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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3era] ‘두 이야기의 합류’를 다시 쓰기 위하여(정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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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20. 6. 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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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를 발행하며, '두 이야기의 합류'를 다시 쓰기 위하여

정용택(본 연구소 연구실장)

오늘날 다수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민중신학적 연구물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75년 무렵이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그해 『기독교사상』 2월호에 발표된 서남동(徐南同)의 「예수‧교회사‧한국 교회」, 그리고 두 달 뒤 같은 잡지 4월호에 함께 발표된 서남동의 「‘민중’의 신학: 김형효 교수의 비판에 답함」과 안병무(安炳茂)의 「민족·민중·교회」 같은 글들이 민족과 구별되는 ‘민중’(民衆)을 신학과 교회를 포괄하는 전체 그리스도교 운동의 핵심적인 주체로 제시한 최초의 공식적인 민중신학적 연구 성과들로 인정되고 있다. 이 논문들은 1970년대 전반기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통해 촉발된 ‘민중’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본격적인 응답이자, 향후 한국교회의 투쟁에 있어서 ‘민중’ 이념이 그 기본 토대와 목표가 되게끔 성서적·교회사적·신학적으로 확정하는 최초의 이론적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자 박성준(朴聖焌)의 경우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 1970년대를 중심으로』)에서 1973년 6월 『한국신학보』에 실린 현영학(玄永學)의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가 서남동이나 안병무의 75년 글들보다 2년이나 앞선 것으로서, 민중신학 형성사에 있어서 더욱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글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박성준은 이 대목에서 또 다른 민중신학자 송기득(宋基得)의 진술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서 지상에 나타난 글로 보면 민중신학은 현영학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영학의 글은 제목 그대로 “기독교가 민중의 것이 되려면 먼저 민중의 친구가 되어 민중과 함께 살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보고,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질문하는 동시에 마땅히 그래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민중과 유리된 엘리트가 되었음을 전제하고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종의 하방운동(下放運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것은 이 글에서 현영학이 만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역사를 통해서 활동하고 역사를 통해서 그 뜻을 나타내는 역사적인 하느님이라면, 한국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경륜을 찾아보아야 하고,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무속적인 것까지도 망라하는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 하느님나라의 표징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훗날 서남동이 「민중의 신학」(1979)에서 보다 정교하게 제시한 민중신학적 역사 개념의 선례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서남동은 「민중의 신학」이 발표된 1979년 당시에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되고 있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곧 한국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 글을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제목으로 이후에 수정하여 『민중신학의 탐구』(1983)에 재수록하면서 덧붙인 주석에서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의 민중전통과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의 합류이며 그 합류가 70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민중신학은 이 합류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이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서술들에서 우리는 서남동이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으로 대변되는 두 이야기의 합류가 갖는 지위를 어떻게 점점 높여나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해석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과제이며, 그렇기에 두 이야기의 합류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이 민중신학의 본업이라고 말했지만, 이후에는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한국적 신학담론이 그 자체로 두 이야기의 합류라고 말했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에서는 민중신학과 두 이야기가 여전히 구별되는 가운데 민중신학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해석하는 작업으로 단순히 규정되고 있지만, 후자를 통해서는 민중신학이 두 이야기의 합류의 산물이므로 이제부터는 그렇게 두 이야기가 합류되어 탄생한 새로운 흐름의 이야기,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을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이접적으로 종합한 그런 제3의 역사(쓰기)로서 민중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3년에 발표된 현영학의 글이 최초의 민중신학적 연구물로 재평가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다. 그는 1973년에 이미 두 이야기의 합류로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민중으로 성육신”하여 “에로스(생명력)와 저항(자유)과 신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오니소스적” 신학을 주장했으며, 이후 민중신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에 이루어진 한 좌담회에 사회자로 참가하여 (앞서 소개한 글의 연장선상에서) 민중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임을 명확히 지적함으로써 민중신학이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돌파하여 그 자체로 새로운 지평의 담론이 되었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73년을 두 이야기가 합류되어 민중신학이라는 제3의 이야기가 탄생한 기점으로 다시 봤을 때, 예기치 못한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의 민중신학자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1973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후의 장기호황을 바탕으로 형성된 ‘포드주의-케인스주의’라 불리는 체제가 붕괴되고 ‘포스트-포드주의’ 또는 ‘금융주도 축적체제’라 불리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1945년 이래로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아 금 가격을 고정시키고 달러의 태환성을 인정하는 금 본위제 및 고정환율제를 핵심으로 유지했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걸쳐 생산성둔화=수익성저하를 계기로 촉발된 인플레압력의 구조적 위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1971년 8월 15일에 발표한 달러와 금의 교환 정지를 골자로 하는 ‘닉슨 쇼크’(Nixon shock)와 더불어 붕괴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 이르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고정환율제 대신에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침내 세계 자본주의는 금융화된 자본주의, 또는 금융주도적 축적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미국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1973년을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가르는 경계’로, 캐나다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맥낼리는 ‘세계 금융이 영원히 변화한 날’로, 영국의 사회학자 스콧 래쉬와 존 어리는 ‘조직 자본주의’와 ‘탈조직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경계점으로 규정한 바 있다.  

한편, 이러한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정보통신기술을 요체로 하는 디지털경제혁명을 동반했다. 실제로 1973년에 역사상 최초로 영국의 통신사 로이터에 의해 전 세계 주요 환율이 데이터 전용선을 통해 전송되어 모니터로 나타나는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세계 각 주식시장의 정보가 실시간 제공되는 주식시장의 네트워크화가 본격화된다. 이는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생산적 기반이 IT산업의 급격한 발전과 인터넷의 상용화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구축된 디지털네트워크임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디지털네트워크를 주무대로 펼쳐지는 금융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이제 화폐는 어떠한 귀금속, 또는 다른 어떠한 상품들과도 가시적이거나 공식적인 연관을 갖지 않게 되었다. 화폐는 완벽하게 ‘탈상품화’ 또는 ‘탈물질화’된 것이다. 이렇게 화폐가 탈상품화‧탈물질화되어 유동하는 비물질적 가상의 실재로 변할 때 화폐가 갖고 있던 물질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화폐 물신주의는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자본 축적이 역설적이게도 산업자본주의 특유의 축적방식, 즉 생산적인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한 실질적인 잉여가치의 창조로부터 점점 더 스스로를 분리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의 ‘자립화’(autonomization)라 불리는 이러한 자본의 본능적인 가치증식의 운동을 통해서 실물경제를 중심으로 한 물질적 부의 체계적 생산이 금융 시장의 미래 예상을 확증하는 상상적 자료(imaginary material)를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적어도 1973년 이전의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의 형태로 된 물질적 재화의 생산이 자본을 증대하기 위한 결정적인 매개물이었을지 몰라도, 이제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는 상품 생산적 활동이 금융파생상품으로 대표되는 가공자본의 동학에서의 종속변수로 변모해버렸다. 

자본의 운동이 인간의 노동으로 대표되는 생산적 활동들에서의 잉여가치 창출 및 노동 착취로부터 점점 분리·독립되면서 생산적 노동이 담당하던 잉여가치 생산의 주된 역할은 이제 가공자본 축적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으며, 그렇게 노동의 지위가 추락하자 프롤레타리아적 노동(자본 관계 하에서의 임금노동)의 폐지 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전도된 형태로, 즉 불필요한/잉여적 노동(superfluous labor)이 증가하는 형태로, 대다수 노동인구의 점증하는 잉여성으로, 불완전고용의 거대한 증대로, 영구적 실업자 및 프레카리아트가 노동자의 지배적인 형상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의 자립화로 나타난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진실은 여전히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물질적 재화 및 서비스 생산의 의미와 목적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는 데 있다. 가공자본의 시대에 노동은 자본의 가치화에서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의미화하기 때문에 어떤 규정적 의미도 지니지 않는 비어 있는 기표”(슬라보예 지젝), 곧 ‘영(零)제도’로서 기능할 뿐이다.

이처럼 1973년은 한편으로 두 이야기의 합류로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역사쓰기를 의미하는 민중신학이 출현한 해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역사에서 화폐의 탈상품화‧탈물질화,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자본의 자립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민중신학자들에게는 1973년 이래로 서로 평행해온 민중신학의 역사와 자본의 역사를 다시 합류시키는 새로운 해석학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두 이야기의 합류’를 더 이상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아니라 1973년부터 나란히 시작된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역사와 자본이라 불리는 역사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다시 쓰는 작업 말이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이러한 과제 수행의 일환으로 이번 주부터 두 개의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하려 한다. 먼저 <전복의 눈 키우기>라는 제목으로 급진신학 연구과정 시즌2가 총 10주에 걸쳐 진행될 예정인데, 이번 여름학기 주례강독모임에서는 ‘전복성’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주로 장애인, 퀴어, 페미니즘, 탈식민주의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나갈 것이다. 유동적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구성체에서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이론적, 정치적 표상/재현에 대한 급진적 도전을 제기하는 민중적 존재의 구성적 이질성에 의해 형성되는 민중신학적 역사를 전복적 시선으로 탐색하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된다. 

그리고 <금융화 시대의 민중신학: 현대 비판이론과 함께 안병무 다시 읽기, 안병무 연구 다시 읽기 Ⅰ>라는 타이틀을 내건 안병무학교-민중신학 아카데미 여름학기 강좌는 2000년대 이후로 안병무 연구들에서 발견되는 민중신학의 주요 개념들을 앞서 말한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대상으로 수행된 현대 비판이론 및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와 더불어 재독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 구조에 대해 구성적인 공백, 자본이 자신에 대해 갖는 한계 및 자기모순과 동일시되는, 즉 자본의 모순적인 구조와 동실체적(consubstantial)인 존재자인 민중의 역사와 ‘운동하는 가치’인 자본의 역사를 안병무의 글들과 2000년대 이후 민중신학자들이 생산한 글들을 통해서 함께 추적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2주 전에 발행된 <웹진 제3시대>의 특집호는 조민아 선생께서 ‘위안부’라는 수많은 쟁점이 얽혀 있는 복잡하고 무거운 사안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자극하는 글을 기고해주신 덕분에 전례 없는 뜨거운 반응과 관심을 얻었다. 이번 <웹진 제3시대> 166호 역시 김윤동 기획실장을 비롯한 다섯 분의 외부 필자들, 김난영님, 김정원님, 권오윤님, 신윤주님, 이상철님의 빛나는 글들로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와 호응에 성실히 응답하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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