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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타자에서 타자들로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1. 9. 2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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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타자에서 타자들로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왜, 복수적 윤리인가?

복수적 윤리는 니체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의 특색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통합된 주체가 아니라 분열된 주체이고,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기에 흔들리면서 가는 주체이며,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복수적 주체이다.[각주:1]

들뢰즈와 가타리는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아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욕망의 복수성’[각주:2]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우리가 다루었던 헤겔-프로이트-라깡으로 이어졌던 욕망이론과 축을 달리한다. 주인과 노예의 상호인정투쟁에 바탕한 헤겔의 욕망이론[각주:3], 타자의 오이디푸스화를 말했던 프로이트[각주:4],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욕구간의 괴리로 인한 결핍이 욕망의 동인으로 등장하는 라깡[각주:5]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있어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다. 욕망을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 파악하는 기존의 욕망 이론 속에는 이미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욕망이론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상실한 주체의 결핍된 무언가에 대한 수동적 반작용에 그칠 수 밖에 없다.

Gilles Deleuze (1925-1995)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에 반해 욕망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하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들이 찬양하는 욕망은 지난 세기 자본의 질주에 제동을 걸었던 이념과 계급의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오직 자본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고 자본의 질서만을 욕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만족을 모르는 자본의 욕망과 그것에 호명 당하는 인간의 운명! 이것이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욕망에 저당잡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그 욕망에 주목하는 걸까?

자본에 의해 영토화된 세상이 창조적 에너지의 흐름인 욕망을 통해 탈영토화 될 수 있음을 믿기에 그렇다. 욕망은 격렬한 분열적 흐름(schiz flow)이고, 본질상 정착을 거부하는 유목적 흐름(nomadic flow)이며, 체제의 관습과 기표에 갇히지 않는 기계적 흐름이기에 이를 이용하면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키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인성의 역동적 관계로 파악할 때 끌어들이는 성적 충동의 에너지인 리비도 개념에 가깝다. 넘쳐흐르는 리비도의 에너지를 자본의 탈영토화를 위한 영역으로 유도함으로써 자본의 가치증식에 딴지를 걸고, 리비도의 에너지가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는 정치적 실천으로 화할 수 있음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감지한 것이다.

본문에서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복수적 윤리’는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이론에서 착안하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인 분열, 흐름, 유목 등은 기본적으로 정주하지 않고 탈주하는 주체, 끊임없이 다성 다종의 타자들과 교신하고 접촉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복수적 관계, 복수적 윤리는 그런 주체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면대 면(面對面)’, 양자관계, 초월적 수직을 강조하는 레비나스 ‘타자의 윤리’를 횡적으로 확대시켜 ‘타자들의 윤리’라는 좀 더 폭이 넓고 개방되고 소통과 접속을 강조하는 윤리로 우리를 초대한다.[각주:6]


레비나스에 대한 도전

지난달 웹진에서 필자는 레비나스에 대한 유감을 다루는 단락에서 레비나스 사상 안에 깃들어 있는 주체와 타자간에 결성된 완고한 2항 관계와 급격한 초월성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자칫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의 경직성으로 변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그것은 전체주의를 야기시켰던 근대적 대칭성, 상호성, 동일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의식적 거리두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타자, 나와 똑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은 타자,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초월성)으로서의 타자를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지나친 ‘비대칭성’, ‘거리두기’, ‘낯설게 하기’가 오히려 윤리적 행위의 실천력을 후퇴시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가 타자인 이유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기에 타자인 것이고, 레비나스에게 있어 내가 주체인 이유는 비록 지쳐 쓰러져갈지언정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타자에 대한 면대(面對)를 포기하지 않는 주체이기에 내가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란 이렇듯 얼굴(주체)과 얼굴(타자)의 양자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조합되는, 나와 세상간의 복수적 관계, 복수적 윤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타자를 위한 존재’를 표방하는 본회퍼의 교회론은 복수적 관계,복수적 윤리를 지양하는 윤리형성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다양한 타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는 그야말로 복수적 관계의 총체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는 복수적 관계의 실험 내지 모범이기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또 다른 요소라 할 수 있는 디다케는 수동적으로 교회내 봉사로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그것이 대사회적 관계로 표출될때는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타자들의 입장과 처지를 섬기는 복수적 윤리의 형태로 전환되어야 한다.

몇 해전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데이빗 트레이시도 레비나스와 같이 근대가 지녔던 전체성의 폭력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레비나스의 ‘면대 면(面對面) 윤리’와는 다른 처방을 내린다: “근대가 제공했던 거대담론의 폭력에 의해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지배당했던 모든 사람들의 고난의 경험과 기억이, 은폐된 채로 자신을 드러내던 그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각주:7]고 말이다.

트레이시는 신이란 이해되거나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레비나스에 공감하나, 고난받는 타자들의 집단적 경험, 기억, 그리고 집단적 연대를 강조함으로서 ‘면대 면’ 윤리가 지닌 무한소를 향한 수렴을 무한대를 향한 발산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트레이시의 이러한 건의는 레비나스가 지녔던 완고하고 철저했던 윤리적 물음을 ‘산만하고 다양한 세계화된 세상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들로 나타나는가?’라는 복수적 윤리에 대한 기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복수적 윤리에 대한 제안은 기술문명에 바탕한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을 언급했던 발터벤야민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 발터 베냐민의 기념비적인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마치 현대의 첨단 테크놀로지에 바탕한 가상의 공간, 즉 인터넷 시대를 예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벤야민은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현상에 대해 회의적이고 여전히 예술작품이 지닌 아우라에 집착했던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자들과는 달리,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예술이 전통적 아우라의 개념을 파괴하여 새로운 미적 아우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한 진보적 이념과의 융합을 통해 사회변혁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예측하였다.

특별히 기술복제 시대 예술작품의 특징을 ‘free-floating contemplation’(탈향脫向, 산만함, 부유浮游함)[각주:8]이라고 지적한 그의 통찰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미리 보고 온 것처럼 정확히 그려냈다. 기본적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산만하여 인터넷에 떠있는 창을 따라 부유(浮游)하는 주체이고, 자본의 운영원리에 따라 모든 국경이 해체된 세상 속에서 유목하는 주체이다. 이제 우리의 의식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머무를 수도 없다. 첨단 IT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타자들과 교신하는 주체이고, 세계화로 인해 파생된 자본의 흐름을 따라 국경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수많은 타자들과 동시다발적으로 교제하고 연대해야 하는 주체이다.

복수적 윤리란 이렇듯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매체환경의 변화에 따른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변화, 신자유주의체제 밑에서 집요하고 처절하게 파멸되어 가는 다양한 인간 실존에 주목하면서 그에 따르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구성방식에 주목하는 윤리의 새로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지금까지 우리는 성의 차이, 세대 차이, 지역 차이, 계급 차이, 노선 차이 등 무수한 차이들이 자아내는 관계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엮어져 왔다. 그러나 그 차이를 하나로 엮었던 방식은 이제 그 기능적인 면에 있어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새로운 얼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현대사회의 복수적이고 산만한 관계속에서 얽혀지는 새로운 통합방식, 즉 일사불란한 통제가 아니라 타자들이 지닌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방식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이는 인간들은 상호간의 필요와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인격과 사회적 실존의 자리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다름이 존재 이유인 바 여성과 남성 그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인간성이 어떻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정, 노숙자들과 같이 나그네 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신체 장애자들과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변방에서 우짖는 목소리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전체성의 테두리에서 볼 때 동일성안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렀던 타자들,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면 호모사케르(Homo Sacer)이다.[각주:9] 하지만,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보편성 안에서 이와 같은 소수자들의 위치는 레비나스식의 ‘면대 면(面對面)의 관계’뿐 아니라, 다양한 횡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한다.

기독교 윤리는 막힌 담을 허무는 기독교 신앙의 변혁적 원리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라는 자기 동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자기 동일적인 페쇄성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가 그것을 보증한다(본회퍼). 그것은 모든 낯 설은 것 중의 가장 낯선 존재으로서의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자였던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을 한 인간을 통해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존재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타자성을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혹은 예루살렘이 혹은 율법과 도그마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할 뿐 아니라, 새롭게 획득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자리로 우리를 내몬다. 그 자리란 자본의 논리가 유일한 삶의 원리가 되어버려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균질화된 세상이고, 그 곳은 또한 세계화된 사회속에서 온갖 이유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의 상황에 놓인 복수적 타자들이 떨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기독교 윤리는 다시 쓰여진다.

ⓒ 웹진 <제3시대>


  1. 2010년 11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G, Deleuze. & F, Guattari,F.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xx [본문으로]
  3. 2011년 2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I)-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5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 2011년 3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II)-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6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 2011년 4월과 5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V)-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68)와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71)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6. 본서에서 필자는 ‘타자들의 윤리’와 ‘복수적 윤리’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직 더 예리하게 가다듬어야할 부분이지만, 기본적으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는 다른, 좀 더 폭이 넓은 윤리적 개념을 부각시키 위해 ‘타자들의 윤리’를 썼고, ‘복수적 윤리’는 ‘타자들의 윤리’와 기본적으로는 같은 의미이지만 레비나스적 색깔을 탈색시킨 개념이라 보면 무난할 듯 싶다. 굳이 ‘복수적 윤리’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타자들의 윤리’가 단순히 ‘타자의 윤리’에 글자 하나 더 붙인 개념이 아니라, 사상사의 지난했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렇다. 본서에서는 그 과정을 들뢰즈, 본회퍼, 트레이시, 발터벤야민의 순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7. David Tracy, On Naming the Present: God, hermeneutics, and Church (New York: Orbis Books,1994), 37. [본문으로]
  8.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26. [본문으로]
  9. 호모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의 책 제목이다.(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Stand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8). 직역하면 성스러운 者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자,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자이다. 체제가 체제밖으로 밀어낸 자들인 셈이다. 미국에서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호모사케르를 만날 수 있고, 외국인 유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필자 역시 호모사케르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별히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입국할 경우 (예를 들어, 한국 갔다 돌아올 때, 캐나다 쪽에 있는 나이애가라 폭로를 구경하고 미국으로 넘어올 때 등) 우리는 무슨 테러용의자 취급을 받으며 국경수비대들의 삼엄한 경계와 조사를 받는다. 미국의 지하경제(3D 업종)는 대부분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주로 멕시코에서 건너온)이 담당하는데, 이민국에서 불체자들의 수가 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불시 단속으로 들어가 이잡듯 불체자를 색출한다. 아마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해도 불체자라는 이유로 단순사고 처리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호모사케르는 너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자, 노숙자, 동성애자, 좌파빨갱이 등으로 말이다. 우리 모두 잠재적 호모사케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범위와 속도는 신자유주의 팽창과 더불어 빠르고 넓게 번져나가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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