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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신도 마음을 돌이킬까? (민기욱)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3. 2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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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마음을 돌이킬까?



 

민기욱
(GTU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내가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저널에 글을 한 꼭지 올려서도 아니요, 번역이든 학술적인 글의 출판도 아닌 일반 독자와의 만남과 “쉬운(소통하는)” 글을 통해 글이 나누어지고 응답을 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현란한 어휘와 사고의 생산에 버금가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쉬운” 글이 되길 바라며 과거 어느 지면에 썼던 글의 1.01판 정도 되는 글이니 독자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 

       종교인들이든 아니든 우리는 “기도”라는 걸 하곤 한다. 기도는 물론 대상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 기도의 효력에 대해 상대적이기는 하나 분명 어느 정도의 믿음 내지는 “기대”를 하게 된다. 과연 신은 기도를 들어주시나? 종교인이라면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하여,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이 닥치게 되면 누구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마련이다. (잠깐 사고실험을 해보자!) 기도의 순간 잠깐 멈추어 보자. 왜 기도하지? 그렇다. 기도의 효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가? 항상 신이 들어주셨나? 아니다. 들어주시지 않았던 적이 많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크다. 어떤 이는 항상 들어주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신앙의 정도를 키재기 당할 때가 많다. 기도의 효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닌, 기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두 반응 사이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재단된다. 이럴 때 목회자들은 흔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혹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대답하곤 한다. 나도 목회자지만 답답하다. 그것 말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만일 신께서 마음을 굳건히 정하셔서 우리의 기도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절대불변하시다면 그 때는 어쩔 셈인가?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다면? 더 나아가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그러나 다행히 어느 누구도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가끔 과학자 중에 기도와 과학의 관계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허나 교회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변두리일 뿐이다.  

       나는 한국과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출판한 적이 있다. 기초적인 전제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해 오고 있다는 것인데, 양자물리학의 발견 이후 신학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도대체 양자물리학이 무엇이기에 신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물리학적 세계관이 바뀌었는데 왜 신학의 렌즈가 바뀌는가? 또한 “변화”했다면 무엇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기도에 대해 말하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양자물리학을 운운하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양자물리학과 더불어 아이작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과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17세기부터다. 그러니까 철학과 과학이 각각의 분과로 나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다. 서로 나뉘어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칸트의 철학이 뉴튼의 물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따라서 뉴튼의 물리학을 알게 되면 칸트의 철학이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신앙의 뼈대가 되는 신학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학도 당시의 사회, 문화, 사상,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의 영향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신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은, 신앙의 색깔은 어땠을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포탄을 예로 든다. 실제로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여 전쟁에서 서로 대포를 쏘아댔다. 정확한 위치에 캐논볼이 떨어져야 한다. 여러 가지 초기 조건, 즉 대포의 위치, 포탄의 무게, 바람의 방향, 바람의 속도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필요한 모든 조건을 알게 되면, 그래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런 기초적인 과학적 전제와 산물이 철학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필요한 초기 조건을 알게 될 때, 나중의 결과를 알게 된다는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이를 신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이, 그리고 신학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될까? “결정론적 세계관”이 낳은 신에 대한 생각(신론)을 일컬어 오늘날 “고전적 군주모델”이라 한다. 즉, 고정된 계급 질서 속에서 신의 절대 주권과 전지하신 계획 아래 모든 것이 통합된다. 신의 전능과 신에 의한 예정은 불변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 신에 대한 기존의 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고전적 군주모델”을 통해 신을 이해할 때가 많다. 마치 오늘날에도 화성 등에 우주왕복선을 보낼 때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운행할 때 뉴튼의 고전 물리학만을 사용했다간 큰 사고를 당할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세계를 또한 다뤄야 하는데 이 영역에는 다른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신앙도, 신학도, 교회도 더 이상 예수가 살던 시대 속에 있지 않고,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 속에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질서가 변했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빨리 변해도 문제고, 너무 변하지 않고 고집할 때도 문제다. 그렇다면 변화의 속도만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변화의 방향도 문제 아닌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변화로 인해 뭔가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나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게 아닐까?  

       신학과 신앙은 뼈와 살의 관계다. 뼈가 없이 살로만 살 수 없다. 또한 역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군주모델”이라는 신학은 어느새 우리의 신앙이 되었고, 교리가 되었다. 뉴튼의 물리학으로 인해, 철학으로 인해, 더욱 탄탄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신학은 또한 살이 되어 신도들을 먹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도 중에 비만이 생기는가 하면 배탈이 자주 나서 피골이 상접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체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음식 상태가 문제였다. 물론 같은 음식을 먹어도 탈나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하면 모든 사람이 탈나겠지만.  

       그렇다면 음식의 상태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이 뭘까? 수많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계관과 세계의 변화 상호간에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겠지만)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단 말이다. 토마스 쿤이 지적하는 “과학혁명”이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다방면에 정말 큰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원리의 발견이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는 개인에 의해 발전된 상대성원리와는 달리 양자물리학은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됐고,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혁명일까?  

       “양자물리학을 접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실로 놀랍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가 양자물리학의 영향 하에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다 처음 만나게 되는 용어는 아마 “불확정성 원리”일 것이다. 뉴튼의 영향 하에 포탄을 쏠 때는 몰랐던 사실이 미시 세계에서 발견됐다. 실험기구의 발달로 인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시세계에 이르러 철저하게 무너졌다.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불확정성 원리”다. 우리는 단지 불확정적으로, 통계적으로 세상을 알 뿐이다. 그것이 자연의 성격이다. 이런 과학정신이 시대에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다. 이를 교회가, 신학이 비켜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전자장비와 통신기기는 교회에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 과학정신이 교회에 스멀스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과학기술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적 군주모델”을 깨뜨리고 새로움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불편하다 하여 무시할 수만은 없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 아닌가? 그렇다면 대화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지난 2월 초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를 이곳 GTU에 초청하여 “과학으로 이해하는 창조세계”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학우들보다는 외부인들이 훨씬 많았던 강연이었다. 과학을 전공하고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도전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신앙인이자 과학자인 우 교수의 열정과 진지함은 실로 존경스러웠다. 그랬다.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 독서 모임”을 꾸리고 신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아우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때가 된 것이었다. 하여 특별강연을 빌미로 취지를 설명하고 홍보하여 드디어 소수이지만 지난 3월 12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가 21세기를 살아갈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지배적이며, 냉정하고 통제적이며 이성적으로서 군주적 모델에 기반을 둔 “하나님 이해”와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과는 상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교인이 겪는 혼돈과 갈등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교회에 대한 신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포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의 음악도, 문화도 이성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교회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교회에서 “역사”가 해석되어야만 하듯이 시대 정신인 “과학”도 말해져야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마켓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계신 분들을 보게 된다.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묻고 싶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과 진지하게 세상에 대해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대화”는 결과를 예상하지만 미리 결과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 “대화”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전제와 비슷하다.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살펴 본 자연의 “실재”는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미래를 결정하지 않으신다. 정해놓은 각본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뉴튼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빚어놓은 산물일 뿐이다.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미래를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양자물리학이라는 체계에 의해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양자물리학도 한 시대의 산물이겠지만 과거의 어떤 도구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게 현대 자연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거 같다. 물론 일관된 범주로 구성된 단 하나의 집합이 인간 경험의 풍부한 다양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는 뉴튼을 극복한 양자물리학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지니고 있고 부분적일 뿐이다. 다만 “모델”일 뿐이다. 그렇다. “하느님에 대한 모델과 생각”이 “하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도 마음을 돌이키는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기도를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배웠다. 그렇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해야 한다. 한 쪽이 마음을 닫아 놓는다면 대화가 되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지, 그분이 닫고 계시는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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