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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실종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2. 10. 29. 00:35

본문

 

실종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때에는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될 것이다. 그 땅에서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서 살 것이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될 것이다.
―「에스겔서」 37,25

 

실패한 체제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바벨로니아에 의해 강제 유배된 이주민 집단들 내부에서 복잡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제국의 끝이 임박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이런 논쟁은 폭발적으로 활기를 띱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은 다분히 메시아주의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은 메시아적 열망을 부추기며 자기들의 미래 기획 속에 저들 대중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과거의 인물 에스겔의 상징성을 추종하는 사제집단들도 당대의 주요 정파였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미래 기획의 핵심은 군주 중심의 체제를 사제 중심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사제들의 공간(안뜰)과 평신도의 공간(바깥뜰)을 이분화하고 전자는 사제들이, 그리고 후자는 사제들의 지휘를 받는 레위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제 중심적 질서를 이룩하면 야훼의 영광(카보드)이 성전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회는 진정 회생하게 된다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이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로 귀환하는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리는 묵시적 상상이 「에스겔서」 37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죽어갔던 동족들, 아무렇게나 흩어져버린 그네들의 뼈들이 되살아나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유다국과 이스라엘국 백성이 하나가 되고 한 위대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위대한 족속이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한데 그 통치자는 다름 아닌 유다국의 군주 다윗입니다. 다윗의 통치 아래서 야훼의 백성이 다시는 쫓겨나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요.
한데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사제 중심의 성전체제가 미래 기획의 핵심인데, 그렇게 되면 군주인 다윗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이룩될 거라고 합니다. 에스겔 정파가 그리는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은 군주체제의 실패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얘기인 듯하지만, 실은 미래의 시나리오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미래에 귀향해서 구축할 사회가 다시 군주 중심의 체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유다국의 몰락은 군주체제의 실패이고, 하여 군주체제는 청산의 대상입니다. 하여 그들은 새 체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그 중심에는 군주가 아니라 사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순적인 얘기가 하나로 엮이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텍스트가 두 부류에 대한 포용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왕당파에 대한 포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대중입니다. 왜냐면 영원히 다스릴 군주가 다름 아닌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중이 다윗이 미래에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메시아니즘’이 바벨로니아 제국 말기에 유대계 유배민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 중심의 미래 기획이 실현될 때, 왕당파는 과연 이익이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에게도 이익이 있을까요? 상상하자면 왕당파는 사제 중심의 세력 재편과정에서 이익 분점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 분할 점이 어디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왕당파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중의 경우는 영락없이 토사구팽(兎死狗烹)될 운명입니다. 곧 권력재편이 이뤄지면 단순한 피통치자로 전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대중은 협상할 자신들의 이해를 제도적 언술로 명료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개 대중들이 품고 있는 언어는 열망의 언어이지 제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빼앗기지도 쫓겨나지도 않으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자자손손 지키며 사는 권리 같은 식입니다. 
제도의 언어가 아닌 언어들은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제도의 언어로 번안되어야 합니다. 가끔은 대중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번안 작업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최근 대선정국에서 각 대선후보 캠프에서 이구동성으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론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한데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세력들은 아직 번안하지 않고 단지 ‘조상이 살던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모호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가령 ‘희년제도’를 도입하겠다든지, 과거 요시아 정부처럼 지주들에 의한 착취와 착복을 억제하는 각종 제도를 시행한다든지 하는 제도의 언어가 원론적인 열망의 언어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호한 언어들은 제도로 실행되지 않고 ‘약속’으로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신체제가 모호하게 약속했던 많은 것들이 끝내 바람으로만 남겨졌던 것처럼 제도의 형태로 정착시켜야 하는 부담이 덜한 약속들을 짊어질 만큼 여유 있는 체제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열망의 언어가 메시아주의적 성격을 띨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메시아주의적 언어는 최대주의적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고강도의 열망을 외치면서 도래할 가상의 성취감에 몰입되어 있는 이들은 이 성취감만으로도 행복감에 충만히 젖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 감당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에 열정적으로 몰입합니다. 이 몰입 과정은 그이들을 정체 모를 희열에 젖게 합니다. 게다가 그 과제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인 경우 그 쾌감어린 열기는 불꽃을 일으키곤 합니다.
이쯤 되면 메시아주의적 열망에 젖은 대중은 길을 잃습니다. 자기들의 열망이 어느 것인지 되돌아볼 여유 없이 메시아주의를 충동질하는 이들이 제시한 과제에 맹렬하게 몰입합니다. 그리고 그 충동질한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곧 메시아주의적 열망이 성공한 권력에 흡수되었을 때, 대중의 그 열망은 흐지부지되어 지리멸렬해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리고 메시아주의는 실종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피지배자가 될 뿐입니다.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이 대중을 그렇게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문은 그렇게 메시아주의에 열광하는 대중을 선동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염원했던 것과 같은 사제 중심적 체제가 몇 세기 후에 실제로 구축되었습니다. 하지만 실현된 사제 중심적 체제가 에스겔을 추종하는 사제집단의 직접적 후예들은 아닙니다. 다만 그이들의 신학을 후대의 체제는 적극 활용했습니다. 한데 이 체제에서 대중은 아무런 이익 분점의 주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세 명의 유력후보들은 예외 없이 경제민주화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알다시피, 지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무수히 많은 대중을 몰락하게 했고, 대부분의 대중으로 하여금 잠재적 몰락자가 되게 했던 것 때문입니다.
대중은 심각한 고통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대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안 부재의 상황에서 대중사회에는 메시아주의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 명의 유력 후보 중 둘은 그러한 대중적 메시아주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박정희 메시아주의와 노무현 메시아주의 말입니다. 또 안철수도 유사메시아주의 혹은 원초적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는 ‘팬덤’ 현상의 주역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대중은 절망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 명의 대선후보들은 이런 메시아주의적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에 관한 한, 안 캠프와 문 캠프는 ‘잘 준비되었는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도의 언어로 번안하려는 데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그것은 집권 이후 어떻게 해서든 실행에 옮겨야 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박 캠프는 모호한 원칙적인 말만 되풀이합니다. 더욱이 그런 대중을 향해 박 캠프는 NLL논란 같은 논거 없는 북풍에 대중을 동원합니다. 어쩌면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메시아주의적 대중은 벌써 그이들이 고통 속에서 품어온 메시아주의적 열망을 실종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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