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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책: 서평] 거듭나야 할 동성애 혐오증 (이종원)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1. 9. 2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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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할 동성애 혐오증

 

 

이종원
(본 연구소 회원)



  동성애를 바라보는 눈

  “너 때문에 집안이 완전 개꼴이다. 더러운 자식!”

  지난해 방영된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의 대사다. 조카 태섭의 동성애를 알게 된 삼촌은 태섭에게 막말을 퍼붓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이 대사는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동성애를 다룬 주제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고 스크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개방되었다. 21세기에 성적 다양성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며 유교 사상이 뿌리박혀있던 한국 사회에도 성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교회문화는 아직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혐오스럽고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자체까지도 경기를 일으키고, 수치심을 유발케 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병적이며 죄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교회문화의 지배적 현실이다. 이러한 동성애적 혐오의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배타성은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동성애 혐오를 넘어 그 자체에 강한 죄의식을 심어 우리를 동성애 혐오자로 만들고 있다. 이런 보수적 기독교를 향해 "예수가 게이였다?"라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너무 뻔한 질문일 것이다. 어찌 감히 신성한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신성모독이다. 경박하다, 불경하다, 마녀사냥 하듯 그 발언을 한 사람을 향해 이단 시비가 휘몰아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불경스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난 이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기독교인이라면 필독서로 읽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방영될 때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안내기 운동까지 펼쳤던 개신교 보수단체들로선 ‘펄쩍 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이 책은 미국에서는 2003년 출간된 책으로 올해 동연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 시카고신학교 교수이자 퀴어 신학(Queer Theology·동성애 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제닝스 교수는 이 책의 기획의 의도는 동성애혐오와 게이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서 구절들을 우선 다루는 방어적 전략에서 벗어나서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오) 독해가 받을 만한 개연성보다 사실상의 ‘증거 우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즉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도를 밝히면서 복음서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전승들에 대한 탐구로,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논점들을 다루고 있다.

제1부 : 예수가 사랑한 남자

  ‘예수는 게이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지 않는다.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 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 전승인 성서 속에서 동성애에 호의적으로 볼만한 풍부한 텍스트가 있다고 제시한다. 예로 요한복음서에서 '제자'는 예수의 무릎과 품에 기대어 있었고(요 13:23, 21:20),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가족으로 연결된(요 19:25~26) 내용의 해석을 기존의 주류 해석학이 애써 숨겨 왔던 혹은 외면해 왔던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서사로 해석적 개입을 시도한다.

  제닝스 교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신약성서 내·외적 자료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결과 성서는 동성애 혐오적이 아닌 옹호적 서사임을 증명하고, 여기에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 등을 참조하여 연구하면 신약성서가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동성애자로서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한다.

제2부 : 예수 전승

  ‘백부장과 젊은 애인’ 일화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한다.

 “그는(백부장)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 그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소년애에 대한 관념을 전적비난하며, 그가 경험하는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동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서 한 유대인 치유사를 찾고, 거절과 조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사랑하는 소년 애인을 위해 도움을 청한다.”(p.257)

  또한, 제9장의 당혹스러운 젠더에서 거세된 남자들에 대한 일화중 에티오피아인 환관의 경우 “그는 경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고 ···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환관이 읽고 있던 이사야서는 특별히 신의 통치 안으로 환관(거세된자)을 포함한 바로 그 예언자의 책이다. 또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이야기”,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기는 전통적 젠더 역할의 전복을 권고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예수 전승에 대한 고찰로부터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이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제3부 :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식,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그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27)

  성서는 그 이름(예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라는 새로운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가족해체의 전복적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확대된 가족 공동체를 소개한다.

  사두개 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를 폐지해 버린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새번역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가족 제도에 대한 반대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인 결혼에 대한 의혹은 동-성애적 관계들의 수용에 부합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미래상을 증거하고 있다는 시각이 놀랍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의 특징이 되는 성애 혐오에 귀속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거듭나야 할 동성애적 시각

  역사적으로 성서는 노예제, 여성차별, 소수자에 대한 끝없는 학대를 정당화하고 지키는 근거로 성서를 인용해 왔다. 동성애 혐오를 지지하는 증거의 빈약함이 노예제 등 인종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많지만,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서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제닝스 교수가 동성애 혐오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교회의 입장이 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 전환자 등을 괴물로 만든 동성애 혐오증은 교회가 만든 신화일 뿐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자들의 평등을 부인하는 등 차별의 도구로 사용된 성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주장으로 거듭난 것처럼, 동성애의 보편적 혐오적 시각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했던 운동이 동성애의 보편적 금지의 시각에서 눈을 돌려 성서 속의 진정한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임 없이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맹목적 신앙의 장애물을 재거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교회에서 순종하라는 지배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에서는 “믿음이란 그저 믿는 것일 뿐”이라는 너무 파렴치한 순종의 신앙을 강요해 왔다. 믿음의 증거로 자발적 맹목의 신앙에서 벋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금지를 탈피하고 생각의 외연을 넗혀 나가면 보다 큰 믿음의 세계를 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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