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꿈꾸는 멜로디, 아리랑 (구현경)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09. 12. 3. 00:21

본문

꿈꾸는 멜로디, 아리랑

구현경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지난주 토요일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이중 언어학회’의 열네 번째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학회의 주제는 ‘국제어로서의 한국어, 그 교육의 전망과 도전’이었고 아침10시부터 저녁 5시까지의 일정 중에서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주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중앙아시아 3국의 한국어 교육-우즈베키스탄현지 한국어 교육 기관의 교실 분석을 중심으로>이라는 발표였는데요 그간 제가 참석했던 학회 중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제게 도움이 된 학회였다는 평을 해봅니다.

이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저는 학교가 있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금요일 늦은 저녁에 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홀로 서울에 가기 전 같은 과 동기에게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피한 것입니다. 학회 프로그램을 보고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뿐인데 그렇게도 싫어할 줄이야. 아마도 제 또래들은 ‘학회’라는 것에 대한 인상이 ‘별로’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거길 갔느냐고요.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듯 제가 선택하는 일에도 그러한 것이 작용했던 겁니다. 제 꿈은 ‘세계적인 국어학자’입니다. 지금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제 과동기가 생각하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학회’처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 조금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뭐, 사실 저는 대학교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그려왔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란 것이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변함없고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제 꿈은 이겁니다.

“국립 국어원 교육진흥 부 연구원(더불어 해외 근무에 적합한 한국어 교원)”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국립 국어연구원(국립국어원)까지는 알겠는데 거기서 뭘 하는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대학원석사과정을 마친 뒤 ‘국립국어원’에 입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2년간 한국에서 근무한 뒤에는 ‘중앙아시아’에 한국어 교사로 파견되어 가는 것이 제 꿈의 최종 목표점입니다. 이렇게 제 목표와 계획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왜 하필, 그 나라에 가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곳에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있거나 생활환경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제 발걸음이 그곳을 향합니다. 아직 확신에 찬 발걸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곳을 알게 된 이후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보면 항상 ‘거기’입니다.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들이 하는 말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럼에도 저는 ‘한국인’이고 그들은 ‘고려인’ 혹은 고려인 2,3세들로 불러지는 현실. 왜냐하면 그들이 숨 쉬는 곳 역시 ‘대한민국이’ 아닌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이거든요. 그들이 ‘억지로’ 혹은 어쩌다가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는 어린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부쩍 꿈이 자주 바뀌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서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국어와 관련된 그 어떠한 일이라도 좋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해가 거듭할수록 더욱 구체적인 틀을 만들어 가게 되었고 처음과 달리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어느덧 국어학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다 우연히 TV프로그램을 통해 보게 된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자유’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한민족, 한뿌리’라는 친근함을 포장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저들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똑같은 ‘아리랑’을 불러도 그들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어보였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저들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으니까요. 우리는 ‘내’가 아닌 남들과 견주어 결핍감을 느낄 때 어쩐지 ‘나만’ 부족한 것 같은 피해의식에 몸서리를 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브라운관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작은 것 하나에도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위로받는 모습에서 진짜 하나 되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비바람을 막을 만한 공간도 없이 황량한 뜰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불편한 책걸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고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단기간 봉사활동을 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만 얼굴이 발개진 기억이 납니다. 저는 교복도 책가방도 심지어 공부할 학교와 교실에 대해서 고마움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더 많았고, 결국 저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저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피해의식에 젖어들었던 것입니다. 저들과 비교해 보면 더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직 부족하다고 떼쓰는 어린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장면입니다.

또, 이런 제 마음이 단순한 동정과 연민이 숨어든 허황된 꿈일까 두려워 한동안 고민도 많이 하고 아직도 고민합니다만 그 결과는 끝까지 가 보아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더 많이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보고, 멀리 그곳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게 되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 사족(蛇足)

지난 여름, 우리 연구소 회원인 이지영 님의 따님 구현경 양을 만났습니다.

덕유산을 내려오며 들었던 '중앙아시아로 가겠다'는 꿈 이야기를 맘 속에 담아 두었다가 얼마전 한백교회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 언른 글을 부탁했드랬습니다.

일본에서 오래 지내셨던 어머니를 보며 '재일 한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는 그녀는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고려인'들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등장인물들 중 강도를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사람이 바로 예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장에서 재림한 예수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구원'이란 고통받는 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함으로써 성취됩니다.

낯설고 척박한 땅에 강제 이주돼 모진 고난의 세월을 보냈을 '고려인'과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경계인'으로 살고 있을 그 후손들을 현대 한국인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잊혀진 존재 '고려인',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다가가려는 구현경 양은 그 자신만의 구원체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녀가 바라듯, 훌륭한 국어학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

- 유승태 연구원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