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을 생각한다 - +a와 상징의 세계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서양의 해석학이 성경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것처럼 나도 사춘기에 성경을 읽으면서 해석이 중대한 문제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수녀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좌가 있었다. 많은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의심하였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반골이어서 성경 해석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축자적인 해석에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 처음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읽고는 얼마나 흥분하였던가? 지금도 어려운 그의 사상을 알았을 리 없지만 니체의 기독교 비판에 깊이 공감하였다. 니체의 비판은 기독교를 순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체의 초인은 결국 예수이지 않겠느냐고 단정하기도 하였다.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 더욱 더 다원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석의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하였다. 전공으로 사회학을 택하면서 종교에 대한 나의 사유를 심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대학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가운데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있다. 포퍼와 쿤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에 대한 논쟁은 이 시절 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해석은 무한하지 않지만 언제나 다양하다. 쿤의 업적은 자연과학마저도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쉬운 언어로 설명했다는 점에 있다. 자연과학에 대해 무의식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인문(과)학자들이 쿤을 환영했음은 아주 당연하다. 나는 포퍼보다는 쿤을 더 좋아하였다. 과학을 포함하여 형이상학을 전제하지 않는 이론은 없다. 예수의 말을 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진리는 오직 허위를 폭로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비판을 거치지 않은 이론은 언제나 독단과 광기로 흐를 뿐이다.

   그런데 쿤의 논의가 종종 과장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주장은 정상 과학이 패러다임이라는 논증이 불가능한 기반에 서 있다는 것을 논증할 뿐 무한한 패러다임이 가능하다거나 모든 패러다임이 타당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소위 패러다임은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에는 사람들의 의식을 넘어서는 곳에 각인된 패러다임이 전체 과학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한도 내에서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내게로 왔다. 그때부터 나는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진화론의 도통(道統)을 지키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반골의 자유를 즐긴다. 나에게 있어 종의 다양성은 진화의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특수한) 원숭이에서 진화했지만 그 원숭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 원숭이 +a이다. 이 새로운 원리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질적으로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인간 이하의 동물은 필요(need)에 전적으로 지배되지만 인간은 요구(demand)에 매개된 욕망(desire)에 따라 산다. 이 차이를 설명할 때 +a가 요긴하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크게 두 가지 필요(본능)에 구속된다. 이 두 가지 본능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번식의 본능이다. 프로이트의 성욕과 공격성은 이 본능과 밀접하게 얽힌다. 성욕은 번식의 본능에서 공격성은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 파생된다. 인간의 모든 성생활을 번식 본능의 변형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 이론이 일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에 성생활은 동물의 번식(교미) 본능 +a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한 해석이 언제나 미덕인 것은 아니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몸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음식이 자기 보존과 관련된 양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의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들을 보라. 백화점의 음식코너를 둘러보라. 요즘은 양분이 빈약할수록 고급 음식으로 통한다. 인간의 욕망들이 음식에 짙게 배여 흐른다. 인간에게 +a가 없다면 종교적 구도자들이 금욕하는 것은 오직 환상적이고 자학적인 광기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도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a가 있다고 믿으면서 산다.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지적되는 욕망은 오랜 진화의 단계에서 +a를 전제할 때에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덜 진화한 종을 설명하는 원리로 더 진화한 종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설명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령 인간을 몸으로 환원하는 의학은 인간의 삶에 대단한 유익을 주지만 의학적 설명이 인간을 전체로 설명한다고 주장할 때 의학은 독단이 된다.

   사람이 고유하게 가진 +a 때문에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에 비해 매우 복잡한 해석을 요구한다. 인간의 삶은 기호(code)가 아니라 상징(symbol)에 의해 얽힌다. 속담처럼 사람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계를 산다. 기호는 아무리 복잡하여도 오직 제한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는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다. 물론 아주 단순한 기호라도 인간의 삶에 연루되면 언제나 애매해진다. 

   자연과학이 쉽사리 정상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들이 기호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벌들의 현란한 소통의 방식이나 개미들의 복잡한 구조들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획일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본능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의 세계를 구성한다.

   상징은 지극히 단순한 경우에도 아주 복잡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상징은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없는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논리를 따른다. 거의 무한한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생산과 유통이 사람의 세계를 이루는 근본 사태의 하나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일정하다면’ 이라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이 구절에서 단순화의 욕망을 읽는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정한 것은 없기에 경제학 이론들은 과학으로 포장되기는 하지만 지배 지식-권력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분과 적분의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경제학의 ‘한계효용의 이론’은 효용이 적어도 정상적인 다수에게 동일하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종종 나의 쓰레기가 다른 사람에게 보물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가끔 학자들은 말들이 갖는 의미의 애매함과 풍부함을 견딜 수 없는 ‘빅브라더’처럼 말을 단순화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전체주의자들은 언제나 상징을 기호로 만들려고 한다.

   인문(과)학이 직면하는 해석의 다양성은 사람이 기호의 세계가 아니라 상징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상징이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인 한에 있어서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쉽게 정상과학이 되지 못한다. 정상과학으로 주장하는 대부분의 인문(과)학은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세계마저 벗어나서 억압적인 독단론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인문(과)학은 ‘위기상태’ 또는 정상과학의 전(前) 단계 상태를 항구적으로 견디어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 인문(과)학자들은 정상과학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독단적으로 되는 학(學)을 거부하면서 영구적인 주변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들의 글에 유목이니 유배니 하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속화된 표현을 빌면, 인문학자는 노마드이다. 그러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반항하는 주변인을 닮았다. 

   해석은 기존하고 있는 해석들에 반대함으로써만 가치를 획득한다. 오랫동안 무시되던 면이 새로 부각되고 그 동안 과장되었던 면들이 마모되면서 텍스트는 새로운 삶을 획득한다. 해석은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의견을 생산하면서 기호의 세계로 환원되어 버린 텍스트를 다시 상징의 세계로 되살린다. 해석의 과정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동물과 구별되는 +a를 소유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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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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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솔로몬 왕이 강제 노역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주님의 성전과 자기의 궁전과 밀로 궁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9장 15절


팔레스티나에 철기문명을 선도했고 국가적 체제를 앞서 이룩했던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팔레스티나 거의 전 영역을 병합했으며, 요르단 강 건너의 모압과 암몬 족속을 예속화했고, 남쪽과 북쪽의 상당부분의 영토를 장악했던 나라, 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소제국. 성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가 이러했다고 말한다. 이만한 영토의 나라는 이 지역에서 이전이나 이후 누구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제국 이집트는 혼인관계를 통해 선린을 도모해야 했고, 지중해 문명의 최고봉을 장식했던 페니키아와도 대등한 국제무역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도성이 건설되었고, 헤롯의 성전에 비견되는 화려한 성전이 건조되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졌고, 특히 몇몇 요새도시는 훗날 아시리아 제국을 막아낸 아합의 군사력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예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솔로몬이 지었다는 시들은 대대로 성전 예배의 노래로 찬송되었으며, 나무와 풀과 동물의 분류학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예술이면 예술,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군사력이면 군사력, 어느 하나도 모자랄 것 없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가 기원전 11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부를 장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묘사에 걸맞은 다윗-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다. 솔로몬의 시편들이 그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그의 당대로 보이는 기원전 10세기 말경에 예루살렘에는 문자사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동식물의 분류학이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려한 성전이나 웅대한 궁전터도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에 세워졌다는 요새들은 적어도 한 세기 이후, 그것도 (유다 왕국이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것임이 밝혀졌다. 조잡한 도성의 흔적, 문자사용을 통한 체계적 통치술의 부재 등, 알 수 있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모로 보든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의 영토들을 병합한 전대미문의 제국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윗-솔로몬 제국 가설은 성서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또한 다윗-솔로몬의 나라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분열하여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는, 이른바 통일왕국 가설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 나라는 없었다. 다윗-솔로몬의 시대, 팔레스티나 남쪽의 지형이나 유적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이 지역에 등장했을 법한 나라는 기껏해야 아직 국가 단계라고 할 수 없거나 잘 보아야 국가로 막 진입한 나라, 그것도 북쪽의 나라들보다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잠시를 제외하면 이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약소국 가운데 하나로, 변변한 국가제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후진적 나라였으니, 그 시조인 다윗-솔로몬 시대가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였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역사비평학적 성서주석들은 아직도 낡은 가설을 전제로 하여 집필되고 있고, 신학교 학생들은 낡은 가설에 기초한 성서 해석을 역사적 해석처럼 배우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낡은 역사적 정보들과 긴밀히 결합된 신앙제도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새로운 역사적 성과들은 이제까지의 성서학, 성서교육, 신학교육, 신앙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다윗-솔로몬 시대만이 아니라, 제1성서(구약성서) 시대 전체, 그리고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서 역사학의 최근 조류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대안을 내놓으라고 반문한다. 사실 1990년대 이후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안정된 가설은 확립되지 않았다. 다수의 성서 역사가들이 그러한 대안 가설을 향해 매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하다.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자료가 축적될수록, 역사해석학적 인식이 발전할수록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 역사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백합화처럼 아름답지는 못합니다.’(「마태」 6,29) 이 말 속에는 솔로몬의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천년이 지난 예수시대의 대중과 예수 자신이 공유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시대에 대한 상상을 통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를 그리고 있다. 곧 예수와 대중은 솔로몬 시대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대를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 역사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시사되어 있다. 곧 역사학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학문적 논의여야 한다는 얘기다. 마치 안병무 선생이 「마가복음」이 그리는 예수전은 예수의 독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 대중이 나누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주-객 이분법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항거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는 과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간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예수와 마가공동체의 시간대화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선생은 ‘제2의 마가복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태일 사건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시간대화에 관한 예수전이다.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증언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은 그 신학운동은 바로 민중(오클로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며, 바로 이것, 한국의 민중-예수 이야기가 바로 ‘제2의 마가복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시간대화에 관한 현대 역사학적 문제설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성서해석은 바로 민중신학이다. 그것을 비록 학문적 언어로 세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오늘날 서구학자들의 대부분의 역사비평적 주석학이나 실증주의적 성서역사학은 학문적 세공은 있으나 역사적 문제설정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성서 역사학의 최근 동향이나 과제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의제와 만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와 대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유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성서 그 자체로는, 최근의 성서 역사학이 밝혀낸 것처럼 허황된 역사 이야기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성서 얘기를 더 해보자.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성서’라는 책이 신앙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는 점이다. 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제작비용이 저렴해짐으로서 책은 비로소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바로 국가 단위의 공교육이 제도화됨으로써 잠재적 독자로서의 문자대중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책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서양 근대를 대변하는 종교로 그리스도교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미 종교개혁기에 성서가 자국어로 번역됨으로써 근대어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후 신앙제도만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제도의 형성에 ‘성서라는 책’ 혹은 ‘책으로서의 성서’를 매개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나아가 근대의 지식과 성서의 이해는 상호 연관되어 발전하며, 지식 엘리트는 동시에 성서학자이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전망은 성서를 매개 삼아 대중과 교호하였다. 하여 서구의 사회는 기독교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의 종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기독교를 근대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한 매개이지만, 동시에 근대적 종교이기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위기의 핵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것은 바로 ‘독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책의 독서는 읽는 이의 체험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해서 사람마다 책에 대한 취향이 생긴다. 어떤 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대하 서사물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무협지를, 어떤 이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이더라도 책을 읽는 때마다 취향이나 기대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한데 독서가 독서하는 이의 삶, 취향 등과 얽힌다는 것은, 책이 그 자체로 의미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그때마다의 사정과 얽힘으로써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성서의 독서에는 개개인의 체험이 끼어들 수 없다. 성서는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전(Canon)이라는 성서의 외장(外裝)은 그러한 ‘선험적 완결성’의 다른 이름이다. 개인이 자기 삶을 가지고 끼어들어 해석하기 이전에 성서는 이미 답을 갖고 있으니, 개인이 할 일은 그 답에 준해서 자기를 돌아보면 될 일이다. 다르게 읽는다든가 항변한다든가 재해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러니 성서는 결국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인 셈이다. 아니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을 독점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이들은 그것이 마치 신탁을 수행하는 자처럼 자임함으로써 자신의 해석 행위가 해석이 아님을 주장할 뿐이다.

결국 성서는, 성서를 둘러싼 책의 제도는 독서를 가로막는다.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성서의 의미 속에 엉켜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의미를 완결짓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전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의 책은 국가가 임의적인 법을 확정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임의적인 계약을 확정짓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즉 고대의 책은 구술의 해석적 기능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책은 읽는 이마다 저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즉 책은 근대에 와서 해석적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이다.

전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 그 전통이 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를 포박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 신앙제도는 교리라는 이름의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성서를 읽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경험을 개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독서일 수 없다. 해석이 불가능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원칙이 강고하게 작동할 때 사람들은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읽기라는 행위를 수행한다. 가령,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독서를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근대 이전에는 구술이 해석을 수행하는 매체였기에 신앙은 삶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책의 종교가 된 근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라는 책이 해석을 불허하게 된다면 신앙은 끊임없이 삶과 어긋나게 된다.

책의 종교에서 책(성서)을 해석하지 않으면 신앙은 삶을 표현할 수 없다. 전통에,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삶을 담아낼 수 있을 때 책을 매개로 하는 신앙은 가능하며 그것이 성찰에 이르게 한다. 매순간, 독서할 때마다 해석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순간 다르게 읽어야만 살아 있는 책이 된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만 성서는 하느님의 소리로서의 성서일 수 있다. 하여 그래야만 성서는 책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일상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성서는 매순간 다시 쓰여야 하며, 매순간 새롭게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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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작성된 원고입니다.



사상-사건-사회상(社會相)/사회상(社會像)/사회사(社會史)-사회사적/사회학적(=사회과학적) 성서 해석/연구
이 아들은 여전히 ‘거지 왕자’의 신세인가?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 신약학)

1. 어느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 한 마당


청개구리 엄마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들랑 냇가에 묻어다오.”

청개구리 자식들은 평소에 엄마가 시키는 일이면 꼭 반대로 해서 엄마의 속을 썩이었다. 못된 자식들이지만 엄마의 마지막 유언만은 그대로 시행해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효도를 하기로 결의하고 엄마의 시신을 냇가에 묻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비가 내릴 때마다 엄마의 무덤이 냇물에 씻겨 내려 갈 위험 때문이다. 그래서 청개구리 자식들은 여름철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려고 할 때면 엄마의 무덤이 걱정되어 “꽥꽥” 하며 울어대야 하는 것이란다.

물음 1: “청개구리 자식들은 마지막으로 효도를 한 것인가?”
답    : “엄마의 뜻이 유언에 똑 바로 표현되었다면 그렇다.”

물음 2: “청개구리 엄마는 실제로 냇가에 묻히기를 원했는가?”
답    : “속 썩이는 딸이 엄마로부터 ‘이년아, 차라리 죽어버려!’라는 극한적 꾸중을 듣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것은 엄마의 말의 액면상의 내용에는 부합될지라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뜻과는 정반대이다. 이 딸은 엄마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서 엄마의 진정한 뜻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엄마와 자기 사이의 평소의 삶의 총체적 관계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지적(全知的)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청개구리 엄마는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 자식들이 평생 동안 자기 말을 꼭 반대로 했기 때문에 자기가 유언을 이렇게 하면 자식들은 저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하면서도 정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에게만 속한 것이지 이야기 속의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다. 청개구리 자식들이 진정으로 마지막 효도를 하려고 했다면 엄마의 살아생전의 삶에 비추어서 엄마의 뜻을 조명해야 했을 것이다.”

물음 1과 2는 글 또는 저자의 뜻을 규명하는 해석학의 문제이다.

물음 3: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    : “이 이야기에 담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전통적 성서해석은 바로 이러한 작업이었다. 즉 성서 본문 속에 담긴 신학적 사상, 도덕적 교훈, 윤리적 지 시 사항 등을 끌어내는 것이 성서해석의 해석의 과제였다.”

물음 4: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답  : “이것은 역사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 또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에 관련된 물음이다. 성서에 대한 이 접근방법은 성서 본문의 이야기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really?) 또는 ‘그 사건은 정말로 일어났는가?’(Did the event really happen?)를 탐구한다. 이 방법은 더욱 간단하게 역사적 방법(historical method 또는 historical approach)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또한 성서의 각 문서를 역사적 산물로 전제하고 저자와 독자와 누구이며 저작 장소와 연대, 저작의 계기와 목적, 저작에 사용된 자료, 다른 문서와의 문학적 관계 등등을 탐구한다. 역사 연구의 주된 관찰 대상은 과거의 사건이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연쇄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이라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이라 한다. 이 관찰 방법은 시간이라는 선로(線路) 위에서 사건이 진행하거나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며칠 전에 이라크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기자 회견장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 아랍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어 부시에게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은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 선을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 현장에 자동 무비 카메라가 비치되었더라면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이 연속으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신발 투척 사건이라 하자. 여기서 우선 기자석으로부터 구두 한 짝이 날아와 부시 앞에 떨어진 일만을 떼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일의 맨 처음 장면은 한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한 손으로 신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신발이 날아가는 운동, 맨 마지막 장면은 그 신발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장면까지 진행된 일을 죽 열거하는 것을 사건의 서술(description)이라 한다. 사건은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우선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원인(原因, cause)이라는 것은 물리적 운동을 촉발시킨 작동력을 가리킨다. 신발이 날아간 사건을 순전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는 경우에는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지는 행위가 이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다. 화재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눈앞에 진행된 화재의 과정과 결과만을 진술하지 않고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즉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전기 누전과 같은 사고로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주어야만 화재의 내용을 좀 더 실제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사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틀에 넣어서 관찰하거나 이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더 큰 맥락에 넣어서 관찰하는 것을 사건의 설명/해설(explanation)이라 한다. 그런데 구두 투척과 같은 사건은 사람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는데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게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촉발시킨 것이 무엇인지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동기(動機, motive), 의도(意圖, intention) 또는 목적(目的, purpose) 등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을 규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우선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의 소영웅 심리, 열등감, 원한, 복수심, 피해의식, 당일 부부 싸움으로 인한 의기소침 등등 갖가지 개인의 심리 상태를 그 행위의 동인(動因, drive)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운동에서 원인과 결과는 순전히 기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개입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는, 동인에서 기계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동인과 행위 사이에는 그 행위자의 판단, 의지, 결단과 같은 의식작용이 반드시 개입한다. 이러한 의식작용은 행위를 추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가 일정한 목표점에 이르도록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한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는 행위가 작동하기 전에 예기하는 미래의 결과가 이미 장치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행위의 의도 또는 목적이라 한다.

“행위의 동인, 동기, 의도, 목적 등등은 행위자의 내면, 즉 그의 심리나 정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의 원인—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사용하기기로 하자—을 그 행위자의 외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첫째로 역사적 접근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이 행위에 선행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관계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큰 사건이 앞서 일어났다. 그 행위자의 판단으로 이 전쟁은 이라크 민중을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며 부시가 바로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다. 이러한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거나 이러한 전쟁의 원흉을 응징하는 뜻으로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라크 전쟁은 이 행위가 일어난 상황이며 폭로나 응징은 이 행위의 목적 또는 의도이다. 둘째로 종교적 접근 방법이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원흉인 부시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알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또 이 행위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도 이라크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 애국적 행위에서부터 국빈에게 외교적 결례를 행한 파렴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음 5: “청개구리 가족의 삶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살림살이 형편은 어떠했는가? 가족 사이의 관계는? 이웃 개구리들과의 교우 관계는?”
답    : “자녀의 배필을 결정하는 경우에 ‘착한 사위/며느리 노릇을 하겠습니다’라는 후보 자의 말 한 마디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부모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어떤 말 한 마디에 죄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총체적인 삶에 비추어 볼 때에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청개구리 가족은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부모 세대로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기간에 그들이 쓴 몇 편의 글들을 남겨 놓고 떠나갔다고 하자. 우리가 이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그들의 글들이다.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에 관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게 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눈감고 지나쳐버린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너무나 많이 알지마는 그들의 먹이가 어느 정도로 결핍했는지 또는 이웃 마을의 황소개구리의 횡포 때문에 날마다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남겨 놓은 신약성서의 문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문서들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이단 사상으로 배격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서에서 신학적 내용과 교훈적 사상을 끌어내는 작업을 신학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념론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상의 삶을 영위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 본토박이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주자로서 나그네 신세로 살았는지, 그들이 사는 지역은 도시 빈민촌인지 농촌 지역인지, 지역 터줏대감과 황소개구리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공세를 바쳐야 했는지, 종교적인 문제로 이웃집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청개구리 엄마는 과부인지, 미혼모인지, 무직자인지, 피고용자인지, 자영업자인지, 청개구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청개구리 자녀들 중에서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가 있는지, 전체적으로 그 청개구리 가족은 개구리 사회 전체에서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그들은 빚 없이 또는 과중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했는지 등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청개구리 가족의 삶과 관련된 이러한 모든 측면을 총체적으로 일컬어서 사회적 정황이라 한다. 개개인은 고립된 존재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제도, 기구, 윤리, 가치관 등등의 관계망 속에 얽혀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의 이러한 관계망은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그 성격이 정태적(靜態的, static)이다. ‘정태적’이라 함은 불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틀거지인 제도, 기관, 계급, 생산양식, 가치관 등등은 장구하게 동일한 양식으로 동일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이나 이 관계망 속에 얽혀 살아가는 존재의 사회적 정황을 관찰하는 방법은 사건을 관찰하는 방법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사건은 시간의 선 위에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의 전체 과정을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사용된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통시적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의 제도나 기구 따위는 정태적인 것이고 사회 구성원이 이러한 제도를 매개로 해서 맺은 사회적 관계는 정적(靜的)인 상태이다. 정적인 상태라 함은 운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정적인 상태를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필요 없고 정지 사진을 찍는 카메라로 충분하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이라 한다. 공시적 방법은 정지된 동일한 시점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얽혀 있는 모든 관계의 실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사회의 현상이나 인간 삶의 사회적 여러 차원을 서술하는 데 적절하다.”


2. 대상과 방법론 문제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연구 대상은 1세기의 원시그리스도교의 사회이다. 연구의 어려움은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 세계에 이전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70년 유대 독립전쟁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70년 이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사회적 성격이 확실하게 다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의 사회적 차원의 삶의 현실을 구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삶의 현실이라는 것은 공시적 관찰 방법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파악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 현실이 그 사회의 100년에 걸친 전 기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연구의 목표를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 서술(social description)이다. 이것은 사회적 현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회상(社會相)이다. 그런데 사회학이 사회 현상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전형적인 것, 일반적인 것, 동일성이 있는 것을 채택하지 특수한 현상은 배제한다. 빈약한 자료를 이용해서 이렇게 구성한 사회상이 어느 곳, 어느 시점의 특수한 사회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는 그 사회에 대하여 총체적인 성격 규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갱신운동 단체, 사회통합 세력이니 대안사회니 하는 식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회상(社會像)을 구축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셋째는 사회사(社會史)를 기술하는 것이다. 사회사(Sozialgeschichte, social history)는 학문분과로서는 역사학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이다. 그것은 일반적 역사과학의 한 특수한 관찰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Sozial)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관찰 대상을 가리킨다. 즉 여러 집단과 계층과 계급에 따른 사회 구조의 발전을 서술하고 이러한 각 집단의 크기, 처지, 의미를 다루며 나아가서 각 구성 요소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사회적 과정의 역사를 구명한다. 그러니까 ‘역사’(-geschichte)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찰 대상을 한정한다. 즉 그것은 과거의 사회가 연구 대상임을 뜻하는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역사학적 관찰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가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분석 방법을 당연히 사용한다. 사회사라는 말은 이 학문의 연구 결과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상의 세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적’(soci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회적 서술’(social description)이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 사회적 서술은 사회의 여러 문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이용하여 그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립한 결과물은 사회상(社會相)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사회과학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된 사회상이 특수한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둘째는 ‘사회학적’(sociological) 또는 ‘사회과학적’(social-scientific)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라는 표현은 사회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을 대표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학을 위시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인구학 등등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회과학적 학문분야를 함께 뭉뚱그려 지칭하는 정확한 표현은 ‘사회과학적’이라는 표현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회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사회의 모습을 구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사회학의 이론과 분류 체계를 이용한다. 사회학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이 있는가 하면 갈등론적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 갈등론적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연구 결과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구축되는 전체적인 사회의 모습은 사회상(社會像)이다.

셋째는 ‘사회사적’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이성은 역사학적 관찰 방법을 포용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이 방법은 사회적 사실을 서술하는 점에서는 첫째 방법론을 수용하며 사회학적 분류 도식을 응용한다는 점에서는 둘째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형성한 결과물은 일정 기간에 걸친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 즉 사회사이다.


3. ‘거지 왕자’의 신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인다. 사회학을 위시한 사회과학들은 순전히 세속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거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연구에 사회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결혼한다”는 어느 아프리카 추장의 말이 뜻하듯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일로 여긴다.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세속적 학문을 이용하여 계시를 밝히려는 노력은 배격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과 개인 영혼 구원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사회 문제는 전적으로 외면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사회복음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반짝 강조하다가 곧 신정통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짓눌려 사라져버렸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특히 미국 신학계에서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물이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한 사람만을 언급하겠다. 그는 독일 신학자 타이센(G. Theissen)이다. 그는 1974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저서가 연구사적으로 볼 때에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공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저서는 공로 못지않게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한 가지 단점만 지적한다면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론 때문에 연구 결과 전체가 정반대로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연구에 종사하면서 많은 귀중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연구는 여전히 서자의 신세에 머물러 있다고 할 것이다.


4. 성서 연구냐 성서 해석이냐?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은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서 해석은 성서의 말씀, 즉 성서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성서 연구는 성서와 관련된 사항들, 예를 들어 성서의 생성, 성서의 세계, 성서 시대의 역사, 선교의 역사, 사도들의 활동 등등의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연구는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을 위한 예비 작업이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으로 올바로 재구성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그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서 전해진 성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는 말씀으로 들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서 연구 자체가 성서 본래의 궁극적 목표,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는 것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본래적 목표는 올바른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성서 해석이나 사회사적 성서 해석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이라는 것은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동원된 유용한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성서를 읽을 때에 전통적으로 촛불을 사용해서 읽던 것을 훨씬 더 밝은 전등이라는 조명등을 사용하여 읽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서 읽기의 방법을 비교한다면 다른 점은 조명등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조명도가 높아지면 읽기가 더 편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성서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조명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독자가 찾으려고 목표하는 것 이외의 것이 그의 눈에 띌 수 없다. 전통적인 성서(聖書觀)은 성서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데 이 계시의 내용은 신학적 담론, 즉 신학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풀이하는 작업이다. 이 경우에 성서 해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 되는 셈인데 성서 해석의 과제는 한 신학 사상을 다른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풀이해 내는 작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을 신학적 성서 해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신학적 성서 해석은 오로지 사상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념적 성서 해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석의 최종 목표인 계시의 내용이 신학 사상이라고 하는 전통적 신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밝은 조명등으로 바꾸더라도 해석의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하고 인간의 삶을 영적인 삶의 영역과 물질적인 삶의 영역으로 이분하거나 현세와 내세로 이분하여 어느 한 쪽을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 처분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이원론 철학 사상에서 유입된 그릇된 사상이다. 성서가 인간의 구원, 해방, 자유를 말하는 경우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떠나서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반쪽 떼어낸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가상 존재가 누리는 어떤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계시 사건이다. 그러므로 계시 사건은 육신과 관련해서 해석해야지 육신과 분리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계시 사건의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계시의 내용을 순전히 신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육신이 된 말씀을 도루 말씀으로 뒤바꾸어 놓는 반역 행위가 아니겠는가?

1970년 대 말에 당시의 서독과 동독, 프랑스, 네덜란드 출신의 몇몇 성서학자들이 사회사적 성서 해석에 종사하다가 전통적 성서 해석을 배격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창하려는 취지로 “비관념적 성서 해석” 또는 “물질적 성서 해석”(materialistische Bibelauslegung)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석 모임을 결성했다. 우리나라에는 “실사적(實事的) 성서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성서해석 방법은 아직까지는 ‘거지 왕자’의 신세이지마는 성서해석의 본래적 왕자, 참된 적자(嫡子)로 판명될 날이 곧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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