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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2] 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지 않는가? (배근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2. 28.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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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지 않는가?

- 기억의 정치학, 기억의 신학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 미국에서 한국 전쟁을 지칭할 때 많이 쓰이는 관용구입니다. 왜 한국인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미국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였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일까요? 한국 전쟁은 한국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수많은 젊은 미국인들을 목숨 또한 앗아간 전쟁인데도 말입니다. 201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의 공영 방송 PBS에서는 ‘잊을 수 없는 한국 전쟁 (Unforgettable Korean War)’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이 80분 짜리 다큐멘터리는 참전군인들이 미국에 돌아 온 이후, 일생 동안 겪었던 또 다른 전쟁을 들려줍니다. 장진호에서 중공군과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 동료들을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과 살인에 대한 죄책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전쟁에서 돌아 왔을 때, 일상으로 돌아 가라는 가족과 친구들. 그 잊혀짐 속에 홀로 남은 기억하는 자들의 이야기. 한 참전군인들은 이렇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기차 역에 내리니, 마중 나온 가족들이 하나도 없더군요. 모두 일을 하러 갔어요. 저 혼자 택시를 타고 동네 입구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 가다 친구 녀석을 만나죠. ‘지미, 자네 어디 갔나 오나?’ 친구가 묻더군요. ‘한국 전쟁에 갔다 왔어.’ ‘그래? 얼른 쉬고 내일부터는 일 좀 해야지?’”
          한국 전쟁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전쟁입니다. 미국은 전쟁 발발 직전, 케네디 대통령을 잃었고, UN의 동의안을 얻지 못한 채 나간 전쟁에서 10년을 싸웠고, 나라 안팎으로 반대 여론에 고전하다 결국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전쟁과 비슷한 방법으로 밀어 붙였는데, 실패했으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중 반전 시위에 동참한 저널리스트, 사진 기자들,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미군이 베트남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유린의 증거들을 열심히 퍼 날랐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이 라이 마을 학살’입니다. 한국 전쟁 중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과 유사한 사건으로, 1968년 미군은 월남에 위치한 어린아이, 노인, 여성 할 것없이 마이 라이 부락민 347—547명을 학살하고, 여성을 집단 강간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마이 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진 1969년, 베트남 반전 운동은 더욱더 거세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이 라이를 기억하는 미국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재미 베트남 기독교 윤리학자인 조나단 트랜 (Jonathan Tran)은 그의 책, ‘베트남 전쟁과 기억의 신학 (The Vietnam War and Theologies of Memory)’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마이 라이를 비롯한 양민 학살 사건과 베트남 전쟁 자체가 조작된 전쟁이란 것을 기억 속에 묻어 버린 채, 미국이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만을 기억한다. 미군들이 겪었던 정글에서의 고통, 그들의 희생과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전쟁 고아 탈출 작전 등, 미국이 기억하는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한 미국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함께 베트남 전에 참전한 한국은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베트남인들에게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도 않고,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베트남 전쟁이 한국 전쟁 후 여전히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월남을 남한과 동일시 하면서 국내적으로 반공의 기치를 강화하고, 박정희 군사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월남 파병을 통하여 고질적인 실업 문제와 외화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우수한 신무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큰 수확입니다. 하지만 고엽제로 고통 받는 월남 파병 군인들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겨우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입니다. 그나마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소수에 불과합니다. 한국군들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과, 베트남 여성 강간 사건, 베트남 종전 후 남겨진 라이 따이한들.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한국인들은 분개했습니다. 반미 사상, IMF와 맞물려, 한국인들은 눌린 자로써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분분투했습니다. 이 즈음에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을 알리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노력은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에겐 잊혀진 전쟁이 된 베트남 전쟁을 재조명하고, 반성하려는 기회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만적인 미군을 한국군과 동일시한다는 비판만 받았습니다. 한국은 잊었을지라도, 베트남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군의 양민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잊은 한국 전쟁을 한국이 기억하는 것 처럼, 우리가 의도적으로 잊은 베트남 전쟁을 베트남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의 잘못을 물을 것입니다. 이 기억의 형벌에서 구원받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조나단 트랜은 기독교의 성찬식을 전쟁의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성찬식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예수의 평화를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희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쟁은 결국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와 같은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 우리의 삶이 안정되고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조직적인 망상에 기인합니다. 성찬식은 전쟁이 주는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일깨워 줍니다. 즉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 영원한 삶과, 평안의 주체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간 수많은 이름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죽음을 파괴하신 부활의 예수와 함께, 우리는 죽음의 전쟁을 거부하고, 이 세상을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누룩과 같은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러 오신 예수가 아닌,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화해하고, 삶을 즐기는 자리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의 억울한 희생자들이 살아있는 이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화해하고, 삶의 축복을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역사의 억울한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전쟁으로 몰아 넣는 국가 권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 권력이 우리의 기억을 두려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와 종교 권력이 우리의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서 예수의 희생과 전쟁의 희생을 동일시 할 때, 역사 속에 켜켜히 쌓인 희생자들을 지워 버리려고 할 때, 우리는 반드시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억의 정치학은 저항의 정치학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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