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가 되었던,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가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발언이며, 신학이다. 어쩌면 모든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자의 편에서,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만 구성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 그러나 누군가는 죽었기에 - 그 '살아남음'을 해명해야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집중한 자는 사랑의 신학과 구원론을, "하지만 저들은 죽었군요."에 집중한 자는 심판과 징계의 구원론을 각각 열심히 구성했다. 그것을 통해 신은 높여지고, 우리도 신과 함께 높여진다. 그들은 구원론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권리를 누린다. "우는 자와 함께 웁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입니다."라는 사랑의 윤리조차도 살아남은 자들의 권리다.
우리가 죽은 자들의 편에서 구원론을, 혹은 신학을 전개할 수는 있는 걸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창조물이 거대한 죽음으로 엄습해올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 신은 어떤 신인가?(물론 이 질문은 하느님이 생사화복과 자연만물을 주관한다는 고백을 하는 이들에게 해당할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개인성이나 개별적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인연 속에서 빚어갈 뿐이라 사유하는 불교도에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불교가 이러한 죽음 앞에서 섣부른 악담이나 위로가 아닌 '빛나는 초연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신의 심판이나 악마의 놀음이 아니라면, 그 신은 무엇보다도 '무의미'다. 지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도래할 뿐인 것으로서 도래했다. 그렇게 절대적인 무의미로서, 해석되지 않고, 해석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은 임재한다. 죽은 자도 말이 없고, 죽이는 자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산 자들의 시끄러운 그 구원론들, 그 신학은 바로 이 죽은 자들의 '무의미성의 신학' 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삶이란 죽음 앞에서 삶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자랑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그림자로서 절대적인 무의미로서의 그 '신'이 따라다니고 있지 않은가. "I am who I am"(출 3:13)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그 신은 우리의 신학이 묘사하는 신의 모든 성품 - 심판하는 하느님이라던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같은 - 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이 모든 '의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자들로 하여금 살게 하는 위로이며,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다. "하느님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그런 위로와 도움을 낳게 한다면 기꺼이 우리는 그 말을 빈번하게, 확신에 차서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을 해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고, 우리의 의미들은 무의미에 빚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빚을 모두 죽음과 무의미가 탕감해 준 것이다. 죽은 자가 빚을 받을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신이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이 죽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앙과 종교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자유인이 된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만 '탕감받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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