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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사실이 거짓으로 둔갑하는 세상 (Post-Truth Era)에서 설교를 한다는 의미는?(김혜란)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9. 5. 1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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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거짓으로 둔갑하는 세상(Post-Truth Era)에서 설교를 한다는 의미는?

 


김혜란

(토론토 임마누엘 대학 설교학 부교수 2019년 7월 부임)



전 세계에 극우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 몇 년동안 필리핀, 폴란드,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 아시아, 유럽, 북미, 중동에서 치러진 선거들을 보면 국수주의, 이민반대주의, 백인우월주의, 종족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극우파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 극우 포퓰리스트 (populist) 난동의 여파 속에서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시사토론, 여론, 담론들을 보면, 거짓이 사실이 되고, 사실을 담은 언론의 보도는 가짜 (fake) 뉴스로 변모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옥스포드 사전에서 2016년 대표용어로 뽑은 언어가 바로 “post-truth era” (진실 탈피/기피의 시대) 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각주:1] 이 단어는 2016년 영국에서 벌어진 EU 탈퇴 국민투표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선거 승리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post-truth” 시대(era)를 뺀 용어자체는 2004년 랄프 케네스가 9/11테러에 대한 부시정부의 입장과 영국 블래어 수상의 대량파괴무기에 대한 수사학에 대한 진실은폐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면서 등장한 용어이다.[각주:2] 진실 탈피/ 사실기피 시대에서 벌어지는 가짜뉴스의 등장과 함께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또다른 문제는 바로 공공연한 온갖 종류의 혐오발언이다. 절대 용납되어선 안되는 발언들이 인종이건, 종교이건, 성정체성으로 억압받는 특정그룹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던져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 그 혐오의 독설에 맞아 죽기도 하고, 공적 언어라는 칼이 되어 이들을 찌르고 베고, 그래서 피를 부르고 있다.

한 예로 내가 사는 캐나다, 비교적 평화롭고 극우정권이 아닌 나름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현 상황인데도, 지난 한 해, 2018년 유대인들과 유대교 회당을 향해 발생한 폭력 범죄는 이전해보다 16.5% 가 증가했다.[각주:3] 이 범죄회수에 이슬람교인들과, 유색인종, 원주민, 그리고 성소수자,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범죄를 포함하면, 아니 캐나다를 넘어서서 전 세계를 둘러보면, 이 세상은 엄청 위험하고 무시무시하고 폭력적이다. 이른바 극우 보수 배타적 백인 남성 기독교 이성애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진실이 왜곡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세상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어떤 설교를 해야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 설교가 무엇인지 약간의 정의가 필요하다. 설교가 무엇인지는 한가지로 정의되지 않는다. 설교는 다면층을 담고 있는 크리스탈과 같다. 그러나 오늘 이 글에서 중점을 두는 설교의 정의는 바로 진리, 진실과 연관된다. 그 면에서 설교를 정의하면 설교는 바로 진리(복음)를 선포하는 행위다. 설교는 진실 (하나님의 의, 뜻, 사랑)을 드러내는 공적 사건이다. 이 정의를 기반으로 본 저자는 왜 진리가 왜곡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설교의 역할이 막중한지 주장하고 싶다. 설교가 가짜를 가짜라고 말하고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한다고 그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실이 거짓으로 돌변하는 세상에서 설교가 행할 우선적 과제는 다음과 같다. 지면 한계상 성서읽기, 성서해석, 설교를 위한 성서주석의 문제를 세가지로 압축해서 중점으로 다룬다.

첫번째, 극우화의 폭풍에 교회에서 벌어지는 설교가 어떻게 그 폭풍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지 분석해야한다. 현 정세가 극우화되고 무지화 (populist 운동의 원인이자 결과)되는 그 상황과 설교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매주 설교를 듣고, 매주 또는 설교를 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기성찰,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한 예로 정권이 바뀌는 선거시절, 기독교인들은 어떤 설교를 듣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선거 전 설교자는 어떤 설교를 하는지 (또는 안하는지) 주의깊게 살펴야한다.

사순절 기간은 여러모로 힘든 기간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기간이니 쉬울리 없다. 그런데, 더 힘든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 왜 예수님이 죽어야했는지를 자문하는 사순절 성서적 묵상이 유대교를 향한 혐오로 깃들기에 힘들다. 우리는 설교를 위해 성서주석을 하면서 신약성서, 복음서를 포함해서 서신들 속에 얼마나 유대인을 향한 편견이 팽배한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각주:4] 예수를 죽인 자들이 유대인이라는 논리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지극히 단편적이고 비정치적이고 (예수를 처형한 로마제국의 권력을 제외함으로써) 그리하여 역으로 다분히 정치적인 이런 해석이 설교에 인용되고, 성서공부에서 무작위적으로 공유되고 있지 않은지 기독교인들운 비판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할 의무가 있다.

두번째, 사실 왜곡 기피시대에 당면한 설교의 역할은 성서본문을 고르는 것과 연관된다. 교회력을 따르건 목사가 혼자 본문을 고르건 성서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필수다. 설교자가 좋아하는 본문만 계속 선택하는 것[각주:5]은 마치 아이가 편식을 하도록 한 음식만 주는 어른의 행위와 같다. 그렇다고 교회력 (lectionary)을 예외없이 매 주 매 년 따르는 것의 한계도 있다. 왜냐하면, 교회력이 모든 성서구절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편식읽기의 더 큰 문제는 반유대인주의가 팽배한 대부분 기독교에서 신약성서를 선호하고, 유대인 성서 (Hebrew Bible or Jewish Scripture), 구약으로 알려져 있는 본문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아마 10번 설교를 하면 히브리성서를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많아야 한두번일 것이다. 이런 식의 비등하지 않는 편파적 선택의 방식은 건강하지 않다. 특히 설교본문 선택권이 없는 듣는 이들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다. 이런 점들이 성서본문을 고르는 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확실한 것은 성서 본문 선택은 설교자의 사적 취미가 아니라는 점이다.[각주:6] 설교가 공적 행위라면 그 설교를 위한 성서 본문 선택도 평신도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성서읽기의 방식이다. 이른바 성서 골라읽기, 작위적 성서해석은 설교를 위험으로 몰아간다. 설교자의 일방적선택으로 주어진 성서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한 질병이라면 그 본문의 상황 (context)을 고려하지 않은 구절식 본문 주석설교는 또다른 병폐다. 청교도 영향을 받은 주석설교, 한국 교회에 팽배한 구절설교양태는 그 본문이 왜 쓰여졌는지 어떤 상황인지 다루지 않는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서는 제국의 식민지하, 구약의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 상황에서 쓰여졌다. 그런데, 대형교회에서 아니 대다수 중소교회에서 이런 상황을 깊기 다루면서,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숙고한 설교는 보기 힘들다. 더 나아가, 고대 제국의 상황과 21세기 오늘 제국의 상황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연결시키는 설교도 찾기가 어렵다. 또 다른 예로, 성서라는 세계는 가부장제 공기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그 공기가 얼마나 탁하고 위험한지 점검하지 않고 마치 그 공기가 없는 거 처럼, 아닌 아주 깨끗하고 건강한 공기인 것처럼 오늘날의 청중들은 그 설교들을 마구 마셔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서 해석 중 역사적 비평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서 안에 담긴 시대적 상황, 저자의 상황, 그리고, 역사, 정치, 문화, 사회적 상황을 아는 것은 본문에 담긴 메시지를 찾는데, 삼가해야 할 음식을 기피하고, 오염된 공기를 제거하는데 필수적이다.[각주:7]

그러나, 역사적 비평방법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성서의 역사적 비평방법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마치 본 성서비평이 보편적 과학적 방법이고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마치 성서의 메시지가 정관사 the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본 방법은 다루려는 위험이 있고, 그런 시행착오들을 겪어왔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쓴 성서라 하더라도 인간에 의해 편집되었기에, 중립적이거나 완전할 수 없다. 경전화된 성서만도 66권이고, 그 66권은 초월적 힘을 가진 한 명의 저자에 의해 일관되게 쓴 책이 아니다.[각주:8]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의 말씀과 14장의 말씀, 교회 내 여성 지도력의 문제를 다룬 본문이 상충되는 것이다. 창세기1 장과 2장의 창조이야기가 다른 것도 그 같은 이유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 성서는 실제로는 힘을 가진 자, 특권층에 의해 편집되었고, 그 과정에서, 특권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으로 해석되었던 점을 설교를 준비할 때, 설교를 들을 때 인식할 필요가 있다.[각주:9] 이것이 바로 세번째 사실이 거짓으로 돌변하는 세상에서 설교가 행할 우선적 과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를 쓴 저자의 의도와 배경을 고찰하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그 의도와 배경이 오늘 우리 설교를 듣는 청중들, 성서를 읽는 독자들,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의 상황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그 연관성을 숙고해야 한다.[각주:10]

설교 준비차원의 성서 읽기, 성서 해석/주석하기 측면에서 설교의 우선적 과제를 다루어 보았다. 그런 준비가 자성적으로 자기 비판적으로 잘 수행되면, 설교는 왜곡된 진실를 폭로하는 것이 악의 권력에 도전하는 강력한 역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일그러지고 추한 사탄의 얼굴을 폭로하는 일이 바로 설교이고, 그 “지옥과 사탄의 분노가 이 세상의 추한 권력의 가면”[각주:11] 이기에 그 가면 벗기기가 설교의 주역할이라고 보았다. 칼빈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설교이고, 그 진리는 신앙의 지식이며, 그 지식은 일종의 거울보기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거울보기는 바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상, 뜻, 가르침을 거울처럼 비추는 일이 설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각주:12] 여기서 루터와 칼빈 두 종교개혁설교자의 주장이 유사하다. 악의 권력을 드러내기 (reveal)과 하나님의 권능을 비추기 (reflect)가 설교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루터와 칼빈 훌륭한 설교자였던 신앙의 선배들을 가르침을 잘 계승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설교는 왜곡된 진실,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그치지 않는다. 설교는 종말론적이어야한다. 즉, 설교는 과거를 짚어내고 현재를 진단하지만 미래로 향한다. 설교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 도래할 그 세상, 오지 않았지만, 이미 현재의 삶속에 들어오는 그 가능성, 그 샬롬을 꿈꾸게 해야한다. 그 꿈을 살아내도록, 기쁨을 주고 (delight), 그 변화를 향한 가능성을 품도록 영감을 주고 (inspire), 매일 삶속에서 그 꿈과 가능성을 실천하도록 권면(instruct)하는 것이 거짓이 사실로 둔갑되는 세상에서 설교를 한다는 의미이다.




ⓒ 웹진 <제3시대>



  1. Alison Flood, ‘Post-truth' named word of the year by Oxford Dictionaries, The Guardian (16 November 2016). [본문으로]
  2. Ralph Keyes, The Post-Truth Era: Dishonesty and Deception in Contemporary Life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4). [본문으로]
  3. https://globalnews.ca/news/5221739/jewish-canadians-hate-crimes-yom-hashoah/ (accessed April 30, 2019) [본문으로]
  4. Ronald J. Allen and Clark M. Williamson, Preaching the Gospels Without Blaming the Jews: A Lectionary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2004). [본문으로]
  5. Justo Gonzáles, Out of Every Tribe and Nation: Christian Theology at the Ethnic Roundtable (Nashville: Abingdon, 1992), 40. [본문으로]
  6. Thomas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73. [본문으로]
  7. Temba L. J. Mafico, “Biblical Exegesis and its Shortcomings in Theological Education,” in Teaching the Bible: The Discourse and Politics of Biblical Pedagogy, Fernando Segovia and Mary Ann Tolbert, eds. (Minneapolis: Fortress, 2009), 255. [본문으로]
  8. John McClure, Other-wise Preaching. A Postmodern Ethic for Homiletics (St. Louis: Chalice, 2001), 14. [본문으로]
  9. Gale Yee, The Author/Text/Reader and Power: Suggestions for a Critical Framework for Biblical Studies, in: Reading from this Place: Social Location and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e United States, ed. F. Segovia and M. Tolbert, (Minneapolis: Fortress, 1995), 113. Italics is original. [본문으로]
  10. Elizabeth Schüssler Fiorenza, Rhetoric and Ethic: The Politics of Biblical Studies (Minneapolis: Fortress, 1999), 28. [본문으로]
  11. Charles Campbell, The Word Before the Powers: An Ethic of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2002), 117—45. [본문으로]
  12. Charles L. Campbell and Johan H. Cillers, Preaching Fools: the Gospel as a Rhetoric of Folly (Waco: Baylor University, 20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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