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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4. 1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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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 현대 기술 문명을 둘러싼 타락과 상승의 변증법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임청하’에 대한 추억

지금은 홍콩영화의 열기가 사그라졌지만, 90년대 내내 홍콩영화의 파워는 한류열풍의 원조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했었다. 쟝르상의 특성으로 홍콩영화를 분류할 때, 80년대 중,후반이 ‘영웅본색’류의 홍콩판 조폭영화들이 르네상스를 이뤘던 시대라면, 90년대 후반은 중국으로 할양되는 홍콩 젊은이들의 잿빛미래를 감각적 영상으로 담아냈던 왕가위 감독 시대라 할 만하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90년대 전반기의 홍콩 영화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쟝르가 바로 현란한 액션과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무술사극이었다.

필자가 당시 중국무술 사극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배우 ‘임청하’때문이었다. 얼음장과 같은 차가움과 중성적 매력까지 지녔던 임청하는 80년대 학생운동권(주로 PD계열 남학생들)의 영웅이었던 로쟈룩셈베르그의 서늘한 관능미를 연상시키며 나로 하여금 그녀의 열열한 매니아가 되게 하였다. 내가 임청하를 처음 만났던 영화가 바로 ‘신용문객잔(이혜민 감독, 1992)’이다. 이 영화는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등 90년대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배우들이 함께 등장하여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고, 이후 등장하는 무술사극 열기에 기름을 부었던 영화라는 측면에서 기억에 남을 만 하다.

사막가운데 위치한 용문여관을 무대로 극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녔던 임청하의 서늘함도 아니고, 장만옥의 농염했던 백치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용문여관의 주방장이 지녔던 기술, 특별히 양의 각을 뜨던 얼치기 주방장의 현란한 칼솜씨이다.  

동양에서, ‘기술’은 어떻게 ‘도’로 상승하는가?

영화 ‘신용문객잔’을 보고 4년이 흐른 뒤에 나는 철학과에서 개설되었던  <장자>강독에 참여한 바 있다. 함께 책을 읽던 중에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 잡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불현듯 잊고 지냈던 용문여관의 주방장이 떠올라 나 혼자 비디오 가게에서 테잎을 빌려 주방장이 양을 잡는 장면만 몇 번이나 돌려봤던 기억이 있다.

백정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손, 발, 무릎, 어깨를 모두 이용하여 소를 잡았는데, 뼈와 살을 발라낼 때의 칼쓰는 소리가 마치 옛 선인들의 음악소리 같았고, 그 동작 역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절도에 맞았다고 한다. 이를 본 문혜군이 “소잡는 기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고 물었더니, 포정이 대답하기를; “제가 즐기는 것은 ‘도”입니다. 도는 기술보다 위에 있습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눈 앞에 놓여있는 소를 보는 데 급급했지만,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으로 소를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손을 놀립니다”  

위의 예는, 동양적 사유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도’가 어떻게 기술에서 시작해서 ‘도’의 경지로 상승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를 봐도 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 전체가 눈 안에 들어왔다고 포정은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소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손을 놀릴 때도 눈의 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놀린다고 말한다. 확실히 서양의 영, 육 이원론과는 다른 사유다. 물론 물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를 언급하는 변증법적 논리학이 영과 육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서양적 해법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적 사고는 몸이 점차 대상과 합일되는 과정에서 마음의 테두리(범주)를 해체하고, 사물을 향해 여과 없이 투신해 가는 동양적 합일의 개념과는 그 발상이 다른 듯 하다.

다시, 근대를 묻다

지금까지 동양적 전통에서 기술이 도의 경지로까지 승화되고 있음을, 우리는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에 반해, 서구 정신사에서 기술은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근대는 인간의 전 영역을 합리화하는데 성공한 시기였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합리화되면서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였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합리화되면서는 봉건제가 물러가고 자유와 평등을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등장하였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마저 합리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비신화화와 비종교화를 언급하고는 마침내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근대가 선물한 명절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생산물의 확대를 위해 과학과 기술이 사용되고, 생산관계의 개선(노동력 확보)을 위해 근대는 봉건제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선포하고 급하게 이를 앞당긴다.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인 소비의 미덕을 찬양하고 향락에 대한 동경을 부추기기 위해 자본은 신마저도 저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 살과 땀냄새 나는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뒹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은 (신에 의해) 긍정이 되었고, 필요와 need를 추구하는 우리의 탐욕은 현대 시민사회의 덕목 중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이 모두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술책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근대(성)의 프로젝트에 대해 조밀한 분석을 시도한 집단이 있었으니, 흔히 ‘비판이론’(Critical Theory)으로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학파이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세례를 받은 이 그룹의 대표적 인물들로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있고, 21세기 기술복제시대의 미학이론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발터 벤야민, 맑스와 정신분석을 연결하고자 했던 마르쿠제 등이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라 할만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비교적 덜 활동적이지만, 현존하는 철학자중 가장 잘 팔리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기술은 어떻게 (근대와 맞물려) 타락하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그들의 논지를 끌어오기 위해 사용했던 ‘비판이론’은 관념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시대 물화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비판이다.[각주:1]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러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기획되었다.

우선 그들은 두 종류의 이성에 대해 논한다. 하나는 봉건제의 압제와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반성적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조작과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한다: “이성은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서게 함과 동시에……이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제어하는 계산적 측면도 갖는다.”[각주:2] 도구적 이성의 견지에서 보자면, 자연(대상)은 오로지 ‘얼마만큼 인간에게 쓸모 있는가?’로 평가된다.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은 이를 전체주의적 논리라고 꼬집는다.[각주:3] 

도구적 이성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논리는 타자를 전유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동일성의 논리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 그리고 성숙의 과정을 지탱하는 뼈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대상에 대한 끝없는 착취를 통해 자기 존재가 증명되는 원칙이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착취와 그 다음 착취의 대상으로의 이동은 환유적 연결고리로 이어져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것은 사과이고, 사과는 맛있고,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이다. 이 문장에서 의미란 없다. 단지 문장이 끊이지 않고 대상이 바뀐 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의미라면 굳이 의미일까. 자본주의는, 맛있는 건 바나나-긴 건 기차-빠른 것은 비행기로 계속 (환유적 연결고리를 따라) 의미가 미끄러져 가듯, 그 착취의 대상이 자연이건, 인간의 노동력이건, 인간의 감정과 꿈까지도, 하물며 (반자본주의적이어서)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것들까지도 자기증식의 욕망 안으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의지이며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근대의 프로젝트에서 기술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들이 싹틀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을 제공하였고, 산업혁명 이후 자본의 급작스런 팽창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가능케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기술은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구현하는 마법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기술은 급기야는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오히려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리틀리 스콧 감독, 1982)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replicant 생산을 모토로 탄생한 타이렐사의 복제인간 레이첼처럼 말이다 (그녀는 다른 복제인간과는 달리 어릴 때 기억이 입력되어 있어서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 믿는다). 이렇듯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더 모호해지고,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 조차 검증 받아야 하는 시대, 이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세계라 말한다.

에필로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발생한 기술이 (혹은 기술의 부산물들이) 이제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서 고안된 것들이 그 칼날을 우리에게로 향한 채 다가오는 전혀 새롭고 낯설고 불안한 경험을 인류는 최초로 하고 있다.[각주:4]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붙힌 뒤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이카루스처럼, 인간은 한쪽에는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로, 다른 한편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욕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다이달로스가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이 밀랍을 녹여 떨어질 것을 경고 했으나 이카루스는 계속 태양을 향해 고도를 높힌다. 신화에 의하면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것에 도취되었다고 말하지만…글쎄…, 점점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카루스도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불안이 시작되고 그 불안으로 인해 영혼이 잠식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비상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 기술문명의 현재와 미래가 이카루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냥 이 비상을 멈추고 추락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자본의 달콤한 논리와 속삭임이 추락하는 우리를 그냥 놔두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에잇! 그냥 눈 질끈 감고 추락해버리자!! 그리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다시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빠른 선택이 아닐까? 이 불쾌와 고통의 반복강박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의 하강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런지….

ⓒ 웹진 <제3시대>

  1. “부르주아 사회는 동일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다름을 추상적인 양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계몽에 있어 수나 궁극적 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환상이 된다. 근대 실증주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하여 지워해버린다”- M. Horkheimer and T.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ment (New York, 1972), 7. [본문으로]
  2. Ibid., 83-84. [본문으로]
  3. “계몽사상의 경우, 계산과 효용의 원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의문시된다….그에 대한 정신적 저항은 단지 그 힘을 강화시킬 뿐이다. … 또한 이 같은 신화에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항세력이 어떤 신화를 제시할 경우, 이러한 신화조차 계몽적 이성의 용해적 합리성의 원칙에 굴복하고 만다. 계몽주의는 전체주의적인 것이다.”-Ibid., 6. [본문으로]
  4. 한스 요나스는 기술문명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하면서 “공포의 발견술”을 언급한다: “완전히 새로운 양태의 권력과 이러한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한 양식들을 예속시킬 수 있는 선과 악의 규범에 관해서 전통 윤리학은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고도의 기술과 함께 들어서게 된 집단적 실천의 처녀지는 윤리 이론에 관점에서 보면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미개지이다. …… 무엇이 윤리의 나침반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심상치 않은 상황의 변화, 위험이 미칠 수 있는 전지구적 범위, 그리고 인간의 몰락 과정에 대한 징조를 통해서 새로운 윤리적 원리들이 발견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공포의 발견술’이라고 명명한다.” –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이진우 역, 서광사), 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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