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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누구라도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황용연)

시평

by 제3시대 2019. 10. 1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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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황용연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1.

지난 10월 첫 주일은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성찬이란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this church or any church"

북가주에 살았을 때 거기서 나가던 교회에서는 매주 성찬식을 했었습니다. 목사님 여러분이 성찬 집례를 돌아가며 하셨는데요. 흑인 여성 목사님이 집례를 하실 때 꼭 안내를 해 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위의 목소리를 참조해서 최대한 기억을 살펴 보면 이런 말이었습니다.

"You do not need to belong to this church or any church."

어쩌다가 전체 문장은 기억 못 하고 마지막 부분만 기억에 남았는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 마지막 부분에 깔려 있었던 환대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 교회 교인이 아니어도, 아니 아예 교인 자체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환대의 느낌. 성찬이란 게 근본적으로 밥상이라면, 밥상은 당연히 그런 환대의 자리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 굳이 영어로 쓴 것이기도 합니다.

2. 

지금 나가고 있는 교회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예배 찬양을 선곡하면서 골랐던 곡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은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따뜻한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2](백창우 작사/작곡)

 

1절 가사만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노래가 한 사발 술이면 좋겠네

고달픈 이들의 가슴을 축이는 한 사발 술이면 좋겠네

우리의 노래가 한 그룻 밥이면 좋겠네

지친 이들의 힘을 돋우는 한 그릇 밥이면 좋겠네

어릴 적 잠결에 듣던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처럼

이름 낮은 이들의 삶 속에 오래오래 살아숨쉬는

그런 생명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네

 

성찬이라는 자리는 마침 '술'과 '밥'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 술과 밥이 "고달픈 이들의 가슴을 축이고" "지친 이들의 힘을 돋우는" 술과 밥이 되기를 바라는 노래라면, 찬송가나 복음성가는 아니라 할 지라도, 성찬주일에 딱 어울리는 노래 아닐까 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앞의 "this church or any church" 이야기와 연관짓는다면, 고달픈 이들이면 누구든지, 지친 이들이면 누구든지, 밥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자리가 성찬이어야겠다는 것.

3.

서초동의 검찰개혁 집회가 대규모로 바뀌어 벌어진 첫 주 후에, "조국수호" 구호를 빼는 조건으로 참여하고 싶은 단체들이 있었는데 집회 주최 측에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걸 봤습니다. 한 가지 눈길을 끌던 건,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단체들을 두고, "숟가락을 얹으려 든다"고들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그 단체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위화감은 어쩔 수 없더군요. 주장하는 게 "검찰개혁"이라면, 그것은 공공의 문제일 텐데. 공공의 문제라는 건 굳이 숟가락을 얹으려 든다는 표현을 쓴다면 "누구든지" 숟가락을 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텐데, "숟가락을 얹으려 든다"는 게 욕으로 쓰일 수 있다니.

그 위화감을 느끼고 나니 생각나는 다른 에피소드.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할 때 장관 부인이 남편인 장관에게 전화를 걸고 검사를 바꿔 줘서 장관이 검사와 통화를 했네 말았네 했던 그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을 두고서 "남편에게 전화해서 검사를 바꿔준다"는 상황 자체가 아무에게나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는 지적(+그러니 누구나 그 상황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까지)에, 아 그렇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니 그걸 못할 게 뭐 있지 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후자의 사람들은 대체로 서초동에 몸이든 마음이든 나가는 사람들이었고 말이죠.

위의 두 가지 에피소드 모두에서 어떤 구분선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구분선과 관련하여 어느 철학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이야기를 곱씹게 되더군요. 지금 한국의 사회적 문제들은, 많이 모였을 때 자기들이 "국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집단들과, 많이 모이더라도 자기들이 "국민"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집단들, 이 두 범주 사이에서 발생한다고요. 저는 최근에 쓴 민중신학 박사논문에서 "시민"과 "비시민"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앞의 철학자가 이야기한 전자와 후자에 각각 겹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이 조국 장관이라는 분은 장관 취임을 전후하여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를 건드리는 언행을 참 많이 하셨더군요. 정신장애인, (폭력)시위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등등. 그리고 이 언행들에서 어김없이 "시민"의 편을 들어주는 장관이 되겠다고 하셨구요.

4.

이런 이야기들을 쭉 해 오면서 해 보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서초동"은 혹시, "누구든지"로 구현되어야 할 공공의 의미를 "많이"로 땜빵하려 드는 집회인 것은 아니냐고요. 처음에는 백만이니 이백만이니 하더니, 두 번째 대규모 집회 이후에는 숫자 추산을 안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충분히 "많이" 모여서 그걸로 "누구든지"를 땜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냐고요. "광화문"에는 왜 이런 질문 안 하냐고 하신다면, "광화문"에 이런 질문 물어 봤자 대답이 너무 뻔하지 않냐고 해 두지요.

하지만 어쩌면 이 질문도 부질없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아는 한, "누구든지"는 그 "누구든지"가 필요한 집단, 고달픈 이들과 지친 이들의 가슴을 축이고 힘을 돋울 때 가능한 것이었다 싶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성찬주일을 지내면서 성찬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해 봅니다. "누구든지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성찬 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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