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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무한 반복하는 삶 속에서 길찾기 (이희승)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6. 5. 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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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반복하는 삶 속에서 길찾기,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이희승*



  온 나라가 예상치 못했던 총선 결과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들썩이고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에 전에 없던 총기가 반짝이는 지금 이 순간이 맞다라고 외치고픈 마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열일곱번째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를 되돌려 보았습니다. 저처럼 대략 ‘중년’이라는 타이틀이 울컥 억울하지만 그래도 부정하기 어려운 독자분들이라면, 폭염에 숨이 막히던 여름날 종로 어딘가에 있는 텅빈 예술영화관 구석에 앉아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함께 어리둥절한 오후를 보낸 경험이 한번씩은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저 또한, 엉뚱한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로 시작해서, 절대로 소개팅한 그와 함께 보지 말았어야 했던 <강원도의 힘> (1998), <오! 수정> (2000) 그리고 <생활의 발견> (2002)을 지나 연애의 발견, 결혼의 발견, 육아의 발견 등등을 거치면서 어느새 홍감독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혼자 보나 여럿이 함께 보나 매한가지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취중진담에 중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전무후무한, 참으로 독특한 존재입니다. 문민 정부 시절, 컨텐츠 산업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소나기 투자로 영화산업이 몸집 불리기에 정신줄을 놓고 있던 그 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홍상수 감독은, 영화만들기에 있어서 자본이 반드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며 배신, 타협, 투항, 혹은 변절없이 이십년을 한결같이 외부 투자에 큰 의존없이 영화 제작과 배급의 길을 가고 있는 흔치 않은 영화작가입니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반자본주의적 제작구조 말고도 영화의 형식과 주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배반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보완하고 완성짓는 영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한 텍스트이지요. <투캅스>와 <결혼이야기>로는 성에 차지 않고 <라이언 킹>이나 <보디가드>는 어쩐지 인공감미료 향이 강하다고 느끼지만 아직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기에는 조금 어렸던 90년대부터 홍상수 감독의 ‘기름기 쪽 빠진’ 영화들을 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술에 취해 체면을 잊고 화장기를 벗어 던진 동시대의 자화상이 커다란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그 민망한 ‘지금’을 견뎌야만, 관습적인 거짓과 모순에서 아주 조금 더 자유로운 내일이 올 수 있다는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저만의 경험은 아닐 듯 하네요. 숙취로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 이미 중천에 떠있는 해를 원망스레 올려다 보고는 주섬주섬 낯선 여관방을 나서는 그 한심한 순간에도, 인생은 바로 지금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진실을 받아 들이려고 애쓰는 홍상수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은 그 데자뷰의 경험 말입니다.  



  영화는 정확히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 집니다. 하지만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둘 사이의 닮음과 반복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헐렁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승전결의 구조로는 도무지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댓구 – 즉, 지금과 그때, 그리고 맞다와 틀리다 – 를 살짝 헝클어서 늘어 놓은 듯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감독인 주인공이 특강 날짜를 착각하고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와서는 낯선 도시에서 목적없이 하루를 메꿔 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수원 여기저기를 돌던 함춘수는 화가 윤희정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살짝 허세가 있는 듯도 하고, 그 허세가 외로움 때문인 것도 같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름이 알려진 영화감독이 보이는 관심이 싫지 않은 윤희정은 다소 앙큼하게 속내를 숨기며 함춘수의 할 일 없는 하루 보내기에 동참 하기로 합니다. 윤희정의 작업실 방문, 그리고 이어진 둘만의 술자리, 마지막으로 윤희정의 지인들과의 파티로 자리를 바꿔 가며 희정을 쫓던 함춘수는 끝내 순진하지만 또 응큼하기도 한 연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희정과 헤어지죠. 실망과 불만족으로 마음이 답답해진 함춘수는 다음날 특강에서도 만족할 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 가게 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뒷맛이 개운치 못한 마무리로 끝을 맺고, 영화는 곧장 두번째 이야기로 향합니다. 같은 인물과 설정으로 시작한 두번째 이야기는 ‘어, 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라며 의아해 하는 관객들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같은 장면들을 꼼꼼히 복기해 나갑니다. 겨울 햇살이 와닿는 복내당 툇마루에서 살포시 잠을 청하던 함춘수는 1부와 똑같이 비닐 봉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바나나 우유를 꺼내 마시는 윤희정을 발견하고 호감을 느낍니다. 함께 커피 한잔 하자며 예민해서 커피를 못 마시는 윤희정을 데리고 카페로 들어온 함춘수는 어쩐지 첫번째 이야기의 함춘수보다는 살짝 더 편안해지고 솔직한 태도로 윤희정에 대한 호감과 궁금증을 표현합니다. 결코 1부에서 겪은 함춘수의 실패가 이야기의 틀 밖으로 튀어나와 2부의 주인공인 그에게 교훈이 되지 못하는 단절된 반복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관객은 왠지 모를 이 바람직한 변화에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부의 윤희정 또한, 1부에서는 허세로 무장했던 외로움과 혼란을 솔직히 털어 놓습니다. 1부에서는 몹시 수동적이고 관습적이던 윤희정의 태도는 변하고, 두번째 이야기에서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더 사랑스러워진 듯합니다. 윤희정이 입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과 함춘수에 대한 관심에 충실하면서, 영화는 둘의 관계가 1부의 함춘수가 그토록 소망하던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대를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금 더 성숙해진 듯한 두 주인공들은 순간의 감정에 솔직함으로 현실의 벽을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유부남인 함춘수는 자신을 향해 흔쾌히 무장해제한 윤희정을 지금 이순간 열렬히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을 환각제 삼아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에 더이상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애틋한 밤을 아쉬움으로 넘기고, 둘은 다음날 함춘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에서 다시 마주합니다. 예측하지 못한 작은 변화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함춘수와 윤희정은 마치 오랜 친구 혹은 오랜 연인처럼 각자의 공허함,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한 흥분을 이해하고 보듬어 줍니다. 이렇게 두번째 이야기는 홍상수 감독이 시나리오에 써 넣지도 않았던 흰 눈을 소복하게 맞으며 흐뭇한 결말을 맺습니다.  


  하루를 살고 보면 그 하루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허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순간에는 내일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기도 합니다. 지리멸렬한 어제를 안타깝게 돌아보며 반드시, 그리고 완벽하게 달라져 있어야 할 내일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는 지지부진한 ‘지금’을 긍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우리의 갈급함을 채우려는 듯, 수많은 영화들이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미래를 화사하게 색칠하며 ‘앞으로, 앞으로!’를 외칩니다. 그러던 어느날, 당혹함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민망한 ‘지금’을 견뎌낸 이십년 전의 ‘나’와는 좀 달라져 버린 듯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눈빛이 형형한 젊은 유학파 감독 홍상수가 잘못 흘러가는 영화판을 향해 호통을 치고 세상을 다 바꿀 듯한 기세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세상에 내놓았던 ‘그때’를 거쳐, 시네마 파라디조를 홀로 지키는 고독한 장수같던 ‘한때’를 지나고, 이제는 백발이 성성하고 목소리도 한결 나긋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희망, 혼란, 실망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스무해를 보낸 탓인가 봅니다. 쨍쨍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컷’을 외치던 그때나, 자신의 이름 앞에 열일곱개의 영화 타이틀을 무심히 쌓아 놓은 지금이나, 또 앞으로 올 그 어느때나, 한결같이 안경을 앞이마에 척 걸쳐 놓고 뚫어져라 보는 모니터와 듬성듬성 자리가 찬 영화관에서, 자신과 관객이 마음을 다해 ‘지금’을 살기 원하는 홍상수 감독이 넌지시 읊조리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엉성하지만 기품이 있고 다소곳하지만 힘이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세상이 바뀐다면, 그리고 그 바뀐 세상이 이전의 세상보다 극적으로 나아진 세상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이런 영화가 무슨 소용일까요? 분명히 달라질 줄 알았지만 똑같고, 혹시 나아지나 싶었지만 역시 그대로인 ‘그때’를 만날지라도 당장의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 낸다면, 이 영화가 두 개의 반복적인 이야기 사이로 내비치는 은근한 변화들로 인해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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