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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옥바라지 골목을 둘러싼 서사학(이상철)

시평

by 제3시대 2016. 7. 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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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을 둘러싼 서사학[각주:1]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프롤로그: 옥바라지 골목 잔혹사


    옥바라지 골목은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본은 체제에 반하는 독립운동가나 불순분자들을 잡아 감옥에 쳐넣었는데 그곳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이다. 옥에 갇힌 남편과 아들, 그리고 딸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대문 감옥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거할 곳을 마련하면서 동네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옥바라지 골목의 시작이다. 김구, 여운형, 김좌진, 손병희, 유관순 같은 인물들이 일제 강점기때 이곳에 투옥되었었고, 해방 후 4.19, 5.16을 거치면서는 시국사범들이 주로 그곳에 수감되었다.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던 악명 높았던 인혁당 사건(1975년)도 서대문 형무소 역사에는 또렷히 새겨져 있다. 이렇듯 옥바라지 골목은 일제 강점기 부터 박정희 독재시대까지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장소이다. 1987년 경기도 의왕으로 구치소가 옮겨 가면서 옥바라지 골목은 점차 쇠퇴하였고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더니 2015년 7월 주민 70% 이상의 동의를 받아 재개발 정비사업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단다. 그리고 올초부터 철거가 시작되었다. 현재는 최은아씨와 구본장 여관 건물주 이길자 사장만이 남아 외로운 투쟁중이고... 옥바라지 골목은 다양한 서사와 함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5월초에 몇몇 단체들이 뒤늦게 대책위를 꾸렸고 감신, 장신, 한신에 재학중인 신학생과 졸업생들이 합류하면서 옥바라지 선교센터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지난 5월 11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신학도들이 기도회를 이끌면서 옥바라지 골목 사수를 위한 마음을 모아가고 있다.  


<옥바라지 골목>


공간의 몰락


    나는 2004년에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가 2014년에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10년 만에 귀환한 셈이다. 5년 동안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은 1년 반, 10년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은 적응하는데 3년 걸린다고 누가 말했줬는데, 나는 귀국한지 2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한국땅에 완전적응하려면 1년 더 남은 셈인가? 어쨌든 아직까지 난 살짝 어리버리하다.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정권이 바뀌어 있었다. 2004년 미국 갈 때는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는데, 2014년에 돌아와 보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명박도 대통령을 해먹었다고 누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10년 전 정권과 현 정권이 다르다라는 현실보다 나를 몇 배나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달라진 서울의 모습이었다. 사라진 골목과 변해버린 광장과 물이 흐르는 청계천, 철거된 후진 건물들과 새롭게 섹시하게 들어서는 건물 사이에서 귀국 한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배회한다. 

    달라진 거리의 풍경을 위해 용산에서는 사람들이 자본이라는 제단위로 올라가 희생양으로 바쳐졌다고 언젠가 누가 나에게 고자질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용산뿐만이 아니란다. 4대강이 흐르는 국토 곳곳에서, 밀양으로, 강정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그곳에서 자본의 행진은 지속된다. 그리고 이제 이곳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으로 악령이 찾아왔다. 

    지금 돌이켜보니 옥바라지 골목의 비극이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징후가 있었다. 작년에 서대문 고가가 철거된 사건이었다. 예전에 서대문고가 밑에 화양극장이라고 있었는데 고등학교때 중간고사 끝나고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보고 몰래 숨어서 담배도 처음 펴보고 했던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1989년으로 기억하는데, 그 무렵 대한민국은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님 방북으로 인한 통일운동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당시 기청과 감청이 중심이 되었던 기독청년들이 아현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시내로 데모를 하러 갈라치면 꼭 서대문 고가 밑에서 담배 한 대씩 피고 갔었는데...그 고가가 사라졌다. 우리의 칙칙하고 암울했던 과거와 기억이 사라져 홀가분은 한데 어딘가 영 마음은 편치 않다. 육중했던 고가가 사라지자 서대문로터리는 너무나 밝고 화려한 거리로 변모되었다. 새롭게 상권이 조성되면서 후진 건물들은 철거되고 집값도 오르고 땅값도 올랐다. 살짝, 아니 많이 앞으로 닥쳐올 한백교회 월세 인상이 걱정된다.(※참고로 한백교회는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2번 출구 롯데리아 골목에 위치한다)   


기억의 종말


    앞서도 말했듯이 정권이 바뀐 것 보다 내가 놀던 동네와 내가 활보했던 거리가 달라졌다는 것이 귀국 후 나에게 다가왔던 가장 큰 당혹감이었다. 무조건 7080을 낭만적으로 회고하고, 아무런 비판없이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을 쏟아 붓는 것은 민망하고 유치한 일이다. 우리는 더 큰 거리로 나가야 하고,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기분이 엿 같은 걸까?  

    미국에서 살았던 학교 기숙사가 하도 낡고 삐걱거려 도대체 언제 이 건물이 세워졌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1893년 시카고 무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세계에서 왔던 각국 대표단들의 숙박을 위해 지어졌다고 답했던 학교 직원의 말이 떠오른다. 당시 우리나라도 COREA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다는 그 박람회 말이다. 백년이 지났어도 건물과 도로의 변화와 차이를 별로 느낄 수 없는 지역에서 살다 돌아온 나로서는 10년 만에 변한 조국 산하가 놀랍고 경이롭다.  

    하지만 점점 살아보니 이 변화가 마냥 즐겁거나 유쾌하지 만은 않다. 모종의 정권적 차원의 음모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같은 것도 들고... 그 혐의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거리와 동네가 사라지고 달라지고 있는 것은 각각의 장소와 공간에 베어있는 과거 그곳에서 벌어졌던 서사에 대한 세탁, 혹은 그 장소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기억의 연쇄를 차단하거나 거세하기 위한 정권적 차원의 노력 아닐까?  

    실례로 귀국하여 뒤늦게 안 사실인데 큰돈을 들여 권력은 온 나라의 길 이름과 집주소를 새롭게 개명하였다. 옛 지명을 다 지우고 새 주소로 싹 교체한 것이다. 현대철학이 이룩한 성과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재발견이다. 그전까지 언어란 단지 사물이 지닌 의미를 겉으로 외화시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어는 현대철학에서 와서 더 이상 보조적 차원의 그 무엇이 아니다. 언어는 사건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거나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언어는 사건 그 자체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도로명과 집주소를 바꾸는 일, 시내의 대표적 상징적 건물을 부수고 파헤치는 일은 장소성과 연관된 사건의 의미와 의식을 다시 주조하겠다는 정권적 차원의 야욕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실제로 그 약발은 먹혔다. 돌아와서 내가 만나본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전 거리의 이름과 옛날 동네어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하고 불편해 한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고 옛 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을 들먹이는 나를 보며 시대착오적이라고 충고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나를 측은하게 여겨주는 고마운 동무도 있었다. 순간 문득 이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멍청하고 파렴치하고 양아치 같고 천박한 정권이 민중들이 지니는 기억의 매커니즘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는지.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이 되면, 거리와 광장에서 출렁이며 메아리 쳐졌던 민중들의 함성 안에 감추어져 있는 봉기의 기억과 그 기억의 반복이라는 매커니즘을 말이다. 그것이 지니는 파괴력을 성실히 학습한 후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를 MB와 그네가 터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민중들이 지닌 기억의 고리를 하나씩 절단하기로 작정을 했고, 잘려나간 지면을 잘 다지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광장과 거리에서 제한적으로 뛰어 놀게 하고, 폼 나게 단장된 동네에서 세계시민이 되어 촌티내지 말고 세련되게 그 문화를 향유하라고 다독이고 있다면 말이다. (이상은 얼마 전 달라진 종로길과 광화문 광장, 그리고 고가가 사라진 서대문에 이르는 도심길을 걸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옥바라지 선교센터 포럼>



에필로그: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 옥바라지 선교센터

  

    악령이 종로와 광화문을 지나 서대문을 거쳐 북으로 방향을 틀어 옥바라지 골목에 다달았다. 그리고 그곳에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있다. 센터라고는 하지만 길 한모둥이에 설치된 남루하고 초라한 천막이다. 그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그곳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린다. 그 탓에 악령이 잠시 발목이 잡힌 듯하다. 

    문득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10번째 재앙이 떠오른다.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는 신탁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온 나라를 스쳐지나가면서 장자들의 목숨을 거두어 갈 텐데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그림자가 피해갔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 하나님의 영은 자본의 악령으로 대체되었고, 그 악령이 온 서울을, 전 국토를 유린하고 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한다고 했는데, 나는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이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되기를 소망한다. 

   옥바라지 투쟁은 단순히 공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기록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의 분노이고, 역사에 대한 신뢰와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의 양심이다. 사물과 인간에 대한 예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성찰, 그리고 신앙과 믿음에 관하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기록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전망과 책임있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답을 하게 한다.   

    나는 옥바라지 선교센터에서 활동하는 젊은 신학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작동되는 것을 본다. 부디 자본의 악령이 그들을 보고 도망하기를, 그리고 자본의 횡포에 시달려 낙담한 사람들, 자본의 악령이 들린 사람들에게 옥바라지 선교 센터가 부적이 되고 퇴마사가 되어 악령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싸인으로 작동하기를 소망한다. 현장을 지키고 있는 여러 손길들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간만에) 아멘!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7월 11일 옥바라지 선교센터 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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