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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3] 정치적 상처를 치유하기: 회복적 정의와 인간 안보 (배근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4. 3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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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상처를 치유하기

- 회복적 정의와 인간 안보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2012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과 평화학을 가르치는 다니엘 필폿(Daniel Philpott) 교수는 “정의로운 평화와 부정의한 평화(Just and Unjust Peace: An Ethic of Political Reconcili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2)”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평화와 상생의 윤리를 재발견한 이 책은, 물리적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끝난 후, 어떻게 살아남은 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의 끝은 정전 선언이 아니라, 포스트 전쟁 국가(post-war country)가 ‘정의’에 기반하여 평화와 사회 통합을 이루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의로운 평화, 용서와 화해에 기반한 사회 통합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력 충돌로 야기된 ‘정치적 상처(political wounds)’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피해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 가족의 죽음, 인권 탄압과 가해자를 향한 증오감을 치유하지 않는 한 사회 통합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필폿이 말하는 정의는 징벌이나 보복적 개념으로써의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개념의 정의(restorative justice)입니다. 회복은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남성과 여성 구성원 간의 올바른 관계(right relationship)를 말합니다. 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의의 개념인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이웃간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관계 회복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힘을 가진 집단이 사회 통합이란 미명하에 피해자 집단에게 용서를 강요하거나, 과거를 무조건 덮으려고 하는 행위만큼  올바른 관계를 위협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필폿이 이야기하는 부정의한 평화입니다. 부정의한 평화로 어정쩡하게 통합된 사회는 언제든 사회 집단 사이의 무력 충돌이나, 국가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이 발생할 수 있는 시한 폭탄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대다수의 국민이 정치적 상처를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종교 집단과 사회 집단, 정치 집단들이 이 상처를 조직적으로 무시하고, 사회 통합과 용서 또는 금전적 피해 보상만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사회는 위기 관리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고, 사회 구성원들 간의 불신은 커져만 간 것 같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정의로운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학자들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인간 안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국제 정치학에서는 국가의 존립에 초점을 맞추어 평화와 안보를 이야기하면서, 국가를 구성하는 인간을 하위에 두었습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국민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반해 인간 안보 패러다임은 진정한 평화와 안보의 의미를 모든 인간들이 육체적, 정신적 자유와 보호가 보장되는 삶을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권 탄압을 일삼는 국가 권력이나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는, 그러므로 ‘안보’에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안보는 사회 집단 간에 대화를 바탕으로 한 서로에 대한 이해, 역사의 잘못에 대한 진실된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행위, 적절한 처벌과 피해자 보상, 잘못에 대한 용서 등을 기반으로 한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어 갈 때 가능합니다.
           인간 안보에 초점을 둔 정의로운 평화를 세월호 참사에 비추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일주일 전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물리적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 시간에 그 배에 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참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깊은 정치적 상처를 남겼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실패했고, 개개인의 삶과 죽음은 전적으로 ‘운(luck)’에 달렸다는 운명론적 생각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몇몇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수가 세월호에서 운명을 달리한 이들과 함께 수장되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은 항상 부활 사건과 함께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서 부활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안병무 선생과 타이완 출신의 신학자 C.S. Song은 예수가 하나의 개인 인격체가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의 집단적 정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고통 받는 민중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현재 우리의 삶으로 불러 들여서, 함께 살아나갈 방법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과정은 굉장한 용기와 영성을 필요로 합니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것 자체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유령들과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필폿이 제안하는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 볼 수 있습니다. 유일신 전통에 근거하여 ‘화해’를 ‘정의, 자비, 평화, 용서’의 개념에서 설명한 필폿은, 화해를 위한 여섯 가지 단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필폿, 174): (1)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조직 건설(building socially just institutions), (2)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 of past wrongdoings), (3) 희생자들에 대한 적절한 피해 보상(reparations for victims), (4) 공식적 사과(public apology) (5) 가해자에 대한 처벌(punishment for perpetrators or wrongdoers), (6) 용서(forgiveness). 이 여섯 가지 단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세대에 필요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화해를 바탕으로 한 회복적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사회적, 역사적 과제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방관자가 아니라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역사의 주체가 되기를 제안합니다. 정의로운 국가 조직, 경찰 조직, 시민 조직을 건설하여 사회 위기 관리 능력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매해 성금요일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묵념의 시간을 교회들이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충일과 6월 25일엔 국군 희생자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없이 죽어간 민간인 희생자들을 기억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한, ‘회복적 정의’를 향한 희망의 불꽃은 항상 살아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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