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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우리 시대 새로운 신학적 화두, ‘비어 있음과 약함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9. 6. 7.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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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새로운 신학적 화두, ‘비어 있음과 약함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주간)

탈종교라는 난제

‘탈종교 시대, 기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는 21세기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이전 시대보다 복잡한 지적인 지형과 혼종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탈종교로 번역 가능한 영어 단어는 ‘Post-Religion’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Post-Religion’은 접두어 ‘Post-’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다르다. ‘Post-’라는 접두어가 두 가지로 의미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After’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Ex-’의 의미다. ‘After’는 ‘후에, 나중에, 후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농구 경기의 후반전을 생각해보라. 농구 후반전은 전반전의 점수와 선수들의 경고 누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Post-’를 해석할 경우 Post Religion은 기존 종교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래서 기존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Post-Religion이 되는 것이다.     

반면 ‘Ex-’, 즉 ‘탈(脫)’이라는 접두어에서는 ‘결렬, 단절’이 강조된다. 예를 들어 Post-Modernism에서 Post를 ‘결렬, 단절’로 해석할 경우,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는 것이다. 주로 프랑스 철학을 지적 배경으로 하는 탈근대주의자들은 이성, 계몽, 주체, 진보와 같은 거대담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이와 같이 단절과 결렬로 Post를 이해하면 Post Religion은 기존 종교와의 차별, 혹은 더 나아가 기존 종교의 해체까지를 의미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Post에 끌리는가? 연속인가, 아니면 단절인가. Post Religion의 Post가 연속이든 단절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해석할 때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국 ‘탈종교’는 기존 종교에 대한 비판적 계승, 혹은 기존 종교와의 혁명적 결렬을 동시에 지니는 짝패라 할 수 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나의 과제는 이러한 탈종교 시대 속에서 앞으로 기독교가 나가야 할 방향을 숙고하는 것이다. Post Religion에서 ‘Post-’를 둘러싼 해석의 갈등 못지않게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은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한 물음이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입각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서구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남긴 유산, 전통, 교리 등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기독교의 과거가,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가 보이는 시대착오적 행태가 과연 기독교적인지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고 하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자리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관계로 과연 그것들이 시대를 읽어내는 지혜와 공감의 도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냉소의 목소리가 드세다. 우리 시대 등장하는 윤리적 문제를 성서의 구절과 교회의 전통에서 찾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인공지능,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인간복제, 인터넷 가상공간, 신자유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난민 문제 등 21세기에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근거한 답을 구하려는 근본주의적 접근이 불러일으키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시대를 선도하고 사회 문제에 전향적 견해를 피력하는 집단이 아닌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는 수구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언가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탈종교 시대, 기독교의 역할’을 물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신학자인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의 테드 제닝스(Jennings) 교수는 탈종교 시대를 맞아 기독교의 미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신학적 발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혹은 “종교 없는 종교” 

작년(2018년)에 한국에서 번역된 『무법적 정의』에서 제닝스 교수는 앞으로의 기독교는 “세속적인 그리고 심지어 비종교적인 지식인들과의 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기독교 담론이 아니라, ‘교회적인 해석을 하는 종교의, 심지어 학자들의 게토(ghetto) 바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제닝스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탈종교 시대의 기독교’는 제도 기독교를 벗어나는 기독교, 기독교 밖으로 나아가는 기독교, 혹은 기독교 밖에서 침투하는 이질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제닝스 교수는 신앙을 영적인 영역에만 제한시키거나 피안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전통 교리에 입각한 믿음의 형태를 배척하였다. 바른 신앙은 마술과 다르게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탈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바른 신앙인은 이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지고 게토화된 특별하고 경건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개인의 탈속을 추구하지도, 혹은 본인의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지도 않는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나는 제닝스 교수의 견해를 접하면서 그가 자주 언급하는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와 데리다를 신학화했던 카푸토(John D. Caputo)의 아포리즘이 떠올랐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과 “종교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ligion)”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주의(messianism)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주의를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는 점에서 특이하다. 데리다는 메시아주의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으며 수많은 전쟁과 죽음을 가능케 했던 동인이었음을 자각한다.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제안하였고, 그곳은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신학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존 카푸토는 『종교에 대하여(On Religion)』에서 지금 시대의 종교 상황을 “종교 없는 종교”라 표현하였다. 신은 인간의 믿음, 행위, 고백, 이성적 판단 안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가능성들과 대립하는 불가능한 형식으로 도래한다. 신으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이란 신의 현재화를 드러내는 표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화될 수 없는 잉여를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무엇이다. 그 결과 신은 현재화할 수 없는 절대 미래, 절대 타자의 자리로 내몰린다. 그것이 카푸토로 하여금 “Religion without Religion”을 발설하게 하였다.

인간에 의해 구성되고 제도화된 종교는 해체의 대상이다(without Religion). 진정한 종교는 인간에 의해 구조화된 종교–그것은 역사 속에서 온갖 폭력과 혐오의 원인과 동기가 되었던 기성 종교를 말하는데-로부터 혁명적 결렬을 감행하고, 신에게서 오는 초월의 가능성과 계시의 신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종교를 해체하는 가운데, 새로운 실천적 차원의 진리를 종교가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 카푸토가 “종교 없는 종교”를 말하며 내세웠던 바이다.

틈과 균열을 가진 신과의 조우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문득 지젝이 적어놓은 무신론자들의 믿음에 대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의 운명을 지켜보고 행복한 결과를 보장해 주는 전능한 권위란 없다. 무신론자들은 현실도피에서 즐거움을 얻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창조적으로 제자리를 찾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는 가르침을 전개하려 애쓴다.” 지젝이 말하는 운명과 결과를 보장하는 전능한 권위에 대한 폐기는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without messianism이고, 카푸토에 적용하면 without Religion이며, 제닝스에 와서는 Post Christian Theology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탈종교 시대,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 체험은 기존의 교리와 도그마에 근거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텅 비어 있고, 틈과 균열을 포함하고 있는 신을 만날 때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왜 나를 버리냐’고 울부짖었던 신 아닌가. 그런데 전지전능했던 신의 아우라가 깨어지는 그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신은 다시 그 균열을 통해 우리에게 다른 메시지를 보낸다.

이러한 신의 침묵과 자기 제한은 전통적 신에 대한 폐기임과 동시에 신의 약함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전지전능했던 신이 틈과 균열을 지닌 신으로 존재한다는 발언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논리를 무력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신은 기존의 충만과 번영과 강함의 방식이 아닌, 비어 있음과 해체와 약함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탈종교 시대, 기독교의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이 가져야 하는 신학적 화두가 아닐까.    

* 이 글은 불교 정론지 <월간 불광> vol.535(2019년 5월),  42~45쪽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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