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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난 (김창락)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1. 4. 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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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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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마가복음 15:33-35]

 
1.

1962년 미국의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을 때에 전 미주의 TV 방송은 한 시간 동안 흑색 화면에 “SHAME” (수치)이라는 자막만 띄워서 전국에 방영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일어난 마지막 일주일을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의 체포 - 재판 - 처형의 과정을 그의 고난/수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고난주간 중에는, 즉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활동하신 마지막 일주일 기간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단 한 건의 기적을 행하지도, 단 한 건의 자연계의 기이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예수의 저주 한 마디에 말라버렸다 (마가복음에는 그 이튿날에, 마태복음에는 당장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도함)는 예수의 기적 능력의 과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생명을 산출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영화 벤허에서처럼 예수의 운명 시각에 천지가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천둥번개와 더불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자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 바록 그것이 마가복음의 보도대로 예수의 주관적 체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 울리지 않았습니다. 낮중에 가장 밝은 시점인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현상은 처형 현장의 사람들에게 경외심이나 두려운 감정을 일으킬 자이한 자연현상으로 제시되었기보다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비참한 끝장에 접하여 눈앞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당혹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의 이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도한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실의에 잠겨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길손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들이 무슨 일을 두고 그렇게 침통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하고 길손에게 핀찬을 주었습니다. 그 길손은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활동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품고 가슴이 벅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기대와는 달리 바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벅찬 꿈은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는 벅찬 가슴으로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허탈한 심경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그의 허망한 죽음 때문에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유독 이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 - 더 정확히 표현해서 죽임 당하신 사건 - 은 예수를 따르던 처음 제자들이 극복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최대의 걸림돌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도된 대로 사흘 만에 일어난 부활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의 거리낌이 하루아침에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감추어서 없애야 할 거리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십자가 처형 때문에’ (because of the cruxifiction)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해석 작업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렇게 덧붙여진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들은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의 핵심으로 구축한 긍적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지마는 지나친 신학적 해석 일변도가 역사적-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은폐시키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3.

예수에 대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은 예수를 종말적 구원자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예언된 종말적 구원자 상(像)의 대표적인 칭호는 ‘메시야’였습니다. 이 밖에도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칭호로 지칭되든지 상관 없이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는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또는 세계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할 존재였습니다. 종말적 구원자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패배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종말적 구원자 상과 절대로 부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적 구원자로 믿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종말적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는 논리를 펼쳐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낯선 얼굴로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 (The Christ should suffer these things and enter into his glory.) 는 것을 증언하고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만일 하나님이 종말적 구원자가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데는 구원자가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그 일 자체를 필요불가결한 요건으로 설정하셨면 그러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디즘(sadism)에 사로잡힌 분이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임당하심이 인간 구원 사업의 필수요건이라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룟 유다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는 구원 사업의 필요불가결한 일등 공신으로 찬양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유다복음서> 같은 위경(僞經)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예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고 수행한 참된 제자로 내세웠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視角)으로 십자가 처형을 그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감사합니다. 멈추지 말고 좀 더 피를 계속 흘리시고 죽으셔서 구원 사업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과히 사디즘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4.

제2 이사야 (사 40-55장)에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한 시가가 네 개 들어있습니다. 특히 넷째 번에 나오는 시가 (사 53장; 정확하게는 사 52:13-53:12)는 고난을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하고 또는 어느 특정한 미지의 역사적 인물을 지칭한다고도 보며 미래의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유대교의 주석에서는 이 여호와의 종과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와 결부시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아주 일찍부터 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서 종말적 구원자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전도자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인 한 내시가 귀국하는 마차 안에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장면과 마주칩니다. 그가 마침 읽고 있던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내시는 빌립에게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입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은 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이샤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결부시켜 해석했음에 틀립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4절a)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5절a)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8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1절c)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12절e)
“그는 그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 (10절b)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겪었으며 그의 목숨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는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응보로서의 형벌과 죽음의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우리는 이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만으로 다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서 불의와 폭력의 희생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떠나서는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뜻매김이 내 이웃의 문제 해결에 적절하지 않다면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는 왜 그의 삶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성서의 어느 곳도 그의 예루살렘 행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에서, 무슨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또는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신학적, 종교적 목적 이외는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의 신약신학의 거장 R. Bultmann의 주장처럼 예수의 처형은 순전히 사법적인 오판(誤判)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이 예수를 제거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는 그의 생애 초두에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막 3:6) 예수의 적대자들의 이러한 모의는 마가복음 1:14-3:5에 전개된 예수의 갈릴리 선교 활동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이 자기네의 지배질서와 조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사정은 예루살렘의 지배층에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막 12:12; 14:1). 집권자들은 예수의 요구에 순응할 수도, 묵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현 사회의 무권자들에게 삶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선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사회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밑바닥 무지레기들이 하나님나라 잔치의 주빈으로 영접되는 것은 현 사회의 지배층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의 주동자인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6.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통, 고난, 재난, 불행 등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죄와 관련지어서 너무나 근원적인 차원에만 국한하여 다루기 때문에 이 문제의 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고통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고통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마땅한 응보로서 내리신 징벌이기 때문에 고통의 당사자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죄인에게 그의 죄를 각성하게 하여 그를 회개시키고 순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통의 매저키즘(masochism)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고난은 인격을 단련시키는 교육적 기능도 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 만연한 수 많은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것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성서는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을 우리의 우리의 인간됨의 주요한 임무로 명했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있든지, 다른 누구에게 있든지 상관 없이 - 따져 본 후에 도우라 하지 않고 그저 도우라고만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노역으로 신음하기 때문에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생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고통과 고난을 용인한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현 세상의 지배자인 파라오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7.

알베르 까뮈가 1947년 발표한 소설 <페스트>가 생각납니다.

알제리아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병은 급속히 번져갔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도시는 불가항력의 이 재난 앞에서 큰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문은 폐쇄되고 외부와의 왕래가 차단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특히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예수회 신부 파늘루 신부가 이 재난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극명하게 대조되는 처신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리외는 페스트라는 재난을 막기에 인간은 역부족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환히 알면서도,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을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하는 데 투신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내리는 천벌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라고 설교하면서 페스트와의 투쟁에 방관적 태도를 취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그들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의사 리외: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소. 그런고로 하나님 편에서도, 인간 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 소? 하늘로 눈을 돌리지 않고 말이오. 보시오,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 않소.”
신부 파늘루: “그래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나 당신의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 않소.”
의사 리외: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중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요.” 

리외의 투쟁은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보고 더욱 고양됩니다. 그리고 신부도 죄 없는 아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입장의 변화를 일으켜서 리외를 도와보건소에 봉사하게 됩니다. 리외는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얻게 되고 결국에 페스트도 일단 정복됩니다. 그렇지만 리외의 아내도, 늘루 신부도 페스트의 희생자 되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페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성문은 다시 열리고 오랑 시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뤼는 이 질병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할만한 것 보다는 감탄할 만한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글로 써서 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재난과 불행은 승산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맞서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원인을 밝히는 것은 문제 해결과 관계 없는 한 한가한 관념의 유희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신론자인 의사 리외의 자세가 신부 파늘루의 자세보다 훨씬 친인간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한다는 아이로니를 배우게 됩니다.


8.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죄악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전히 종교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것은 중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의 권리를 쟁취하고 수호하려는 데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어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경우에 우리는 그 희생되는 짐승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의 심정에 사로잡히지 그 짐승을 나쁜 놈으로 학대하거나 미워할 리는 전혀 없습니다. 이수현씨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사회는 그를 의인이라 칭송합니다. 이사야 53장 12c,d에 “그는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맡겼다. 그래서 그는 죄인으로 셈해졌다/여겨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그는 죄인들을 중재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 의인으로 칭송받아야 바땅하지 왜 죄인으로 셈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목숨을 바친 것은 인간 일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따돌림 받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지배자층은 그 사람을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의 하나로 지목하여 배척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도 이와 꼭 마찬가지 이치였습니다. 그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지목 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남의 고난을 퇴치하기 위하여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한다는 것을 뜻하지 인격도야를 위한 육체적 학대나 나 신비주의적 고행을 수행하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도들을 선동하는 그의 적대자들을 겨냥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갈 6:17) 라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상처 자국’은 예수가 당하신 고난의 길을 뒤따르는 데서 얻은 육체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승리의 상처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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