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숨
- 영화 도쿄소나타를 본 뒤 -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0)
“내가 지금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진정한 21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이다. 21세기는 왜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가? 그것은 왜 우리가 이전 세기에 가졌던 미래의 모습과 크게 다른가?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도쿄 소나타>는 내가 직면한 이 복잡한 문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는 그것이 나에게 새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현대 도쿄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작은 드라마를, 가능한 작은 과장과 함께 묘사하려 노력했다.” (무비위크 2009. 3)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켄지는 엄마가 건네준 급식비 봉투를 들고 피아노교습소를 찾는다. 엄격한 가장인 아빠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형은 출구 없는 미래를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외국인의 입대를 허용한 미군에 지원한 뒤 ‘신원보증서’를 들고 집으로 온다. 엄마는 가정주부다.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들고, 청소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입대지원서를 들고 온 큰 아들의 질문에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녀는 외롭다. 빈 집, 쇼파에 홀로 누워 두 팔을 허공에 뻗으며 읖조린다. ‘누가 나를 좀 잡아줘’ 한편 제법 큰 의료기 회사의 서무과장이었던 아빠는 고학력 저임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인 직원들에 밀려 실직 당한다. 하지만 매일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선 뒤, 동네 공원 무료급식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백화점 청소용역 노동자가 된 아빠가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아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친다. 그리고 엄마는 바다로 간다. 더 이상 길이 없는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운 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생겼으면 좋겠어’ 같은 시간, 지나던 트럭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아빠가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그날 두 시간 여 동안, 나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큰 아들이 되고, 막내아들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가 우리의 분신 같았고, 미래 같았다. 권위를 상실해가는 아버지는 불안하다. 무관심에 길들여져 버린 엄마는 외롭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은 무기력하다. 막내아들의 눈에 비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려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말은 그들의 행동과 다르다. 켄지는 고립되어 간다.
결국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다시 묶어주고, 이들 각자가 ‘다시 시작’하게 하는 순간으로 엔딩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시작’은 혁명적이지도, 격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느리고 긴 호흡’으로 그들에게 다시 찾아온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뱀은 몸이 자라고, 비늘이 닳게 됨으로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새 비늘옷이 낡은 비늘옷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동안, 뱀은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눈꺼풀도 허물을 벗어야 하므로, 이 무렵에는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껍질이 완성되면, 낡은 허물을 장갑 벗듯 벗어버린다. 그제서야 눈도 다시 뜬다. 살아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때, 말하자면 낡은 허물을 벗거나, 벗어야 할 때 눈도 함께 흐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을 보았고, 내적변화를 겪었다. 이때 그는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마침내 낡은 허물을 벗어버리던 순간,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변화가 필요할 때, 새로움이 간절할 때,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내 시선을 기다리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한 방에 모여, 문을 걸어 잠구고 있었다. 이어질지도 모를 죽음의 연좌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상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침묵과 공포의 순간, 이 폐쇄된 공간속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공포에 공포가 더해진 상황, 제자들에게 ‘평화(평강)’는 역설 중에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곤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령을 받아라’.
나는 이것을 ‘두번째 숨’이라 이름 짓고 싶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성령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도행전에 기록된 ‘불의 혀’같이 찾아온 그 성령은 아니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때 그들 속으로 성령이 들어갔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반면 사도행전의 그 영은 ‘능력’이었던 것 같다. ‘생명’과 ‘능력’은 공존한다. 생명이 있어야 능력이 있을 수 있고, 능력이 있음으로 생명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앞선다. 예수는 먼저 생명을 불어넣었다. 흙으로 형상 지어진 사람의 모양에 첫 번째 숨을 불어넣은 야훼처럼, 그도 두려움과 공포로 빚어진,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폐쇄된 자아들을 향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환상체험이었든,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든 그것을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무겁고 답답한 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혹시라도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모든 분들께 ‘성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조심스레 건네 보는 것이다. 호흡을 불어넣은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언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 20:23)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평온히 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낸 그 집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집사님 부부 데이트 한번 하시죠. 영화 어떠신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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