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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지젝과 신학 (I): “신은 죽었다” Vs. “신은 무의식이다”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3. 9. 17.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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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과 신학 (I)
: “신은 죽었다” Vs. “신은 무의식이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

몇 해전 30대 이상 미국 남녀에게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물었더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언뜻 생각하면 사랑하는 부모, 아내, 남편,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해, 정말 사랑해~ 너와 함께 한 이생에서의 삶은 다시 생각해도 최고였어!’라는 숭고하고 가슴 벅찬 말을 할 것 같은데, 성인 남자들의 답변은 남아있는 최후의 4시간 동안 ‘본인의 개인용 PC 하드 안에 저장된 포르노를 다 지우겠다!’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여자들은 화장대 서랍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자위기구들을 제일 먼저 처분하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남녀 공히 높은 순위에 있었던 항목은 이메일에 남겨져 있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나눈 은밀한 대화, 혹은 사랑의 연서를 지우는 것이었다. 종합하면, 최후로 남겨진 이생에서의 4시간 동안 우리는 불륜의 흔적을 지우고, 내 욕정과 쾌락의 흔적을 찾아 말살한 후, ‘나는 비교적 정결하고 하자없는 사람이었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다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는 뜻인데... 
뭐 그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서구인들이라 ‘새삼 정결하고 정숙하게 보이려 애쓰지 않으리라!’예상했으나 (신앙 생활 열심이라는 한국 크리스챤들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까지는 드러내지 말자!’라는 의식이 그들 뇌리에 여전히 잠재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나를 살짝 놀라게 했다. 이 글을 읽는 한국에 있는 독자들은 4시간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신의 죽음

서구정신사에서 니체만큼 매혹적인 인물이 있었을까?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기관차처럼 종말을 향해 겁없이 달려가 막다른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바로 니체다. 이런 이유로 일찍이 푸코는 그 부서진 니체의 파편이 천 개쯤 될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니체는 그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서구 근대를 향한 본인 특유의 돌직구를 날리기 시작했고, 갈수록 구위가 날카로워지더니 급기야는 본인 사상의 후반기로 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을 수없이 마구 퍼부었는데, 그것의 최종 판본이 “신은 죽었다”[각주:1]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 신을 ‘우리가 죽였다(we have killed him)’라는 니체의 고해성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겁없이 니체가 위와 같은 위험한 발언을 할 수 있었지?’ 물론,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는데, 이는 서구 근대화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니체의 발언이 독하긴 했지만)

왕의 죽음

근대적 주체는 신을 죽이기 이전에 이미 왕의 목을 벤 전력이 있다. 프랑스 인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이 그것이었다. 왕의 폭정에 맞서 파리의 시민들은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1789). 민중들의 행보에 불안을 느낀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은 프랑스 인권탄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구제도(앙시앵 레짐)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된다.
시위가 탄력을 받자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인권 선언문에서 제시된 천부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 언론.출판의 자유 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민주적 시민사회 운영 원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혁명을 진압하려 하였다. 더욱이 루이 16세는 본인을 향한 국민적 저항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왕후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은밀하게 국외망명을 시도하려다 발각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국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일부 세력들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면서 정국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데…
임기 2년의 국민의회가 끝나고, 제한선거와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근거하여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고,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개발로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 중심의 신흥 부르지와 계층과 봉건제의 폭정과 불합리에서 벗어나고픈 부농들이 결합한 지롱드 파가 대두하여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역의 기운에 대한 수구세력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기존 구질서에 종속되었던 세력들과 주변국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이 본인들에게 미칠 파장에 대해 경계하였고, 혁명의 진전을 방해하려는 공작을 도모하였다. 정국 상황이 이렇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프랑스 인민들은 왕궁을 습격하여 왕권을 정지시키고 공민공회를 조직한 후에,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을 선포하였다.(제 1공화정, 1792). 그리고, 그 다음 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1793, 1).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이다.[각주:2]

"느낌 아니까~"(개콘버전으로)

자고로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의 지위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왕권신수설’에 입각해 있었던 사회였던지라, ‘인민의 손으로 왕을 처단했다’ 함은 그 동안 우리사회를 지탱해주었던 왕의 법과 하늘의 도에 대한 폐기처분, 내지 사망선고와도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고, 이는 더 나아가 신의 죽음까지도 감히 도발케 하는 담력과 욕망을 근대인들에게 제공하는 빌미가 되었다. 실제로, 물리적 왕이 제거된 지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니체는 ‘신은 죽었다’(1882)라고 선언하였다. (개콘버젼으로, ‘느낌 아니까~’)
이렇듯 그 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던 신적인 원리와 선험적 중심의 균열을 지켜보며 19세기는 세기말적 불안과 공포속에서 사라져갔고, 그 균열과 텅빈 중심을 예감하며 20세기는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라지는 중심은 비어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다. ‘내용 없는 중심’이라는 근대성의 새로운 공리는 그 비어있는 중핵을 채우려는 분투들을 야기시켰는데, 지금 회상해보니 근대의 정신이란 당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했던 탈중심화된 개별적 사상 혹은 그것들이 지닌 특수성을 아우를 수 있는 있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담론형성의 원칙 뭐 그런 것 아니었나 싶다.
에덴을 떠나간 하와와 아담 이후 후손들이 다시 무리를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탈향을 극복하면서 삶을 지속해갔던 것처럼, 바벨 이후의 자손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내동댕이쳐진 서늘한 그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진 천형이라 할 수 있는 방언을 세워나갔던 것처럼, 사라진 왕의 자리와 神의 이름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어야 했고, 이에 대한 답으로 근대는 최종적으로 ‘주체로의 전환 Turn to the Subject’이라 말을 고안해냈다.
막스 베버는 이를 ‘근대의 숙명’으로, 맑스주의는 이를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프랑크푸트트 학파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하버마스는 ‘대화적 합리성’으로 각각 달리 표현했지만, 이 독일의 사상가들의 뇌리에는 공히 그 텅 빈 중심을 향한 집착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점이 현대의 프랑스 사상가들과 대결하는 대목이기도 하고) ‘20세기는 이런 주체성의 한계가 어느 선까지 가능한지 실험되었던 장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지적일까?

지젝이 던지는 화두

지젝은 20세기 내내 실험되었던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근대성 전체를 관통하는 주체성이라는 코드의 상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허무를 지적하면서,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살아 남아야 하는지? 어떻게 다시 사회를 조직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한 법과 정치의 형태는 무엇인지? 냉소가 판치는 이 시대에서 새로운 윤리적 전략은 무엇이고, 신의 무능과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이 시대에서 우리는 신학에 어떤 말을 다시 건넬 수 있을지?’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다.
니체 이후 현대인들은, 아니 엄격히 말하면 갈릴레오가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던 그 무렵부터, 칸트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던 빛의 단절을 선언하며, 인간 경험 너머를 알 수 없는 영역, 즉 물자체로 선포하던 그 무렵부터, 신은 사실상 죽었던 것은 아닐까? 이미 그때부터 대타자의 붕괴는 감지되었고, 빈틈이 없었던 城의 어느 구석에서부터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간극은 매울 수 없는 현실의 질서가 되어버렸고...
그래 맞다. 돌이켜보면, 이미 신은 오래 전부터 쭉 그렇게 죽어있었다. 신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마치 똥 싸놓고 뭉개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태연히 현실의 놀이에 몰두한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지젝의 신 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젝과 신학>을 시작하며

하지만, 대타자의 균열을 충분히 분명히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일말의 불안이 우리에게는 있다: “신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우리는 신의 부재를 알고, ‘그 신이 과연 본인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랑가몰라~’ 하면서 신을 조롱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 불안이 숙주처럼 잠재해 있다. 그렇게 그 불안은 숨어있다가 ‘4시간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포르노 파일을 지우고, 자위도구를 없애고, 애인과의 불륜의 흔적을 제거하는 무의식적 행위를 하게끔 하는 동인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지젝은 라깡의 말은 빌어와 “신은 무의식이다”[각주:3]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설에서부터 다음 원고는 시작될 것이다)

이번 웹진부터 <지젝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한다. 흔히 지젝의 신학을 유물론적 신학, 유물론과 신학의 조화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렇듯 조야한 나의 지젝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젝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려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씁쓸한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이제는 신학에 대해, 한국교회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이 서글픈 현실 속에서, 전통적인 신 담론에 입각했던 교회의 타락을 ‘대타자의 붕괴’, 혹은 ‘실재의 균열’로 이해하고, 그 균열과 붕괴, 그 연약함과 불완전한 지점에서부터 다시 신을 바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젝을 통해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구원의 패러다임을 다시 꿈꿀 수 있다면………정말 좋겠다. <계속>

ⓒ 웹진 <제3시대>

 

 

  1. “God is dead. God remains dead. And we have killed him. How shall we, the murderers of all murderers, comfort ourselves?”- Nietzsche, Friedrich., “The Gay Science 125” in The Portable Nietzsche, Edited by Walter Kaufman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8), 95. [본문으로]
  2.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제1공화국 이후 등장했던 나폴레옹 시대가 몰락한 후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은 빈 회의(1814-15)를 개최하여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원칙하에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회귀시키려 하였다. 그 일환으로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여 다시 ‘앙시앵 레짐’으로 복귀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프랑스 시민들이 다시 봉기하여 민주주의를 사수하면서 제2공화정 수립을 향해 다시 피 눈물나는 혁명을 감행하는데…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바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이다. [본문으로]
  3. Lacan, Jacques.,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ed. Jacques-Alain Miller, tr.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78), 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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