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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다시 평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양권석)

시평

by 제3시대 2016. 3. 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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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평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실험, 2월 7일의 북한의 광명성 4호 로켓발사, 2월 10일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과 함께 거센 북풍이 불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한반도의 현재를 준전시 상황으로 기정사실화 하면서, 테러방지법과 사드배치 협상을 밀어붙이고, 교과서 국정화의 정당성과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가 최선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4월의 총선 역시 그 북풍의 소용돌이 속에 가두어 보겠다는 계산인듯하다.  

    결코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은 오히려 매우 익숙한 반복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그 북풍의강도와 질이 달랐다. 2000년 6월 15일, 적대적 대결로부터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향해 큰 틀에 있어서의 변화가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적이며 민족적인 결단은 비록 소소한 부침은 있었을 지라도 끝내는 제 길을 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놓아 본적이 없었다. 개성공단은 그러한 기대와 희망의 가느다란 끈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6.15 선언문에 나와 있는 분단을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켜주던 끈이었으며,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의 틈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순간에 그 끈을 잘라버렸다. 한반도는 다시 강대국들 간의 긴장과 대결이 펼쳐지는 격전지로 변하고 있고, 남북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적대와 공포감을 비정상적으로 증폭시키고 그것에 기초해서 권력의 독점을 강화하려는 악순환적 분단체제가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악순환적 분단체제 안에서 평화는 다시 금기의 언어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동서간의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평화운동을 불온시하고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어 배제하려고 했던 것은, 비록 이 한반도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반전 반핵 운동을 공산주의로 매도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어왔다. 전쟁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면서, 물리적 대결은 피할 수 없고, 이 물리적 대결에서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의 균형 혹은 우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핵무장이나 전쟁과 같은 모든 방어 수단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주장을 현실주의적이면서도 보편적 인식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운동은 비현실적 이상주의로 취급되거나 적에 동조하는 불온 세력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종북몰이 꾼들이 때를 만난 듯이 날뛰면서, 남북간의 모든 합의들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면서, 남한 핵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긴장과 갈등의 골이 깊어가는 이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물론 우리 주변에는 공개적으로 핵무장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회고해 본다면, 전쟁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 선다면, 우리는 민족을 포함한 모든 집단적 이해 관계를 넘어서 인간과 생명의 신비와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옹호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정말로 의미 있는 가르침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인간화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뿐만 아니다. 거의 재앙에 가까운 파괴와 희생을 불러 올 핵무기를 사용할 만한 정당한 이유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방어를 위해서라도 전쟁과 폭력이 무조건 정당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가 속한 국가나 공동체가 가진 물리적 힘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생명을 섬기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가진 물리적 힘이 전쟁과 파괴의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막아 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무조건적인 비폭력 평화주의를 말할 자신은 없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협하거나 공격해 오는 세력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전쟁을 포함한 모든 폭력적 수단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더욱이 선택의 폭을 더 많이 가진 강자에게는 마지막까지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의 속한 국가나 공동체를 지켜내야 하는 권리도 있고 책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과 무력의 사용에 무조건 동의해야 한다는 요구는 될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향해서, 물리적 대결의 길이 아니라 평화적 해결의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요구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무기도 남한의 핵무장도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동시에 북한의 핵폐기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 평화적 해결의 노력도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있고 로켓을 발사하고 있으니 물리적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선택 가능한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나 남북한의 맹목적 정치세력들의 역학관계가 아니라, 남북한 주민들의 삶이라는 중심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계산이 아닐 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세력 다툼의 결과에 대한 예측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식의 역학관계에 대한 계산은 위험한 물리적 대결을 선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계산은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의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향한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어떤 물리적 대결도 거부한다는 분명한 입장, 마지막까지 평화적 해결 방법의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분명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를 향한 이처럼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오히려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할 것이다.  

    전쟁과 같은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는 것은 광기 가득한 정치 집단들의 탓만은 아니다. 사실은 그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있기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의 한 세기를 살아 온 사람들이 물리적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때 보다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현재 상황이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을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공단 사업중단을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뿐만 아니다. 평화를 향한 우리의 노력이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다시 그 좌절의 위기 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평화적 화해의 과정을 향한 운동과 물리적 대결을 향한 운동을 조심스럽게 식별해 내야 하는 때이며, 평화의 길을 향해 큰 물줄기를 바꾸어 내야 하는 때이다. 때로는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로 취급 받거나 불온한 종북 집단으로 매도 당할 위험을 각오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남북간의 정치권력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책임도 없고,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책임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하고 살아가는 남북한의 모든 인간과 생명들을 향한 책임 그것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북에 호전성과 폭력성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남의 호전성과 폭력성에 대해서도 냉정한 비판을 가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남북의 정치권력들을 평화의 길로 다시 불러 세우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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