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선의 힘: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2]으스름달밤에 나는 너와 걸었다.(김정원)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6. 2. 22. 20:50

본문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둘. <으스름달밤에 나는 너와 걸었다.>




 김정원*



         희끄무레한 으스름달밤이다. 약간 찬바람이 코를 훔치고, 두어시간 전에 비는 그쳤지만 땅은 충분히 젖었다. 그야말로 런던의 밤 같은 그런 밤에 사람도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함께 걷는 이’는 말이 없다. ‘함께 걷는 이’가 말이 없으니 ‘걷는 이’도 말이 없다. 둘 다 말이 없으니 손에 든 봉다리가 바지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비니루봉다리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봉다리 속 아이템들끼리 부대끼는 소리마저도 또렷해진다. 또각또각하는 구두가 젖은 땅을 때리는 소리는 그 소리들의 중심이 된다. 여러 소리들이 쟁쟁한 가운데, 걷는 이 둘은 말이 없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둘은 말이 없다. ‘걷는 이’는 말수가 적은 여자가 아니지만 지금 이 밤에는 잠깐 침묵하기로 한다. 어색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하여 그런 것이다.

         이들의 친밀함은 ‘이해’를 그 근거로 한다. 의미가 결여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둘은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침묵한다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은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서로에게 개방시켜 나간다.

         이 둘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비단 침묵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말하고 듣고’, 또 ‘말하고 듣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서로의 사정과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즉, 서로 많은 말을 나누던 사이가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땐, 아마도 틀림없이 더 본래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해의 정도는 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들이 침묵하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내용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저 둘이 나누었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그 둘은 조만간 닥칠 미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수차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지점에 이르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큰소리가 오가기도 하고, 분노가 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말함과 들음’의 과정에 성실히 참여한다. 비록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화제를 이해하게 된다. 대화를 마친 이 둘은 이제 으스름달밤을 걸어간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이들은 더 많은 낱말을 쏟아낸다고 해서 서로의 주장이 보다 명료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요~ 땡! 지금부터 침묵 시작!’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충실한 대화 후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의 대화 속에 동의, 순종, 협조가 들어차 있지는 않았지만, 진실한 대화와 경청은 이 둘 모두를 침묵으로 이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침묵에 없는 것은 단지 소리 일뿐, 이해나 관계 맺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성실하고 진실하게 ‘진정성 있는 말’을 주고 받았다면, 둘은 본래적으로 침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각주:1] 자신을 활짝 열어서 보일 때(開示), 둘은 침묵의 달밤을 어색함 없이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대화는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너는 나와 달라. 나는 너를 통제할 수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야. 결론이 나지 않아 너는 오늘도 속상해 하고 있어. 네가 속상하니까 나도 속상해져. 그래도 다행이야. 네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지.’


         어쩌면 그 둘은 으스름달밤이 오기 전, 보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남자를 원하는지를 아름다운 어구를 사용해가며 부단히 설명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쉬 믿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부지런히 개시한다. 서로 듣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여자와 남자는 ‘새로운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자는 ‘그 남자를 간절히 원하는 여자’라는 새로워진 존재로서 그 남자 앞에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간절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한 남자’로서 그 여자 앞에 나타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롭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즉, 이 둘은 여자의 진실한 ‘말하기’와 남자의 ‘경청’을 통해 새롭지만 ‘공동의 존재’들로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이 서로의 의도나 욕망 혹은 거절 등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녀의 애달픈 마음을 그가 단박에 받아들여줬음 더 없이 좋겠지만. 또, 으스름달밤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이겠지만 여하튼.) 즉, 두 사람은 ‘둘만이 알고 있는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은밀하게 말이다. 그 남자를 원하는 여자로, 그 여자의 고백을 들었던 남자로, 그 둘은 관계를 맺어간다. 

         이윽고 둘은 침묵하며 으스름달밤을 걷는다.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둘 모두가 듣게 되는 신비의 순간에 머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서로의 존재가 아주 또렷하게 드러나버리는 침묵의 공간에서- 두 남녀는 대화를 이어간다.


         결국 진정성 터지게 ‘말하고 듣기’ 후에 찾아오는 침묵에 관한 이야기이다. 긴밀하고도 본래적인 침묵 뒤에 오는 대화는 보다 커진 이해를 틀림없이 동반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본래적 침묵은 결국 사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각주:2] 속이 ‘빈말’ 역시 걸러지게 된다. 생떼를 쓰며 주장했던 것들도 침묵 속에서는 이내 사그라져버린다.

         그러니까- 그 날 밤에, 그 으스름달밤에, 겨울비가 내린 그 밤길에, 또각또각 소리가 나던 그 찬거리에서 그 두 남녀가 침묵 속에서 들었던 것은, 비니루봉다리의 버석거리는 소리가 아닌, ‘함께 걷는 이’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p 224~ 참고. [본문으로]
  2. p 229 참고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