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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마흔살(문재승)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2. 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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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살



문재승

(가족신문 <월간 제주살이> 편집장)


몇해 전부터 간에 품게된 혹을 제외한다면, 혹할 것이 없는 삶이었다. 


마흔살 즈음의 인생은 마치 잘 설정된 자율주행 기능을 지닌 자동차 같았다. 익숙해진 일은 치열함없이 그럭저럭 흘러갔고, 자가발전을 시작한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자라고 있었다. 나는 분명 핸들을 잡고 있는데, 마음대로 꺾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죽했으면 스마트폰에 축구게임을 내려받았다. 스무살 무렵 친구들의 몸과 마음을 혹하게 한 스타크래프트 열풍에도 꿈쩍않던 과거는 잊은지 오래였다. 뭐 하나라도 내맘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초보자 모드는 맥이 빠졌고 슈퍼스타 모드에는 혼이 털렸다. 그 중간 모드는 뭐 하나 이뤄낸거 없이 어중간하게 인생의 전환점을 도는 것 같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답답함에, 어느날 밤 자리에 누워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아빠랑 말섞기를 피하던 녀석들도, 억지로 잠을 청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면 온 마음을 다해 아빠와의 소통을 열망한다는 점을 간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밤이었다. 


"얘들아, 아빠 고민이 있어. 아빠 요새 너무 힘든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왜 아빠, 누가 괴롭혀? 그럴땐 117에 신고해!” 큰아들이 특히 신났다. 

“야, 그건 늬들처럼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누군가를 때리고 못살게 구는 상황을 보면 전화하라고 만든 번호야...” 

“아빠, 키즈폰은 번호 못눌러.. 번호도 눌러지고 게임도 되는 걸로 하나 사주든가” 


그러고보니 아빠의 마흔살 즈음은 아들의 열살 즈음이었다. 

그렇게 밤마다 엄마의 눈을 피해 아이들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인생의 넋두리를, 아이들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각자 하루를 정리한다는 구실을 들어 즐거웠던 일과 슬펐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며 깨어있는 시간을 연장하곤 했다. 

그런데, 마흔살의 공허함은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되었다. “지구를 지키는게 미니 특공대만이 아니라 코보도 있다”는 둘째의 말에 아빠는 가장의 은근한 부담을 얼마간 덜 수 있었다. “하나님은 믿지만, 매일은 안믿는다”는 큰아이의 무심한 신앙고백은, 스무살 시절 미련하게 고집했던 것들을 은근슬쩍 놓아버린 마흔살의 나를 발견했을때 밀려오는 허무함의 근원이 무언지 알려주었다. 혹할 것이 없다던 마흔, 그렇게 아이들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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