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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니체의 독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10. 2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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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독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지난 웹진 19(2010 1) <영화 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21(2010 3) <니체 : “니들이 근대를 알아?”>에서 나는 영화 박쥐로부터 기인하는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의의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그 논의의 진앙지를 니체로 설정한다고 명시하였다. 왜 니체인가? 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근대()를 향한 시비와 싸움질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 니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앞의 두 글에서 니체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에 나타난 니체의 근대비판, 즉 아폴론적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인간과 디오니소스적으로 상징되는 탈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소묘, 그리고 근대적/탈근대적 증상이라 일컫는 것들에 대한 나열 혹은 비교에 시간을 할애하였다.

 

필자의 게으름으로 인해 올 초 웹진에 올렸던 졸고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결국 내가 니체를 통해 닿고자 하는 지점은 근대()를 향한 니체식의 딴지걸기 안에 깃들어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지금 이곳에서 유추해보는 것이다. 특별히 윤리를 전공하는 학도로서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글에서 필자는 긍정의 윤리로 대변되는 니체식 윤리의 계보학적 지형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이런 기획아래 이번 호 웹진에서는 니체의 도덕 철학을 대변하는 <도덕의 계보학>에 나타난 서구 기독교 윤리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을 소개할 것이다. 다음 달 웹진에서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윤리학에 대한 소고와 이에 대한 계보학적인 연관을 정리할 생각이다.

 

 

윤리적 쟁점은 어떻게 진화(혹은 퇴보)되어 왔나?

 

영혼의 구원이란 바로 구원에 대한 참회의 경련과 히스테리 사이에서 왕래하는 조울적인 광기이다.[각주:1]

기독교적 도덕은 거짓을 범하려는 의지 중에서 가장 악의가 많은 형태이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마녀 키르케였으며 이것이 바로 인류를 타락시켰다.[각주:2]


니체는 구원을 미끼로 인간을 옥죄는 죄책감, 죄악, 책임, 의무 등등의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우리를 연약하고 수동적이고 부정의 논리 가운데 머물게 하였다고 비판한 후 도덕은 벰파이어[각주:3]라는 악담까지 퍼붓는다. 이러한 니체의 서양의 도덕적 믿음에 대한 체계적 비판이 전개되고 있는 책이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초반부에서 좋음에 대한 어의전승을 분석한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좋음이란 인간의 행위보다 사람 자체에 무게가 실렸던 말이었다.[각주:4] 본디 좋음이란 선함이 아니라, 우수함을 뜻했다. 희랍인들은 이를 arête(아레테)라 불렀다. 의사의 arete는 병을 잘 고치는 것이고, 축구선수의 arete는 골을 잘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학은 인간 일반이 지니는 arete를 묻는 학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라 정의하였다.[각주:5]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우수함은 선함으로 바뀌었고, 행위의 원칙이었던 행복에의 추구는 선의지에 순종해야 한다는 칸트식 정언명법으로 대치된다. 고대 그리스의 윤리가 보편적 도덕규범을 개별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는 것을 격려하고 긍정하던 태도를 보였다면,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게 행위하라는 칸트식 윤리 강령은 개별자들을 어떤 보편적 규범에 예속시켜 포섭하려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러한 서양윤리의 형성사를 고찰하면서 몇 가지 발전단계가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구의 금욕적 의무적 윤리 형성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각주:6]으로 바라본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 책임과 양심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그것들은 처벌과 훈육을 통한 지속적인 공포 속에 성장하면서 점차로 개인들에게 내면화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각주:7] 이 과정에서 니체는 어떻게 노예의 도덕이 (고대 그리스적인) 주인의 도덕을 극복하고 그 위치를 전도시킬 수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적인 주체처럼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던 도덕과는 달리 노예들은 오히려 자기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드러내 보인다. 노예들의 생존방식은 주인이 지닌 유쾌, 상쾌, 통쾌, 활달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알아서 기는것이고,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것이다. 모난 정은 돌 맞는다. 그러니 제발 튀지 말자. 이런 것들이 그들 삶의 모토였다.[각주:8]

 

두 번째 단계에서 노예들은 자신들의 무력한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승화시킬 매개체를 찾다가 선인이라는 아이디어를 착안하였고, 그 선인에 자신들을 투영하였다.[각주:9] 선인의 요건에는 주인의 도덕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덕목들 부가되었다. 금욕과 겸손, 책임, 양심, 자기부정, 알아서 기는 것, 모난 정은 돌 맞으니 튀지 말 것,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니 복지부동하며 눈치 잘 볼 것 등등…….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학이 탄생한 것이다.  

 

니체는 새로운 윤리학의 탄생에 그리스도교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믿는다. 『도덕의 계보학』의 세 번째 에세이인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니체는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닌 도덕적 가치들이 노예들의 심리적 속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 그리스도교적 도덕은 원래는 (노예들이) 피치 못해 받아들여 자신들의 속성으로 만든 것들을 도덕적 가치로 전환시킴으로써 만들어진 도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을 억압하고, 창조적 상상을 금지시켜 인간의 잠재력이 분출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너무나도 체제 순응적인 개인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필로그: 21세기 윤리를 향한 짜라투스트라의 제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첫번째 장에서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세 단계를 설명하면서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를 언급한다. 낙타는 전통적 인습과 도덕에 대한 굴종을 상징하는,“무릎을 꿇고 짐을 잔뜩 짊어지려는 정신[각주:10]이다. 종교적 권위와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인내와 복종을 거듭한 후 얻어진 형질이다. 하지만,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낙타는 짐을 싣고 수없이 많은 밤낮을 걸어 마침내 사막에 도착하였고, 사막에 이르러 그 모든 짐들을 무장해제시킨 채 사자가 되어 그동안의 자기를 부정하며 포효하기 시작한다. 니체는 이 대목에서 전시대와는 다른 인간, 다시 말해 더 이상 어떤 예속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정신의 자유를 부르짖는 근대적 인간을 선포한다.[각주:11]

 

하지만, 사자로 상징되는 근대적 인간은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자기 존재의 유의미함을 증명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지닌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태생적 근거로 삼아야만 하는 태생적 한계! 부정의 정신은 니체사상의 진화과정에서 허무주의로 발전하는 단초가 되었고, 허무에 대한 극복으로 등장하는 인간정신의 완성이 바로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절대긍정의 정신이다.[각주:12] 절대긍정의 정신은 후에 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니체계열의 자기윤리학의 바탕이 되는데, 이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진다.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윤리학을 자기의 윤리학이라 한다면, 레비나스-데리다로 이어지는 라인은 타자의 윤리학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레비나스와 데리다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도 니체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타자의 윤리학은 전개과정에서 니체계열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한다. 21세기 윤리학의 새 지형이라 할 수 있는 자기의 윤리학타자의 윤리학에 대한 차이와 비교는 다음 달 웹진에서 다룰 예정이다.

 


ⓒ 웹진 <제3시대>



  1. 니체, 『이 사람을 보라』, 김태현 역 (서울: 청하, 1992), 303. [본문으로]
  2. Ibid., 301. [본문으로]
  3. Ibid., 302 [본문으로]
  4.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는 사람 측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판단은 좋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학』 , 김태현 역 (서울: 청하, 1992), 33. [본문으로]
  5.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단순히 명칭의 차원에서라면 가장 좋은 삶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행복(Eudaimonia)이라고 한다”- A.E. Taylor, Aristotle, 이정우 역, 『아리스토텔레스』 (서울: 종로서적, 1986), 97. [본문으로]
  6.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대한 주석서들 가운데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드르 꼬제브(Alexandre Kojeve)가 쓴 Hegel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헌영 역, 한벗출판사,1981) 은 맑스와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노동과 죽음의 관점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독창적인 헤겔 주석서로 평가 받고 있다. 꼬제브는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되는 타자성이 근대성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였다고 밝힌다. 타자가 주체를 위한 거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체는 결코 주체일 수 없다. 주인은 노예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노예가 주인을 주인이라 부를 때 비로소 주인이 된다. 이렇듯 (헤겔식 근대적) ‘자기의식’이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 타자와의 투쟁,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 사유가 지니는 서로 다른 두 측면과 만난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이룩한 근대는 중세의 암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근대였지만, 헤겔이 발견한 근대는 주체와 타자가 여전히 분열된 상태로 남아있다. 즉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을 선사한 해방자로서의 근대이고, 또한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상징되는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 넣는 잔인한 몰이배로써의 이중성을 지닌다. 근대성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논의는 하버마스가 그의 저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4) 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와 같은 기억의 덕택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도달한 것이다. 아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고 불리는 모든 음울한 일, 인간의 모든 이러한 특권과 사치,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던가! 모든 좋은 것들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잔혹함이 있었던가!”- 니체, 『도덕의 계보학』 , 김태현 역 (서울: 청하, 1992), 70 [본문으로]
  8. 이러한 노예의 심리를 니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그의 정신은 은닉처를, 은밀한 길을, 뒷문을 사랑한다. 모든 비밀스런 것이 그에게는 자기의 세계로서, 안전과 위안으로서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법, 잊어버리지 않는 법, 기다는 법, 잠정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비굴해지는 법을 안다” – Ibid., 45. [본문으로]
  9. Ibid., 46 [본문으로]
  10. Friedrich. Nietzsche,「Thus Spoke Zarathustra」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138. [본문으로]
  11. “그러나 고독한 사막에 이르면 두 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자기 것으로 하고, 자신의 사막에서 군주가 되려고 한다.”- Ibid. [본문으로]
  12.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말해다오! 사자도 능히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아이가 할 수 있는가를? 어찌해서 약탈하는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결이요 망각이며, 새 출발이며, 유희이며,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의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고 하는 유희에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 Ibid., 13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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