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네번째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
- 잃은 사람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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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교회의 사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지속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이고, 이들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기선교”라 이름 붙인 한국교회의 선교 풍조는 외국에 가서 적당히 관광을 즐기면서 형식적인 전도를 하는 것이거나 배타적 신앙관 속에서 타문화에 대한 이해나 존중 없이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심히 무례한 종교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식의 선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점은 실제로 많은 교회가 제 몸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와 세상을 향한 봉사도 실은 제 몸을 불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기에 교회가 존재해야할 본래의 모습은 자꾸 사라져 가는 듯 보여 안타깝기만 한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최소한의 생존은 해야 하고, 바울 사도의 말대로 일꾼이 삯을 받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자비량 선교를 하였던 사도들의 뜻을 살펴볼 때 양적 교회 성장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타인을 위한 존재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아야 합니다. 그 정신에 비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만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참으로 역설적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내어 줌으로 부활하셨듯이 말이죠.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인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참된 선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 이번 하늘뜻펴기입니다.


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3)
향린의 선교 - 잃은 사람들을 찾아
요나 4, 9- 11 ; 루가복음 19, 1-10

작년 한 해 향린교회는 선교비로 1억 6천만원 가량 사용하였고, 선교비는 총 결산의 약 28퍼센트의 구성비율이었습니다. 1994년 10월 교회갱신 실천결의문의 13번째 과제인 ‘적어도 예산의 30% 정도를 선교비에 할당하도록 한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향린교회가 선교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15년 동안 남북화해와 동북아 평화, 한미군사동맹 철회를 위한 평화통일 선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해치는 전쟁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성차별, 소수자 차별반대 등의 인권선교, 농촌교회와의 농산물 직거래, 생태기행과 아나바다 운동 등의 생명환경 선교, 독거노인 목욕봉사, 반찬 만들기, 노숙인과 도시빈민을 위한 복지선교, 민주화에 역행하는 제도와 정책에 맞서 싸우고 교회의 비민주적 구조를 바꾸는 민주화 선교, 민중교회 지원, 1인 1사회단체 후원, NGO 기구들, 이웃종교들과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선교를 해왔습니다. 목회자와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고, 교회의 예결산을 공개하고 있으며 더 투명한 재정운영을 위해 지금 복식부기 방식을 연구 중입니다. 또한 지역사회 발전과 교회의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교회 건물과 시설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출석교인 500명이 넘으면 분가하도록 하는 분가선교는 아직 논의 중에 있고, 장기적으로 사회선교센터를 세우는 것도 유급 사회선교간사를 두어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사회/선교부가 준비하고 있는 향린선교 정책 토론회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 교우를 합쳐 700명이 넘는 우리교회의 선교활동을 보면 정말 다양하고도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992년 공동의회 자료집부터 2009년 공동의회 자료집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두께가 점점 두꺼워 지고 있음을 볼 때, 향린의 선교와 활동이 더욱 다양하고 활발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도 처음 교회를 창립했던 이들의 입체적 선교, 또는 입체적 교회라는 뜻이 지금까지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입체적 선교/교회라는 창립정신은 교인들의 삶 전체를 선교에 헌신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키며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의 전선에 나서게 한다는 말입니다.[각주:1] 비록 향린교회 초기와 같이 교인 전체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 직업을 통해서 선교하는 일은 교인규모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하고 다원화 된 이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향린교회의 교인이 되어서 전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정신은 오늘날도 살아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선교활동을 위해 향린교회에서는 11개 신도회, 8개의 각부위원회, 7개의 평화나눔공동체, 3개의 소모임, 구역모임 7개, 선교부 산하 5개 위원회, 사회부 산하 4개 위원회, 예배부 산하 3개 부서, 교육부 산하 5개 부서, 장기발전위원회, 당회, 공동의회, 제직회, 목회운영위원회, 향린공동체협의회 등등 59개의 모임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은 1년에 한번 모이지만 어떤 모임은 월 1회, 또는 매주 모이는 모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새 교우가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의 저자 A. J. 제이콥스처럼 향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해보겠다고 큰마음을 먹는다면 한 10년은 꾸준히 다녀야 향린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루가복음을 탄생시킨 공동체는 마르코 공동체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다양성을 담보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루가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6:13 이하) 70인의 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10:1 이하) 이들이 모두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뽑힌 대표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들만 모두 82명이었으니 루가공동체는 아마도 59개의 모임이 있는 향린교회보다 더 큰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방인 지역의 한 변두리에 모여 작은 소종파를 이루었던 마르코 공동체와는 달리 루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난, 어쩌면 로마에 터를 닦고 있었던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섞여 있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으며, 열두 사도와 칠십인 대표와 같은 지도자들과 라오스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루가복음서 저자는 경건한 유대전통의 그리스도교 계열에서 만든 예수의 어록을 읽었고, 이방인과 소외된 계층이 그리는 예수의 복음이야기인 마르코 복음서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전에 자기가 들었던 예수 이야기와 이미 읽은 모든 이야기들을 가지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히 정리하여 한 로마관료에게 보냅니다(루가 1:3).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구석”(행 26:26)에서 일어난 불분명한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모든 사회 계층을 꿰뚫고 들어가며 다른 민족, 인종 및 계층의 벽을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제일 처음 유대인인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야기로 끝을 냅니다. 우리는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은 저자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신학자들은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붙여서 루가-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 사회에 하느님 나라 운동이 펼쳐진 것처럼, 이제 이후 제자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이방 세계가 변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평등 경험에서 비롯된 이 공동체에 부자들이 동참하고, 로마 사회에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떼거리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상태에서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요소를 제공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이제 루가는 예수 사후 그 운동을 이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계에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로마시민들이 좋은 황제로 기억했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보다 훨씬 더 낳은 평화를 만드는 나라임을 증명해보이고자 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핵심으로 삼는 향린교회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갔던 루가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닮아 있습니다. 향린교회 구성원들이 교양 있고 주체적 안목을 가진 신앙인들인 것처럼 루가 공동체도 중상류층 이상의 교양인들이 쓰는 헬라어를 쓸 줄 알면서 주변 세계와 자신들을 성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을 하고, 그에 따른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향린의 선교를 되짚어 보면서 루가 공동체의 경험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천신학자들은 흔히 교회의 역할을 보통 복음의 선포인 케리그마, 교육, 봉사, 친교 이렇게 네 가지로 봅니다. 이 중 ‘봉사’로 번역된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뜻하는 단어로 흔히 일반교회에서는 교회 내 봉사를 뜻하는 것으로 말들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선교의 기지가 되기 위해 교회 내적인 것도 잘 추슬러야 함은 당연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인식이 필요하고 자신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며 백번 맞붙어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의 경구처럼 외부와 내부 모두를 살필 줄 알아야 적절한 선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쌓아온 민주정신을 이렇게 저렇게 실험하면서 실수도 하고 또 부족하지만 나름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그 10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역사는 오히려 거꾸로 흘러 후퇴해 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국민들의 잘못이 큽니다. 투표권을 가진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가진 게 많고 그럴 듯한 학벌이 있고 힘이 있어 보이는 부자들이 나라 일을 잘 볼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일부는 돈이면 다된다는 생각에 물들어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의 경제적 위기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 때에, 정부와 여당은 계속해서 5~20%만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나머지 80-95%가 죽어나가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조차도 미국시민이 되려고 미국으로 가서 애를 낳는 원정출산이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부는 중산층에 들지 못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들에게는 관심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1980년에는 전쟁에서 외국의 침략에 맞서 자국민을 보호해야할 군인이 국민을 폭도로 몰아 죽이더니, 2009년에는 국민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켜줘야 할 경찰이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죽였습니다.

머리 속에 삽만 들은 지도자가 국정 운용의 기조를 ‘실용주의’로 잡아 성과와 효율만 내세우고, 군인이 정권을 잡고 무식하게 독재를 펼치던 시절의 ‘하면 된다’라는 군대식 사고로 국정을 운영하려고 하기에 모든 정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경쟁의 소굴로 몰아넣고, 언론과 한 통속이 되어 나쁜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이라도 하면 사진 찍고 누명 씌워 끝까지 잡아들여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못하고,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기에 조세희 작가는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 하는 자는 도둑 아니면, 바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 70-80년대를 통해서 독재자의 말로를 보았고, 그들의 권력이 누구의 피땀을 착취한 것인지 온 몸으로 느끼고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이 시기에 권좌에 있는 자들의 권력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루가공동체는 로마대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로마의 황제가 마치 자신들이 신인 양 제 맘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쓰이기 전의 로마를 다스리던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한 첫 번째 로마황제였는데, 유대인의 세금을 따로 거두기 위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90세 노인조차도 바지를 내리고 할례를 받았는지 조사하는 악독하고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였고, 루가는 이렇게 교만한 황제의 죽음 속에서 “권세 있는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루가 1:51-52) 하느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권력이기에 직접적인 정면대결은 못했지만 예수의 시험이야기에서 마귀를 로마황제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사도행전 12장 20절 이하에서는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을 신격화 시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루가공동체는 정치적 권력이 신성화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셔서 그 어른을 존중하고 그 어른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며칠 동안 명동성당에서 퇴계로까지 줄을 서서 조문하였습니다만, 그의 삶을 진정으로 되새기는 길은 그분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와 역사를 위해 촛불을 들거나 남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눈을 기증하시고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을 했다는 데, 그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되살렸던 예수의 불꽃을 계속해서 되살리는 길이 진정한 추모입니다. 루가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남기면서 바울의 순교를 적지 않습니다. 그가 우상처럼 떠받들어질까 염려한 것입니다.[각주:2] 오히려 하느님 나라 운동이 왕성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마치는 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선교 금지를 당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행 4:19-20) 이렇게 말하고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조상이며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떠들어 대고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의 그리스도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고 군주들이 함께 작당하였다.’”(행 4:24-26) 후에 다시 산헤드린이 이들을 호출하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를 실행하려고 하는 향린교회는 이 정부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향린교회는 왜 촛불 들고 거리로 나갑니까? 다른 교회들은 장로님이 대통령 되셨다고 한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데 향린교회는 어찌하여 설교시간마다 MB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까? 다른 교회들은 은혜로운 복음성가와 찬송가로 노래하고 교회도 크게 짓고 목회자들을 많이 두어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데 왜 향린교회는 좁고 낡은 건물에서 어려운 국악찬송을 부르게 하고 평신도들을 설교까지 하게 하는 불편함을 감수합니까? 그것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좀 더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보다 하느님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바른 길로 가고, 그리스도교가 예언자적 종교가 되어 사회에 정의의 외침이 살아나게 하기 위해 향린교회는 화살촉과 같은 역할 즉, 민족문화의 수용, 교회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통일, 생명과 인권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더욱 투철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 내야 합니다. 향린교회의 존재의의는 바로 이러한 선교적 사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향린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고 큰 품을 가져야 합니다. 루가는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두 강도를 구별합니다. 한 강도는 로마병사처럼 예수를 조롱합니다만 다른 강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예수의 무죄를 변호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루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회심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루가 23:40-43).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거절하는 사람도 루가에게 있어서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혹시 압니까? 누가 압니까? 이명박 장로님도 회개하실지~.

루가는 바리새인들을 구별해서 볼 줄 압니다. 루가복음서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지만(루가 11:37-54), 루가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행 5:35 이하). 우리가 생각하는 답답한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또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분명 향린의 정신을 흠모하고 거기에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있고 생길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루가 9:51이하), 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루가 10:25-37)과 감사하는 신앙(루가 17:11-19)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분들도 계시고, 하느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자진해서 나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루가는 정부와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이는 악한 놈일 뿐이고(루가 3:19 이하),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루가 13:31 이하)일 뿐이고,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사형집행을 하는 폭군(루가 23:4, 14, 22)일 뿐이지만,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접하고(행 13:4-12)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해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향린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상당한 학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지 못한 탓에, 성공한 모든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된 것으로 알고 그들을 일거에 부정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다는 것을 향린교회에 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청년은 자기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오면서 “존경할 만한 어른을 보려거든 우리교회에 와 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전문성과 성실성, 바른 생각, 진정한 실력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관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루가 공동체가 그러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향린교회의 선교 현실이고 가능성이고 잠재성입니다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선교의 핵심은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선교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에토스인 예수 그리스도 휴머니즘을 발견합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잃은 사람들 당시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당하고, 때로는 여론에 의해 매도당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눕니다. 우리는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선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루가-행전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으라”(루가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라고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이들은 ‘오클로이’ 즉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 말은 속옷 두 벌을 가지고 두 사람이 공유하며, 먹을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함께 서로 어깨를 기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루가-행전의 후반부의 주인공인 바울은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행 20:33-35) 이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신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면 부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고별연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바울은 경제적 독립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으나, 그 권리를 희생합니다.  즉 그는 부양받기 위하여 일하기보다, 오히려 주기 위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였고, 그럴 때만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욥바와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음으로써(행 9:36-43)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단순히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 세리들은 로마의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폭리를 취하기 일쑤였기에 세관의 우두머리라면 그런 혐의에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캐오가 남을 속여먹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8절에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부자였고 세관장이었기에 매도를 당했던 자캐오가 오늘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예수는 그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던 자캐오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그로 하여금 나눔의 기쁨을 맛보게 함으로써 살 맛 나게 만들어 줍니다.

세례요한의 충고, 바울의 연설, 자캐오 이야기가 이루어 낸 선교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수평적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산주의(Communism of Love)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누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노동에 의해 자신의 경제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부자 될 권리를 포기하고 남에게 주기 위해 노동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모두가 구원을 이루는 선교에 동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하느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이 루가가 꿈꾸던 선교였고 이상이자 목표였던 것입니다. 

개개인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돕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선교이든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만 고통을 지우는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는 선교이든지 이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모두가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이라면 모두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이루도록 도전할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청남 수련회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해 함께 공부했던 것, 지난 주 우석훈 선생을 모시고 강의를 듣고 토론했던 것 모두가 그런 노력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장기와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각양의 모양대로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쓰실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땡전뉴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괘종시계가 9시에 가서 “땡”하고 울리면 제일 첫 소식이 전두환 씨의 소식이었기에 땡과 전두환 씨의 성을 따서 땡전뉴스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땡전뉴스에 나오는 전두환 씨의 호는 “오늘”입니다. 언제나 뉴스에서 오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어쩌구 저쩌구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아내 이순자씨의 호는 다들 아시겠지만 “한편”이었지요. 그럼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무엇일까요? 제가 최근 한겨례 21을 읽고 안 사실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한때”가 아닐까 합니다. 지난 1년간 이명박 대통령이 쏟아낸 말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도 한 때 기업해봐서 안다.” “나도 비정규직 노동자로 출발해 최고경영자가 된 터라 태생적으로 노동자 프렌들리다.” “나는 여러분 환경미화원의 대 선배다.” “나도 질문자 나이 때 황학동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했다.” “나도 학생 때 학생회장 하면서 데모를 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끊어야 한다. 내가 산 증인이다.” “나도 한 때는 여러분처럼 노점상인이었다.” “나 자신이 한때 철거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디 가서든지 “나도 한때는”이라는 말을 늘 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선교의 현장에 서야 할 때 가장 주의할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나도 한 때는 무엇 무엇 해봤다~”. MB처럼 한 때에 무언가 해 봤다고 떠드는 사람은 거의 현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주의해야 할 단어는 “앞으로”입니다. “지금은 좀 어렵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 하겠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과거와 대비해서 지금은 좀 어렵고 미래에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한 때 잃은 사람을 찾아 선교를 했다고 지금 잃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분명히 말합니다. 지금 잃은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거의 찾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루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한번 더 읽겠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잃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제 목숨을 잃는 사람 즉 미래에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목숨을 잃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한 때”나 “앞으로”가 아니라 매일 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때 십자가를 졌던 사람입니까? 앞으로 질 사람입니까? 아니면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까?

하느님은 요나 같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땅 조선반도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수백만이 되고, 뭇생명들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하여 이 땅을 아끼지 않겠느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돈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불의한 재물로 사람을 살리시오.
가난하더라도 떳떳함을 잃지 말고
부자가 되더라도 하느님 두려운 줄 아십시오.
고통 속에서도 넘치는 평화를 맛보고
눈물 속에서도 그리운 자유를 누리시오.
매일 그대들의 자리에서 예쁜 사람꽃 하나 피어나게 하시오!


ⓒ 웹진 <제3시대>


  1. 『향린40년사』, 79p. [본문으로]
  2. 사도행전 14:11이하에서 군증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생각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당황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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