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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테러리즘과 반이슬람주의 (배근주)

시평

by 제3시대 2015. 12. 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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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과 반이슬람주의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11월 13일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공격. 그리고 12월 2일 열네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나디노에서 있었던 총격 사건.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전세계적인 인도주의 목소리가 이 두 사건으로 묻혀 버린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2001년 9월 11일,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공격한 테러 사건 이후로, 지난 십여년 동안 세계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행한 테러 공격이다. 파리와 샌 버나디노 사건이 서구 미디어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은연 중에 반이슬람 메세지를 퍼트리는 이유는, 이 사건들이 소위 말하는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반이슬람 정서가 뿌리 깊은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종교적 관용이나 다양성에 대한 관용 정신은, 이슬람이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테러리스트들, 총기 난사범들로 인해 사라졌다. 그나마 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들 조차도, “모든 무슬림들이 테러리스트들은 아니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무슬림이다”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상당한 헛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샌 버나디노 총기 난사 사건을 대하는 FBI의 태도에서 보듯이, 총기 난사 사건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가 일어났을 때, 가해자가 백인이거나, 비무슬림인 경우에는 주로 가해자의 정신 상태에 대해 먼저 감정을 한다. 즉 사회 부적응자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외톨이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 하고, 불특정 다수들, 주로 약자들을 대상으로 분풀이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썩은 사과 이론’이다. 사회는 별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몇몇의 썩은 사과들이 사회 질서를 위협하므로, 이 썩은 사과들을 벌하고 골라냄으로써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반면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폭력을 사용한 가해자가 무슬림이거나 이슬람과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논리가 달라진다. 즉 이들의 정신 상태나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분노가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이란 제도화된 종교가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문제이다. 이슬람이 폭력을 조장하는 비윤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이 종교에 심취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들이거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다. 더 나아가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보다 높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는 반이슬람 정서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면,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종교가 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비종교인들도 충분히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테러리스트는 종교 논리 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고, 인간들의 본질적인 폭력성이 해결되지 않는한, 테러는 항상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극단주의적 이슬람 교도들이 (또는 극단적인 기독교, 유대교, 불교 등등의 신봉자들)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기 전에, 이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또는 정신 상태,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등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테러리스트들을 행동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인권 운동가이자, 팔레스타인 해방 신학센터인 사빌 (Sabeel)을 만든,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 (Naim Ateek)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자살 폭탄 테러를 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아랍인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덜 폭력적이지도, 더 폭력적이지도 않다”고 이야기 한다 (A Palestinian Christian Cry for Reconciliation, 2008). 그렇다고 아틱 신부가 테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테러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더 강화하고, 더 큰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테러가 왜 일어나는지 그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의 조직화된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필수적인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에서 보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모욕을 당해서, 친구나 친척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살해되거나 상해를 당한 복수심 때문에, 억압적인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한 억울함으로, 직업도 구할 수 없고 점령지에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대한 울분으로, 고문을 당하거나 수감되었던 것에 대한 억울함, 희망없는 삶과 인종차별 등에서 생겨난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자살 폭탄 테러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결국 이스라엘의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점령이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군사화된 이스라엘의 폭력이 강해질수록, 팔레스타인의 폭력적 대항과 자살 폭탄 테러는 더욱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미디어나 일반 대중들은 국가나 공권력이 행하는 조직화된 폭력과 민간인 학살 보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더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는 것 같다.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테러리스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르침들이 있다. 이렇게 사용된 종교적 해석은 사회적으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다른 무슬림들이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들을 순교자들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테러의 목적이 적을 교란시키고, 적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적을 죽이는 것이 테러의 목적이 아니라, 무슬림 형제 자매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거룩한 전쟁’으로 번역되는 지하드 (jihad)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하여, 신의 뜻인 정의를 세우고, 남은 형제와 자매들이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권위있는 이슬람 학자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지하드는 육체적 전쟁과 영적 전쟁으로 나뉘어 지는데, 영적 전쟁인 지하드를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영적 지하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께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이다. 그렇기에 이슬람에서 ‘다섯개의 기둥’이라 알려진 종교적 의식이 중요한다. 이 기둥들은 유일신인 하느님과 (알라 Allah는 유일한 하느님이란 뜻의 아랍어) 선지자 모하메드가 그의 메신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께 드리는 다섯번의 기도, 라마단 기간 동안 하는 낮동안의 금식,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 메카로의 성지 순례이다. 이들 다섯 가지는 모두 무슬림들이 영적인 지하드에서 승리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또한 살인을 금하고 있으며, 순교 행위 또한 살생이나 종교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를 포함하면 안 된다. 굳이 이야기 하자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무슬림들의 인사가 서로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인사이듯이. 내가 지금까지 만난 무슬림들은 모두들 하느님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친절하고, 여성들을 존중한다. 이들 중엔 소말리아 난민 출신도 있고,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보스니아 난민 출신도 있다. 이들이 기꺼이 난민의 대열에 합류하여 미국에 정착한 이유는 폭력과 테러리즘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만약 서구 사회에 정착한 난민들 중에, 또는 그들의 자녀들 중에 자발적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서구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차별과 난민들에 대한 편견, 반이슬람주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등의 사회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이러한 부정의한 구조들을 고쳐 나가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건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장을 만드는 것,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정치 구조, 정의로운 경제 구조, 존중과 관용, 배려에 바탕을 둔 다문화주의 등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구조를 만들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이 있어야, 테러를 막을 수 있다. 국제 사회는 IS, 탈레반, 알카에다, 보코하람, 남미의 마약 군주 등등의 테러조직들을 벌하고 응징하는데에만 급급하지 말고, 국제 사회 전체가 힘을 합쳐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지, 어떻게 분쟁 지역에 무너진 사회 구조를 인류애 차원에서 재건설할 것인지, 국가 권력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된 안보와 평화를 이루어나갈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로, 중동지역은 정치적으로 더 혼탁해졌고, 군사적으로는 더 폭력적이 되었다. 아랍의 봄이 실제 안정적인 평화 구조로 귀결되지 못 하고 있는 이유도,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반이슬람주의가 계속 힘을 얻어 가고 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고 있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또는 오만한 우월주의와 엘리트 의식에 빠져, 민중을 먼저 생각하는 평화 협상은 하려고 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이란 종교를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평화를 위한 해법이 되기 보다는 위협이 된다.

  
          테러를 대다수의 신학자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과 윤리학자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갈등이나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반인들이 테러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풀면, 전쟁에서 군인들은 무장한 적군을 죽일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무장을 한다. 그러므로 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거나 해를 가하는 것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인류에 가한 범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대전에서는 일반인과 무장을 한 테러리스트들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무장 군인들을 상대로 한 테러,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일반인들에 대한 테러 또한 증가하고 있어서, 누가 (총기 난사범이 아닌) 테러리스트이고, 어떤 행위가 테러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은 공포심을 먹고 살며, 정치 지도자들은 어떻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문구에 속아서, 국가와 공권력이 행하는 전쟁과 폭력을 간과하거나, 종교를 테러의 정신적 기반으로 몰아가는 일에 동조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종교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나약함을 먹고 공포스러운 괴물로 변질되기가 쉽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가 피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권력과 폭력, 사회 구조, 그리고 타인을 두려워 할 때 반복되어 왔다. 10여년 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사회 기반이 무너진 스리랑카에서는 평화의 종교로 알려진 불교가 군사 폭력에 앞장 섰고, 일본 불교는 오랜 동안 군국주의와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인도에서는 힌두 급진주의자들이 국가주의와 결탁하여, 무슬림들을 살해하는 일이 최근까지 계속 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를 버려야 할까? 무신론자들이 덜 폭력적이란 근거 또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어느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테러리스트로 불려질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인 베들레헴에서 아랍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났을 예수. 예수께서 만약 지금 똑같은 모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면, 그의 사진이 한국의 다음이나 네이버 뉴스에 뜬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불쌍한 아기. 너도 자라서 테러리스트가 되겠네.” 이 세상에 테러리스트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아기들은 없다. 그리고 테러를 지지하는 종교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아기 예수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때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증오 받는 테러리스트들도 한 때는 평화주의자로 자랄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들이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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