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The Day Before The Sewol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10. 7. 01:32

본문

The Day Before The Sewol[각주:1]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Intro: 제작의도 & 당부의 말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100일 가까이 보내고 있다. 갓난 아기가 태어나 100일을 넘기면 100일 잔치를 열어 이 아기가 100일까지 살았고,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도 이 거친 세상을 능히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 축복하는 세레모니를 가지는데,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100일 가까이 지나고 있는 나는 갈수록 이 사회가 묘연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에 치여 있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다. 도대체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일까? 그 시간들을, 그 세월 속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 시카고에서 하나하나 음미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내게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본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글에서 2014년 오늘의 한국 사회를 말하기보다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이방인의 관점에서 유학을 떠나기 10년 전 대한민국과, 10년이 지난 지금 고국으로 돌아와 100일 동안 살면서 느꼈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후기를 쓰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며 독자들도 당신들의 지난 10년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난 10년이 어떠했는지? 괴롭겠지만 잠시 회고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S# 1. 정권교체

우선,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가장 달라진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정권이 바뀐 것이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한국의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십 년 동안 이 나라는 정권이 두 번 바뀌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그리고, 내가 미국에 있는 십 년 동안 두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했고, 얼마 후에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울부짖던 김대중 대통령도 그의 명을 다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시카고에서 인터넷을 통해 접하면서 나는, 내부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국 현대사가 이렇게 저무는구나!’ 라는 씁쓸하고 애통한 마음에 한동안 빠졌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다 살아있는데,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사라진 것이, 내가 그 두 분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이 무너졌구나!”라는 생각을 직감적으로 들게 만들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어떤 이는 '87년도 체제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기간을 이데올로기(시대)의 종말이라 부르고 싶다.


S# 2.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

2.1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지금은 슈퍼스타가 된 지젝의 영미권 진출작이 바로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이다. 그 후로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많은 단행본을 출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지닌 의미와 함량만큼의 그것을 담고 있는 책은 몇 권 되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The Sublime Object는 번역하면 숭고한 대상이다. 그럼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2002년 ‘인간사랑’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역자: 이수련)의 제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었고, 2013년 ‘새물결’에서 나온 개정판(역자:이수련) 제목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었다. 이렇듯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중간에 있는 전치사 ‘of’ 때문이다. 영어사전에서 of 용법을 찾아보면 수 십가지 용례가 나오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격의 of’와 ‘소유의 of’, 그리고 ‘주격관계의 of’이다.
첫 번째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이데올로기와 ‘숭고한 대상’을 동격으로 처리한 경우다. 그렇게 되면, 이데올로기 자체가 숭고한 대상이 된다. 개정판 번역본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이 경우 ‘of’를 ‘소유의 of’로 해석을 할지, 아니면 ‘주격관계 of’로 해석할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소유의 of’로 해석하면,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숭고한 대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주격관계 of’로 해석하는 것이 지젝이 의도하는 이데올로기에 적합하다.
‘주격관계 of’의 쓰임새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the works of 은희경’이라고 할 때, 은희경이 쓴 작품들을 뜻한다. 은희경의 작품들, 예를 들면, <새의 선물>, <타인에게 말걸기>, <비밀과 거짓말> 같은 소설들 말이다. 그렇다면 ‘주격관계 of’를 갖고,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될까? 이데올로기가 숭고한 대상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은희경이 그녀의 작품들을 생산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전포인트가 있다.

2.2 이데올로기 작동방식

이데올로기는 절대 자기 스스로가 숭고하지도, 그렇다고 이데올로기 안에 숭고한 측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데올로기 하면, 어떤 장엄하고 숭고하고 거시적이고 무엇인가 유의미한 것이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주는 환상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가 작동을 해서 별볼일 없었던 그 무엇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바라보게 되면, ‘숭고한 대상’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숭고한 대상’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온갖 정치적 선전들이 그 숭고한 대상들 아니었던가!  4대강, 뉴타운, 부국강병, 정의사회구현, 경제강국, 보통사람들의 시대…등등 얼마나 많은 ‘숭고한 대상’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졌던가!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허위의식, 즉 환상과 착각과 오해를 계속 만들어내는 주문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명품백을 사면 내가 명품인간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자본주의 상품 이데올로기의 특징인 것처럼, 내가(혹은 우리가) 그렇게 지금 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80년대 운동의 1차적 목적은 체제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거짓과 기만을 폭로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명석한 현실분석과 각종 날카로운 이론을 근거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 시대는 90년 동구권의 몰락, 97년 IMF체제,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의 상실과 2007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라는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그 무렵 한국사회는 ‘냉소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S# 3. ‘냉소의 시대’가 오는도다!

3.1 Welcome to 냉소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무엇을 몰라서 문제가 발생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운동은 체제가 억압하고 강요하고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밝히고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신자유주의 시대는 운동의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시대가 뭘 몰라서 문제가 생기는 시대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이 냉소의 시대에는 모든 것을 다 알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안다’ 라는 뜻이 무슨 뜻일까?
냉소주의(Cynicism)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수면으로 올라온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질적인 차이, 즉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꿔 버린 시스템이다.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서사의 구조들이 있는가?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신앙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고, 전통과 개성일 수도 있는데, 그런 서사의 구조들을 비웃으며, 이제 현대인은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런 것들 얼마면 돼?” 이렇게 말해버리는 것이 자본이 지닌 냉소의 법칙이다. 예전의 사람들은 당신들의 속마음을, 그 진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는 서슴없이 그 속내들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3.2  냉소의 토착화

현재의 냉소주의가 시작된 것은 90년 사회주의 붕괴부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 냉소주의가 한국 땅에 고착화된 것은 IMF이후다. 공교롭게도 한국사회에서 냉소주의 전개되던 시기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던 민주정부 10년과 겹친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현 집권세력이다.
한국 현대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일종의 원죄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인권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분단의 문제, 정의의 문제 등등. 이러한 부채감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원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자본의 원칙에 충실하게 된다.
옛날에는 사회적으로 “돈, 돈, 돈” 그러는 사람을 천박하게 바라봤다. 설사, 마음속으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을 향한 우리의 탐욕을 거리낌없이,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우리사회는 꿈, 이상, 이념, 종교, 대학의 가치, 인간에 대한 예의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이야기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다 안다. 그런 것들이 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오직 시장의 논리만이 유일한 삶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다 알아버렸다. 이것이 저 냉소의 요체다.

3.3 이명박은 나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돈, 돈, 돈’만 외치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건이었고, 우리의 뻔뻔함과 우리의 파렴치함을 집단적으로 공유케 하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대통령이 되려면 어느 정도 자기희생이 있어야 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감정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해,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선거 때마다 부산으로 달려갔고 예상대로 멋지게 낙선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 마저 박정희때 군부독재에 맞서 야당 총재시절 목숨을 걸고 단식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우리 국민들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일정부분의 자기 희생과 확고한 자기 철학을 대통령의 자질로 요구했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달랐다. 대선직전 BBK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유권자들의 표심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 민주, 통일, 정의, 인권, 자유…그런 이야기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과거 역사에 대한 살풀이를 했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탐욕과 욕망을 실현시켜 줄 정권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명박 이후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테네시 윌리암스가 말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공동으로 탑승했었다. 술에 취한 기관사가 운전하는 열차를 타고 고속주행을 하다 탈선한 형국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로 놀라워 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죄의식도 이제는 별로 느끼지 않는다. 이런 복원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니, 이런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에피소드: 세월(sewol)호에 갇힌 대한민국을 위한 레퀴엠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랑 가끔 소식을 전하거나 전화할 기회가 있다. 지금은 덜하지만 CNN에서도 한동안 세월호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친구들이 세월호를 발음할 때 ‘쎄울’로 발음을 할 때가 있다. 서울과 발음이 비슷하게 들린다. 미국 친구들의 어눌한 세월호 발음이 공교롭게도 서울로 들리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상징적 의미로 다가왔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서울의 침몰을 의미하고, 서울은 침몰은 결국 대한민국의 침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침몰이 이루어졌던 시기가 고난주간이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부활을 2014년 부활절에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 또한,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을 향한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詩가 사라졌다고 했는데, 포스트 세월호 이후 우리는 무엇을 잃어야 할까? 우리는 삶과 인간을, 세상을, 그리고 신을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시대는 아마도 오랫동안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사는 수 밖에.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도구이고 애도의 방식이다.

 

ⓒ 웹진 <제3시대>

 

 

  1. 굳이 번역하자면 “세월호 전에 우리는…”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