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눈물의 가벼움
2009년1월 15일에 개봉한 이충렬 감독의 저예산 독립영화 <워낭 소리>가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수 60만을 돌파했다. <워낭 소리>의 예기치 못한 흥행을 두고, 어느 진보적 인터넷신문에서는 한국 사회의 두 가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나라에서도 <원스>나 <워낭 소리>같은 작품성 있는 저예산 독립 영화라면 언제든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우리가 그간 잊고 지낸 목가적인 전원의 삶, 즉 오염되지 않은 고향산천과 문명의 이기를 거스르며 사시는 아버지와 사람보다 더 의리 있는 소를 기억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이 한국인들에게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 바로 그런 사실들을 영화가 확인시켜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시사IN, 2009년 02월 10일).
특별히 두 번째의 이유가 몹시 흥미롭다. 이 영화 한 편의 갑작스러운 흥행 현상을 통해, 한국 대중들에게서 모종의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권에 대한 전통적인 문법에 따르자면 인권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였는데, 이 영화는 주인공 할아버지를 통해 소와 같은 동물을 인간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는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로티가 말한 바, 인권이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인권, 이성, 감성, 현대사상과 인권, 사람생각, 2000).
40년이 넘게 자기 곁에 남아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자기가 곁에 남아 있어주어야 할 단 한 마리와 함께 걸어온 80년 촌로의 인생 위로 눈부신 황혼이 덮쳐오는 라스트신,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음은 자명하다.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 눈물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동물로 상징되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환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종(種)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존재 대 존재의 우정 혹은 교감 같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 혹은 향수가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위에서 인용한 로티적인 의미의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정의 징후로 해석해보려 한다.
<워낭 소리>와 같은 좋은 영화가 여전히 제작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영화가 흥행하게 된 것, 그래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동을 받은 것,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다 만족스럽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갑자기 슬퍼진다. 한국 사회의 대중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할 만큼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 라는 인터넷신문의 분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갑자기 슬픔이 밀려온다. 더욱이 평소 TV 모니터로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았던 대통령께서도 나처럼 이 영화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라고 전해주는 기사를 읽을 때 그 슬픔은 배가된다.
소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를 통해 소의 아픔을 듣는 노인의 감성에 깊이 매료되거나, 두 존재 간의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하는 이들이 60만 명이 넘었고, 더구나 그 60만 가운데 대통령을 포함한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상당수라고 하는데,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나아가 시민사회는 한 줌의 동정 섞인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가? 나는 그들이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이 나의 눈물과 같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지금 절망한다. 우리가 정말 같은 종(種)의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드러내는 도덕의 감성이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로티의 말을 인용하자면,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청소를 자행한 세르비아인들의 만행은 그들이 보스니아인을 동물처럼 즉 도덕의식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무방한 곧 '인간 범주' 밖의 존재로 여겼던 집단적인 편견, 그러한 왜곡된 감성(sentimentality)의 산물이지, 저들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합리적 판단에 따른 인권 유보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산 철거민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 집단적으로 공모한 국가권력과 시장질서와 시민사회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우리'라는 자기 귀속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범위 밖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용산 철거민들은 한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적 질서와 시장적 질서, 그리고 시민사회적 질서 그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말하자면 삼중으로 배제된 비국민/비시민/비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먼저 국가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생떼나 쓰는' 사람들이 되다 못해 결국 망루에까지 올랐고, 공안(公安)적 논리에 따라 대(對) 테러 진압작전에 의해 주검이 되었다가, 죽어서도 검찰 발표대로 폭력과 방화를 일삼은 범죄자가 된다. 동시에 시장적 질서로부터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40층 이상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4구역, 이전에 비해 땅값이 10배 이상 오른 덕분에 돈이 없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부자들에게 그대로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게다가 작게는 용산 구민, 크게는 서울 시민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서울시 재개발 프로젝트에 사적인 동기로 이의를 제기하여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을 초래했고, 나아가 주변 이웃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폭력 시위도 서슴지 않았으니, 인권이니 생존권이니 하는 차원의 알량한 인정(人情) 따위를 시민사회로부터 기대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자. 87년 6월 두 명의 대학생이 고문과 최루탄에 의해 차례로 사망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죽음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을 때,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마찬가지로 2002년 6월 두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군 장갑차 운전병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시민사회는 민족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지난 2008년 촛불항쟁 때는 급기야 참여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기초한 아주 구체적인 인권 즉 건강권, 생명권, 행복추구권 등의 이름으로 거대하게 궐기하였다. 그렇게 한국시민사회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인권에 대한 존중을 정치적 권리의 쟁취로 연결시키면서, 한국의 시민운동은 성장하고 발전해 왔는데, 왜 가장 인권이 존중되어야 할 상황 앞에서 시민사회는 침묵하고 있을까?
영화의 '워낭 소리', 현실의 '워낭 소리'
억지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작동하던 인권적 감수성이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중들에게 용산의 이웃들은 인간 밖의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와 희생자들의 위치가 뒤바뀌어, 소는 대중들에게 동물이 아닌 인권적 존중과 친밀한 소통의 대상이 되고, 희생자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되어 전혀 인권의 보호나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바, 영화 관람의 윤리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체득한 감각을 일상의 윤리적 행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단지 영화적 현실, 디제시스적 공간(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 내로 한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고, 극장 밖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통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흥행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 한국 대중들의 인권적 감수성의 진정성도 입증될 수 있다. 만일 <워낭 소리> 관람에서 보여준 인권적 감수성의 뜨거운 눈물이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대중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차마 조우하지 못하였던 소와 인간의 평등한 우정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삶 속의 느낌이나 사건을 때늦게 후회하며 그리워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은 자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여기 도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와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실재적인 공간은 언제나 영화 관람의 자리에서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향수와 열망의 조건은 언제나 그 실재적인 것이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와 신성을 독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의 신앙은 예수가 지상에 절대 강림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예수가 세상에 다시 내려온다면 대심문관은 현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이다. 실재적인 것의 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관에서 실재적인 것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넘어 소와 같은 타자에게까지 개방된 인권적 감수성의 발휘가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에서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혹은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에, 대중들은 다만 영화 <워낭 소리> 안에서 그 감수성의 풍경을 거리 둔 채 자유로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를 향해 인간이 자기의 도덕과 감수성을 뛰어넘은 신뢰와 환대를 보내고, 소와 인간이 종(種)의 차이를 넘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이 현실로 귀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타자에 대한 인권적 감수성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그 반가움의 최종점에 물론 뜨거운 박수와 눈물이 있다. 영화에 보내는 박수와 눈물은 영화에서 본 실재적인 것을 다시 영화 안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는 다시 그러한 실재적인 것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을 때 물론 영화관으로 다시 가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 영화는 40년을 함께 살아온 늙은 농부와 소의 관계를 통해 땅과 노동, 나이 듦과 죽음 그리고 특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교감의 실재성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에 따르면, '워낭'이란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 또는 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에서 워낭 소리는 소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주인 할아버지를 소통시키거나 교감하게 하는 '매개음'이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메타포'로 일종의 '맥박'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워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소와 노인을 교감시키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그들의 관계가 다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고통 공감의 구조, 혹은 사회적 연대의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는 현실의 워낭 소리를 외면하며, 그 워낭 소리에 응답하는 인권적 감수성의 이상적 풍경을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이 아닌 영화 속 판타지의 공간에서 관람하며, '실재'가 아닌 '실재의 효과'를 체험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실재 효과'를 즐기며, 오늘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국가/시장/사회로부터의 고립이나 배제에 대한 불안을 종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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