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9]


지젝 (2) : 헤겔 같은 라캉, 라캉 같은 헤겔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라클라우가 지젝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의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지젝은 라캉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내려오는 관념론적 전통속에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참고: 지젝(1) : 까다로운 주체), 지젝은 헤겔을 동일성 원리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고착시킨 철학자로 비판하는 탈근대주의 철학자들의 입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겔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헤겔의 부정성에 대한 개념이 항상 개념의 자기 동일성으로 회귀함으로서 타자를 대상화하고, 차이를 말소한다는 점에서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형이상학 체계로 받아들여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안에서 다름과 차이의 정치를 위해 헤겔은 항상 넘어서야 할 고지였다. 그러나, 지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과서적인 해석처럼 헤겔의 절대지식은 초월적인 주체가 이성과 일치되는 상태가 아니라, 절대지식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의 부정은 절대적인 부정'이라는 해석으로 뒤집어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정'과 '반'의 모순, 주체와 객체의 모순은 '합'에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합이라는 단계에서 은폐되었던 모순의 실체가 확실하게 입증되고 드러나게 된다. 정신이 자기와의 관계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태로 남아 있지만, 타자라는 대립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은 비로소 현실화된다. 타자와의 모순적인 공존이야말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라는 말을 사용한 의도는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정신 안에 내재하는 모순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하지만, 그 통일은 모순이 지양되고 해소된 상태의 통일이 아니라 모순 없는 화해의 순간은 불가능하며, 분열은 지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통일이다. 다시 말해, 모순이 제거된 절대지식은 환상일 뿐이며 그 환상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주체가 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젝이 해석한 헤겔의 절대지식이란 '모순'의 지속되는 상태를 말하고, 나아가 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이 없는 절대지식은 '존재하지 않음', 또는 '불가능성'을 가리킬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젝은 헤겔주의는 칸트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화의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칸트가 주체를 초월적 통각과 물자체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존재로 본 것 처럼, 헤겔이 말하는 주체는 현실의 감각세계 너머에 있는 물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성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다. 헤겔은 칸트적 주체의 비판자가 아니라, 오히려 칸트가 애매한 것으로 남겨놓은 물자체를 근원적으로 폐기함으로서 칸트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인식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해결한 것이라고본다. 그러나 헤겔에 대한 이러한 과감하고 도전적인 해석이 지젝 자신의 창안물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헤겔에 대한 지젝의 급진적인 해석은 주목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전통적 헤겔 해석을 뒤집고 헤겔의 숨겨진 본연의 모습을 복구하려 한다.


이데올로기와 판타지


라캉에 의해서 상징계는 기표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기표들에 의해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이 상징적인 질서가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징질서 안에서 항상 실재계로부터 미끄러지고 부유하며 떠다니는 기표들은 하나의 주인기표 (혹은 대타자)를 만남으로 비로소 의미의 관계를 구성한다. 여기서 실재계는 기표의 관계망이 형성한 의미화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고 저항하는 상징질서의 잔여물이다. 실재계는 상징으로서 언어와 기표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고, 상징적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위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재계가 없다면 상징계의 존재 또한 불가능하다.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한 불가능성이 상징계 자신의 존재 가능의 조건이 되는 모순을 내포한다. 상징계 안에는 실재계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지만, 그 자체가 실재와 동일시 되지 못한다. 여기서 주체는 소외를 경험한다. 상징계 안에서 편입될 때에 주체는 존재의 안정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지만, 대신에 자기의 본래적 존재를 상실해야 하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결국 의미의 사슬망에서 벗어나 기표와 동일시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와 결핍을 느낀다. 상징질서 안에서 경험한 결핍과 소외로부터 주체를 지탱해주는 장치가 바로 판타지이다. 판타지는 실재계에 이르지 못하는 주체가 느끼는 결핍을 상상으로 대리할 수 있는 대상을 욕망하는 데서 발생한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는 오인된 욕망의 대상(Object a)과의 관계가 판타지이다.


지젝이 라캉의 눈으로 헤겔을 뒤집어 보려는 정치적 의도는 분명하다. 탈이데올로기시대를 선언하며 이데올로기를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으로 다루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도전하려는 것에 있다. 지젝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비가시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파헤쳐야할 당위성에 대해 주장한다. 이데올로기 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기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섣부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담론은 오히려 부활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하는 방식으로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현실을 전면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 간주하고,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유방임적 시장활동)로 가는 변화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효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여기까지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논의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의 현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보았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분석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보았는데, 자발적인 주체는 대타자의 호명에 의해 구성된다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분석을 통과함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분석 역시 '호명'과 같은 개념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프로이드와 라캉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알튀세르는 대타자의 호명이라는 국가의 억압적 장치의 메커니즘에 의해 주체가 구성된다는 주장에 멈춰서고 말았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주장대로, 대타자의 호명을 통해 주체는 형성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대타자의 호명으로 인해 호명된 존재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호명은 표면적으로는 대타자의 목소리로 들리지만, 사실 이 호명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이 내는 주체의 목소리이다. 그러므로 호명된 주체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의 환영, 착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 주체의 호명이라는 과정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오인'된 호출에서 이뤄진다. 대타자의 호명으로 형성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었음을 발견하고 욕망하는 타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결핍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마침내, 주체는 대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출현하지 않으며, 대타자의 결핍은 주체를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시킨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고 있는 점은 이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억압적인 작동방식은 균열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주체의 출현은 이데올로기라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대신하는 대타자이다. 대타자는 언제나 상징화되어 있다. 그러나 상징으로 실재를 대체할 수 없다. 상징과 기표는 언제나 실재와의 메울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실재로부터 분리된다. 성공할 수 없는 상징계의 완전성을 성공으로 위장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는 환상으로서 출몰하며 상징계와 실재계의 간격을 채우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상징과 기표의 체계로 질서화된 사회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위장하는 시도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한 발 다가선다. 이데올로기는 제거된 것 처럼 보이지만, 판타지와 유령과 같이 현실 사회의 상징질서를 완전한 시스템인 것 처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부터 추방된 이데올로기는 상징계가 의심받을 때마다 상징질서의 균열을 막아주는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실재의 세계에 속한 본질이 아니므로 상징화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


라캉과 헤겔의 접점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절대지식의 부재이다. 절대지식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불가능성을 암시할 뿐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대타자는 없다'이다. 대타자를 존재하는 것처럼 판타지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헤겔이 진정한 주체는 모순과 부정성을 끝까지 긍정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듯이, 지젝의 라캉적 주체는 이데올로기는 실재가 아닌 유령과 같이 비어있는 가상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자면, 판타지와 유령이라는 말이 실체없는 허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와 유령은 실체없는 대상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상징질서를 지탱하는 힘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면해야하고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실체이다.


환상을 가로지르기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배제된 것 처럼 보이지만, 상징질서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언제든지 소환되어 유령과 같이 출몰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고 가로질러 통과해야 하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환상을 가로질러 틈새의 균열을 발견하는 가운데 주체는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서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윤리적, 정치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라캉에게서 환상을 가로지르고, 틈새에 균열을 가하는 행위는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고, 상징계에서 실재의 차원을 추구하는 행위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젝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는 상징적 질서의 메워질 수 없는 간극에 맞서 대타자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정치적이고 윤리적 사건이다. 결코 주체는 실재의 불가능한 영역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지만, 상징질서에 대한 저항의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실재에 다가선다. 그 실재란, 자신의 비존재의 공백을 수용하는 것이다. 주체의 결핍을 경험함으로서 주체는 자신의 상징적 정체성을 지탱해 왔던 환상의 구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주체의 결핍을 경험하고 상징적 질서를 폐기시킬 때 이데올로기로서의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윤리적 행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젝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행위의 모델을 라캉이 '정신 분석의 윤리'에서 분석한 안티고네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에게서 발견한다(안티고네의 분석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가 사회적 선이라면 라캉의 정신분석적 윤리는 충동에 있다. 이 충동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욕망하는 것이다. 라캉은 명령을 거스르고 자신의 오빠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죽음을 선택한 안티고네의 행동을 윤리적 행위로 묘사한다. 크레온은 상징계의 법적 질서망을 의미하고 안티고네는 이 법망을 넘어서는 욕망의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안티고네는 죽음의 행위를 통해 비극의 윤리를 실행한다. 이 죽음의 충동을 실현하는 것은 곧 상징계의 의미화의 사슬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실현되는 시점에서 상징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얻게 된다. 죽음의 충동에 의한 비극적 자유야말로 바로 환상을 가로지르는 윤리적 행위이다. 주체는 바로 이처럼 상징질서가 제거된 비워진 공백 그 자체이며 이 공백을 지향하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전복적이며 저항적인 주체의 실현이다. 따라서, 주체는 주체를 공백으로 비우는 부정적인 행위이며,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주체의 결핍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하고 이데올로기 구조의 틈새를 파고들어 상징적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지젝은 실재에 대한 주체의 결핍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통해 주체의 새 모델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죽음충동에 의한 주체화의 과정은 헤겔의 '부정성에 머물기'의 개념에서 보여주는 주체의 이해와 거의 일치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생명은 죽음을 감내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죽음의 활동에 있다고 말한다. 현실의 안정된 세계안에 머물고 이를 고수하려고 할 때에 정신은 정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나 정신이 생명을 드러내고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안정되고 친숙한 세계와 결별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헤겔이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를 말할 때에 이는 죽음을 감수하고 부정적인 상태를 수용하고 외면하지 않으며 끝까지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라캉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도 죽음은 고립된 정신이 현실안에서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게 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처럼 지젝은 독일의 관념론적 전통을 폐기하지 않고, 주체의 담론이 형성되는 이론적 토대로 사용한다. 특별히 헤겔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이 라캉의 정신분석과 공명을 이룸으로서 오늘의 이데올로기의 현실안에서 저항의 주체에 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대를 자극한다. 다음에는 지젝의 라캉식 정신분석학적 주체이해가 맑스주의와 어떻게 만나는지, 그 안에서 발견되는 주체의 변혁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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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각주:1]

: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51호 웹진에 이어>

IV

형. 이 대목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수없이 나누었던 변증법 관련 대화들은 결국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 어떻게 종합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을 철폐하면서 논리적 일치성을 향해 치달았고, 결국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원론(ex,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헤겔식 변증법의 정의라 한다면 너무 조야한가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최초의 반항아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높은 단계에서 종합되는 헤겔의 ‘전체성의 변증법’에 맞서 본인 특유의 ‘실존의 변증법’을 고안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다’라는 논증보다는, ‘그 진리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고, 그 진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옳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냐며, 헤겔을 물고 늘어진 것이죠.
예를 들어, 성육신,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헤겔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너무나 서둘러 봉합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는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와는 달리, 신과 인간사이의 간격(대립)이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차이를 고스란히 느끼고 고민하는 가운데, 그 역설과 간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키에르 케고르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실존에서 절대적으로 역설과 간극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진리란 헤겔식의 거대하고 종합화된 ‘내용(What)’보다는 구체적 실존의 ‘어떻게(How)’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한차례 의심의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막 일시 시작한 서구 근대의 진보적 사관과 낙관적 사고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를 풍미하였습니다. 그리고 헤겔식의 종합과 체계와 전체의 변증법은 이런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니체와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그 질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아마도 헤겔 변증법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던 사람은 아도르노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탄생을 알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기념비적인 작품인 <계몽의 변증법>과 더불어 <부정의 변증법>을 세상에 내놓으며 헤겔 변증법의 균열을 직시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매달렸고, 최종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쌓아올린 동일성의 논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본인의 주장을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들을 통해 밝혔고, 그 강의들이 모아져 나온 책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1966)입니다.

 

V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반-합’의 도식을 따라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해결로 나가는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모든 방법들에 대한 저항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각주:2] 특별히, 아도르노는 인식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일성의 법칙이 실질적인 삶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 교환시스템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합니다. 동일성의 원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인간의 주체성을 물화된 형식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입니다. 이곳 시카고에는 매일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섭니다. 어쩌다 새벽기도 가다 길을 잘 못 들어 그 곳을 지나치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공원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할 줄 아는 사람 4명!” 하면서 차량 한대가 그들 앞에 멈춰서면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손을 급하게 흔들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마이클이 가도 되고, 호세가 가도 됩니다. 물론 나 이상철이 가도 되고, 김진호 목사도 가능합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멘트를 할 줄 아는 건장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이때 호세, 마이클, 이상철, 김진호는 서로 교환 가능합니다. 아니, 이 네 명만이 아니라, 시멘트를 할 줄 아는 신체 건강한 남자 모두는 이 교환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별존재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100%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이성이 이룩한 동일성 원칙의 결정판입니다. 이 법칙하에서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교환가치로 매개된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이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부르주아 사회장치는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질적인 차이와 다름을 물화된 공동성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점입니다.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억압당한 단독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들, 셈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것들은 역사에서 고아와 과부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고, 이교도들이었고, 흑인이었고, 유대인이었고, 제3세계 민중이었고, 불법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었고, 그리고 동성애자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해방을 위한 전략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던 셈이죠.
흔히, 서구사상(신학 포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전후 대륙 철학을 휩쓸고 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철학, 해체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정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해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아도르노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전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이 지닌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해체를 말하고, 부정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위기담론’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할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과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적 윤리’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VI

프랑스 철학자들이 해체를 말하고,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을 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대 사회가 ‘위기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신념과 신기루로부터 출항한 근대! 그곳의 사람들은, ‘비록 지금 우리에게 약간의 혼돈과 동요가 있지만, 저 지평선 너머에는 어김없이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환상에 휩싸였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를 향했던 동경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위기사회가 도래한 셈이죠. 2차 대전 후 확립된 미.소의 냉전체제와 그 구도 밑에서 전개되는 핵무기 경쟁도 이러한 위기담론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적 위기의식이라면,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버젼의 위기의식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을 휩쓴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위기를 선사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역설을 봉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세상의 변혁과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고 믿고 의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부터 떠나가게 했습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고 그 광장의 부활이 요원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된 온갖 종류의 위기담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민중신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 위기본능이라고 합니다. 위기를 예감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고 물리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위기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 위기의 요체는 우리 삶의 구조와 방식이 인간의 통제와 예측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자본의 자기장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교환가치로 전락되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인간가치가 셈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둡고 몽매했던 중세의 어둠을 비추던 한 줄기 이성의 빛,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은 주인의 손을 벗어난 통제가 안 되는 광선검이 되어 세상을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한번 가열된 원자로가 식을 때까지는 외부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기술의 발달한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불투명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 위기담론의 요체인 셈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담론들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왔고 지탱해왔던 중심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 내지는 징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위기는 요체는 ‘우리가 의지했던 중심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그것이 아닌가 봐!’라는 황망함과도 연관됩니다. 즉 지젝식 실재(the Real)를 봐버린 후에 주체가 느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말입니다. 밤새 달게 마셨던 바가지에 담겨 있던 그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져 있었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효에게 다가온 그 실재(the Real)! 물론, 원효는 그 다음 단계에서 깨달음이 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리면서 다가오는, 그 동안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악스럽고 흉측한 실재 앞에서 위기를 느낍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중심의 부재와 상실, 그리고 믿었던 실재에 대한 배신, 실망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민중신학의 위기’를 발설케 한 것이죠.

 

VII

하지만, 본디 중심이란, 데리다의 말처럼, 무엇인가 꽉 차 있어 중심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不定으로, 반드시 도래할 그 무엇에 대한 대망으로 존재하는 중심이 아닐런지요. 그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성서는 ‘선악과 이후 아담’, ‘바벨의 언어’, ‘금송아지 상’ 등으로 치환하면서 맹렬히 비난합니다. 성서는 또한 신의 자기비움(필리오케)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 사라져 버린 중심의 형태와 격이 어떠해야 할런지를 성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민중신학이 이런 성서의 메시지에 너무나도 충실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중심의 부재와 해체를 선언하면서 등장한 진정한 위기의 신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본성상 주변에 위기를 선사할 수 밖에 없는 싸이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민중신학을 여전히 현재진행적인 위태로운 사건의 문법으로, 혹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위험한 증환의 방식으로, 아니면 도래할 미래를 불러내는 유령의 언어로 남아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죠.
형.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좋습니다. 물론, 민중신학의 위기론을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선전을 통해 얻어지는 반사이익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민중신학의 위기론 유포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조급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을 향한 지적질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내용을 좀 더 촘촘히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안팎에서의 걱정과 비난은 민중신학의 체질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을 확인케 하는 거울이고, 그 결핍을 메울 환상을 제공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生으로 날것으로 다가와 살 냄새가 나고 피 냄새가 나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였던 것처럼, ‘광주사태’라는 말을 곱씹으며 미완으로 끝난 우리의 혁명을 상상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 역시, 적어도 제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예감케 하는 용어입니다.
맞습니다. 민중신학은 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이 안전한 토대 위에서 그 위용이 전파되는 순간 이미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민중신학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선언을 물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호는 결단코 민중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은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해체적으로 대하면서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선언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중신학이 위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리라 봅니다.      

형. 아도르노가 “진정한 깊이는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결국, 모든 저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라는 의미로 저는 그 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멈추는 날,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걷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의 저항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일테구요. 그럴 것입니다. Peace.  <다음 호에 계속>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New York: Seabury Press, 1973), 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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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재형
    2013.05.10 14: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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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 글을 읽고, 많은 영감을 얻고 공감을 갖습니다. 어서 빨리 형과 함꼐 배울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결핍과 부정이 민중신학의 동력이고 가능성이라는 말... 깊게 되새겨봅니다.^^ 주님의 평화!!!

타자 II : 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김형경의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서른이었던 나는 당시 스물 넷이었던 김희선을 만났다. 신춘문예 등단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허풍을 떠는 나, 그리고 은희경과 김형경을 자기와 함께 이야기하는 나를 바라보며 김희선은 내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래서 지금도 죽기 전에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춘문예 등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빚진 마음으로 있다.

나와 내 아내 김희선을 연결시켜줬던 <새의 선물>(문학동네,1995)은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이 책으로 은희경은 문화동네에서 수여하는 무슨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으로 진출하였고, 15년이 지난 지금 은희경은 한국문학의 얼굴이 되었다. 그 무렵 한국 문학계는90년대 이전 분단문학, 이념지향적 사회풍자적 작품으로 넘쳐나던 황금기(?)를 지나 사회주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며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때였다. 몇몇 전시대의 풍조와는 다른 도발적이고 그 당시로서는 실험적이고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했고 은희경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다. 60년대 말 12살 소녀 진희와 진희와 함께 살아가는 외갓집 식구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일상을 12살 소녀의 시선으로, 하지만 전혀 12살 같지 않은 조숙함과 영악함으로 바라본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진실, 사랑, 거짓, 풍자를 섬세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미장센한다. 갑자기 헤겔을 이야기하려는 지금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12살 소녀 진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헤겔철학의 체계가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12살 소녀가 사람들(타자)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듯, 헤겔의 그것 역시 근대가 선사하는 온갖 타자적인 것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예감에서이다.        

    이 글의 주된 포인트는 <정신현상학> 4장에서 헤겔이 언급하는 자기의식,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보존하는 주체에 대한 주목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의 헤겔해석에 기대어 근대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추적해 갈 것이다. 글의 후반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헤겔철학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할 생각이고, 글의 시작은 칸트와 다른 헤겔철학의 독특성을 열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헤겔을 위한 예비적 지식

 

지난 웹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장은 유한과 무한, 주체와 대상, 존재와 사유가 빛과 계시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안정적인 구도를 띄었고, 이러한 사회속에 사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이고 명료한 세계관을 지녔다. 근대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사유를 이어주던 끈이 분리되는 전환점이었다. 영국 경험론(Empiricism)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한 의심은 칸트에 이르러 물자체(Ding-an-sich, 物自體)에 대한 판단불가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빛의 차단, 계시의 실종, 교회의 추락, 세속화, 주체의 등장으로 명명되는 근대성의 도미노를 낳았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헤겔은 근대가 이룩한 성과는 계승하고 좌절은 봉합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근대가 이룩한 성과라 함은 세계가 신적 계시에 의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우발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인간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했다는 점이고, 근대의 좌절이란 무한과 유한을 이어주던 빛의 몰락으로 인한 전체성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 어둠의 영역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 즉 타자로 남겨둔 채 판단중지를 선언했다면, 헤겔은 칸트가 남겨놓은 타자를 다시 정신 속으로 흡수하려했다. 근대철학이 떼어놓은 무한과 유한의 재결합을 다루는 책이 바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적절한 비유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칸트철학을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미분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으로 이어지는 칸트의 비판철학은 인간정신의 역할, 능력, 한계 등에 대한 조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칸트가 미분해놓은 성과들을 적분하여 다시 하나로 엮어나간다. 그리하여, 헤겔은 인간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라 할 수 있는 감각적 확신에서 오성, 자기의식, 불행한 의식, 이성, 도덕과 양심, 종교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정신이 절대지에 이르는지, 즉 소박한 의식수준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성숙한 의식에 이르는지를 설명해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을 처음 접했던 시절, 헤겔에 대한 주석서 중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Alexandre Kojeve)가 쓴 Hegel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한벗출판사,1981)과 이폴리트(Jean Hyppolite)헤겔의 정신현상학 I,II(이종철 역,문예출판사,1986)이다. 후자가 비교적 원전에 충실했던 해설서였다면, 꼬제브의 책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특한 헤겔 주석서로 평가 받는다. 이러한 꼬제브의 헤겔 해석은 후에 등장하는 프랑스철학자들의 헤겔 이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고, 특별히 라깡의 욕망이론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각주:1]

꼬제브는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되는 타자성이 근대성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각주:2]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였다고 밝힌다. 가령, 여기에 나는 나!’라고 외치는 두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둘은 상호인정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이 끝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면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된다. 승자인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인의 목적은 단순히 타자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에 있지 않다. 타자인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의해 본인이 정복되었음을 인정케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타자가 주체앞에서 거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체는 자신을 자각 할 수 없으며, 주체로 인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자 자신을 고립 속에서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나는 타자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그가 나를 인정하고 주인으로 바라보며 내 말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 주체란 타자와 분열된 주체이고 타자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한 주체인 셈이다. 이렇듯 헤겔식 근대적 자기의식이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 타자와의 투쟁,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각주:3]

 

 

 

헤겔의 유산

 

1. _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이기적 욕망과 열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발전의 원리에 따르면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은 신의 섭리에 힘입어 신의 자기현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신개념을 수정한다. 칸트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추방시켰으나, 헤겔에게 있어 신은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저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속에서 속물 같은 우리의 욕망과 삶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재적인 신이다. 영원불변한 고정되어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사(세계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동태적인 신으로 (헤겔에 의해) 신은 거듭난다.

 

2. 욕망/윤리_ 칸트의 윤리에 있어 욕망은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욕망은 실천이성(윤리)으로 환원할 수 없었던 이성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욕망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헤겔은 이기적 욕망을 오히려 삶을 구동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보기에 욕망과 개인의 쾌락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후에 보편적 자아의식, 즉 이성으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였고, 욕망은 이러한 헤겔철학의 밑그림 속에서 일정구간 헤겔의 법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관점은 후에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담론윤리학, 즉 욕망과 개인의 이해관심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와 대화적 이성(원할한 의사소통)에 입각해 합의를 추구하는 윤리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드러난 욕망의 주체는 개별적 자아의식을 극복하고 보편적 자아의식으로 성장하여 공존의 윤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이성의 모든 타자적인 것을 변증법적으로 사변의 총체성 안에서 통합시키려했던 헤겔철학의 믿음 위에 서있다.

 

3. 理性_ 우리는 헤겔에게서 근대적 이성의 이중성과 대면한다.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논리가 첫 번째 근대성의 원리라면, 이성의 남용(무한신뢰)으로부터 야기된 근대성의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근대성의 두 번째 원칙이다. 근대성의 문제를 지목하는 학자들의 대안 역시 헤겔철학의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한다.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이성옹호론자들은 후자에 기대어 근대성이 야기시킨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했던 이성에 의한 이성의 자기 극복은 결국 그들이 문제 삼았던 이성을 또다시 긍정해야만 하는 수행적 모순을 되풀이한다는 비난을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받는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사상가들은 근대적 인식론 자체에 대한 전면적 회의와 해체의 틀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주체의 동일성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헤겔식 사유를 거부하고, 주체의 동일성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타자에 주목하는 것이 탈근대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타자_ 헤겔의 타자론은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인 주체가 자족적인 코기토를 상정하고, 칸트의 그것이 선험적 주체를 내세우며 타자와 무관한 주체를 말했다면, 헤겔에게 있어 주체란 타자와 상관없는 내적사유 속에서 직관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주체성이 획득되는 존재이다. 헤겔은 이렇듯 이기적 욕망뿐 아니라 모든 타자적인 것들을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으로 포섭한다. 소설 <새의 선물>에서 12살 소녀 진희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모든 타자적인 것을 섭취하면서 성인으로 되어가듯, 헤겔 역시 모든 이성의 타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절대정신을 향해 성장해 간다. 그렇다고 볼 때, 헤겔철학은 정신의 거대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안에 감추어진 헤겔철학의 함의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헤겔의 타자론은 후에 라깡에게 영향을 끼쳐 라깡의 거울단계’, 그리고 욕망이론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다시 인용된다. 

 

<다음 웹진부터는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적 타자론이 이어집니다>

 

 

 ⓒ 웹진 <제3시대>


  1. 꼬제브의 헤겔해석이 라깡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31-34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헤겔은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下에서 다름과 같이 규명한다: “주인은 물론 대자적 의식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결코 자기에 대한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의식은 하나의 또다른 의식, 다시 말하면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나 물성 일반과 종합, 연계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삼는 그러한 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매개된 자기확인자로서의 대자적 의식인 것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서울: 분도출판사,1981), 264 [본문으로]
  3. Alexandre Kojeve, Hegel ,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서울: 한벗출판사,1981), 27-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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