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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탄탈로스의 잔치 (김진호)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4. 1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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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로스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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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창세기」 6장 1~4절

이 텍스트는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하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랬더니 ‘인간’의 수명이 줄게 되었다고 한다.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의 아들들과 결혼했다면 사람에게 좋은 일인 듯한데, 그 결과는 뭔가 잘못됐다는 분위기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다음 말은 한술 더 뜬다. 느닷없이, 그 이후 거인족이 살게 되었는데, 이들의 정체는 하늘의 아들들과 땅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한다. 황당하다. 이런 종족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면 탄탈로스라는 이가 나온다. 그는 시피루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대단한 자산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그는 신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제우스는 종종 그를 신들의 잔치에 초대한다. 신만이 마시는 술(神酒)을 먹으며 신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는 신과 같은 반열로 올라간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주(神酒)에 취해버렸다. 잔치 속에서 그는 자신이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 다시 사람의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그는 땅으로 내려와 땅의 논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람의 음식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 사람의 진실에 진지해져야 한다. 속으로는 ‘이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 라며, 조소로 가득한 마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탄탈로스는 신의 권력을 흠모하며, 신의 잔치의 영원한 손님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진질을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였다. 실상, 그의 ‘돌아섬’은 육체 밖으로 나가려는 욕망의 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대한 외면을 통해서 자신이 정말 그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자기는 남들과는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가치로 사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궁궐이 신의 잔치마당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하여 이번에는 그가 신을 초대한다. 신들을 위한 향연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초대된 순간만을 향유할 뿐인 손님의 자리가 아니라, 잔치의 영원한 향유자인 주인의 자리에 앉고픈 것이다.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으론 양이 차질 않았다. 그에겐 모든 것은 한갓 세상의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최후로 그는 비장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잔치상인가? 누구도, 이만한 향연을 주최할 순 없으리라.”

그러나 이것이 그의 추락의 계기였다. 그의 상승 욕망은 결국 그를 타르타로스라는 ‘지옥’같은 곳으로 인도한다. 목까지 차는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물이 마르고, 눈앞에 과실이 열려 있는 데도 배가 고파 손을 뻗치는 순간 멀리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이다. 끝없는 욕망의 공간이며, 결코 충족되지 않는 고통의 공간이다.

Honoré Daumier 작 <Tantalos>(1842)

탄탈로스는 끝없는 상승 욕망의 노예가 된 자를 상징한다. 그는 남보다 우위에 있는 자기를 즐기고자 했으나, 그것이 다른 이들이 밟고 있는 같은 땅 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가치를 실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한 존재다. 그는 다른 이들의 삶과 가치를 무시하고서만 실현되는 욕망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의 권력이라고 믿었다.

신의 권력이 확인되는 잔치의 손님이 된 자화상을 그린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잔치가 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을 위한 잔치를 주최한다. 그러나 그가 초대한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권력이었다. 이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 끝은 자기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것이 타르타로스, 곧 끝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시 「창세기」 4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딸들이 누구냐,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 그들이 어떻게 됐느냐 등에 대해선 이 본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그 무언가에 관련된 주역은 바로 ‘하늘의 아들들’이며,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단지 하늘의 아들들로 나오는 존재의 소행과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부가적인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들’(베네 하 엘로힘)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물론 혈연적인 자녀라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역하면 ‘~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천사일 수도 있고, 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천사건 악마건, 이들은 인간의 어떠한 성향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떠한 성향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일까?

본문에 따르면 행위의 주체인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취했다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행한 이 일의 요체는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욕망’이라는 성향의 존재들이다. 이들이 욕망한 것은 ‘땅의 가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땅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하늘의 가치가 아니라 땅의 가치였다는 것이겠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자의식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다.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 곧 하늘의 가치와 맞닿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치 하늘의 지혜를 알려고 ‘선악과실’을 먹은 아담의 ‘착각’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들은 아마도 탄탈로스처럼 신을 사모하는 방식을 신의 권력을 욕망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존재들인 것 같다.

이 내용은 3절의 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즉 ‘하늘의 속한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결혼한 결과, ‘거인들’의 탄생했다는 것이다. 2절의 내용, 즉 사람의 수명이 120세로 줄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자연스런 논리의 흐름을 깨뜨리고 있다. 그러니 먼저 3절을 보고, 뒤에 2절이 끼어든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좋은 독서방식이다.
본문에서 ‘거인’은 ‘힘’으로 표상되는 존재다. 즉 이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힘’이었다. 신의 권력을 추구한 결과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탄탈로스처럼, 본문의 욕망의 결론은 ‘힘만이 생존의 논리’인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수명이 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여기서 ‘사람들’은 1절의 ‘사람들의 딸들’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 앞의 구절이 ‘하느님의 속한 자들’에 대응하는 하나의 수사어로 쓰인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 일반’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숨’이 120년밖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의 초점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한계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욕망의 대가는 창조의 생명력을 상당부분 손실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해봤자, 120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이라는 냉소인 것이다.

이 텍스트는 「창세기」 처음부터 계속되는 일련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과정은 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로 세상은 더욱 죄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 모방 욕망’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대응하고 있고, ‘죄’는 ‘고통’과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끝없이 탄탈로스의 잔치를 벌이면서, 그것의 발전에 도취한다. 그것이 마치 신의 축복의 증거이기라도 한 양 말이다. 그것이 마치 신의 반열에 이른 인간 자아상의 확인인 양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바로 도정에서, 본문은 그러한 대단치도 않은 인간의 호들갑이 길어야 120년에 불과함을 냉소하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욕망의 쳇바퀴 속에 갇혀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을 체험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의 이 비밀을 알아낸 인간은 이 욕망의 쳇바퀴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기다림’의 요체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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