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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고인(故人)을 추억하는 두가지 방식과 한가지 옳은 방식 (박찬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09. 9. 1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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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故人)을 추억하는 두가지 방식과 한가지 옳은 방식

박찬선
(본 연구소 회원)

죽은 자를 추모하는 방식이 따로 있을까. 슬프면 슬픈 대로,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담담하면 담담한 대로.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 서울광장은 사람들의 발길로 빼곡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뒤 이곳에 도착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발걸음도 기다리는 발걸음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마음은 달라도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같았다. 초조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을 실은(어쩌면 태운) 운구차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영웅은 죽은 채로 도착하였다.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탄식했을 것이다. 미망인이 대신 인사를 건넸고 잠시 후 운구행렬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관객처럼 사람들은 지하철로 향했다.

사회자는 벌써부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잔뜩 고조된 목소리로 군중들은 촉구했고, 군중을 대신하여 고인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모인 사람들의 애도 감정을 극대화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은 사람인양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고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추억해보고자 마음을 모으고 있으면, 여지없이 더 크고 열광적인 감정으로 곧 도착할 영웅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나에게 고인은 고(故)인이었으나 그에겐 고인은 생(生)인이었다. 사회자의 감정몰이에, 그 자리에서 고인의 삶을 대면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고인은 특정인의 고인이 된 채 고도감정속에 함몰되어 버렸다.

지난 8월 30일. 한백교회 예배 중 삶의 고백 시간에 안 선생님은 또 다른 죽은 자를 추억하고 있었다. 공무상 만난 39살의 윤성환 씨인데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한강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안 선생님은 타인의(?) 죽음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고인을 추억했다. 그를 위해 “낯선 이방을 떠도는 가엾은 나그네의 노래”라는 흑인 영가를 불러 바쳤다. 안 선생님이 어떻게 담담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지, 사람들 앞이기에 감정을 절제하였는지, 아니면 그 슬픔이 시간이 흘러 승화되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다.

만일 그가 눈물을 쏟으며 고인을 추억했더라면 어땠을까. 감정을 드러내며 한껏 슬퍼했다면. 이것 또한 고인을 향한 그의 마음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럼에도 만일 그랬다면 글쎄...고인은 적어도 그의 고인으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에게도 고인의 죽음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을 보니 고인은 그에게서 매몰되지 않았나보다.

고인을 사람들 앞에서 추억할 때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다라는 방법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특정한 방식이 어디 있으랴. 슬프면 슬픈 대로, 담담하면 담담한 대로, 그렇게 마음가는 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결론을 내려야겠다. 사회자는 마음가는 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게 부여된 역할이 그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안 선생님은 담담한 마음 그대로 담담하게 고인을 추억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자연스러움 속에 고인의 죽음에 우리 모두 연결될 수 있었다. 영웅의 추모식 사회는 맡지 않고 볼 일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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