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평]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을 발휘해 보자 (김학철)

시평

by 제3시대 2009. 4. 20. 16:48

본문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을 발휘해 보자

김학철
(신약학 / 연세대 신학 박사)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 아직까지 모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기업 연구원, 대기업 계열사 중간 간부, 공무원, 대기업 중간 간부, 방송국 PD 등 각기 자리를 잡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두었다. 가족들이 종종 모이는데, 남자들만의 모임과는 달리 가족 간의 대화에서 화제는 언제나 두 가지로 모이게 된다. 하나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 교육’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서언이고, 모임이 끝날 무렵 덕담은 그 두 가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그러나 대화 내내 우리는 괴롭다. 그 두 가지 ‘문제’가 오늘 이 땅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과수원을 망치는 두 마리 여우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것들을 잡는 덫이 무엇이어야 하며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갑론을박 중에 유일하게 얻는 소득은 서로가 서로의 크고 작은 고통을 위무하고 있는 친구임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난 후 거주권과 교육권이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도 거주에 관한 권리와 교육권을 국민의 중요한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괴로운 건 지금 우리에게 ‘집’과 ‘교육’이 단순히 거주나, 교양 및 직업 지식을 얻기 위한 교육 이상인 데에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 삶의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 그래서 몽둥이를 들고 잡을 수 있을 훼방꾼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다. 그 둘은 이른바 물신화되었다. ‘집’과 ‘교육’은 일종의 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고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가 오늘 우리에게 ‘집’과 ‘교육’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듯 싶다.
 
바알은 우뢰와 비를 주관하며 자기의 짝신인 아세라와 함께 풍요와 다산을 약속한다. 숭배자들은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지극한 제사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우상일 뿐이다. 그것이 우상인 까닭은 그것 자체가 그저 상상물일 따름이며 따라서 약속을 실행해 줄 능력도 없고, 그들이 요구하는 제사가 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집’과 ‘교육’도 이와 비슷하다. 그 둘은 우리에게 달콤한 약속을 한다. 집은 안정과 여유와 안락을, 교육은 그것에 이를 수 있는 길이자 탁월함 및 명예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둘은 바알과 아세라처럼 우상일 뿐이다. 그들의 약속은 빈 것이고, 그 헛된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지내야 할 제사는 우리의 삶을 망칠만큼 파괴적이다. 문득 아합 왕 때 갈멜 산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리기를 바라면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던 바알 선지자 4백 명과 아세라 선지자 4백 5십 명의 제사 광경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소를 재물로 삼고 아침부터 부르짖는 그들은 제단을 돌면서 춤을 추고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러 대면서 미친 듯이 날뛴다. 그러나 불은 내리지 않았다. 그 광경의 현대적 소프트코어 버전은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자식을 조기 유학 보내고 사무실 한 켠에서 라면을 먹으며 행복해하다가 자식과 함께 외국에 갔던 아내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혁수’의 모습이다. 하드코어 버전은? 말하기도 싫다.
 
기독교를 궁극적인 실재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확보하게 도와주는 상징 체계라고 편의상 정의할 때, 이 시대에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상의 본질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폭로하는 성서를 손에 들고 읽는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헤아려 본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제단과 제물에 물을 붓고는 하나님께 불을 청하던 엘리야가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누군가를 향해 냉큼 ‘엘리야가 오셨다’고 환호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는 아닐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 좀 발휘해 보자. ‘신앙을 통한 물질의 축복’이니 ‘다니엘 학습법’이니 하면서 ‘집’ 우상, ‘교육’ 우상의 제단을 섬기는 부끄러움은 그만 반복하자. 우리 시대 우상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그것이 살 길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실제로 다른 삶을 집단적으로 훌륭하게 살아보여 주자.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교회로 모여 뭐 하겠는가?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