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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마스크, 바이러스, 포도나무, 그리고 봄(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20. 3. 3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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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바이러스, 포도나무, 그리고 봄

박여라*

여러 해 만에 미세먼지로 찌들지 않은 봄이다. 그런데도 마스크다. 사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가 몰려와도 나는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심지어 통합대기 지수가 200(매우 작위적인 기준)이 넘지 않으면 따릉이도 잘 타고 다녔다. 마스크를 쓴다고 미세먼지가 내 몸에 얼마나 덜 들어갈지 그래서 마스크를 쓴 것보다 얼마나 건강을 지키지 못할지 의문이 들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사람들이 일본에서 난 것을 먹지 않을 때도 딱히 괘념치 않았다. 그 바다나 우리나라 바다나 다 이어져 있는데 애써 가려 먹으면 얼마나 내 몸을 오염에서 지켜낼지, 믿을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 도쿄전력과 그 정부의 사태수습 행태를 봤을 때 더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굳이 찾아 먹은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다르다. 감염되면 내 몸이 바이러스를 배양한다. 나도 감염되지 않으면 좋지만, 내가 남을 감염시킬 수도 있는 위험을 내가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나. 증상이 없어 내가 감염됐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데 말이다.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런 때에 특히 닫힌 공간에서는 남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침은 소화에도 필수 역할이 있지만, 와인의 맛과 향을 느끼게 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비말을 통해 번진다니. 마스크로 막아야지. 

세균이나 곰팡이와는 달리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 죽일 수가 없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자라고 증식하고 활동한다. 살아있는 세포를 감염시키니 살아있는 세포를 죽일 수도 없는 대략난감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포도나무가 바이러스 질병에 감염되면 그 부분을 아예 잘라내 없애버린다. 그렇게 해도 뿌리에 6년 동안 잠재해 있는 바이러스도 있다. 포도나무 바이러스는 와인 생산량과 질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원래 자연이 사람에게 그렇듯 내가 돌보는 포도나무가 큰 스승이다. 봄에 새 가지가 나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겨울이면 지난해에 새로 나온 가지를 마디 두어 개 남기고 잘라버린다. 올해는 2월 중순에 했다. 가지치기는 포도나무가 완전히 활동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해야 하는데, 너무 이른 겨울에 하면 자른 단면이 추위에 노출되어 좋지 않다. 제일 추운 시기가 지난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 다 책으로 배웠지만 실제로 여러 해 반복하다 보니 아주 조금 알겠다. 교과서에 의하면, 처음에 가지를 좀 길게 놔두어 잘랐다가 봄에 서리도 다 지난 다음 마저 하는 것이 새순을 보호할 수 있다. 가지치기를 너무 늦게 할 경우 물오른 가지 단면에 수액이 맺히는데 이때 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있긴 하나 큰 위험은 아니라고 한다. 일찌감치 가지치기하고 난 가지의 단면이 되려 바이러스 감염에 더 오래 노출되니 이 보다는 차라리 늦게 하는 게 낫다고 한다. (사진은 바로 며칠 전)

코로나19가 포도밭에 영향을 끼칠 리는 없지만, 작물을 다루는 사람들과 와인산업, 그리고 와인 연관산업에 미치는 위기는 이미 우리 곁에 와있다. 프랑스 보르도는 매년 봄에 지난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미리 판매하는데, 올해는 일정을 연기했다. 크고 작은 세계적인 연례 와인 행사들도 마찬가지다. 와인 지역으로 여행은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호주 같은 유명 생산지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 어려우니 지구촌 구석구석 와인 소비 역시 이미 위축됐다. 상황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금 우리의 짐작을 넘어서는 강도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예전의 정상은 다시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날이 따뜻해지니 마스크는 점점 불편하다. 얼마나 이렇게 더 가야 할지 모르는 답답한 나날이다. 모든 게 정지한 것 같았는데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잊고 있던 산수유 매화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제비꽃 민들레 자두꽃 살구꽃 벚꽃이 피어나 화려하고 눈부시다. 공기도 맑다. 코로나19 때문에 실천하고 있는 거리 두기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인지는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우연이라 하더라도 맑은 봄 공기는 참 오랜만이고 좋다. 마치 원래 이랬음을 기억하라는 듯.

*필자소개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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