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목회마당] 쉼이 있는 교회 (김혜령)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6. 3. 8. 00:01

본문


쉼이 있는 교회[각주:1]

 


김혜령[각주:2]
(이화여대)


 

          “내가 꿈꾸는 교회”라는 타이틀로 글의 요청을 받았을 때, 정형화된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 각자가 원하는 교회를 꿈꿀 수 있다는 권리는 인정받은 것 같아 매우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꿈꾼다’는 것은 곧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볼 때, 가능하지도 않을 일을 꿈꾸는 일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저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행위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과 진보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꿈꾸는 교회”라는 제목아래 쓰인 모든 글들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필자들 각자가 진단한 현대 교회, 한국 교회의 문제를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 딸로 태어나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참 무난하고 행복하게 목사 딸이라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교회와 목회자의 집은 붙어있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늘 걸어서 30분 이상 되는 거리에 집을 두셨습니다. 공간의 분리로 인해 어머니와 자녀들의 사생활이 보장되다보니, 아무래도 저와 남동생은 여러 부족한 모습에도 교회 내에서 구설수로 오르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마도 이것이 한 교회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면서도 성도님들에게 많은 사랑을 감사하게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비교적 편하게 목회자 자녀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축복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중반이 되어 유학가기 전까지 저를 가장 힘겹게 했던 것은 쏟아지는 교회 봉사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피아노에 소질이 없어서 교회반주를 못했는데, 목사딸로서 그러한 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저의 쓰임은 다채로웠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되는 청년모임 준비와 예배, 저녁 친교모임 등... 임원이라도 맡은 시기에는 토요일 전체가 그렇게 교회 내에서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20대 초반 제가 연애를 못했던 이유라고 하면 너무 구차한 변명일까요?  


         주일은 더 바빴습니다. 아침 7시 예배 성가대에 서기 위해서 6시면 교회에 도착하여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소프라노였는데 아침부터 돼지 멱은 수 십 마리 딴 것 같습니다. 7시 예배가 끝나면 8시 반쯤 고등부실로 올라가 교사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9시 예배를 시작하지요. 10시가 되면 분반별로 흩어져 성경공부를 가르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로교 공과공부 책이 매우 훌륭했는데, 그 책도 제대로 예습하고 가르치지 못한 것 같아 아이들에게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점심 먹기 전까지 교사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11시 본당예배의 끝과 맞추어 식당에서 어울려 밥을 먹지요. 눅눅한 교회 지하 식당에서 먹는 밥, 그래도 아침부터 달려온 하루에 잠시 짬을 내니 그 시간에 제일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밥을 먹고 잠시 청년들과 수다를 떨다보면 1시가 됩니다. 오후 예배 찬양인도를 위해 찬양팀 연습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도 믿음 좋은 후배들 덕에 찬양단 연습이 무사히 끝나게 되고, 어른들이 본당에 다시 모이실 때쯤 복음성가로 20-30분 찬양을 인도하지요. 부끄럽게도 오후예배는 꾸벅꾸벅 조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하시는 부목사님, 외부 초청 목사님이 오셔도 웬만하면 이 졸음을 막아 내시지 못합니다. 깔끔한 성격으로 사모역할을 충실히 해내시는 우리 어머니 눈에 띄지 않게 잘 조려고 해도 당해낼 수 가 없어 여러 번 혼이 나났지만, 졸음에 설교말씀이 당하지 못하는 죄인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3시 반쯤 오후예배가 끝나면 해방입니다. 아침부터 달려온 주일봉사가 그렇게 끝이 나니까요. 그래도 일 년에 십 여 차례 주일이 쉽게 그렇게 끝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수련회 준비, 임원회 회식, 노인대학 봉사, 친목회 등등 저녁까지 교회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은혜로운 일들은 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스케줄은 수요예배와 철야예배,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독려하는 다른 교회 성도들에 비해 무척 가벼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신앙을 단련시키는 훈련이었나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말 내내 멈추지 않고 성도의 봉사와 헌신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교회의 선교방식은 유학이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말할 때 기독교는 다 죽었다고 말하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을 만큼 프랑스의 교회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까지 그 화려한 석조 건축물이 너무나도 아깝게 예배당을 텅텅 비워둔 채로 주일예배를 맞이합니다. 성도들이 무엇을 열심히 할 만큼 사람들이 모이지도 않고, 또 솔직히 많이 모이겠다는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주일 오전 예배당에 입구에 들어서며 간단히 안내하시는 원로들과 목례를 나누고 교회당에 앉아 예배에 참여하게 되면, 목사님의 조용한 설교가 예배당을 채워나갑니다. 저는 칼뱅이 목회했다던 전통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거기서도 주일 예배인원이 30-40명 내외였던 것 같습니다. 아동부 예배는 따로 드리지 않고 어른 예배 중에 아이들을 위한 설교를 잠시 짬을 내어 하기 때문에, 교사가 따로 헌신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게 예배가 끝나면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 예배당 입구를 빠져나갈 때 그 앞에 서 계시는 목사님과 악수를 하고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일이 이루어지지요. 그 때 심방이나 중요한 소식을 목사님께 전달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오전 예배가 끝나면,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끼리 오붓한 점심을 먹습니다. 그것이 제가 경험한 프랑스 주일의 풍경이지요. 물론 한 달에 한번 교회 식당에서 성도들이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친교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아동부, 청소년부도 방학 때면 2주씩 스키 캠프를 겸한 신앙 수련회를 다녀오기도 하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주일은 그렇게 차분하게 보내집니다.  


          토요일부터 주일 저녁까지 빡빡한 봉사와 헌신으로 채워져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눈으로 볼 때 프랑스 교회의 성도들은 한량처럼 보입니다. 껄렁 껄렁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고 돌아가는 이들이니깐요. 도대체 이들은 왜 교회에 다닐까? 무슨 재미로 다닐까? 열심도 없는데 왜 교회에 나갈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주일 풍경이 자칫 생명력이 없고 차가운 신앙에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몇 년의 교회 생활을 하며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주일이, 그들의 예배가 창조 후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선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만드시는 육일 간의 역동적인 창조사역을 끝내시고, 하나님은 일곱째 날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따로 구분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지요.  


          저는 주일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주일 간 어쩔 수 없이 세상 속에서 힘들게 일하며, 살아남기 위해 품어야 했던 욕망과 탐욕, 시기심, 경쟁심, 분노, 좌절 등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질서, 맘몬의 권력이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들 때, 주일은 질서의 거짓됨과 권력의 포악함을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대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다시금 고백하게 하며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그것이 주일의 쉼의 회복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소란하게, 정신없이 교회 온 곳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봉사와 헌신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헌신의 결과물이야 물론 아름답겠지만, 저는 영혼이, 생명이 주일마다 오히려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 교회헌신의 의무가 축복으로 주어진 주일날 쉼의 권리를 압도하게 될 때, 저의 신앙은 습관이 되었고 주일 설교시간은 낮잠에 포획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교회는 이렇습니다. 주일 쉼의 권리를 보장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노동 시장이 점점 더 포악스러워지면서,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한 성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직장을 잡지 못한 청년들은 학원이나 고시원을 전전하며 일주일을 피곤에 절어있고, 직장을 다니는 이들도 정상 근무 이외의 야근에 시달립니다. 비정규직 일자리의 증가는 많은 성도들의 주일에 예배드릴 권리마저 박탈하였습니다. 세상이 돈 버는 일에 미쳐 돌아가면서 우리 모두의 주중의 생활이 맘몬의 세력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은 마치 그러한 우리 자신을 극도의 육체적 헌신으로 극기(克己)하기라도 하라는 것처럼,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성도들에게 일거리를 몰아칩니다.  


          이러한 저의 확신은 최근 친구 이야기를 듣고 더 커졌습니다. 친구는 잘나가는 외국계 회사에 부장이어서 새벽6시에 출근하여 이미 7시에는 업무를 시작합니다. 일주일 내내 과한 노동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친구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다니는 교회 재정 봉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제법 큰 교회여서 재정 일은 오후 늦게까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재정의 쓰임에서 의심의 꺼리를 발견한 친구는 그러한 의심이 자신을 시험에 빠뜨리고 신앙을 잃게 할까봐 그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봉사를 맡게 되었답니다. 오전에는 유치부 교사를 하고 오후에는 교회에서 새롭게 오픈한 커피숍에서 바리스타를 맡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무척 화가 많이 났습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진이 다 빠진 성도를 교회봉사라는 성스러운 명목아래 교회까페의 바리스타로 일하게 하는 “한국교회의 과도한 헌신 구조”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탐욕과 배려 없음에 쉽게 화를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그 일을 믿음으로 즐겁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그렇게 일하는 친구가 한없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성도의 봉사와 헌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약한 지체를 돌보고, 새 세대를 교육시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도들의 참여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식일의 쉼의 권리가 박탈된 봉사와 헌신은 – 감히 과장되게 말하건대 – 성도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일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저의 아버지께 반항하던 말을 하자면, 목회자야 월요일에 쉬지만 성도들은 월요일이면 다시 생계 현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쉼을 박탈당한 신앙.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그에 대한 감사함을 성찰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신앙인으로서의 매우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쉼 없이 봉사로 채워지는 주일 하루는 목회자의 설교를 흘려듣게 하고, 매주 반복되는 “행사”로 축소해 버립니다. 설교를 들으며 생각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헌신하는 몸만 남게 됩니다. 어찌 보면 쉼이 없이 달리기만하는 한국교회의 주일 풍경이, 신학자들이 그렇게도 비판해 왔던 이성적 성찰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쉼이 있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을까요? 쓸데없이 일할 거리를 줄여야 합니다. 바리스타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직분을 맡아서도 곤란합니다. 말씀을 듣는 귀를 열 수 없을 지경까지 고단해 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려면, 결국 교회 공동체 사이즈 자체가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장도 커지면 커질수록 분업화가 되고, 그 안에 노동은 단순해지고 양은 증가합니다. 노동자들끼리의 관계도 단절되기 십상입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커지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봉사 받아야 할 일도 늘게 됩니다. 성도의 수, 교회의 공간 크기, 재정의 크기 모두 줄어야 합니다. 교회는 생산성의 논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야 초대교회가 가르치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에 해당하지 않는 일들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쉼이 넘치는 교회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성도들의 열정이 쉽게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몸을 부딪치며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야 교회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성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행위를 천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은 몸을 움직이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고백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쉼을 주는 교회, 쉼이 있는 예배는 우리에게 신앙 고백 시간을 복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리더라도, 그 방식이 진정으로 성도를 신앙 안에 성장시키고 교육시키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봉사의 열정은 그 이후에 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회자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물을 때 뒤에 줄을 선 성도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짜증나지 않을 만큼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에는 서로의 삶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모를 수도 없고, 각자의 어려움들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에는 재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크게 부패할 돈이 없고, 그러다 보니 엉뚱한 사역도 벌이지 않습니다. 모여서 예배하고, 성경공부하고, 간단히 식사하며 교제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흩어지는 일. 그 일이 전부이게 됩니다. 주일의 쉼의 권리를 회복하는 교회, 저는 의외로 이 일부터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함께 풀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단독목회를 시작한 남편을 도와 감히 “쉼과 성찰이 있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2년째 고군분투 중입니다. 예상대로 성도가 많이 모이지 않는 초미니 교회입니다. 여기서 제가 맡은 봉사는 점심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난 2년간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꾸준히 마련해 가는 제 자신이 기특해 집니다. 그래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초미니 교회이니 한 끼를 준비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그리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일날 넉넉히 준비한 반찬이 저희 집 식사의 일주일의 반을 먹여 살리기 때문에 맞벌이를 하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1석 2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늘어 그 일이 힘들게 될 때쯤에는 무한 헌신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사모’라는 이름에 순응하지 않고 차선의 방법을 성도들과 함께 찾자고 건의할 생각입니다. 저는 주일에 말씀을 들으며 참으로 쉼다운 쉼을 얻고 싶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쉴 만한 물가가 제가 다니는 교회가 되기 원하고, 거기서 저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가능해야만 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에서 발간하는 <한국여성신학> 82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본문으로]
  2.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윤리)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울 향연감리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며 가끔 설교를 맡기도 한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