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5]
지젝과 바울(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번 지젝과 바울에서 주제는 지젝의 라깡 읽기였다. 라깡의 욕망의 도식을 바탕으로 판타지가 어떤 역할을 하며 주체는 어떻게 상징계(심볼릭 월드)에서 빗금쳐지는지, 케보이(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언제나 불안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라깡에 대한 이해가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지점은 라깡을 바탕으로 한 지젝의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 (후기 맑스주의를 포함한) 읽기이다. 이번 장에서 주된 텍스트는 물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출발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지젝과 바울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처음 이 책이 나온 이후 지젝은 왕성한 필력으로 수십권의 책과 아티클들을 출판하였고, 그만큼 그의 사상과 현 시대에 대한 해법도 변화 발전되었다. 특히 지젝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에 나타난 것이므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몇가지 지젝에 대해 나온 수많은 학자들의 저서들중에 도움을 받은 몇권과 지젝의 다른 저작들을 바탕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진행해보려한다. 지젝을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특히나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전문성이 부족한 필자에게는 지젝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이 쉬울 것이나, 필자의 경험으로 어려운 학자를 대할때는 먼저 최대한 쉽게 그의 사상을 오려내고 그 간단한 그림안에서 계속적으로 그 학자의 저서를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을 변형시켜 가는 것이 코끼리 다리 더듬듯 방대한 저작 속에서 몇개의 편린을 붙잡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지젝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만이 아니라, 지젝의 처음 학문에 대한 계기는 그의 특이한 콘텍스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질문, “왜 나름 성공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는가?”이다.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왜 타락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공산주의적 혁명 정신으로 그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자신의 담론을 펼치면서 빈번히 정치적 사건과 예들을 비유로 사용한다. 그러한 예들을 바탕으로 글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필자 또한 여러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예를 잘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그 예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 웹검색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조금 때로는 맞지 않은 예일수도 있고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 시킬수도 있지만 본 글에서는 ‘교회’를 예로 들어 지젝의 담론을 설명해 보겠다. 물론 지젝이 데드락 (교착상태)을 해석하기 위해, 희망적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기독교를 예로 들기도 하니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닐 것이다.
지젝으로 교회 보기
처음 지젝의 질문을 교회를 바탕으로 바꾸어보자. ‘왜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교회를 다닐까?’ 이것은 교회를 심각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읽는 성경의 나오는 신앙인의 삶이 자신이 사는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봉 오천만원이 넘는 사례비에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자녀들을 미국에서 유학시키는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의 삶이 성서에 나오는 영적 리더들의 삶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좌우당간에 신앙생활을 해가며 큰 갈등없이 살아간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원래 맑스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거짓 믿음’ 즉 쉽게 말하면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가 행복해진다.’라는 거짓말로 시작하여 ‘목사는 거룩한 존재다.’라는 구라로 끝나는 기독교는 시민들이 현실의 부조리와 거짓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회 정의와 혁명을 방해하는 아편적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거짓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지젝은 파스칼을 인용하여 믿음은 앎(Knowledge)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습(Custom)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1 재미있게도 이런 가정이 가능한데, 백일기도의 효과를 믿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일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아담 카스코(Adam Kotsko)는 지젝의 말을 응용하여 현대 미국 대형교회의 성공을 해석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와 같이 열린 예배 형식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예배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배 관습을 제공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믿음을 바꾸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팝음악과 강연형식의 순서를 교회적 예배라고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그 유명한 ISP(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음을 말했다.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거짓-믿음이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를 이끌어가는 물질적 조직과 기구들이란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힘은 강제적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이고 ‘부드러운’것이다. 3 4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요즘과 같이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수많은 타락과 문제점들이 공유된 상태에서도 가능한지 물어봐야 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몰라도 현대의 교회는 ‘구원’이나 ‘복’으로 포장된 거짓으로 가득찬 집단으로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목회자들의 불법과 타락이 사탄의 장난이라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지젝의 설명은 이런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주 소수의 운빨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준엄하며 냉정하다. 백일 기도를 한다고 자신의 자녀가 서울대를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심리가 존재할 뿐이다. 즉, 번영신학의 허울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선언 뒤에 숨겨진 교회의 이기심은 그 구성원들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번영신학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번영신학은 무너지지 않는다. 차세대 영적 지도자로 각광받던 목사가 성추문에 휩싸여도 교회의 공금을 횡령해도 논문 표절이란 구설수에 올라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바로 이전 장에서 논했던 환상(Fantasy)가 등장하는 곳이 이 지점이다. 여기서 판타지의 역할과 현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좀 길긴 하지만 지젝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다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한부분을 필자가 번역 정리한 것이다. 5
한 아버지가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의 곁을 오랜동안 지키다가 아들이 죽자 옆방으로 가서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아들의 침대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고 한 노인이 아이를 지키며 기도를 읖조리고 있다. 그 때 그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옆에 서서 그의 팔을 잡고 꾸짖듣이 말한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일어나자 아들이 죽어 있는 방에서 불길을 발견한다. 노인은 잠에 들어 있었고 촛불이 그의 죽은 아들의 팔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전통적인 꿈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꿈은 잠든 이의 잠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잠자던 아버지에게 현실로부터의 방해가 일어난다. (타는 냄새) 그러자 꿈이 발동하여 그의 잠을 연장시킨다. 짧고 작은 이야기는 외부의 요소를 담는다 (불, 아이- 그 편이 더 자는 자를 안심시킬수도 있다.) 그러다가 현실의 방해요소가 강해지면 잠자던 이는 깨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면 보통 우리는 꿈을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꿈을 벗어나서 현실의 세계로 온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라깡은 이를 역전시킨다. 바로 보통 우리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판타지이다. 역으로 꿈은 우리가 판타지인 현실세계를 넘어서 만나는 리얼의 세계이다. 이를 지젝은 라깡의 현실(Lacanian Real)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현실이 판타지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가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바로 이 판타지가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진짜 힘은 교회의 타락을 숨기고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거짓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교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우리가 교회의 타락과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타락과 문제점의 원인을 밝히고 고쳐 나가면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갱신과 개혁을 포기하고 ‘가나안’ 교인의 길을 걷는다. 7 둘 다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함정이 된다. 지젝에 따르면 이 둘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진정한 교회의 핵(Kernel)을 만나지 않기 위해 환상적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8 왜냐하면 두가지 방법 모두 교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9
왜 바뀌지 않는가?
약 40년전에 지나친 번영신학과 교회의 계급주의, 그리고 지나친 헌금강조등의 율법적 신앙을 바로잡고자 평신도 사역자를 강화하고 신유나 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금하고 세계선교의 희망을 불태운 교회가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구원파’교회이다. 현재의 교회가 거짓된 교리로 얼룩져 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내 그 곳은 이전보다 더욱 신비적이고 세속적인 집단으로 바뀌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인간을 이리도 쉽게 조종할 수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강제로 어떤 것을 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조종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한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할 수있다면 그러면서도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힘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왜 대형교회가 수많은 문제들과 갈등에 시름하면서도 마치 그 교회에 맹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 처럼 보이는지 알 수 있다. 그들도 알고있다 우리처럼. 다만 알면서도 계속 하던대로 할 뿐이다. 바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이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안다는 것은 비판의식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만이 아니다. 나와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모두 마찬가지로 살아간다. 이 부분에서 지젝은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후반부가 ‘주체’(Subject)에 할애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지젝은 알튀세르의 실패는 바로 어떻게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 ‘이름 불리워지는가?’ (Interpellation)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설명해내기 위해 라깡을 데카르트, 칸트, 헤겔의 전통에 위치시킨다. 바로 지젝이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을때 이는 결국 구조주의를 넘어서 독일의 관념론에 라깡을 안착시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11 12
가정된 주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어떤 것을 가정한다. 그 가정 뒤에는 또 다른 가정이있다. 이것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정된 주체(subject)가 있다. 이 가정된 주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을 이전 웹진 글에서 우리는 판타지라고 불렀다. 바로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라깡이 연결되는 지점이 이곳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징계(심볼릭 월드)안에서 이미 가정된 존재이며 (빗금쳐진 $) 불안한 상징계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안정시켜줄 거대한 존재(신)를 찾아나서지만 결국 텅빈 대타자(교회-신이 있다고 하는 장소)를 만나 그 비어있는 곳을 판타지로 채운다. 그곳은 바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이며 바로 숭고한 대상 (무섭고도 장엄한 빈 물체)가 자리한 곳이다. 여기서 지젝이 숭고한 대상 (Sublime object)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바로 칸트가 말하는 thing in itself (물자체)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철학의 사유의 시작은 칸트이며 칸트의 사유를 극복한 지점이 바로 이 물자체에 대한 헤겔의 칸트비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사유의 방식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물자체라는 외부적 요소를 이용하여 주체의 사유의 방식을 규정하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문제점은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방식이 주체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지젝이 보는 헤겔의 주장이다. 위에서 사용한 교회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칸트식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인간 나름으로 만든 기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수도 바로 볼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나라에 준하는 교회는 하나님 자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득 문득 인간은 하나님의 장엄함을 그 숭고한 대상을 체험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헤겔의 불만은 이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은 언제나 틀릴수 밖에 없다가 된다. 숭고함을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신이 틀렸음을 칸트는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3
지젝이 보는 헤겔의 정수(essense)는 칸트가 말한 묘사할 수 없는 물자체의 경험, 즉 숭고함 (Sublime)에 대하여 칸트는 옳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 이면에 여전히 물자체가 있다라고 생각한 것에 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는 여전히 무엇인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물자체 (Thing-in-itself)란 아무것도 없는것, 묘사할 수 없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negation of negation)인데, 바로 현세계(정)에서 묘사가 불가능한 숭고한 무엇(Sublime object)로 부정(반)을 거쳤다면, 마지막 변증법의 단계인 합은 그 부정이야 말로 실재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14 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부정의 공간이 주체가 나타나는 곳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주체 자체를 상정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부정했던 그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15 독자들은 이전 장에서 빗금쳐진 주체에 대해 논했을때, 이미 주체는 빗금쳐져 있었다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미’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있다. 지젝은 바로 절대 부정의 공간에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주체는 나타났으며 주체의 자리와 생성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나타남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서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16
전기 지젝의 대안
보통 지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젝이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두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초기의 지젝은 급진적 민주주의 (Radical Democracy)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언급되어 있다. 후기의 지젝은 그의 기독교 읽기를 통해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 웹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과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설명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기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대안이 어떻게 대안이 될지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에 주체가 언제나 쥬이상스속에서 판타지에 묶여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체가 생성되는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데올로기의 시작점을 살핀다. 바로 독일 관념론적 전통의 주체론에 이미 그 주체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헤겔에 와서 주체론은 완성되어 라깡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신(God)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을 투영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하는 외부적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 주체의 개념의 부정성만으로 신에 대한 설명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무신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젝은 포이에르바하의 시도가 주체를 중심으로 외부적 세계 또는 신을 설명하려 했으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포이에르바하의 설명은 왜 인간이 굳이 신(God)을 상상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칸트가 물자체 (Thing-in-itself)를 상정하고 숭고함이란 개념으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비어있는 리얼에 다가서기를 포기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포이에르바하는 주체의 속성에 신을 위치시킴으로 비어있는 리얼을 인간의 속성에 소외된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채운다. 여기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약함의 부산물이라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신에 대한 지식이 믿음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부분에 언급되었다. 17
지젝은 헤겔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주체를 설명했다고 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또는 주체가 신의 이면에 자리한 진실이 아니라 주체는 주체이전에 신을 가정해야한다. 여기서 신을 실체(Substance)라 해도 좋다. 주체는 포이에르바하식으로 신을 자신의 주체 이후에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먼저 가정하고 그 신이 인간, 즉 주체가 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헤겔식의 그리스도의 화육 ‘incarnation’에 대한 이해이다. 바로 절대 정신인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 주체가 나타나는 시작이 된다는 의미는 거꾸로 바로 그 신을 신의 자리에 세우는 것은 주체라는 말이 된다. 이를 라깡식으로 하면 바로 상징계 (the big Other)의 시작은 주체에 의해 전제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18 지젝은 이러한 헤겔 읽기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것(Traversing Its Fantasy)이라 생각한 듯하다. 바로 전기 지젝의 대안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라깡의 상징계 안에 자리한 주체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상징계를 전제한 것이 바로 주체임을 인식하고 주체와 상징계를 묶는 이데올로기의 그 숭고한 대상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라클라우 (Ernst Laclau)에 착안한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목표하는 평등, 자유, 평화등의 급진화된 형태가 이른바 타인의 개성을 평준화하고 수량화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비어있는 가치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인권, 여성주의, 환경주의등의 가치들과 연대하면서 이른바 민주적 가치라는 평등 담론등을 통해 계속적인 투쟁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19 이를 교회적 상황에 비교한다면, 기독교의 신이라는 드러나 있는 기표와 가치들이 이데올로기임을 감안하고 그것이 비어있는 기표들의 상징계임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가치로 존재하는 사랑과 평화를 기반으로 좀 더 현실적인 층위에서 신앙의 방법들을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후기 지젝은 스스로 의문을 표한다. 다음 웹진은 그 이유와 후기 지젝의 대안을 살펴볼 것이다. 20
<참고문헌>
Kotsko, Adam. Zizek and Theology. 1 edition. London ; 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8.
Zizek, Slavoj.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First Edition edi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Books, 1993.
———.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Second Edition edition. London; New York: Verso,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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