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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 ‘실재(the Real)’에 관하여1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3. 7. 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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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세계철학사’(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 著)와 ‘수학의 정석’(홍성대 著)

대학 신입생때 이런 저런 철학사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때는 흔히 빨간책이라 불리던 요한네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많이 읽었다. 철없던 시절 묵직했던 그 책을 허리춤에 무슨 훈장마냥 끼고 다니며 허세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에서 간행한 10권짜리 <세계철학사>였다. 중원(출)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훌륭했으나, 필자는 후자를 더 좋아했다. 대부분의 철학사책들이 관념론적인 입장과 서양철학사 위주로 기술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소련에서 나온 철학사책은 맑스와 레닌의 후예들답게 유물론적 전통에서 기존의 철학사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동양철학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신.구약 개론시간에 역사비평학을 배우면서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며 충격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느꼈던처럼,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는 그런 의미로 내게 다가왔었다. (문득,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은 어떤 철학사책을 읽는지 궁금해지네…)
예나 지금이나 철학사책을 처음 넘기면 으레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순서가 먼저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등등의 주제가 먼저 소개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던 그 무렵 등장했다는 수많았던 철인들의 발언을 접하며, 나는 철학에 대한 흥미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들이 토해내는 친절하지 않은 개념의 홍수에 치여 질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는 잠시 책을 덮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들고는, 또 다시 휘청거리다 덮고, 다시 펴곤 하던 행위를 반복했었다. 마치, 새학기가 시작되면 수학 정석책 처음부분인 집합편과 방정식부분을 반복하다 보면 그 부분만 손때가 묻어 빛이 바랬던 것처럼, 내가 읽었던 철학사 책의 고대 그리스편과 칸트와 헤겔편이 그랬다.


너무나 오래된 질문, 실재!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논의 역시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 그들 사상의 근거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고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을 요약하는 상징적인 문구가 있다. ‘일자(一者)와 다자(多者)논쟁’이 그것이다. 일자측을 대표해서는 파르메니데스가 나오고, 다자측의 대표선수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변화와 운동을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확고부동한 일자의 존재를 신봉했으며,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something) 있는가?’라는 문구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서양 관념론을 대변하는 아포리아가 된다. 그 something 을 둘러싼 해석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시작이었고, 그 something을 서구철학에서는 실재라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하였는데, 아마도 그 공인 시기는 플라톤 이후가 아닐까 싶다.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젝의 실재에 대한 언급에 앞서 전체 철학사의 지형속에서 실재론의 기원, 전개과정 등을 언급함이 마땅한데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솔직히 말해 그만한 깜양도 안되고. 비록 전체 실재론의 역사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 글에서 적어도 본격적으로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잠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칸트의 실재(물자체)는 현상과 절연되어 있는 반면, 지젝이 말하는 실재는 현상 곳곳에서 출몰하는 그 무엇이다. 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그물을 찢고서 섬뜩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인 것이다. 실재를 타자로 번역하면 그 의미는 더 확 다가온다. 칸트의 타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있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이고, 지젝이 말하는 타자는 내 안에 있는 타자, 즉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씹어먹고 갈아먹어도 여전히 우리를 허기지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칸트와 지젝 모두 실재를 언급하였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실재에 대한 상이한 발언은 후에 전개되는 주체에 대한 논의, 그리고 본인들의 신학과 윤리학에 대한 서술에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재

전체 철학사의 흐름속에서 통상적으로 칸트가 성취한 업적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빛으로 이어졌던 무한(신)과 유한(인간)사이 통일성을 깨뜨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현실(경험)의 영역과 우리가 알 수 없는 경험 밖의 영역을 갈라 그 경험 밖의 영역을 칸트는 물자체라 칭하였다.
물자체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50m 밖으로는 수영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가정하자. 고작 50m 수영하고 돌아온 한 인간이, 50m를 수영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평선 너머 수십 km를 수영해야 닿을 수 있는 어느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담화는 맞는 것일까? 칸트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이 저지른 오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상속의 그대(실재)를 둘러싼 짝사랑이 결국 서양정신의 역사였다면?” 칸트는 정직하게 그 물음에 대해 ‘Yes”라 시인하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실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과 도착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이므로, 이제 그만, 그 변태적 행위를 중단하자! 이제 그만, 현실의 사태에 대한 규명에 있어 신의 은총과 신의 자비가 아닌, 불완전하고 미흡하지만, ‘나의 경험과 판단과 인식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니냐?’며 칸트는 그 동안의 서구정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인간은 칸트에 의해 줄 끊어진 연이 되었고, 하늘에 떠있던 연과 땅에서 연을 날리던 소년.소녀와의 일체감은 종료되었다. 하늘에 떠 있던 연이 물자체였는지, 땅에서 연을 날리던 그 소녀,소년이 물자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제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는 안 되는 운명이 되었다. 신화상에서 존재하던 에덴 이후의 삶과 바벨 이후의 삶이 칸트에 의해 일상에서 섬뜩하게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여기까지가 필자가 좋아하는 칸트씨입니다)


칸트의 반전

하지만 서구정신에 대해 이처럼 가열찬 칼부림을 감행하던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빛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인 주장에 대한 첨삭을 시도한다. 칸트는 현실의 사태를 진단함에 있어 계시의 음성이 아닌, 인식의 틀, 즉 범주(예:양, 질, 관계, 양상)의 보편성을 끌어들인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초월적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말하는 급격한 이원론에 바탕한, 현실을 초월한 어떤 영역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초월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플라톤류의 초월은 급격한 초월인 경우이고, 약한 의미의 초월도 가능하겠다.
예를 들어, 북한의 카드섹션을 상상해보라. 얼마 전 CNN뉴스에서 북한 관련 뉴스를 보는데,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수 만명의 북한 인민들이 모여 카드섹션을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주제는 주로 사상적인 것으로 사회주의 우월성, 내지 반미, 반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김정은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현실을 초월한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능라도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북한인민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것은 분명 조금 전 카드섹션에서 보여준 보편적 주체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일사 분란했던 대열이 와해되고 산종되면서 흩어지는 개별적 주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완벽한 카드섹션을 연출하려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원과 도구에 대한 계산, 인물들의 위치설정과 구성원 전체의 정확한 타이밍 포착 등이 필요하다. 어떤 강력한 보편성이 그 카드섹션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보편성을 어기는 개별적 존재가 등장할 때 카드섹션은 망가지게 된다. 보편적 게임의 원칙과 그 보편성에 입각해 수 만명의 인민에 의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되는 카드섹션!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기운에 대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다른 의미의 초월적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칸트가 비록 그간의 서구형이상학 특유의 초월적 이성에 대해 용도폐기를 선언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사건과 증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망(범주)을 설치했다 함은, 개별주체에게 인식일반에 대한 보편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카드섹션을 지배하는 보편적 룰과 같은 초월적 기재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은 아닐런지! 바로 이 지점이 칸트의 이율배반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인식너머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던 칸트는 그 경험적 인식의 엄격함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범주의 영역, 즉 라깡적 의미의 상징계를 설정하였고, 비록 물자체로서의 실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약한 의미의 초월적 룰에 대한 재소환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칸트는 서구 초월철학의 강력한 자기장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칸트는 ‘초월’씨의 앞문을 멋있게 박차고 나왔지만, 나중에 소리도 없이 그 집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다시 기어들어가는 궁색한 모양새의 칸트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본인이 훼손한 실재에 대한 보충과 첨삭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호기 어렸던 칸트 초기 실재론에 대한 궁색한 미장센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면 칸트에 대한 몰지각하고도 예의 없는 발언일까?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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