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7 : 헤겔의 미국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18세기의 유럽과 미국


    미국역사에서 내가 아는 제일 재미 있는 사건 하나는 역사책에서 ‘제퍼슨과 무스’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는 18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썼고 3대 대통령을 지낸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미국의 대사로 불란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큰 무스 한 마리를 사냥해 뿔까지 있는 상태에서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라는 주문을 미국에 했다. 18세기의 운송수단으로 한겨울에 거대한 무스를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나, 제퍼슨은 지속적인 요구를 했고 마침내 뜻을 이뤘다. 박제된 무스는 자연학과 지질학으로 18세기 유럽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부폰(Comte de Buffon)에게 보내졌다. 부폰은 지구의 역사를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했던 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결과 그 역사가 4,000년이 아니라 75,000년이란 새로운 주장까지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찰스 다윈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진화의 이론을 펼친 학자였다. 제퍼슨이 평소 알고 지내던 부폰에게 미국의 무스를 보낸 건 그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부폰이 자신의 저술 <자연사>에 신대륙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기술했고, 그 내용은 부폰의 명성에 걸맞게 미국에 대한 유력한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부폰은 미주 신대륙의 토양이 유럽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고, 그 증거를 동식물의 퇴행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같은 동물이라도 미국에서 낳고 자란 동물은 연약하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동물도 그 땅에선 점차적으로 기운을 잃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 후 미국의 퇴행성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론으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같은 입장에서 미국을 연구한 결과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부폰의 영향을 받은 드포우(Cornelius De Pauw)란 학자는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만일 유럽인들이 미국에 가서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정신적 활기를 잃는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과 행복추구라는 이념을 기초로 한 역사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했었던 제퍼슨에게 당시 유럽의 이런 미국론은 어처구니없고 근거없는 분석에 불과했다. 이를 반박하고 바로잡는 건 미국을 사랑하는 건국의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말이나 글로 부폰과 같은 대학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건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까, 그는 단번에 미국 자연의 왕성함을 보여줄 물증을 찾았다. 그가 떠올린 게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명물인 거대한 사슴과의 동물 무스였다. 박제된 무스를 받았을 때 부폰의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웃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진지한 학문의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불란서에서 귀국한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에 대한 기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이라는 미국의 자연과 정치제도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고, 그 내용의 상당한 분량을 부폰의 논리에 대항할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 할애했다. 그는 오히려 미국의 자연환경이 자신이 경험한 유럽보다 훨씬 났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은 결국 습관적인 것이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제퍼슨은 그 책의 불어판까지 낼 정도로 미국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미국 특히 버지니아의 뛰어난 자연과 건국의 정치적 실험의 정당성을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부폰은 왜 과학의 이름으로 미국에 대한 황당한 주장을 했을까? 그의 저술엔 상당한 분량의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고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미국의 환경이 퇴행적인 이유는 기온이 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의 땅은 늪지대가 많았고, 그런 지형에서는 생명의 진화가 더디거나 퇴보한다고 생각했다. 그 땅에서 태어난 원주민들은 게으르고 지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생식기까지 작았다는 주장은 당대 최고의 자연학자의 주장이라 믿기 힘들지만 그 논리만은 일관성이 있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미국에 오래 살다보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두포우의 주장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부폰이나 드포우 같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18세기 미국론을 주로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시작이라고 본다. 신대륙은 열등하고 미국은 결국 망할 나라라는 생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식민주의적인 세계관을 반영했지만, 부폰 자신은 과학만을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훗날 자신의 미국론이 틀렸다는 고백까지 했었다.  


    (반미주의의 역사와 사상적 배경은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개념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하자면, 시대나 사안에 따르는 ‘반미’는 언제나 있을 수 있지만 ‘반미주의’라 지칭할 만한 이념의 역사가 실제 미국 밖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반미주의란 개념은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미국의 선민의식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입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대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선민의식을 고수하려면 이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이 왕권주의, 공산주의, 테러리즘 등의 이념의 탈을 쓰고 도사리고 있다는 인식은 미국역사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를 반미주의라는 용어로 묶는 행태는 20세기의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는 시골의 가난한 백인들이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된 세상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총과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다는 말을 해 엘리트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얼마 후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라는 록밴드는 오바마를 은연중 비판하는 “God and Guns”라는 곡을 냈다. 가사가 재밌다. God and guns/Keep us strong/That’s what this country/Was founded on/Well we might as well give up and run/If we let them take our God and guns. 


    18세기 유럽의 미국론을 반대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제퍼슨과 같은 미국의 학자들과 남미의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제퍼슨이나 그와 함께 건국에 앞장섰던 매디슨 또는 먼로 같은 인물들이 건국의 이념과 백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면, 남미에는 17세기부터 원주민들의 학살을 막으려는 노력을 해온 예수회 신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클라비에로(Francisco Javier Clavijero) 신부가 있었다. 그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그들이 만든 문명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모두 계몽주의 사상에 익숙했었고, 그들의 논쟁은 이성적인 판단을 추구했고 또 상대에게 요구했다. 제퍼슨은 부폰의 논리를 정치적인 것으로 공격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언급하며 부폰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클라비에로 역시 드포우와 같은 유럽의 학자들의 무지를 이성의 차원에서 나무랐다. 18세기 유럽의 학문을 유럽중심주의나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의 산물로 읽는 건 정당하고 옳을 수도 있지만, 의심과 해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20세기 학문의 산물이다. 


    유럽인들은 왜 신대륙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 관심은 영토 확장과 식민지 지배의 욕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극 관심은 유럽의 정체성과 역사의식과 실존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1492년 신대륙 발견에서 출발한다. 당시 유럽은 성경에 기초한 지리와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륙이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땅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까지 살고 있었다. 그 땅이 어떻게 생겨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실존적 고민으로 발전했다. 신학에 의존한 유럽의 세계관 속에 새로운 세상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신대륙 충격은 수많은 신학과 신화 그리고 철학과 과학의 상상과 해석을 낳았고, 신대륙은 근대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라 불렸던 18세기까지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데카르트와 코페르니쿠스가 대표하는 근대유럽의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은 그 충격이 만든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그 충격의 신학적인 차원도 간략한 설명이 가능하다. 서구기독교에서 진리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형이었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성경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온전히 신의 영역, 계시의 영역, 즉 묵시록의 영역이었다. 신대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사람들은 당연히 신학자들이었다. 많은 유럽인들은 교회에서 설명해주지 못했던 신대륙에 대한 이해를 중세의 예언서들에서 찾았고, 마침내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묵시록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법칙들이 와해되는 시간이었고, 새로운 방법, 새로운 실험, 새로운 가치들이 등장하는 시간이었다. 교권이 억제할 수 없는 상상력과 새로운 지식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7세기 자연과학이 그 산물이었고, 유토피아라는 개념과 그에 대한 열망이 종말론적 묵시록과 함께 등장했다. 


    16세기 유럽의 지식인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류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원주민들을 직접 목격한 스페인의 선교사들 중심으로 중세의 전통적인 존재의 구분법 - 신과 천사와 인간 그리고 동물과 식물 – 가운데 원주민이 속한 곳이 어딘지 묻는 것이었다. 원주민들도 유럽인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에도 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 이유를 마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계몽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설득력이 있는 답이 필요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유력한 설은 그 차이가 기후와 토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역이 다른 사람들이 기질과 성향에서 차이가 있고, 그 이유가 토양과 기후의 조건 속에서 결정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환경이 사람의 성향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은 사실 오랜 역사가 있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등장한 세상의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일부였다. 부폰을 중심으로 ‘자연사’(Natural History)란 당시로선 모순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도 그때였다. 지구의 역사가 교회에서 가르쳐준 것과 다르다는 주장은 지질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부폰에게 신대륙의 사람들이 뒤떨어진 이유를 그 땅이 습한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동식물의 성장발육도 더디고 동물들의 지능도 낮고 오히려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이 미국은 습하지 않을뿐더러 습한 것과 열등하고 퇴행적인 것은 도데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부폰은 왜 신대륙의 습도가 높다고 생각했을까? 신대륙에 큰 홍수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아는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 홍수는 단 하나, ‘노아의 홍수’였다. 그러나 부폰이 언급한 홍수는 노아의 홍수가 아니었다. 왜냐면 노아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고, 그 이후 인류의 역사는 이미 성경에서 기록되고 서양에서 물려받은 역사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대륙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선 또 다른 홍수가 있어야 했고, 부폰은 제 2의 대홍수가 있었다고 믿었다. 오래전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지금과 달랐고, 육지의 지층에 바다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부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대홍수’라는 개념이다. 홍수로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는 건 서구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 신화적 개념으로 신대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과학과 신학이 모호하게 연결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결국 그 홍수 때문에 신대륙의 기온이 습하고 되었고, 그 때문에 미주의 땅과 정신이 퇴행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었다.

 

    신대륙에 사람들이 살게 된 연유에 대한 많은 가설이 지금까지도 존재하지만, 근대 초기에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설명이 하나 등장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출신 성직자로 남미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원주민들의 인간성을 증언하고 스페인 군인들의 참혹한 학살을 고발했던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가 제시한 설이었다. 원주민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10개 지파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다뤄 기독교로 개종 시킨다면 이는 예수가 재림하는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길이고, 서구세계가 구원받는 길이라 믿었다. 라스카사스는 원주민들의 언어와 관습 속에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믿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이후 남미의 스페인 선교사들은 라사카사스를 따라 이 이론을 유럽에 소개했고, 미국의 백인들 중에서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의 이론을 지금 보면 유럽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황당한 식민주의 이론이지만, 이를 통해 원주민들을 이 학살이 아니라 개종의 대상임을 켜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제공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신대륙과 원주민들의 발견은 그에게 예언의 완성, 곧 새로운 하늘과 땅에 대한 계시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 계시와 구원의 드라마는 원주민들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었다. 라스카사스의 이론이 맡았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신대륙에 살고 있던 새로운 인간들의 존재를 유럽의 세계관 속에서 설명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사라진 지파라는 논리는 유럽의 지식체계 밖에 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사람들의 존재를 유럽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유용한 이론으로 쓰였다. 하다못해 일본인들의 정체가 이스라엘의 사라진 지파들이라는 설까지 비교적 최근 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Joseph Eidelberg, The Japanese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내리기 이미 100년 전에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명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의 논리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의 미국


    미국에 대한 헤겔의 언급은 주로 그의 <역사철학강의>에서 나온다. 18세기 부푼과 드포우는 신대륙과 미국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해는 근거 있는 것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고 헤겔까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이 헤겔의 철학에서 중요하진 않더라도 그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철학의 묵시적인 차원의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그의 글 중에서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란 개념이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땅과 연결되어 설명되기 때문에 그의 편견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에 용의한 면이 있어서 오랜 시간 헤겔철학의 입문서로 여겨졌던 책이다. 이 글에선 그 책 앞부분‘역사의 지리적인 바탕’이라는 장에서 나오는 미국에 대한 언급만 살펴보겠다. 하지만 대상이 헤겔이기에 그를 미국이라는 상황과 연결짓는 배경설명이 빠질 수 없다. 19세기 유럽의 제일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그만큼 제국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옹호하는 철학을 했다고 욕을 먹는 철학자도 없다. 그러나 헤겔 이후의 서양의 철학은 모두 헤겔과의 대화 속에서 나왔다. 사회적인 관계를 앞세우는 다양한 맑스주의 전통의 철학에서 인간의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실존주의까지 헤겔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전통을 세운 듀이와 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는 1989년 이후 동구권의 몰락으로 이념의 역사가 끝났다는 논쟁과 함께 헤겔이 다시 학자들만이 아니라 언론에서까지 회자되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등장과 함께 부쩍 늘어난 역사의 종말이나 묵시적인 역사의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헤겔의 철학은 빠지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학에서 보자면 헤겔이 없는 성서학을 생각할 수 없고,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였던 성부와 성자의 관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해 준 사람도 내 생각엔 헤겔이었다. 여기서 헤겔을 다루는 이유는 헤겔 자신이 미국에 대한 언급을 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의 내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미국이 중요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이 역사의 철학이고, 그 철학에서 역사는 이미 완성된 종착점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유럽의 의식 속에 등장한 신대륙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의 중요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헤겔철학의 가장 큰 공헌은 그의 역사철학에 있었다. 하지만 역사철학이라는 말 자체는 모순적인 면이 있다. 철학은 합리적인 전체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인데, 역사는 비합리적인 우연과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가? 헤겔은 철학이 역사의 시간을 다루려면 그 내용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의미는 역사가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헤겔만의 강력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변증법은 역사의 합리성을 논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는 합리적일뿐만 아니라 발전하고 완성과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에 끝이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가정이 될 수 있을까. 역기서 ‘절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철학이 다루는 합리적인 이성은 상대적인 우연에 시달리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현대에서 용납되지 않는 용어이지만, 헤겔에게 ‘절대’(Absolute)라는 게 없으면 신학과 철학은 일상의 혼란 가운데 표류하게 된다. 역사가 합리적이란 말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과 같다. 역사 속에서의 이성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의 정신이다. 역사는 ‘정신’이 스스로의 절대성을 찾아나가는 정신의 역사였다. 헤겔에게 역사의 출발으로 정신이었고, 또 역사의 끝은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을 회복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시대가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의 시대로 이해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헤겔이 역사의 끝과 자신의 철학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다양하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도 헤겔이 아니라 헤겔의 역사철학 해석으로 유명했던 코제브(Alexander Kojeve)와 니체 같은 이들의 해석이었지만 헤겔의 개념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헤겔에게 역사가 정신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역사가 자연을 극복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같았다. 헤겔이 왜 자연과 역사를 구분하고 세계사를 자연을 극복한 정신의 역사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역사철학강의> 서론에 나온다. 그의 입장은 18세기 계몽주의 학자들이 “유행”처럼 추구했던 자연 속에서 이성을 찾고 신을 찾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에서 신을 찾는 것이었다. 역사의 선악과 굴곡진 모습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여 악의 문제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헤겔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길을 역사 속에서 활동하면서 화해와 통합으로 갈등의 역사를 치유하는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자연은 새로운 것이 없는 시간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역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시간이 헤겔의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은 모든 민족의 삶 속에서 동일하게 존재하고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헤겔의 역사는 정신으로 시작하지만, 그 정신의 활동은 국가라는 제도를 통해 드러났다. 또 국가는 뛰어난 인물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세계사적인 인물’)들에 의해 이끌어지기 때문에, 유럽처럼 정신이 올바른 괘도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고 따라서 역사의 발전이 더디고 이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민족도 있고, 집단으로 모여만 살뿐 역사 이전(Prehistory)의 자연과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집단도 있다. 예컨대 원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역사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이식의 수준이 합리성에 이르지 못하는 야만의 시대가 지나야만 역사가 시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역사는 정신을 통해 발전하고, 현재는 과거보다 더 성숙한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헤겔에게 정신의 역사는 유럽과 그 이전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서 제대로 발전을 했고,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역사를 통해 완성된다고 이해했다. 그 정신의 원리는 자유였고, 유독 서구의 역사 속에서만 자유의 개념이 발전했다는 헤겔의 입장은 19세기 유럽이라는 그의 시대적 한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 역사는 이제 끝이 났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과거형이다. 헤겔의 철학이 닫힌 구조를 갖고 있다거나 전체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에 과거의 역사와 그 역사가 끝나는 현재만 있을 뿐, 내일이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겔은 미국이라는 난제를 만난다. 신대륙이라는 미국을 그의 역사철학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와 과거를 품은 현재밖에 없고, 철학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 대한 관심뿐이다. 그래서 헤겔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불렀다. 미국이 미래의 세상을 주도할 것이란 의미가 아니었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미국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유가 재밌다. 헤겔에게 신대륙이란 개념은 단지 새롭게 발견된 대륙이란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대륙 자체가 유럽보다 지질학적인 나이가 어리다 믿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모든 것을 미성숙한 것으로 이해했다. 미국의 땅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원주민들도 그렇다고 보았다. 모든 게 작았고 약했다. 동식물들은 맛도 없었고,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모습에 기가 눌려 몰락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미국을 다룬 건 <역사철학강의>의 앞부분 “역사의 지리적 바탕”이라는 장에서였다. 미국은 지리적인 땅일 뿐 정신의 역사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던 미국이 경제나 민주적인 제도는 성숙하지 못한 유럽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미국은 역사 정신의 무대인 국가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왕정체제를 선호했던 헤겔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시민들의 망상적 실험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제시했던 성숙한 국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매우 특이하다. 농민들이 개척할 땅이 풍부하지 않아 도심으로 그들이 몰려들어야 했고, 계층 간의 구분이 첨예화 되어 긴장상태가 조성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긴장 가운데서 정신이 살아나 (헤겔식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인간이 자연의 삶을 영위할 수 없고, 경작할 땅이 부족하고, 계층 간의 긴장이 고조 됐을 때 정신의 역사가 시작한다면, 헤겔의 철학이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자유주의 체제의 태동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은 정당한 것이다. 


    ‘미래의 땅’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역사는 현재로 끝났기 때문에 더 발전된 기술과 이념과 문명의 미래는 없었다. 역사의 미래는 없고, 더 나아가 헤겔의 미래는 (연속적인) 역사가 없었다. 미래에 역사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땅’이라고만 했을까. 땅은 역사 이전의 상태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지 않은 묵시록의 미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래를 주로 땅과 흙의 상태로 표현한 현대문화의 장르는 Post-Apocalyptic이다. 영화로도 유명한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대표적인 Post-Apocalyptic장르의 소설이다. 묵시적 대재앙의 사건으로 세상의 역사가 끝난 인류의 미래는 잿빛 하늘과 땅으로 표현된다. 미래를 화려한 문명이 아니라, 죽은 땅이 다시 살아나 자연이 회복되고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건, 그 장르 작품들의 흔한 주제설정이다. 헤겔은 미국의 미래를 잘못 이해했지만, 그의 논리 즉 역사가 끝난 이후는 다만 역사 이전의 자연 곧 땅의 시대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20세기 서구문명의 중심이 되었고, 세계사적인 국가가 됐지만 그 힘은 역사를 끝낼 각오와 힘, 곧 묵시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이 그런 미래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인류에게 남은 미래가 그런 미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헤겔은 분명히 자신의 철학이 역사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사의 시간이 앞으로도 더 지속되는 걸 부정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역사가 끝난 상태는 어떤 것일까. 철학이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적이고 영구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절대와 보편을 성취한 헤겔의 철학과 유럽역사의 영광은 계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고 이제 남은 건 유럽 밖의 깨달음이 늦고 진화가 더딘 국가들이 유럽을 서서히 따라오는 것뿐이라면, 그건 미래가 아니라 유럽역사의 현재가 진행 중인 상태를 말한다. 전쟁을 예를 들자면, 한쪽의 절대적인 우세로 대세가 이미 기울었고 승전까지 선언된 상태지만 작은 전투는 계속되는 상황이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헤겔은 마지막 전쟁이나 묵시적인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헤겔이 불란서 혁명이 공포의 테러 체제로 변하는 과정을 묵시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했던 나폴레옹이 예나(Jena)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이를 역사를 바꾸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예언은 철학이나 역사철학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헤겔을 묵시적으로 읽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완성되고 끝이 난다는 생각만큼 본질적으로 묵시적인 것은 없다. 헤겔이 철학을 역사의 끝에서 영원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보았다면, 그 철학은 재림이나 천년왕국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들을 쓰지 않더라도 묵시적인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그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에 만약 미래가 있다면 퇴보적인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다고 그의 생각에서 묵시록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헤겔에게 신대륙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제 역사가 완성되는 마지막 시점에 그 발전과 전개를 설명하는 논리의 선명함을 퇴색시키는 성가신 땅이었다. 귀찮은 것은 생각하기 싫은 법, 헤겔은 신대륙을 생각과 사유의 영역 밖의 존재로 내몰았다. 그러나 헤겔에게 생각 밖의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고 녹여내고 이해한 시대가 열렸는데, 생각 밖에 무엇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완성되는 헤겔의 역사는 현재에서 끝나고 이미 완성된 역사는 미래가 필요 없다. 헤겔은 신대륙과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선언했다. 여기서 미래가 절대적인 사유를 추구하는 철학의 영역 밖에 있고,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라면 미래는 헤겔이 말했던 Pre-history가 아니라 Post-history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묵시 이후 (Post-Apocalyptic)한 땅이 되고, 19세기 유럽에 관한 헤겔의 진단과 선언은 묵시록에 속하게 된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 웹진 <제3시대>



    (참고도서) 


    제퍼슨과 무스의 일화를 중심으로 18세기 유럽의 자연사 연구와 미국담론의 연구물로 Lee Alan Dugatkin의 [Mr. Jefferson and the Giant Moose: Natural History in Early Ameirca]란 책이 있다. 책의 표지그림이 흥미로워 글 앞부분에 삽입했다. 제퍼슨과 부폰에 관한 일화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는 1900년도에 출간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제퍼슨의 입장을 편집해 알파벳 순서대로 모아놓은 책인데, ‘기후’(Climate)와 연관된 글들을 참고했다. 18세기 이후 신대륙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을 다룬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은 1955년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된 Antonello Gerbi의 [The Dispute of the New World: The History of a Polemic, 1750-1900]이다. 라스카사스가 신대륙 원주민들의 고난을 기록한 책은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이다. 스페인의 남미정복 역사를 유럽과 타자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 한 대표적인 저술은 Tzvetan Todorov의 [The Conquest of America]란 책이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영어판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Sibree 번역의 [The Philosophy of History]. 헤겔과 미국의 관계를 내게 처음 소개해 준 글은 20세치 초 스페인의 철학자 Jose Ortega y Gasset이 쓴 “Hegel and America”란 글이었다. 그 후 비슷한 연구는 남미에서 해방철학을 추구해온 Enrique Dussel과 같은 이들이 제삼세계의 입장에서 진행해 왔다.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각주:1]

: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51호 웹진에 이어>

IV

형. 이 대목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수없이 나누었던 변증법 관련 대화들은 결국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 어떻게 종합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을 철폐하면서 논리적 일치성을 향해 치달았고, 결국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원론(ex,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헤겔식 변증법의 정의라 한다면 너무 조야한가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최초의 반항아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높은 단계에서 종합되는 헤겔의 ‘전체성의 변증법’에 맞서 본인 특유의 ‘실존의 변증법’을 고안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다’라는 논증보다는, ‘그 진리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고, 그 진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옳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냐며, 헤겔을 물고 늘어진 것이죠.
예를 들어, 성육신,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헤겔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너무나 서둘러 봉합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는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와는 달리, 신과 인간사이의 간격(대립)이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차이를 고스란히 느끼고 고민하는 가운데, 그 역설과 간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키에르 케고르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실존에서 절대적으로 역설과 간극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진리란 헤겔식의 거대하고 종합화된 ‘내용(What)’보다는 구체적 실존의 ‘어떻게(How)’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한차례 의심의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막 일시 시작한 서구 근대의 진보적 사관과 낙관적 사고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를 풍미하였습니다. 그리고 헤겔식의 종합과 체계와 전체의 변증법은 이런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니체와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그 질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아마도 헤겔 변증법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던 사람은 아도르노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탄생을 알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기념비적인 작품인 <계몽의 변증법>과 더불어 <부정의 변증법>을 세상에 내놓으며 헤겔 변증법의 균열을 직시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매달렸고, 최종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쌓아올린 동일성의 논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본인의 주장을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들을 통해 밝혔고, 그 강의들이 모아져 나온 책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1966)입니다.

 

V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반-합’의 도식을 따라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해결로 나가는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모든 방법들에 대한 저항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각주:2] 특별히, 아도르노는 인식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일성의 법칙이 실질적인 삶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 교환시스템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합니다. 동일성의 원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인간의 주체성을 물화된 형식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입니다. 이곳 시카고에는 매일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섭니다. 어쩌다 새벽기도 가다 길을 잘 못 들어 그 곳을 지나치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공원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할 줄 아는 사람 4명!” 하면서 차량 한대가 그들 앞에 멈춰서면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손을 급하게 흔들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마이클이 가도 되고, 호세가 가도 됩니다. 물론 나 이상철이 가도 되고, 김진호 목사도 가능합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멘트를 할 줄 아는 건장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이때 호세, 마이클, 이상철, 김진호는 서로 교환 가능합니다. 아니, 이 네 명만이 아니라, 시멘트를 할 줄 아는 신체 건강한 남자 모두는 이 교환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별존재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100%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이성이 이룩한 동일성 원칙의 결정판입니다. 이 법칙하에서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교환가치로 매개된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이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부르주아 사회장치는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질적인 차이와 다름을 물화된 공동성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점입니다.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억압당한 단독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들, 셈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것들은 역사에서 고아와 과부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고, 이교도들이었고, 흑인이었고, 유대인이었고, 제3세계 민중이었고, 불법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었고, 그리고 동성애자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해방을 위한 전략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던 셈이죠.
흔히, 서구사상(신학 포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전후 대륙 철학을 휩쓸고 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철학, 해체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정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해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아도르노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전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이 지닌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해체를 말하고, 부정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위기담론’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할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과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적 윤리’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VI

프랑스 철학자들이 해체를 말하고,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을 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대 사회가 ‘위기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신념과 신기루로부터 출항한 근대! 그곳의 사람들은, ‘비록 지금 우리에게 약간의 혼돈과 동요가 있지만, 저 지평선 너머에는 어김없이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환상에 휩싸였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를 향했던 동경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위기사회가 도래한 셈이죠. 2차 대전 후 확립된 미.소의 냉전체제와 그 구도 밑에서 전개되는 핵무기 경쟁도 이러한 위기담론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적 위기의식이라면,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버젼의 위기의식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을 휩쓴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위기를 선사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역설을 봉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세상의 변혁과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고 믿고 의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부터 떠나가게 했습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고 그 광장의 부활이 요원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된 온갖 종류의 위기담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민중신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 위기본능이라고 합니다. 위기를 예감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고 물리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위기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 위기의 요체는 우리 삶의 구조와 방식이 인간의 통제와 예측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자본의 자기장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교환가치로 전락되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인간가치가 셈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둡고 몽매했던 중세의 어둠을 비추던 한 줄기 이성의 빛,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은 주인의 손을 벗어난 통제가 안 되는 광선검이 되어 세상을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한번 가열된 원자로가 식을 때까지는 외부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기술의 발달한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불투명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 위기담론의 요체인 셈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담론들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왔고 지탱해왔던 중심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 내지는 징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위기는 요체는 ‘우리가 의지했던 중심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그것이 아닌가 봐!’라는 황망함과도 연관됩니다. 즉 지젝식 실재(the Real)를 봐버린 후에 주체가 느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말입니다. 밤새 달게 마셨던 바가지에 담겨 있던 그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져 있었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효에게 다가온 그 실재(the Real)! 물론, 원효는 그 다음 단계에서 깨달음이 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리면서 다가오는, 그 동안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악스럽고 흉측한 실재 앞에서 위기를 느낍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중심의 부재와 상실, 그리고 믿었던 실재에 대한 배신, 실망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민중신학의 위기’를 발설케 한 것이죠.

 

VII

하지만, 본디 중심이란, 데리다의 말처럼, 무엇인가 꽉 차 있어 중심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不定으로, 반드시 도래할 그 무엇에 대한 대망으로 존재하는 중심이 아닐런지요. 그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성서는 ‘선악과 이후 아담’, ‘바벨의 언어’, ‘금송아지 상’ 등으로 치환하면서 맹렬히 비난합니다. 성서는 또한 신의 자기비움(필리오케)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 사라져 버린 중심의 형태와 격이 어떠해야 할런지를 성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민중신학이 이런 성서의 메시지에 너무나도 충실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중심의 부재와 해체를 선언하면서 등장한 진정한 위기의 신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본성상 주변에 위기를 선사할 수 밖에 없는 싸이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민중신학을 여전히 현재진행적인 위태로운 사건의 문법으로, 혹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위험한 증환의 방식으로, 아니면 도래할 미래를 불러내는 유령의 언어로 남아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죠.
형.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좋습니다. 물론, 민중신학의 위기론을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선전을 통해 얻어지는 반사이익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민중신학의 위기론 유포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조급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을 향한 지적질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내용을 좀 더 촘촘히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안팎에서의 걱정과 비난은 민중신학의 체질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을 확인케 하는 거울이고, 그 결핍을 메울 환상을 제공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生으로 날것으로 다가와 살 냄새가 나고 피 냄새가 나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였던 것처럼, ‘광주사태’라는 말을 곱씹으며 미완으로 끝난 우리의 혁명을 상상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 역시, 적어도 제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예감케 하는 용어입니다.
맞습니다. 민중신학은 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이 안전한 토대 위에서 그 위용이 전파되는 순간 이미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민중신학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선언을 물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호는 결단코 민중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은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해체적으로 대하면서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선언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중신학이 위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리라 봅니다.      

형. 아도르노가 “진정한 깊이는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결국, 모든 저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라는 의미로 저는 그 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멈추는 날,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걷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의 저항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일테구요. 그럴 것입니다. Peace.  <다음 호에 계속>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New York: Seabury Press, 1973), 6.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박재형
    2013.05.10 14:4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형의 글을 읽고, 많은 영감을 얻고 공감을 갖습니다. 어서 빨리 형과 함꼐 배울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결핍과 부정이 민중신학의 동력이고 가능성이라는 말... 깊게 되새겨봅니다.^^ 주님의 평화!!!

타자 II : 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김형경의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서른이었던 나는 당시 스물 넷이었던 김희선을 만났다. 신춘문예 등단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허풍을 떠는 나, 그리고 은희경과 김형경을 자기와 함께 이야기하는 나를 바라보며 김희선은 내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래서 지금도 죽기 전에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춘문예 등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빚진 마음으로 있다.

나와 내 아내 김희선을 연결시켜줬던 <새의 선물>(문학동네,1995)은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이 책으로 은희경은 문화동네에서 수여하는 무슨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으로 진출하였고, 15년이 지난 지금 은희경은 한국문학의 얼굴이 되었다. 그 무렵 한국 문학계는90년대 이전 분단문학, 이념지향적 사회풍자적 작품으로 넘쳐나던 황금기(?)를 지나 사회주의 붕괴와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며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때였다. 몇몇 전시대의 풍조와는 다른 도발적이고 그 당시로서는 실험적이고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했고 은희경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이다. 60년대 말 12살 소녀 진희와 진희와 함께 살아가는 외갓집 식구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일상을 12살 소녀의 시선으로, 하지만 전혀 12살 같지 않은 조숙함과 영악함으로 바라본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진실, 사랑, 거짓, 풍자를 섬세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미장센한다. 갑자기 헤겔을 이야기하려는 지금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12살 소녀 진희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헤겔철학의 체계가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12살 소녀가 사람들(타자)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듯, 헤겔의 그것 역시 근대가 선사하는 온갖 타자적인 것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예감에서이다.        

    이 글의 주된 포인트는 <정신현상학> 4장에서 헤겔이 언급하는 자기의식,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보존하는 주체에 대한 주목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의 헤겔해석에 기대어 근대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추적해 갈 것이다. 글의 후반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헤겔철학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할 생각이고, 글의 시작은 칸트와 다른 헤겔철학의 독특성을 열거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헤겔을 위한 예비적 지식

 

지난 웹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이전까지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장은 유한과 무한, 주체와 대상, 존재와 사유가 빛과 계시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안정적인 구도를 띄었고, 이러한 사회속에 사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이고 명료한 세계관을 지녔다. 근대란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사유를 이어주던 끈이 분리되는 전환점이었다. 영국 경험론(Empiricism)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경험 너머의 것에 대한 의심은 칸트에 이르러 물자체(Ding-an-sich, 物自體)에 대한 판단불가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빛의 차단, 계시의 실종, 교회의 추락, 세속화, 주체의 등장으로 명명되는 근대성의 도미노를 낳았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헤겔은 근대가 이룩한 성과는 계승하고 좌절은 봉합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근대가 이룩한 성과라 함은 세계가 신적 계시에 의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우발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인간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선언했다는 점이고, 근대의 좌절이란 무한과 유한을 이어주던 빛의 몰락으로 인한 전체성의 상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이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 어둠의 영역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 즉 타자로 남겨둔 채 판단중지를 선언했다면, 헤겔은 칸트가 남겨놓은 타자를 다시 정신 속으로 흡수하려했다. 근대철학이 떼어놓은 무한과 유한의 재결합을 다루는 책이 바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적절한 비유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칸트철학을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미분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으로 이어지는 칸트의 비판철학은 인간정신의 역할, 능력, 한계 등에 대한 조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칸트가 미분해놓은 성과들을 적분하여 다시 하나로 엮어나간다. 그리하여, 헤겔은 인간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라 할 수 있는 감각적 확신에서 오성, 자기의식, 불행한 의식, 이성, 도덕과 양심, 종교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정신이 절대지에 이르는지, 즉 소박한 의식수준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성숙한 의식에 이르는지를 설명해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을 처음 접했던 시절, 헤겔에 대한 주석서 중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Alexandre Kojeve)가 쓴 Hegel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한벗출판사,1981)과 이폴리트(Jean Hyppolite)헤겔의 정신현상학 I,II(이종철 역,문예출판사,1986)이다. 후자가 비교적 원전에 충실했던 해설서였다면, 꼬제브의 책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특한 헤겔 주석서로 평가 받는다. 이러한 꼬제브의 헤겔 해석은 후에 등장하는 프랑스철학자들의 헤겔 이해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고, 특별히 라깡의 욕망이론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각주:1]

꼬제브는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되는 타자성이 근대성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각주:2]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였다고 밝힌다. 가령, 여기에 나는 나!’라고 외치는 두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둘은 상호인정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이 끝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면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된다. 승자인 주인은 노예를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인의 목적은 단순히 타자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에 있지 않다. 타자인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의해 본인이 정복되었음을 인정케하는 것이다. 결국, 헤겔은 타자가 주체앞에서 거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체는 자신을 자각 할 수 없으며, 주체로 인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자 자신을 고립 속에서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나는 타자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그가 나를 인정하고 주인으로 바라보며 내 말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 주체란 타자와 분열된 주체이고 타자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한 주체인 셈이다. 이렇듯 헤겔식 근대적 자기의식이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 타자와의 투쟁,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각주:3]

 

 

 

헤겔의 유산

 

1. _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이기적 욕망과 열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발전의 원리에 따르면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은 신의 섭리에 힘입어 신의 자기현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를 통해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신개념을 수정한다. 칸트는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추방시켰으나, 헤겔에게 있어 신은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저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속에서 속물 같은 우리의 욕망과 삶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재적인 신이다. 영원불변한 고정되어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사(세계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동태적인 신으로 (헤겔에 의해) 신은 거듭난다.

 

2. 욕망/윤리_ 칸트의 윤리에 있어 욕망은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욕망은 실천이성(윤리)으로 환원할 수 없었던 이성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욕망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헤겔은 이기적 욕망을 오히려 삶을 구동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보기에 욕망과 개인의 쾌락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후에 보편적 자아의식, 즉 이성으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였고, 욕망은 이러한 헤겔철학의 밑그림 속에서 일정구간 헤겔의 법칙을 실현시키기 위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관점은 후에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담론윤리학, 즉 욕망과 개인의 이해관심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와 대화적 이성(원할한 의사소통)에 입각해 합의를 추구하는 윤리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드러난 욕망의 주체는 개별적 자아의식을 극복하고 보편적 자아의식으로 성장하여 공존의 윤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이성의 모든 타자적인 것을 변증법적으로 사변의 총체성 안에서 통합시키려했던 헤겔철학의 믿음 위에 서있다.

 

3. 理性_ 우리는 헤겔에게서 근대적 이성의 이중성과 대면한다.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논리가 첫 번째 근대성의 원리라면, 이성의 남용(무한신뢰)으로부터 야기된 근대성의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근대성의 두 번째 원칙이다. 근대성의 문제를 지목하는 학자들의 대안 역시 헤겔철학의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한다.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이성옹호론자들은 후자에 기대어 근대성이 야기시킨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했던 이성에 의한 이성의 자기 극복은 결국 그들이 문제 삼았던 이성을 또다시 긍정해야만 하는 수행적 모순을 되풀이한다는 비난을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받는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사상가들은 근대적 인식론 자체에 대한 전면적 회의와 해체의 틀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주체의 동일성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헤겔식 사유를 거부하고, 주체의 동일성밖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타자에 주목하는 것이 탈근대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타자_ 헤겔의 타자론은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인 주체가 자족적인 코기토를 상정하고, 칸트의 그것이 선험적 주체를 내세우며 타자와 무관한 주체를 말했다면, 헤겔에게 있어 주체란 타자와 상관없는 내적사유 속에서 직관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주체성이 획득되는 존재이다. 헤겔은 이렇듯 이기적 욕망뿐 아니라 모든 타자적인 것들을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으로 포섭한다. 소설 <새의 선물>에서 12살 소녀 진희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모든 타자적인 것을 섭취하면서 성인으로 되어가듯, 헤겔 역시 모든 이성의 타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절대정신을 향해 성장해 간다. 그렇다고 볼 때, 헤겔철학은 정신의 거대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안에 감추어진 헤겔철학의 함의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헤겔의 타자론은 후에 라깡에게 영향을 끼쳐 라깡의 거울단계’, 그리고 욕망이론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로 다시 인용된다. 

 

<다음 웹진부터는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적 타자론이 이어집니다>

 

 

 ⓒ 웹진 <제3시대>


  1. 꼬제브의 헤겔해석이 라깡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31-34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헤겔은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下에서 다름과 같이 규명한다: “주인은 물론 대자적 의식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결코 자기에 대한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의식은 하나의 또다른 의식, 다시 말하면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나 물성 일반과 종합, 연계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삼는 그러한 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매개된 자기확인자로서의 대자적 의식인 것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서울: 분도출판사,1981), 264 [본문으로]
  3. Alexandre Kojeve, Hegel ,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서울: 한벗출판사,1981), 27-28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04)
특집 (8)
시평 (92)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31)
사진에세이 (38)
비평의 눈 (65)
페미&퀴어 (22)
시선의 힘 (131)
소식 (152)
영화 읽기 (30)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28,025
Today : 66 Yesterday :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