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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다시 읽기] 여자가 뭐냐?(2)(안병무)

민중신학 다시 읽기

by 제3시대 2021. 4. 2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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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뭐냐?(2)

 

 

위에 본래는 하느님께서 남녀를 꼭같은 귀중한 존재로 창조했다 그랬는데 또 한쪽에서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여자를 무시하고 모든 악의 뿌리는 여인에게 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뭐냐? 씨족을 계승하는 씨받이가 중심역활이다. 조금더 발전해서 여자는 하나의 재산목록 같이 노동력이다. 여기까지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구약 전반을 통해서 흘러나갑니다. 아니, 인류사 전체에서 그럽니다.

 

마가복은 14:3-9절까지의 말씀을 봅시다. 예수의 머리에 향우를 부은 여자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의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말없이 들어와서 말없이 옥합을 깨고, 기름을 붓습니다. 거기에서 같이 있는 이들중에서 항의를 합니다. 팔면 삼백데나리온이나 받을 수 있는데 왜 허비하느냐?고, 비난하는 이들은 제자들도 있지만, 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 여인을 옹호하며 가난한 이들은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너희와 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이름없는 여인! 공관서엔 이름이 없습니다. 마태 26:6-13까지도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거기서는 다 같은데 반대한 사람들이, 제자들이 여인이 행동하는 것을 막았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 부분이 다릅니다.

 

마가복음은 누군지 모르게 함께 있는 사람들 이라 했으니까 예수를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를 제자들 이라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여인의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거리를 여기 나타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꼭 같은 변명을 합니다. 너희가 비난하지만 너희들은 내용을 몰라. 이 여자의 마음을 이해 못한다. 여자는 너희보다 더 깊은 것을 내다봤다-. 나는 너희들과 늘 함께 있지는 않는다. 이 여인은 미래를 내다보고, 나의 장례를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여자 앞에서 제자들을 깔아 뭉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입니다. 7장 36절 이하에 나옵니다. 분명히 같은 얘기인데 다르게 나옵니다. 예수가 바리새인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음식을 잡수려고 하는데 한 여인이 조용히 들어와서, 거기까지는 좋은데 단, 누가에서 하나 붙인 얘기가 있습니다. 아주, 죄가 많았던 여자, 얼른 쉽게 말해서 창기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 여자가 들어와 옥합을 깨고 예수에게 기름을 붓고 한없이 울었다. 그러니까 예수를 초대한 사람이 ‘예수가 아무래도 예언자가 아닌가보다, 저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구나. 저 여자가 창기라는 사실을 알면 부정하다고 저런것을 거부했을 텐데-’ 그러니까 예수가 ‘너에게 물어보자- 빚을 많이 진 사람과 적게 진 사람 둘이 있었다. 그 빚들을 탕감해 주었다. 누가 더 고맙겠느냐?’ 하니까 ‘물론 많이졌던 사람이지요’ 하니까 바로 이 여인도 죄를 많이 졌기 때문에 이렇게 너희보다 더 고마워서 감격해 하는거다-. 얘기는 싹 달라집니다. 학자들은 역시, 창기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기가 어떤 동기가 있어서 예수가 그를 모든죄에서 해방시켜줬다 그러니까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감격해 울었다.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아까의 경우와 아주 다릅니다. 죄 있고, 없이 자기 전체를 다 바치는 것과, 예수의 죽음이고 뭐고 전제없이 자기의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기름부었다는 것 아주 다릅니다. 마가나 마태는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누가는, 죄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같은 얘기가 아닌가 보다고 학자들은 따로 구별을 합니다. 내용을 보면 딴 얘기가 아닌데-.

 

어떤 것이 진짜인가? 같은 얘기를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가령, 한 윤락여인을 볼 때 어느눈에서 보냐? 창기를, 과거의 죄라는 개념에서 볼 때 죄를 회개하라, 죄를 회개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합시다. 그런데 빠진 여인들, 죄의식에 가득차고 수렁에 빠진 여자인데 그를 보고 죄를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는 것은 머리위에 올라가 자꾸 누르는 거나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콤플렉스에 차 있는데 누가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저들은 희생의 제물입니다. 저들을 저렇게 만든것은 사회구조와 남성들입니다. 여자얘기 할 자격도 없는 내가 동아일보에 가서 얘기한 것이 신문, 잡지에도 나고 굉장히 충격을 주었던 적이 있어요. 정조 관념이라는 것을 폐기하라 했어요. 정조 관념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를 뒤집어 씌우는 굴레입니다. 그것이 그리 새말이 아닌데 그들은 그렇게 충격을 받았어요. 정조 관념을 자꾸 얘기한 것은 남자 녀석들입니다. 무엇 때문에 강조했는지 아세요? 여자를 붙들어 매기 위해서-. 정조! 정조 하는것은 남자들에겐 해당이 안됩니다. 저희들은 안지킵니다. 유럽게 가면 조그만 박물관에 가도 종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군에 나갈 때 소변만 볼수있게 해서 여자에게 채우고 열쇠는 가져갔어요. 살이 다 썩고 그랬어요. 꼭 같은 거예요. 정조 관념은 정조대 같은거예요. 정조 관념에서 해방되라-. 그러니까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 자리에서-.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비끌어매는 쇠사슬이었죠. 자기는 안지키면서 여자에게만 강조했습니다. 윤락 여성들도 다분히, 정조를 잃고 더이상 나는 갈데가 없구나 체념한 사람입니다. 여자들을 노예화 하려는 관념입니다. 아니 좋겠지 남자도 같이 그 굴레속에 있다면-.

 

그때 또 심하게 얘기한 것은 일부일처제 반대다. 왜? 그것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 요구하지 남자는 매이는 법이 없어. 여자는 꼼짝 못하게 하고 남자는 매일 돌아다니고 있으니 일부일처제는 남자가 만든 제도입니다. 노( )창기! 정조 잃고 몸은 더럽힌 여자, 바로 그의 몸을 더럽히면서 자기의 욕심을 계속 배설하면서도 그는 도도한 신사이고, 그녀는 지금 모든 사람의 조소의 대상, 침 뱉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죄와 남자들의 죄를 등에 짊어지고-. 하옆든 그런 윤락여성을 볼때, 그가 희생의 제물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우리 보는 눈이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남자들이 설정한 낡은 관념에서 보면 더럽고 천해 보이지만 다른 눈에서 보면-. 시골에 있는 부모를, 병든 부모를 위해 아니면 제동생들을 공부시키려고 몸을 파는 그들이 천해? 그런 허위가 어딨어요 그 여자보고 더럽다고 하나? 오히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깔보는데-. 여기서 우리 다시 예수에게로 가보면, 예수가 여인들을 상대할 때 너는 깨끗한 여자다, 무엇이 밝다, 정조관념이 강하다, 정절있다 등 이런 여자만 상대했나요? 아니요! 다분히 그 반대입니다. 여기에, 이름없는 여인 하나가 나타나서 예수에게 기름붓고 눈물 흘렸다 할 때 모두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저 여자가 무슨죄를 많이 졌으면 저럴까? 죄인일꺼다”

 

마치 윤락여성이 부흥사나 누구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서 울때 이 여자 신앙이 돈독하다 하면, 저 바보같은 녀석이 알지못하고 저 여자가 누구인지, 저 기름이 뭐해서 번돈인지-. 이런 소리까지 할지 몰라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복음은 우리 상식을 바탕으로 한 얘기입니다. 아마도 그는 죄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 예수만이 사람으로 대해줬기 때문에 그는 감사해서 모든것을 버린거다 하면 일리가 있지요. 그러나 원뜻은 그게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하고 상관 없어요. 이름 없는 여인이 예수에게 와서 모든걸 바친 겁니다. 옥합의 기름 삼백 데나리온! 이것이 누구였나 하고 이름을 밝히는 것이 요한복음에 처음 나옵니다. 요한복음 12:1-8에 거의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비교적 역사의 예수 모습을 안쓰는데, 이 얘기가 나옵니다. 장소도 베다니아로 쓰고 있고, 또 조금 다른 것은 예수가 그 여자집으로 간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사는 집, 요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20-30년 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이라는 말은 물론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공격한 것은 제자들이 아니고 가룟유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 돈을 가지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텐데! 왜 그런짓 하느냐?” 그런데 요한은 이 여자의 행동을 관심있게 보고 이름을 가르쳐 줍니다. 마리아라고. 마리아는 누군가? 막달라라는 말은 거기 없습니다. 마르타의 형제라는 것은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유명한 형제로 나와 있죠. 그런데 이 마리아가 누가복음 2:8절에 예수를 따르던 여자중에 일곱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로 나옵니다. 어쨌든 문제가 있던 여자로 누가는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마리아의 형제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 여자가 누구냐 하는 관심이 자꾸 생깁니다. 이 여자의 성격을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8절 이하에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타의집을 방문한 얘기가 나오지요. 거기에 마리아는 한마디 말도 없고, 그림자 같습니다. 꼭 기름을 부을때의 그 여인과 같습니다. 예수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고, 활동하는 것도 마르타인데 예수는 이 마리아의 편에 섭니다. 요한복음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를 오라고 해서 가는데 나사로의 두 누이로 등장하는데 거기서도 마리아와 마르타의 성격이 위에서와 100% 꼭 같습니다. 가만히 비교하면 마리아는 내향적으로 드러납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지금 마리아라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막달라에서 온 마리아다.

 

자! 이 행동 자체는 얼마나 중요한지 무리가 평가할 순 없습니다. 누가에서 말하면 바리새인들, 요한으로 하면 가룟유다의 눈, 마가에서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의 눈대로 하면 이런 허비가 어디 있느냐? 시시하고 못할 짓하고 있다. 이렇게 값진 기름을 부어 버리다니. 비윤리적이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그는 내 장례를 미리 예비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얘기는 이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끝까지 같이 전해지리라고-.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이 여인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예수만 인정하고 알아준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영원히 증명하라-.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엔 여인의 행위, 여인의 이름, 아니 여인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그걸 꼭 전해라. ‘뭘 의미하나?’ 이 사건을 빼면 복음이 성립 안된다. 이런 심각한 얘기가 어디 있어요? 조금더 소설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얘기하면, 죽음을 앞에 둔 예수가 죽음을 각오했는데 남자들은 하나도 몰라 그것을 안것은 여인 밖에 없어. 수난과 비난 앞에서, 남자들 세계로 여인이 어려움을 뚫고 들어가 한마디 말도 없이 행동했다.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하나의 사건만 일으켜- 몸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 없이 복음이 형성 안된다 그렇게 해석하면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얘기를 하시는 예수가 이런 사람으 이름도 밝히지 않아, 왜 그럴까? 이 여인이 혼자 한게 아닙니다. 예수가 아니었던들 여인 혼자 하지 못했을 것이고, 또 이 여인이 아니었던들 예수 혼자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할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인과 예수가 마주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운동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마리아가 중요하지 않아요. 사건이 중요합니다. 내가 했고, 그런게 필요하지 않아요. 마리아가 참 위대한 일을 했다가 아니라 예수와 이 여인과의 만남 사이에서 사건을 일으켰고, 이것이 복음의 성격을 규정했습니다. 그 여자는 전에 창기였는지 모르나, 죄가 많았는지 모르나 지금 예수와의 만남으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어요. 함석헌 선생 얘기에 보면 수평선 너머에 내가 세상에 뭐하러 왔나, 사람 얼굴 하나 보러 왔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한 여인이 예수를 만나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보면 절대로 처음부터 여자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고, 여자를 중심으로 한 모권사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역시 생산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노동을 못할 때가 있어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남자가 나가서 짐승도 잡아오고, 생활을 대신하며 그동안 권리를 장악했습니다. 여자가 아이 낳고 기르는 동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그 공백기에 “너는 집안에 쳐박혀 있어라, 내가 먹을 것을 제공하면 되지 않느냐?-” 가치관을 바꿔 놓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아이나 낳고 기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내려 왔습니다. 씨받이다, 얼마나 천하냐로 보면서 천하다고 규정하니까 천하지 생명을 낳는다 굉장한 일인데 깔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 “나야 뭐, 나야 뭐” 하며 점점 낮아져서 자기한계에 걸리게 된거죠. 여성이 자기 한계에서 벗어나려면 “나야 뭐” 하는 데에서 뛰쳐나와야 될 거고, 그 다음엔 남성 자체와의 투쟁이 있을 거고, 세번째, 잘못된 구조와의 싸움에서 여자가 해방되어서 하느님의 딸로써 자기 권한을 다시 찾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면면히 흐르는 것도 남자 위주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여성을 계속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애쓴 예언자들 세력도 있었고 하나 지금 그걸 다 말할 수는 없고-.

 

예수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예수당시를 조금 묘사해 보면, 예수는 유다교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때는 여자의 역활이 컸음에도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을 때입니다. 한 남자는 자기 재산만큼 얼마든지 여자를 첩으로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허락이 된 겁니다. 그 여자하고는 부부관계를 안해도, 남자는 그녀를 붙잡아놓고 노동력으로 부려 먹을 수 있습니다. 돈 안주고 권리를 갖고 부려먹을 수 있는 좋은 노예가 된 셈이죠. 자기는 절대로 상관도 안하면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여자가 이웃집 남자와 무슨 관계가 생기면은 언제든지 그녀를 끌어다가 돌로 쳐 죽일 권한을 가졌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여자를 사람으로 대접한 건 없죠. 왕과 궁녀들 관계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남자에게 살기 싫으면 이혼하고, 이혼증서를 써서 자유라도 주라고 모세법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배우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즉 성서, 토라를 배울 수 없었고, 혹여 영리해서 성전에서 얻어듣고 배우면 몰라도 특별히 정규교육을 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토라, 즉 모세오경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합니다. 여자들은 배워주지 않으면서 너는 토라를 모르는 족속, 그것이 너다 합니다. 토라를 모르니까 자연히 남을 가르칠 권한도 없습니다. 예수 당시에 어머니는 아이를 가르쳐선 안됩니다. 왜? 못가르칠테니까! 여자는 경박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토라같은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가 잘못 써 버리면 안되니까 – 자연히 남, 여라는 계급이 뚜렷하게 생겼습니다. 그것이 신약에도 뚜렷하게 있습니다. 특히 바울에게서-.

 

그러기 때문에 여자는 씨받이, 노동력 이상의 의미는 없고, 아이를 기를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성전에 가더라도 제사계급 들어가는데 따로있고, 아무 흠 없는 사람들 들어가는데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여인들이 들어가는데가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이방 사람들이 들어가는데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랍비라는, 구약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물론 여자를 제자로 삼을 수 없고, 거리에서 밤에 몰래 연애할지는 몰라도 여인하고 얘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창피한 일로 여깁니다. 여인들은 전면에 나설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여인들은 모두 죽어 지냈나?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여인들도 죽지 않는 한 어떤 형태의 양식을 가지고 투쟁해 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아니 남자와 대항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남자와 꼭 같은 투쟁 방법만이 여성 투쟁사라 보면 안됩니다. 여성특유의 그것을 찾아내면 여성학 운동이 됩니다. 개인 속에서 집단 속에서 ‘우린 이렇게 싸운다’라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세계가 잘못된 것은 남성의 투쟁방법이 관철되어서 전인류가 순간적으로 몰살될 상태까지 왔습니다. 전쟁 문화가 남성문화입니다.

 

이제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현자의 예수는 여인들과 밀착했습니다. 예수는 일반이 보는 약하다, 강하다는 것을 다른쪽에서 봤습니다. 민중속에서 힘을 보았고, 민중으 여인들에게서 중요한 힘을 봤습니다. 이것에 진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상대가 생기면 새로운 운동 방법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누구하고 상대했나요? 예수는 도시에서 안살고 농촌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는 농민언어를 썼습니다. 농경문화! 시골만 돌아다녔고, 부자들과 상대 안했고, 가난한 민중들만 만났는데 그중에 중요하게 많이 등장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여자를 무시하던 시대에 이 복음서를 쓰는 제자, 기자들도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만 오천명쯤 되더라, 여자와 아이는 무시하고-’ 그것이 대표적인 겁니다. 여자를 계산에 넣지 않아요. 또 여자를 예수가 부활한 증인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 예수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에게나 인기있다는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제하면 예수와 여자의 얘기는 기록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라는 것이 전체의 생애에서 얼마 안되는 부분이지만, 되도록 여자 얘기는 안썼을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여인과의 관계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 주변에 이름 없는 여인들의 등장이 많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3절에 보면 예수가 열두제자와 사는데 여인들이 예수의 후견인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생활비를 댔다고 얘기가 나오죠? 이것은 누가복음에만 전하고 다른 복음에는 없습니다.

 

예수가 여자를 경시했다는 기록이 여자의 눈에 비치는 것은 없습니까? 열두제자들을 뽑을 때 여자가 없었다는 것 그것은 숙제로 둡시다. 예수의 제자중에서도 예수곁에 있던 사람은 세사람밖에 없습니다. 깊은 얘기가 있을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다니고, 다른 사람의 역활은 거의 없습니다.

 

여인들의 소원을 가로막는 것을 예수는 가로 막지 못하게 했다. 자기 아이를 축복받기 원할 때 제자들은 막았지만 그런데 예수는 가로막지 않고 그 여인의 입장을 생각해서 아이를 받아들이는 예수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이의 소원이 아니고, 여인의 소원입니다.- 하옇든 여인들이 많았고, 실제는 더 많았을 겁니다.

 

사람은 더불어 수난받고, 더불어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절대로 개인이 아닙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냐에 따라서 아주 가변적인 것이 됩니다. 바로 여자이기 때문에 당신은 2,000년전의 그 여자와 공통 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오늘 현재도 예수와의 관계에서 이런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같은 지평위에 있습니다. 2,000년전의 팔레스틴의 한 여인의 한 행위가 아니라, 어떤 ‘여인’이었다는 개인명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일생동안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에요. 그 때문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어요. 오직 그가 날 일생동안 지배했고, 난 그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예수를 사랑할까? 이천년 전의 팔레스틴의 남자, 한 청년의 죽음을 내가 왜 이리 슬퍼하나? 그것도 아주 전달이 희미한데-. 예수 얘기를 난 거의 몰라요. 내가 그를 정말 사랑하나? 여러분이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을 쓸지 몰라! 여러분이 진짜 예수를 사랑하나? 지금 눈앞의 사람도 아닌 이천년 전의 팔레스틴의 유대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나? 생각해 보시오. 무언가 잘못되어 있지 않소? 왜? 사랑하나? 왜,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건 현실이죠. 그건 부정 안하겠어요. 왜? 사랑하나? 왜 사랑해질까? 쉽게 말해서 역사의 예수가 이천년 전의 예수라면 나랑 상관없겠죠. 관념말고 내 피부로 느끼고, 내 삶에서 느껴야 하는데, 다 관련이 돼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관련이 아닌 것은 허구야. 어떻게 관련되나?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따지고 봅시다. 예수를 사랑하나? 자신을 사랑하나? 실은 예수에게서 가장 되고 싶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예수를 생각하며 운다는 것은 나를 생각하며 운다는 것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못된 나! 그렇게 되고 싶은 나를 우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와 비슷한 것을 했으면 희열을 느낍니다. 나를 떠난 이천년 전의 예수는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예수를 이해했던지간에 오늘 살고 있는 나를 해석하는 겁니다. 예수를 해석하면서 나를 해석하는 겁니다. 나눠지지 않아요. 나는 그래요. 복음서 기자마다 같은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요. 왜 다른가? 그 사건을 보면서 내 선 자리를 해석하기 때문에 달라요. 남의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얘기를 해야지 예수 얘기가 내 얘기여야, 우리 얘기여야지 거기에 내가 관련되고, 눈물도 나고, 감격도 생기지. 구경꾼으론 안돼요. ‘믿음’으로라는 막연한 말로도 안돼요. 그의 삶이 내 삶과 깊이 관계가 되어야지요-. 왜 예수를 사랑하면 웁니까? 너무 감격스러워서! 왜 감격스러운가? 나는 못하는데 저렇게 했다 하는 것도 있지만, 나도 그럴수 있다 이기 때문에 오늘 현장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어요. 그때 내가 참 예수를 사랑하는 게 되지요! 그것 빼고는 대부분이 관념에서 - ‘왜 사랑하나?’ 물음에 신비적인 대답밖에 못하게 되죠.

 

이름없는 한 여인이 예수와의 관계에서 무슨 행동을 했습니다. 한 개인이 중요하지 않고, 그 개인속에 ‘여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도 이천년 전의 한 남자, 예수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 여인과 같이 한 남자, 그 여인의 대상, 이천년 전의 개인이 아니라 인간 예수, 이 여인과 예수가 만난 사건! 충격이라면 충격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사건을 복음의 내용으로 담은 이 엄청난 얘기를 오늘 내 현장 삶속에서 경험을 못하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천년 전 나사렛 예수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 예수가 오늘 나와 어떤 형태로 관계를 갖고 있나? 한 남자, - 개인이 아닙니다. 오늘 거기에 무슨 사건이 일어 날 수 있다라는, 일어나고 있다라는-, 일어날거라는- 그런 감격이 없으면 이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얘기가 무슨 의미를 주고 있나? 오늘 현재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더 나아가서 오늘의 이 여인은 누구냐? 여자다! 이 여자가 전체를 쏟아 바침으로써 복음이 전해질때마다 꼭 전해라-고 부탁한 여자다. 오늘 여기서 내가 만날 수 있는 대상은 누굴까? 어디선가? 남편인가? 애인인가? 일인가? 사랑인가? 구체적으로 뭔가? 오늘 예수는 어디 있을까? 여인을 만나서 그 사건을 일으킨 그 예수는 어디 있을까? 내가 만나서 그 사건을 일으켜야 할텐데 그 대상은 어디 있을까? 있어요! 있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있다는 건, 그것이 당신을 온전히 변화시키고, 그래서 복음을 복음으로 전수시키는- 사건들. 그게 있다는 걸 믿는 믿음입니다. 이름없는 여인이 오늘 그가 누구며, 그게 무엇인가? 그 여인이 기름붓는 대상은 현실적으로 누구인가? 어디에서? 이것은 만남으로써 관계 존재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복음의 내용이 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뭘까? 무슨 사건일까? 우리 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나? 이것을 우리는 경험해야 합니다. 일으켜야 합니다. 옛날에 한 여인이 일으킨 것만 아니고-, 나와의 관계에서- 그가 모든것을 쏟아바친 대상이 누굴까? 오늘!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복음이 될 수 있는게 뭘까? 난 거기 참여 못하나? 참여 못하면 아무 의미 없어요. 종교적 얘기만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히 여자와의 관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이 여인의 얘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나? 그것은 예수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나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서를 보면, 뭐든지 다 그렇지만 일사천리로 쭉 내적으로 아무 모순 없이 된 것 아닙니다. 가령 지금 이른바 투쟁하는 사람들이 모순 논리라는 것을 많이 말합니다. 삶은 모순이다. 역사는 모순이다. 모순을 자꾸 의식시켜 가면서 싸움의 대상을 찾는 겁니다. 산다는 것이 죄라는 말을 할 때면 그 안에 상반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성서는 일관된 한 방향만 얘기된 게 아니고, 모순된 양면이 있습니다. 어려운 겁니다. 성서에 그런게 있기 때문에 자기 필요한대로 요쪽편만 들고 해서 같은 성서를 갖고도 주장이 틀려집니다. 오늘 제가 보는 눈도 그중의 한면을 가지고 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안보던 면, 즉 A라는 면에 대해서 나는 B면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B라는 면을 강조하면 A가 어떤지 좀더 밝혀질겁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해서 그렇게만 보면 안됩니다. 성서에도 사람이 모순이 있듯이 모순이 있고, 대립된 의견이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서를 가르치는 주권을 교회만 가졌기 때문에 카톨릭으로 말하면 법왕입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사실상 목사들, 남자들입니다. 교권은 성서 해석권입니다. 지금 교파가 많이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교권의 싸움, 즉 해석권의 싸움입니다. 주로, 남자들이 싸우는 것이고, 여자는 아직 성서 해석권에 들어가고 있지 못합니다. 여자 인구가 2/3인데도 아직 성서 해석권에 여자가 개입 되지 못합니다. 성서만 아니고 윤리, 도덕, 법률까지 모두 남자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해석권을 갖는다는 게 무서운 겁니다. 윤락여성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윤락여성을 해석하는 눈이 아주 달라집니다.

 

한쪽만 가지고 주장하면, 그 여자는그렇게 나쁜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고 그 해석권을 가지고 주장하면 그는 희생의 제물로 부각이 됩니다. 싸움의 중요성도 해석권입니다. 심지어 막시즘 같은 것도, 공산주의 같은 것도 해석권의 싸움입니다. 공산주의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해석권을 장악한 자가 독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어떤 문제 가지고 어떻게 해석 하느냐 하는 자기 해석권만 가지고, 다른 해석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다른 해석을 하면 용공으로 몰아쳐 버립니다.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해석권을 쟁취하는 겁니다. 여자가 스스로 자기 해석을 해본적이 없고, 남자가 해석한 여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희다, 검다라는 주장도 그 자체 뿐 아니고, 해석이나 주장에 따라 상당히 달라집니다.

 

자, 이제 해석권이 뭐냐? 사람들은 해석할때 자기 위치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남자는 남자 위주로, 여자는 여자 위주로 자기 해석을 하려 합니다. 부자는 부자 위주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위주로 세상을 해석하려 합니다. 눈에 다르게 보인단 말이에요. 큰집이 있고, 아래 다닥 다닥한 조그만 집이 보입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 가난하고 조그만 집은 그들이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위생적으로 어떻고 마치 죄악의 소굴같이 부정적으로 가난은 죄로 보는 겁니다. 거꾸로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네가 많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환경이 좁아진다 합니다. 집권하면 집권한 자의 해석이 옳다고 합니다. 이것을 정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국민 언론기관입니다.

 

성서의 해석권에 여성이 거의 개입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신학교를 졸업해도 전도사업에서 실망이나 하고, 선교는 목사 혼자하고 해석권에 관여 못합니다. 총회나 교회의 주도권은 남자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운동 아무리 해 보아도 소용 없습니다. 윤리, 도덕 다 그렇습니다. 남자 위주로 해석하고 여자들도 거기 말려들어 죄인 취급 받고, 그 해석 속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게 여자들입니다. 남자를 낳아 씨족을 계승해야 사람이지- 여자는 그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남자하나 낳기 위해서 딸을 낳으면 5-6명을 계속 낳습니다. 죄인처럼 자기를 학대합니다. 왜 남자를 낳아야 하고, 여자를 낳으면 안되는가 해석을 뒤집어 놓고 하려고 안합니다. 정치면에서도 다 드러나지요. 왜? 지역구 싸움에서 여자가 하나도 당선 안되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반이상이나 차지하고 있는 여자들이 자기들을 대변할 여자를 내 보내지 않는가? 왜 그런가요? 기본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나 정치나 꼭 같습니다.

 

이제 우리 여기 성서에서 그런것을 보겠습니다. 성서 자체도 사실을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면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바울에 의해서 대표되는 보수성이 후대에 가면 점점 더해집니다. 제일 많은게 고린도전서입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14:34-35을 보면 여자는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 소리를 했을까? 여자들이 의견을 주장하고 말하기 시작했단 말이죠. 유대교에선 상상도 안하던 일인데 예수를 만난 이후 교회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곤란이 생긴 겁니다. 바울이 남자 편에 선 겁니다. 여자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이건 반 율법적입니다. 반 율법을 내세운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합니다. 물으려면 집에 가서 조용히 남자에게 물으라, 교회에서 여자가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고린도전서 11:3-16 말에 무슨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으 말씀이라고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했는데 긴 머리카락은 머리를 가리워 주는 거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 계급이 하느님을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 남자 그리고 여자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울의 얘기만 아니고, 유대교 얘기이고, 유대교만의 얘기가 아닌 세계의 얘기입니다. 불교에도 남녀관이 계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윤회설이 있는데 과정 중 여자 다음에 남자가 나오고, 그 다음에 부처가 나옵니다.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여자가 부처가 되려면 남자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최고 목적은 남자가 되는 겁니다. 바울도 꼭 같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 예수의 머리는 하느님이다 라고 합니다. 고대의 세계관 입니다. 바울에게만 국한된 것 아닙니다. 머리깍고 기르는 문제도 지금 카톨릭에서 이해하거나 안하거나 수녀들은 여전히 머리에 쓰고 있고, 신자들도 교회에 들어가선 꼭 수건을 씁니다. 수녀들은 벗지 않습니다. 지금 아랍 계통의 여자들은 뜨거운 여름에도 수건을 쓰고 다닙니다. 아프리카 여자들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해방된 여자들도 있지만, 아직도 다분히 그렇지 못 합니다. 그것 벗어야 여자의 해방이 시작입니다. 불교는 머리를 깍습니다. 왜냐하면 금욕주의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금욕주의가 아니고, 남자와의 관계에서 복종하는 전통입니다. 마음이 왜 그랬을까? 유대교안에서 쓰고 있던 여자들이 훌훌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평온하라, 소란하지 말자, 여자들의 해방운동이 과열해지니까 질서를 잡으려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무섭습니다. 11장 11절은 위의 말한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다른 요소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인정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온을 원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종과 상전, 이방인과 유태인의 구별이 없듯이 남녀의 구별이 없다 이것이 원래 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주장이 통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울도 그리스도의 본뜻은 알면서도 그때 현체제에 대해서 도전할 생각은 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떻게 되나? 예수가 일으킨 어떤 의미의 혁명은 또 다시 무로 돌아가지 않는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자 위주의 세계라는 것이 문제가 많습니다. 권리가 한 그룹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배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슨 조직을 만들면 집행부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그때 조직되었고, 지배층이 생깁니다. 생기면 꼭 두갈래로 대립이 생깁니다. 거기서 대립 알력이 생깁니다. 상부층의 알력은 점점 현실과 멀어집니다. 교회도 당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장로들이 모여 결정하는 것, 그들은 교인들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괴리가 생기면서 점점 밑의 신도들과는 견해가 달라집니다. 왜 그런가? 좋게 보면 위험한 일해서는 안된다, 되도록 존속해 나가야 한다는게 첫째입니다. 나쁜것과 타협하는 한이 있어도 존속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점점 보수로 되고 있습니다. 보수, 진보는 중앙에 있으면 보수가 되고, 주변에 있으면 진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전제하고 긴장 속에서 상호보완해야 유지가 되지 한쪽에만 치우치면 깨집니다. 교회가 일찍부터 제도화 되었습니다. 첫째가 누구요, 둘째가 누구요 라는 계급이 생갑니다. 그래서 질서를 유지합니다. 거기에 중심되는 것이 사도입니다. 사도가 전권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중심한 초대교회의 지배계층이 몽탕 남자입니다. 평신도는 둘로 갈라집니다. 교권이 성립되고, 남자들- 특히 12사도 중심이지요. 12사도는 실제로 예수 때 있었나? 이름만 나열해 있고, 이름도 복음서마다 틀립니다. 실제로 잘 등장한것은 세 사람밖에 없습니다. 꼭 예수와 직결된 의미가 아니고, 조직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2는 물론 12지파입니다. 굉장한 비밀입니다. 거기에는 여자가 한명도 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자는 제일 큰 교회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안됩니다. 같은 신학교를 돈주고 다녀도- 남자가 해석권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가 2/3인데 남자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결정은 남자가 하고, 여자는 꽃처럼 하나 둘 꽂혀 있을 뿐이죠. 한국 뿐 아니라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서 한국 교회가 무슨 개혁이 꼭 일어나야겠다합니다. 지도층이 달라지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을까? 이것이 절실합니다.

 

해석권! 해석권은 중요하고 결국 그것은 자리 싸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싸움은 무섭습니다. 사회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피차 모를게 남, 녀입니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다르니까, 교류가 안되니까 심리학자들은 남, 녀는 철천지 원수라고 말합니다. 제일 싸우는게 남, 녀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사의 싸움은 남, 여의 싸움입니다.

 

예수의 사건을 놓고 남자와 여자가 갈립니다. 지배층과 평신도 사이가 갈립니다. 해석 풀이가 다르거든요. 지배층은 교리를 대표하니까 1차적으로 교리 걱정을 해야한다, 교회가 존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신분과 관계 있거든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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