다 할 기조 없이, 지난 참여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데 몰두하는 듯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생각의 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건 직후 청와대 지하벙커에 모여 긴급한 대책을 숙의했습니다. 부랴부랴 대북위기관리 모임을 급조했지만, 그것은 장기적인 안보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보정치를 중심 기조에 의해 도구화할 우려가 농후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 정부의 정책적 중심 기조는 ‘전국토의 토건화’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이 죽음의 국가화는 북한을 적대적 대상으로 재구축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최근 위기에 처한 4대강 사업 등, 전국토의 토건화 정책에 대한 반대의 여론을 다른 곳으로 환기시키리는 데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늘 그렇듯이 냉전주의적 안보논의를 이용해서 정권안보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국가는 종종 국민의 죽음을 도구화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위기에 처하도록 방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천안함의 병사들은 바로 그런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시민도 그럴 수 있지만 군인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쓸모없는 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장이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인 그런 대상에 불과합니다. 즉 자본주의적 생명력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국가의 생명관리체계는 결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른바 ‘천안함의 용사들’은, 국가가 그 죽음을 독점해 버리자, 이른바 ‘영웅’으로서 대단한 칭찬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생명으로보다는 죽음으로서만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들로 전락해 버립니다. 우리의 생명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삶과 죽음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하여 권력의 시선에서 저들의 삶뿐 아니라 특별한 우대를 받는 죽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에게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영혼이 포박되어 있는 한 말입니다.

다시 성서로 돌아와 봅시다. 바다화-폴리스화의 주인공들은 도시들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도시 문화의 적극적 주역입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학식 있으며 지체가 높은 이들입니다. 훌륭하고 멋들어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세련된 말투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들이 가족은 교양 있고, 자녀들은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그들의 삶은 그 세상에서 의미가 넘칩니다.

그뿐 아닙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들에게 죽음 또한 예사스럽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시신을 유기함으로써 내버려지는 몸이 아닌 존재, 무덤에 안장되고, 숱한 장신구 등이 썩어 사라져버린 몸을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존재, 그런 이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잔류합니다. 무덤을 보며 사람들은 그이를 기억하고, 제사의례를 통해 그이를 기억하며, 그렇게 기억한 이야기 속에서 회자됩니다. 하여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이들이 묻힌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때에 그의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바다의 제국, 그 세계 질서 속에서.

그런데 한 익명의 예언자는 도리어 종말의 때에는 그런 이들, 기억에서 오래도록 남겨진 이들이 모두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울러 그네들의 도시, 바다화의 권력에 사로잡힌 도시는 모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죽음, 버림당하고 이용당하는 죽음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이사야서」 26장 18~19절)

버려진 생명이 다시 되살아나는 꿈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아래,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서 체제에 의해 존재를 빼앗긴 이들의 부활, 이것이 그 시대 묵시적 예언자들이 외친 새 세계의 꿈입니다.

천안함의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곳, 그 주검이 도구화된 곳, 리워야단의 권력, 저 물의 권력이 존속하는 바다는 생기가 없습니다. 한데 예언자는 꿈꿉니다. ‘그 날, 리워야단이 생명을 다하는 그 날’(27장 1절), 생명을 파괴하는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날(25장 2절), 주님은 죽음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25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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