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독한 열정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기하」 13장 15절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몸매, 목소리, 걸음걸이, 그녀에 얽힌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자태가 선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스케줄은 그가 꿰고 있는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짜였고, 그녀 때문에 국정을 배우는 일에도 더욱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며, 신체를 연마하는 데도 더욱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의지가 북돋아졌고, 그녀가 있었기에 최고를 위한 경쟁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이복누이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와 왕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와 같은 혈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집은 정말 재수 없는 집안이었다. 유다 왕국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새똥만한 나라(요르단 동북부 바산 지역에 있는 소국인 그술)에 불과한데, 그것도 왕족 출신이라고 얼마나 있는 척하는지 아니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왕족이라는 점이 대신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부담스러웠고 부러웠다. 게다가 그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기골이 장대했다. 말은 또 어찌나 수려한지,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자인 자기보다 그 동생을 지지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즈음에는, 이복누이인 다말 때문인데, 그가 왕이 되려는 한 그녀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은 대권을 포기할 자가 아니고, 자기 또한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이었기에, 욕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런 마음을 다스릴 만큼 그는 야심만만한 성품도 단호함도 갖추지 못했다.
궁이란 이런 낌새가 비밀로 지켜질 만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대권을 두고 싸우는 두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지만, 각자는 그 정보 하나하나를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며, 전략을 편다. 암논, 이 영리하지 못한 왕의 장자는 자기의 약점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온갖 술책들을 간파할 이해력도 없었고, 사랑의 열정은 그나마 있는 부족한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놓고 말았다.
그때 왕의 노련한 책사인 요나답이 접근해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너무나 영리한 자여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가 아닌 왕의 사람이다. 근데 어느 날 그가 와서 권한다. 자리에 아예 누워 앓는 시늉을 하라고, 왕이 문병 오면 다말의 시중을 청하라고 말이다. 그녀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단박에 그렇게 행동을 한다.
아버지 다윗은 암논의 청을 들어준다. 궁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왕이 저 조심성 없는 장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가 자칫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요나답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왕의 측근의 한 사람이기에 왕이 허락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추측한대로, 왕의 허락이 조심성 없는 것이라면, 요나답은 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은 허락했다.
그렇다면 잠시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요나답이 암논의 사정을 알고 다가와 자문을 해주었다면, 다윗이 그것을 모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했듯이 요나답은 왕의 측근이고,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임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허락이 초래할 사태까지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자인 암논은 영리하지 못한 아들이다.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한편 다말의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너무 영리했다. 게다가 그의 어미는 그술국의 공주다. 그술국과의 친선관계가 유다 왕국에게 유리했기에 다윗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왕권을 그술국 공주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왕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벌써 줄서기를 시작했다. 이 두 왕자가 왕권을 승계할 유력한 후보들이니 그들을 지지하는 파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여 왕과 책사인 요나답은 일련의 음모를 기획하였던 것은 아닐까. 두 왕자를 제거하려는 .........
아무튼 간병차 방문한 이복누이를 암몬은 충동적으로 강간해 버린다.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터였다. 오직 다말 생각에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져 있던 차였다. 하여 그는 순간의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가뜩이나 압살롬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는데, 가뜩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고 도는데,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태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왕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말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자고 오라비의 경쟁자인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혹 압살롬, 그자의 간계는 아닌가. 몸을 팔아서라도 자기 오라비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런 창녀 같으니라고.
암논은 그녀를 사납게 밀치고 내쫓아 버린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한 여인이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녀의 수치이고 가문의 수치다. 해서 그녀는 뭇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사대부가나 왕실 여성의 법도다. 암논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배신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저 창녀 같은 여자가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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