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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너는 안다, 침묵 하나에-주검 하나 (유승태)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4. 4. 30. 00:47

본문

                            너는 안다, 침묵 하나에-

                            주검 하나[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한백교회 전도사)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야」 53장 4~6절

 

1.

지난 16일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누구 하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한 지인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두고 “숨 쉬는 것조차도 죄스러운 나날”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충격과 분노, 안타까움 등이 뒤섞인 비통한 정서 속에 지금 대한민국은 깊이 가라앉아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슬퍼하고 더 분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누군가를 위로하려 하거나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한 말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기독교는 이 현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제 안에 치밀어 오르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습니다. 팽목항에서 바다를 향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희 아이를 살려주세요”라며 간절하게 절하고 또 절하는 한 어머니를 TV 화면에서 보며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팠습니다. 대체 그 수많은 생명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인가요? 아이의 어머니는 왜 있지도 않은 죄과를 자신이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어야 했던 것일까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기독교는 이처럼 무고한 자들의 불의한 죽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언론과 여론은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추적하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로부터 시작해, 해경과 정부 관계자들, 선주 등이 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때의 물음은 원인제공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며, 동시에 죄과를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인은 ‘전문 시위꾼이 유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의 한 최고위원은 한술 더 떠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파가 정부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책임자’의 자리에 이처럼 자신들의 분노와 증오의 대상을 단세포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분노에 찬 ‘책임자 찾기’가 끝나고 책임자에게 처벌이 내려진다고 해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죽음이 정당한 죽음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안전을 지킬 법적 의무가 ‘누구’에게 있었는가 묻는 편협한 책임담론은 그 질문이 첨예해질수록 이 사건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때의 책임이란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한 돋보기이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런 책임담론을 넘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를 ‘책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2.

저는 항구에서 자신이 죄과를 뒤집어쓰겠다며 울부짖는 한 어머니를 보며 오늘의 성서본문이 떠올랐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데,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는 4절은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어머니의 절규와 같은 감정적 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는 아이가 담임선생님의 깜짝 생일파티를 끝내고 자랑하기 위해 전화한 것에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핀잔하고 짧게 통화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3절 본문은 그 어머니의 후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두 이 사고에 매우 깊이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5절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인용한 본문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위해 무고한 당신이 벌을 받았구나’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보통 기독교의 ‘대속’ 또는 ‘속죄’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대속 교리의 핵심입니다(롬5:8, 고전15:3, 살전5:10).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대속과 관련한 놀라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대속 교리와 관련해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알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에서 대속에 대한 서술의 강조점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다른 데에 있습니다. 원래 오늘의 본문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야기 단락(52:13~53:12)의 일부분입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이 이야기 단락의 전반부(52:13~15)에는 당신의 종이 앞으로 이룰 성공에 대한 하느님의 연설이 배치돼 있고, 그 뒤로 후속부에는 "그"의 고난을 목도하며 하느님의 연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서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표1>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52:12~53:12)의 화자-대상 구조

 

말하는 이

말해지는 이/대상 

 전반부(52:13~15)

하느님 

"그(주의 종)" 

 후속부(53:1~12)

 "우리"

 고난받는 종의 노래 전체

 이사야 예언자

 "그"에 대한 "우리"의 증언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이와 말해지는 대상의 관계를 보면, 전반부는 하느님이 말하는 이이고 하느님의 종인 "그"가 말해지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후속부에서는 주어가 "우리"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는 "우리", 말해지는 이는 "그"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후속부의 본문은 하느님의 연설, 즉 하느님의 진리 선포가 아니라, 무고한 "그"가 고난을 받는 현장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자 그가 우리 대신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대속의 강조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고난과 승리를 ‘예정’했다거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을 보며 고난을 피할 수 있었던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과 연민, 그리고 그것을 성찰하고 증언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대속은 내가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자 그리스도 ‘앞에’ 선 장소의 발견을 의미합니다.[각주:2]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업과 짬짜미나 짜는 관료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안전 따위는 상관없다는 선박회사, 열악한 노동환경을 핑계로 승무원들이 내팽개쳐버린 책임의식 등 일반 승객은 알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죽음의 카르텔을 형성해 필연적인 참사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죽음의 자리를 피할 수 있었을 뿐이며, 그들의 죽음이 언제든 나의 죽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5절) 그리고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거짓 명령에 학생들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7절)는 사실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배신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사야서의 "우리"와 같이 부조리한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의 자리가 됐을 수도 있는 고난의 자리에 무고한 그들이 있었고, 그들이 희생됐음을 깨닫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겹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나 대신 희생당한 사람이 바로 내 자녀라는 사실은 생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보며 내 자녀가 언제 죽임의 체제에서 나 대신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희생자의 부모와 같은 심리상태로 몰고 갑니다. 제가 이사야서에서 본 대속의 맥락은 이런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 앞에 있는 성서는 우리를 어떤 자리로 안내하고 있는 것일까요?

 

 3.

너는 안다, 말 하나에-
주검 하나                       
(파울 첼란의 시 <밤으로 삐죽거리는> 중)

나치의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두 줄로 서있습니다. 파울 첼란은 불길한 느낌에 슬쩍 줄을 바꿔섭니다. 그리고 인원을 체크하던 나치 장교는 첼란이 옮겨간 줄에서 한 사람을 지목하고 첼란이 서있던 줄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서 파울 첼란은 노무자 대열에 포함돼 살아남았고, 첼란 대신 줄을 옮긴 남자는 가스실로 가야 했습니다. 첼란의 시는 줄을 옮기라는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을 주검으로 뒤바꾸는 잔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는 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게 됩니다. 그는 자기대신 희생된 한 남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그 경험을 잊지 말라고 되뇌었고 그 기억을 나중에 시로 적었던 것일까요? 자신의 시를, 자신의 증언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잔인한 현실이 당신들의 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대라는 것을 경고하려 했던 것일까요? 어찌 됐든 그는 짧지만 심장을 찌르는 말을 통해 그가 목격하고 살아냈던 잔인한 과거를 현재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말은 죽임의 체제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자기 대신에 희생된 이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검이 된 남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한 생명을 그렇게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죽임의 체제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첼란의 증언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절규는 세월호 안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목소리와 처참한 심정, 그리고 공포를 대언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절규는 비통함에 매몰돼 있고, 그래서 갈라지고 떨리는, 질서가 없는 (말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그 소리
들이 우리의 실존의 민낯을 보게 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우울과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희생자들 앞에 선 우리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삶의 비참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안전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았고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생명을 빚졌습니다.[각주:3] 파울 첼란과 이사야서 속 "우리"의 증언은 이미 '과거'가 된 것을 현재화하는, 살아남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타인의 희생에 기대고 있다는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역사의 고통스러운 선물이 아닐까요.

이제 애도의 시간이 지나가면, 상대에게 의지해 자유를 얻고 있음을 보고 그것을 시인함으로써, 자신이 타인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부여받게 되는 증언의 책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생명을 빚진 자이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무고한 삶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 앞에 서있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압니다, 증언해야 할 자의 침묵은 또 다른 죽음을 묵인하게 될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증언의 책임을 말하기보다는 좀 더 슬퍼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4.4.27.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87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사야서의 '대속' 개념이 '고통받는 이와의 동행'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베른트 야노프스키 지음/김충호 옮김, 『대속』(한국신학연구소, 2005)에서 얻었음을 밝힌다. 대속의 개념사 연구와 충실한 구약성서 본문분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번역이 새로 되기만 한다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이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본문으로]
  3. 물론 체제가 가하는 죽음의 위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할돼 있지 않다. 때문에 이 글에서 말하는 공감과 증언의 영성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논란이 됐던 정몽준 의원 아들의 트위터 발언을 떠올려보라. 그는 세월호 참사와는 무척 거리가 먼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이와 같은 이들은 이 글이 말하는 체제가 만드는 죽음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집단적 감성의 분할선을 추적해보면 우리 사회의 근본적 적대가 무엇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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