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일상의 미술 이야기(1)] ‘만만한’ 예술가 (김현화)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3. 2. 26. 04:33

본문

[일상의 미술 이야기(1)]

'만만한' 예술가

김현화
(연구소 회원,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얼마 전 끝난 대선 이후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내가 찾아 읽는 몇몇 신문에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인터뷰 내용으로 시작해 민심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나, 시대정신을 오독한 것이었나, 또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분석의 말들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영화 <레미제라블>을 찾아보며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기에 바쁘다.
이런 와중에 나는 다소 뜬금없이 내가 아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직업적 예술가도 아니고, 게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르며,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평범한 이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를 굳이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은 소소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요셉 보이스에 동의해 왔던 내가 나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보이스가 “모든 사람은 조각가(예술가)이다”라는 한마디 말로 모든 이의 깊은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예술성을 불러 깨우고 있듯이 말이다.

너의 두상은 나의 초상이다

소개하려는 이 예술가는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나의 유학길에서 만난 친구이다. 지난 석 달간 우리는 함께 조소 과목을 수강했는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일대일로 마주보며 서로의 두상을 진흙으로 빚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수업에서 두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수강자들은 진흙으로 작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고, 이런 이들에게 실제 크기의 두상작업은 부담과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모델이 있어 계속 바라보고 관찰하지만, 그래서 이제 자신의 모델에 대해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정작 그대로 빚어내는 일에선 문제가 달랐던 것이다. 결국, 바로 앞에 모델이 있고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측정도 하면서 작업했건만 많은 두상들은 실상과 점점 더 멀어져가기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실상과 멀어져 갈수록 웬일인지 이들의 작품에 대한 몰입은 놀랍도록 깊어져 갔다.
그러던 중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주 수업을 못하게 된 교수가 내게 수업을 맡기게 되었다.  사실 조각을 공부했던 나는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이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모델을 과학자처럼 잘 관찰하고 충실히 표현하라. 너희는 다른 사람의 두상을 만들고 있으나 결국은 자신의 초상이 될 것이다”는 말 이외에 수업이 진행되는 2-3 시간가량 이렇다 할 조언을 주지 않던 노장의 교수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대상을 보고, 관찰해야하는가에 대한 충분하고도 화려한 설명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먼저 조각이란 수십 수백의 다른 각도,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으니 작품을 돌려가며 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작업자 본인이 작품 주위를 계속 돌면서 작업할 것, 또 이때 특히 주의를 기울여서 두상에서 보이는 갖가지 작은 산(convex)과 웅덩이(concave)를 찾아낼 것을 주문했다. 이와 더불어 조각과 공간의 관계, 조각이 위치한 공간 속에서 조각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조각적 공간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들이 두상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고, 회화적 관점을 극복하여 3차원적 조각을 해나가길 바랬던 것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나의 짧은 강의가 끝났고, 각자 작업이 이어져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 이제 좀더 정확하게 대상을 보며 작업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나의 설명에 모두 동의하고 귀 기울이고 이해한 듯 보였던 이들이 이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하던 그대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콜롬비아에서 온 어떤 이는 자신의 모델이 웃을 때마다 드러내는 얼굴 주름을 포기할 수 없다며 그것에 매달렸는데, 그 결과 젊은 모델의 두상은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고, 모델이 되어준 이는 불만이 가득해 두상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저쪽 각도에서 보면 이 주름이 조금 다르게 보이니 이러저러하게 고치면 좋지 않겠는가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수정된 주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델의 주름은 이와 다르다는 이유였다. 작업실 전체가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이러는 중에 나의 친구도 한 쪽 구석에서 작업으로 고심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작업에 몰입했는지 주변 세상을 잊은 듯한 그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여 성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만들고 있는 두상은 충격적이었는데, 그것이 실제 모델의 두상 크기보다 많이 작은데다 뒷머리와 이마 부분이 함몰되어 있었고, 두 눈 사이는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누가 봐도 코와 입이 많이 비틀려있어 얼굴 전체가 균형 잡힌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의 모델은 아름다운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옆으로 다가간 내게 자신의 작품이 “실제 모델의 모습이나 분위기와 많이 다르고 뭔가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한다. 한 발짝 뒤에서 보자고 했으나 그래도 모르겠단다. 동의를 구하고 오른쪽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볼에 소량의 흙을 살짝 덧대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지 못하고 있었다”며 탄성을 내더니 연이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른 부분들까지 찾아내며 고쳐가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완성된 두상은 바이올리니스트의 편안한 미소가  드러나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실상을 제대로 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그런데 보는 것에 실패를 거듭했던 우리가 ‘본다’는 행위를 조금씩 수정하며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면 실상을 보는 일에 더 가까워지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어쩌면 ‘본다’는 것이 짧은 눈깜빡임처럼 한 순간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겠다. 


핀란드인인 이 친구는 사실 어릴 적에 부모에게 버려져 양부모에게 입양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그의 친부는 일찍 사망했고, 친모 역시 알콜중독자로 어려운 삶을 살다가 2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종종 이 친구는 친모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고 한다. 양부모는 그를 입양하기 전에 이미 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었고, 그는 양부모뿐만 아니라 이 자매들과도 연락을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그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굴곡진 삶의 역사가 마치 그가 만들던 기이한 두상처럼 그로 하여금 실상을 왜곡된 상으로 보게 하고 그렇게 표현하도록 몰아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행위)이 우리 삶에 어떻게 말을 걸고 파고드는지를 말하려고 한다.
두상 작업을 만족스럽게 마친 후에 이 친구는 수년간 소식이 끊겼던 양모를 어렵게 만나 몇 일간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양모를 만나는 동안 웬일인지 내가 만든 두상이 계속 생각났어. 그런데 이상하지. 양모가 아주 다른 관점에서 보이더니 그녀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는 내가 그토록 믿지 못했던 양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지. 이제야 나는 진짜 엄마를 갖게 됐어.”

몸속에 흐르는 예술, 유익한 기억

흔히 일상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믿지 못할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과거의 경험이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저장되기 일쑤이고 현재 시점에서 다시 불릴 때는 실재와 다소 다르게 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지난 경험에 대한 기억은 기억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돕기도’ 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의 두상을 조각한 나의 친구는 ‘본다’는 행위의 필연적 착각 혹은 착오를 침묵의 관찰로, 관찰을 유연한 자기변화로 이어갔다. 이 순간 그에게 예술은 기억처럼 저장되어 그의 몸속에서 생명체처럼 이리저리 흐른다. 이때 ‘기억은 그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된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예술가란 누구인지 고민했던 19세기 말엽 조각가 Hans Brandstetter는 비엔나에서 만난 당대의 사상가에게서 시를 한편 받게 된다. 이 시의 한 구절이다.

...... To bring life and spirit
 to dead and rigid matter
 is the aim of the artist...(중략)

죽은 듯 단단한 물질에 작가적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는 것은 굳어져서 좀처럼 그 흐름이 바뀌지 않는 우리의 사고에 생명의 온기와 유연함을 되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저 관점으로 넘어가는 작가의 유연한 발걸음은 고집스럽고 딱딱한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쌓아올린 차가운 흙덩이를 온기 있는 예술품으로 만든다.
이쯤 되면 본다는 것이 더 이상 안구에 맺히는 이미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이 보는 것을 수정하며 새로운 보기의 각도를 넓혀가는 모든 이들이 예술가로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대선 이후 분분한 말들 속에서 많은 이에게 필요한 건 경직되고 무딘 사고를 말랑하게 만드는 예술가가 되는 일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